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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회


제4장 아동단 앞으로!


4


김기송동지는 렴죽심이와 함께 병기창을 향해 걸어가고있었다.

어제 낮에 있은 일이다.

남자애들이 있는 방에 들어왔던 죽심은 바람벽에 걸려있는 아구리가 오그라든 나팔을 보고 놀라와했다.

(이건 무슨 나팔이야? 전에 있던 나팔이야 잃어버리지 않았나?…)

궁금증을 이길수 없어 옆에 앉은 하촌애에게 물어보았다.

《그 나팔이 태호네 집에서 나타났어. 〈토벌〉때 집이 무너지면서 그렇게 됐어.》

죽심은 입을 비쭉했다. 그는 태호네를 아주 좋지 않게 보고 지냈다. 태호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보고 독립군살이가 신물이 나지 않아 또 젊은 애들을 따라다니느냐고 했다. 그리고 기송오빠와 함께 대마록구에 련락갔다 오는 길에 만났을 때 뭐라 했던가.

왜놈들과 싸워 이기자는건 발로 바위차기와 같다고 했지?

그런데 어떻게 태호 아버지는 머리가 무섭게 터져 돌아갔을가?

그 일은 아버지가 먼저 떠난 다음 죽심이랑 여기 병기창에 들어왔을 때 생겼었다.

(이 나팔을 병기창에서 고칠수 없을가?)

죽심은 방에서 나와 분단장 기송동지를 찾았다.

기송동지는 병실뒤에서 몇동무와 함께 도랑을 깊이 파고 량옆으로 돌을 쌓아올리고있었다. 뒤산에서 쏟아져내릴 비물을 막기 위해서였다.

《기송오빠!》

죽심은 기송동지옆으로 다가가며 이렇게 불렀다. 분단장동무라 불러야겠으나 하촌에서부터 깊어진 정이 그렇게 부르지 못하게 했다.

웃동을 벗어붙인 몸에 땀기가 번진 기송동지는 도랑돌을 꼼꼼히 쌓다말고 머리를 들었다.

《오빠, 나팔을 고치지 않을래?》

《엉?》

기송동지는 뜻밖의 말에 눈만 슴벅거렸다.

《병기창에 아주 재간있는 아저씨가 있어. 그 아저씨는 새것처럼 고칠거야.》

《정말?》

기송동지는 얼굴에 기대의 빛을 함뿍 실었다.

죽심은 뻐기듯 말했다.

《하여간 나하구 같이 가. 꼭 살릴거야.》…

이리하여 기송동지는 할 일이 가득했지만 죽심이를 앞세우고 아침 일찍 떠난 걸음이였다.

깊은 수림속에 겹겹이 덧쌓인 진대통들이 앞을 막자 기송동지는 주춤거렸다.

《이 진대통들을 다 타고넘으며 가야 하니?》

죽심은 까르르 웃었다.

《그 진대통들을 타고넘자면 래일에도 못닿아.》

《그럼 어떻게 하니?》

《내 가는 길로 따라와.》

장재촌에서 병기창으로 오가는 길은 따로 있었다. 더미로 넘어진 진대통사이를 요리조리 빠지며 실오리같이 뻗은 길이였다. 15리길을 20리나마 가야 하지만 진대통은 몇개 넘지 않아도 되였다.

병기창인 굴간으로 다가가느라니 쇠망치로 뭘 바스는 소리가 들렸다. 더 가까이 이르니 동굴밖에서 깨진 쇠가마를 엎어놓고 그우에 헌 마대를 덮은 다음 망치로 조기고있는것이였다. 작탄에 넣을 파편감을 얻고있는 참이다. 풀밭에 튀여나오는 무쇠쪼각을 보니 쪼개진 당콩알만큼씩 자름자름했다.

옆에는 깨진 가마가 무둑히 쌓여있었다. 《토벌》맞은 마을들에서 모아들인것이다.

일에 몰렸던 한 청년이 죽심을 띄여보고 반가운 소리를 질렀다.

《야, 죽심이 오는구나!》

그는 굴안에 대고 소리쳤다.

《책임자동지, 죽심이가 옵니다!》

굴간안에서 너덧사람이 달려나왔다. 죽심의 아버지도 끼였다.

떠난지 겨우 열흘 되였지만 병기창사람들은 죽심을 둘러싸고 반가움에 들썩 끓었다.

