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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회


제1장 잃어진 신호나팔


4


곽찬수선생은 채영에 있는 구공청에서 살다싶이했다. 그는 선전사업을 맡은것이다.

그는 학식이 그중 있는 축에 속해 삐라며 격문의 초안도 제 머리로 지어냈다. 붓글씨도 잘 써 직접 삐라며 격문을 쓰고 등사로 찍어낼건 팔을 걷고 제가 찍었다.

중국글로 삐라며 격문도 써서 중국집의 문짝에 붙이고 마당안에 집어던지는 일도 그가 조직했다. 왜놈들이 동북땅을 집어삼킨 조건에서 조중인민의 단합은 절실한 문제로 나섰다.

그는 내처 일하고나면 온몸이 노근했다. 그러나 부암동의 야학에 나가는 일은 하루도 번지지 않았다.

그가 저녁노을을 등에 지고 부암동으로 향하는데 마침 김정숙동지께서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계시였다.

곽선생은 얼굴에 반가운 빛을 띠며 소리쳤다.

《정숙이! 정숙이!》

검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수건을 쓰신 김정숙동지께서 멈춰서시였다. 그이의 모습에 피곤이 실렸다.

턱이 깨끗이 빠지고 령리한 인상을 주는 곽선생은 김정숙동지의 가까이에 이르자 《여기 좀 앉자.》 하고 말했다. 아마 긴히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다.

곽선생을 더없이 존경하는 김정숙동지께서는 나무밑의 락엽무지에 그와 나란히 앉으셨다.

선생의 목소리는 언제보나 인정에 넘쳤다.

《오빠가 없으니 밭일이 힘들겠구나. 이젠 밭을 다 뚜졌니?》

《예, 거의…》

《우리가 돕지 못하누나.》

《아니예요. 며칠전 마을청년들이 와 일을 절반이나 축냈는데요 뭐.》

《그래도…》

곽선생은 본문제로 들어갔다.

《공청에서는 너한테 중요한 임무를 주기로 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묻는듯한 시선을 드시였다.

《하촌에 아동단이 서지 않았니? 그걸 애들한테만 맡기고있거든. 그래서 정숙이에게 아동단사업을 맡기기로 의논이 있었다.》

《예?》

김정숙동지께서는 꿈쩍 놀라셨다.

그이께서는 소년선봉대원으로서 삐라공작이며 맡기는 일들을 빈틈없이 이악스레 하느라 하셨다. 그러나 남을 지도해본 경험은 없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럴듯한 생각이 떠올라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내 동생이 분단장이 아니나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곽선생이 제꺽 받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일만 잘되면 되는거지. 그러지 않아도 우린 그런 얘기도 있었다.》

사실 공청조직에서는 김정숙동지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이제 인차 공청에 들이자는 의논도 맞추고있었다.

하촌아동단의 지도원감을 하나 고르려니 좀처럼 맞춤한 대상이 짚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정숙동지의 이름이 입에 오르자 모두 《그게 좋겠소.》 하며 찬성을 하게 된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기셨다. 아름찬 마음만 드시였다.

(내가 꽤 해낼가? 아는것두 적고 아동단생활도 해보지 못했는데…)

그러나 조직이 주는 임무는 믿음의 표시임을 잘 알고계시는 김정숙동지이시다.

그이께서는 고개를 천천히 드시고 곽선생에게 말씀하셨다.

《알겠습니다, 잘해보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래야지!》

곽선생은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집으로 바쁜걸음을 옮기셨다. 래일은 조카 인남이의 생일이다. 먼저 들어간 어머니와 형님이 부엌에서 바삐 돌리라는 생각이 드셨다.

눈앞에 오빠가 그려지셨다. 오빠가 이발이 두대나 돋은 세상 고운 아들을 품에 안을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명치끝이 찢긴다.

집에서는 형님이 절구질을 하고있었다. 귀밀을 물에 능그어 껍질을 벗기고 가루로 봏으려는것이다.

이 고장에선 귀밀이 그중 만문한 낟알