죽심의 아버지 렴국찬은 조금 떨어져 얼굴이 환해 서있었다.

《아버지!》

죽심은 아버지의 손을 움켜잡고 어린애처럼 깡충깡충 뛰였다.

《아버지, 기송분단장도 왔어요.》

《오 참, 기송이로구나!》

기송동지가 머리를 깊숙이 숙여보이자 렴국찬은 그를 힘껏 부둥켜안았다.

《반갑구나!》

렴국찬은 기송동지를 보느라니 세상을 뜬 그 집 식구들이 가슴에 마쳐오는지 불깃해진 눈을 슴벅거렸다.

《죽심아, 어떻게 갑자기 왔니?》

《이거!》

죽심은 말에 응석기를 담으며 기송동지가 어깨에 멘 나팔을 아버지앞에 쳐들어보였다.

기송동지가 나팔을 벗어주자 렴국찬은 그것을 찬찬히 살폈다. 이어 고개를 들며 《병두동무.》 하고 불렀다.

렴국찬의 앞에 나타난 사람이 죽심이가 재간덩이라 자랑했던 고수머리청년이다.

그 청년은 나팔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그 나팔을 굴간안에 두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기송동지와 죽심은 이곳 사람들과 함께 동굴안에 들어섰다.

죽심이 놀라운 소리를 질렀다.

《동굴안이 판판 달라졌군요. 이 공구들은 모두 어디서 생겼나요?》

《너의 아버지가 다 구해온거야.》

《거짓말.》

《거짓말할게 따로 있지. 이건 너의 아버지가 요술부려서 다 구해들인거란 말이야.》

죽심은 웃음과 함께 그 아저씨의 잔등을 마구 두드려주었다.

일은 이렇게 된것이다.

죽심의 아버지 렴국찬은 독립군살이를 할 때도 병기창에서 일했다.

새 근거지에 병기창을 꾸리려니 무기를 수리할 도구들이 모두 걸렸다. 큰거리에 나가 사오재도 근거지에는 돈이 없었다.

책임자인 렴국찬은 깊은 시름에 잠겼다.

(무슨 수로 수리도구를 마련한다?)

한가닥 기대는 독립군병기창이 해산될 때 그리스를 발라 큰 상자에 넣어 뒤마당에 묻은 수리공구들이였다. 그때 그것을 맨 마감까지 병기창에 남았던 세사람이 묻었다. 그때부터 벌써 7년세월이 흘렀다.

독립군우두머리들은 백성들의 돈을 사정없이 긁어모아 향락에 뿌린 다음 나머지돈으로 총도 샀고 병기창의 수리공구도 할빈에 가서 일식으로 사왔다.

12조로 갖추어진 세공줄칼, 수동드릴, 수동형삭반, 바이스… 하여간 크게 고장난 총도 넉근히 고칠수 있었다.

이 공구들을 손에 넣으면 항간에 나가 잘살수 있었다.

금은세공업을 차려 가정의 위세를 돋굴수 있는 희귀한 금은장식품을 팔기도 하고 또 주문받은 세공품을 솜씨있게 만들어 소문을 낼수도 있었다.

렴국찬은 함께 묻었던 사람들속에서 누군가 벌써 파간지 오랬으리라는 짐작이 자꾸 들어 기대의 문을 여러번 닫았다.

그런데 딸을 을러메다싶이 해서 장재촌에 내려보내고나니 고독하기 이를데 없었다.

잠은 오지 않고 이궁리 저궁리만 날아돌았다.

줄기차게 뻗으며 지꿎게 사라지지 않는 생각, 그것은 어떻게 해야 수리공구를 구해들일가 하는 생각이였다.

그는 드디여 마음을 다졌다.

(에라 모르겠다. 애도 없는데 나들이나 가자. 끙끙 앓지만 말고 묻은곳에 한번 씨원히 가보기나 하자.)

독립군병기창생활을 하던 곳은 돈화현 재피골, 수백리나 되는 깊디깊은 산골이였다. 지금은 철길이 뻗어 며칠이면 갔다올수 있었다.

렴국찬은 한 동무를 데리고 재피골로 향했다.

정거장에서 30리 가면 되였다. 깊은 골안에 어른의 키 두곱이나 되게 쌓은 크지 않은 돌울타리가 보였다. 세멘트를 섞어쌓아 여간 든든한 돌울타리가 아니였다.

그안에 병기창이 들어앉아있었다.

그때는 무인지경인 이 골안에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가 득실거려 그걸 막느라고 쌓아올렸던 돌울타리였다.

두꺼운 철문이 아직도 굳게 닫겨있는데 토피로 지었던 병기창은 이영이 삭으면서 비물에 다 주저앉았다.

그 토피집에서 다섯발자국되는 뒤마당에 수리도구들을 묻었었다.

뒤마당에 어찌나 잡초가 무성하고 새 나무들이 자랐는지 발을 내짚을수 없었다.

렴국찬과 같이 간 동무는 낫으로 잡초들을 후려치며 수리도구를 묻은 자리로 밟아들어갔다.

그러던 그들은 놀라움에 눈이 허공에 떴다.

수리도구를 묻었다고 보는 그 가까이에 두 사람의 해골이 겹쳐져있는것이였다.

렴국찬은 놀라움을 깊은 숨으로 달래며 주위를 살폈다.

멀지 않은 곳에 단도가 딩굴고있었다. 칼날이 시뻘겋게 녹이 쓸다못해 삭은것 같았다.

렴국찬은 얼핏 함께 상자를 묻었던 두사람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렴국찬은 긴 숨을 내뿜었다.

(음, 두 녀석이 상자를 갖자고 대판싸움을 벌렸군.)

삽으로 묻었던 자리를 파니 상자는 고스란히 숨겨져있었다.

뚜껑을 여니 그리스에 발린 각종 공구들이 상자안에 빼곡이 차있었다.

함께 온 동무는 너무 기뻐 진정을 못하는데 렴국찬은 낯이 흐려져 중얼거렸다.

《욕심이 과하면 죽기마련이지.》

그는 때때로 뜻깊은 말을 입에 올리군 했다.


김기송동지는 동굴안에서 병두아저씨가 돌아오기를 안타까이 기다렸다. 들고왔던 나팔은 작업대우에 그냥 놓여있었다.

키가 작고 앞가슴이 딱 바그라진 청년이 렴국찬이 가져왔다는 깜찍한 바이스에 격발기의 격침감을 물리고 세공줄칼로 그 쇠를 다스리고있었다.

그가 바로 렴국찬과 함께 돈화에 갔다온 사람이다.

그한테서 기송동지는 재피골에 갔다온 이야기를 다 들을수 있었다.

기송동지는 커다란 감동으로 가슴이 달아올랐다.

(야, 죽심의 아버지는 보통분이 아니로구나.)

그도 그 공구들이 욕심났을것이다. 그러나 7년이 지나서야 그리로 찾아갔다. 혼자 살림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기창의 막힌 일을 풀려고 갔던것이다.

기송동지는 죽심이한테서 아버지가 어떻게 자기를 아동단병실에 내려보냈는가 하는 얘기도 들었다.

나흘전이다. 그날은 휴식일이여서 기송동지는 죽심에게 말했다.

《너 집에 갔다오려마. 여기서 쉬든 집에 가서 쉬든 같지 않니?》

죽심은 머리를 수굿하며 도리를 저었다.

《왜 그래?》

《아버지가 욕할거야.》

《욕하긴 더 기뻐할텐데.》

《아니야. 아버진 나를 나라에 바쳤다고 했거든. 그런데 내려온지 며칠 안됐는데 집에 가면 집생각만 하며 돌아간다고 성을 낼지 몰라.》

그런 죽심의 아버지를 귀중한 수리공구 일식을 구해온 지금에는 더욱 높이 보게 되는것이였다.

돈화에 갔다온 청년은 기송동지의 무료함을 덜어주려고 자주 말을 꺼냈다.

《너 이 세공줄칼이 어떤건지 아니? 12조로 무어졌다고 조줄이라고 해. 이걸로 왕관도 넉근히 다스릴수 있거든.》

김기송동지는 눈이 커졌다.

작업대우에 주런이 놓은 작은 줄칼들을 들여다보니 모두 형태가 달랐다. 줄칼이발들이 자름자름하면서도 얼마나 날카로와보이는지 몰랐다.

그 청년은 탐탁하게 생긴 수동드릴을 가리키며 또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 기계로는 바늘보다 더 가는 구멍도 뚫을수 있어. 날만 바꾸면 별의별 구멍을 다 뚫을수 있거든.》

기송동지는 기계속을 모르는터라 눈을 슴벅이며 들여다보기만 했다.

이때 그토록 기다리던 병두가 굴간안에 달리듯 들어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이마에 땀이 밴 병두는 기송동지한테 어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의 손에는 두뽐길이만한 나무토막이 들려있었다. 껍질에 연한 물기와 함께 어두운 재빛이 흐르는걸 보니 황철나무토막이다. 굵기는 나팔주둥이보다 조금 더 굵어보였다. 서있는 나무를 잘라온게 분명했다.

병두는 작업대우에 놓였던 나팔을 들고 나무굵기와 견주어보았다.

그러더니 넙적칼을 들고 나팔의 본래모양으로 황철나무토막을 깎아나갔다. 물기가 짙고 결이 부드러운 나무는 푹푹 깎이여나갔다.

격침감을 다듬던 청년이 또 끼여들었다.

《너 저 칼을 뭐라 하는지 아니? 세공칼이라 해. 형태가 여러가지거든. 날이 좁은 칼, 날이 둥그런 칼… 총박죽이 꺾어졌을 때 이걸로 새 총가목을 제꺽 만들어 바꿀수 있거든.》

청년은 렴국찬의 공로를 자랑하지 못해 등이 단듯싶었다.

병두는 황철나무로 나팔아구리가 제대로 펴있을 때의 모양을 신통히 만들어냈다.

김기송동지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죽심이가 재간덩이라 하더니 빈소리가 아닌것 같았다.

렴죽심은 굴간에 들어오는가싶더니 어디로 갔는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병두는 나팔아구리모양으로 다듬은 황철나무토막을 불덕가까이에 세워놓았다.

그다음 나팔주둥이를 솜장갑으로 잡고 불이 펄펄 이는 불덕속에 나팔아구리쪽을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나팔아구리쪽이 시뻘겋게 달았다.

병두는 그 나팔아구리를 세워놓은 황철나무끝에 끼우고 지그시 눌렀다. 물기많은 황철나무는 치직 익는 소리를 냈다.

목형이라 할수 있는 황철나무토막에 끼웠던 나팔을 뽑아내니 놀랍게도 본래의 모양을 되찾았다.

김기송동지는 《야!》 하고 환성을 올렸다.

병두는 그 나팔을 작업대에 가지고가서 깜찍한 나무마치로 똑똑 다스렸다. 아직도 두드러진 부분을 나무마치로 곱게 펴는것이다.

《어때?》

병두는 싱긋이 웃으며 나팔을 기송동지앞에 내밀었다.

나팔을 받아든 기송동지는 분수처럼 뿜어오르는 환희에 춤이라도 추고싶었다. 불덕에 들어갔던 나팔은 이미 식었다.

렴국찬이와 돈화에 갔다온 청년이 한마디 했다.

《한번 불어보라구.》

《예!》

승기가 나서 대답한 기송동지는 나팔로 랑랑한 소리를 길게 뽑았다. 그 소리가 굴간을 그득 채웠다.

《한번 멋드러진 곡조를 불어보라구.》

아까 그 청년이 또 청했다.

나팔을 오래동안 불지 못해 몸살이 났던 기송동지는 주저없이 기상나팔소리를 온힘을 다해 불었다.

굴간에 있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솜씨가 대단하구만!》

《정신이 번쩍 들어!》

불덕옆에서 벼림질을 하던 렴국찬도 흐뭇한 미소를 얼굴에 그득 담았다.

렴죽심이 굴안에 뛰여들었다.

《야, 나팔이 살았구나! 오빠, 보라요. 내가 꽝포치나.》

나팔을 내려든 기송동지는 얼굴이 환해서 죽심에게 고마움에 넘친 시선을 보냈다.

죽심은 아버지옆에 다가가 귀속말로 무엇인가 말했다.

렴국찬은 소랭이에 손을 씻으며 기송동지를 쳐다보았다.

《기송아, 우리 집에 가자. 죽심이가 점심을 차린게야.》

《그래요? 이거 나팔을 살리고 또 점심까지 먹어야 하나요?》

《비상소집해서 차린게야. 빨리 가.》

죽심이가 끼여들었다. 그는 장재촌에 가서 열흘쯤 살더니 군대술어도 더러 얻어들었다.

기송동지가 렴국찬의 뒤를 따라 굴간에서 나가려는데 병두가 소리쳤다.

《나팔은 여기 두렴. 더 손질해야겠어.》

이리하여 기송동지는 나팔을 병두에게 맡기고 죽심이네 집으로 향했다.


렴죽심이네 집은 굴간 아래켠의 깊은 수림속에 있었다.

귀틀집인데 부엌과 맞붙은 정지방과 작은 골방이 있었다.

정지방 한가운데에 둥글상을 놓고 이미 음식을 차려놓았다. 세 접시에 언감자떡을 무둑히 담고 한가운데에 갓김치사발을 놓았다.

기송동지는 언감자떡을 보자 기쁨을 터쳤다.

《야, 언감자떡!》

《오빠, 이런걸 먹어본지 오랬지?》

딸의 뒤를 따라들어오던 렴국찬이 말참녜했다.

《죽심아, 넌 왜 오빠, 오빠하니? 분단장동무라고 불러야지.》

《헹, 난 그게 좋아. 오빠, 그렇게 부르는게 더 좋지?》

《좋다뿐이겠니.》

기송동지도 기분이 활짝 개여 응수했다.

모두 밥상에 둘러앉자 죽심은 언뜻 생각난듯 방구석에 가 술병을 들고왔다.

《아버지, 병두아저씨가 가져온 술이예요. 옹근술이 아니라고 걱정하면서…》

《그녀석 집이 제일 먼데 거길 갔다왔나? 옹근술이 아니면 뭘해? 성의가 고맙지.》

병안의 술은 조금 곯았다.

기송동지는 얼굴이 뜨거웠다. 병두가 나팔은 고치지 않고 어딜 갔을가 하고 조바심쳤던 일이 뉘우쳐졌다.

죽심은 무릎을 정히 꿇고 상에 미리 가져다놓은 사기보시기에 정성을 기울여 술을 따랐다.

《아버지, 한잔 드세요.》

목소리에 물기가 느껴졌다.

《음, 오래간만이로구나.》

렴국찬의 입이 벙글써해졌다.

그는 하촌에서 야장간 일을 할 때 저녁이면 반주로 한잔씩 마시군 했다. 그러나 근거지에 들어온 다음부터는 술이라는걸 몰랐다.

병두는 장재촌에 갔던 죽심이 돌아온 참에 렴국찬에게 딸이 따라주는 술을 한잔 대접하고싶어 골쑴해진 술이나마 가져다주고싶었던것이다.

렴국찬은 보시기를 놓으며 무척 흡족해했다.

《딸이 따라주는 술이 돼서 별스레 달구나.》

《그래요? 아버지, 그럼 한잔 더 드세요.》

《그럼 일 못나간다.》

《그러지 않아도 병두아저씨가 당부했어요. 돈화까지 갔다오시느라 곤하겠는데 오늘은 푹 쉬시라고…》

《고맙다만 그러면 안돼.》

렴국찬은 술보시기를 밀어놓고 언감자떡에 저가락을 가져갔다.

김기송동지는 병기창에 오면서 의논하고싶은 일이 있었다. 지금 말해도 될것 같았다.

기송동지는 입에 넣었던 언감자떡을 넘기고나서 죽심이 아버지한테 시선을 보냈다.

《죽심이 아버지, 한가지 승인받을게 있어요.》

《뭔데?》

《저… 죽심이 있지 않아요. 휴식일마다 집에 와서 놀게 하면 안되겠나요?》

렴국찬의 눈섭이 굼틀 치켜졌다.

《아니, 아동단도 군대와 같겠는데 그렇거면 되겠니?》

《군대와 아동단은 판판 다르지요 뭐. 휴식일이면 모두 놀아요.》

렴국찬은 기송동지한테서 의아쩍은 눈길을 떼지 못했다.

《요전날 휴식일이 돼서 죽심이보고 집에 올라가라고 하니 아버지가 꾸지람할거라고 해요.》

렴국찬은 눈길을 떨구며 생각에 잠겼다. 어린 나이에 그런 걱정까지 할줄 아는 기송동지가 더없이 대견하고 장하게 여겨졌다.

렴국찬은 머리를 들며 말했다.

《고맙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아동단생활에 지장이 없다면 두주일에 한번씩은 올려보내주렴. 아닌게아니라 애가 없으니 텅 빈집이야.》

《야, 그러니 승인하셨지요?》

렴죽심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자기 집 사정을 알고 집에 올려보내지 못해 마음쓰는 기송동지가 더없이 고마왔다. 정말 친오빠처럼 따르고싶은 분단장이다.

밥상을 물렸을 때 렴국찬은 구석켠에 있는 목침을 끌어다베고 자리에 누웠다. 죽심이 냉큼 일어나 베개를 들고와 목침과 바꾸어 베워드렸다.

돈화까지 갔다온 피로에 이어 오래간만에 마신 술이 몸에 퍼지며 눕고싶게 했던 모양이다.

렴국찬은 딸에게 일렀다.

《나가서 한시간 있다가 나가겠다고 해라.》

눈을 감았던 렴국찬은 머리를 약간 들며 기송동지에게 말했다.

《내가 바래주지 못한다. 후에도 자주 오너라.》

그리고는 이어 잠에 들었다.

김기송동지는 렴국찬의 간격없는 자세에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였다.

기송동지와 죽심은 굴간으로 올라갔다. 병기창에는 렴국찬을 내놓고 다섯명인데 그들이 모두 기다리고있었다.

병두가 기송동지에게 나팔을 내밀었다. 어찌나 눈부시게 반짝이는지 선듯 잡아쥘수 없었다.

《광약으로 닦았어.》

병두가 일러주었다.

기송동지는 나팔을 들고 굴간밖으로 나갔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굴간우에서 해가 웃고있는데 나팔은 상점에서 새로 산 나팔이상으로 강한 광택을 뿜었다.

기송동지는 언뜩 생각났다.

8도구장마당에 가면 이따금 여드름쟁이 중학생들이 다리칸같은데 걸터앉아 모자의 모표를 닦는걸 보군 했다. 뿌옇던 모표가 반짝반짝 윤을 뿜는걸 봤는데 그게 바로 광약으로 닦았던 모양이다.

동굴로 다시 들어간 기송동지는 병두에게 몇번이고 머리숙여 인사하고싶었다. 내던지려던 나팔을 제 모양으로 살리고 이렇게 번쩍거리게 만들어놓았으니 그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기송동지는 병두앞에 꼿꼿이 서서 울먹한 목소리로 인사말을 옮겼다. 병두는 종이에 싼 자그마한것을 기송동지앞에 내밀었다.

《이거면 오래 쓸거야. 천에 비벼서 나팔을 닦아라. 모달리천이면 더 좋고.》

종이를 펴보니 풀색빛이 도는게 꼭 양초비슷했다. 크기는 손가락 한마디만 했다.

기송동지는 눈에 눈물을 그득 채우고 병두앞에 고개를 숙여보였다.

동굴입구쪽에서 죽심이가 소리쳤다.

《오빠, 빨리 와!》

그리로 다가가니 이게 뭔가? 낫, 호미, 도끼, 삽, 톱, 망치, 괭이, 곡괭이… 아동단병실을 꾸려나가느라면 더없이 요긴한것들이 무둑히 쌓여있었다. 낫이나 호미 같은건 여러 가락이다. 대패로 곱게 다듬어 손잡이까지 맞추었다.

돈화에 갔다온 청년이 모두의 대표이기나 한듯 기송동지한테 말했다.

《이건 우리 병기창에서 아동단병실에 선사하는거야. 앞으로 필요한게 있으면 인차 알리라구.》

기송동지는 왈칵 치받치는 격정을 이길수 없어 그들에게 도거리로 인사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기야 뭘, 거기에 우리 죽심이가 가있지 않냐. 잘 봐달라구 그러는거야.》

모두 호탕하게 웃었다.

두개의 중태에 그 도구들을 빼곡이 채워넣었다. 남은것은 따로 묶어주었다.

그걸 지고 든 기송동지와 죽심은 장재촌으로 향했다.

기송동지는 한가정과도 같던 병기창사람들의 모습이 내내 앞을 가렸다. 그들은 책임자인 죽심의 아버지를 얼마나 따르며 존경했던가.

그런데 분단장인 나는…

누나가 그토록 애를 끓이며 타일렀지만 불끈하는 성미는 아직도 살아있다. 무척 조심하느라 애썼지만 언짢은 일에 다닥치면 또 목소리가 높아지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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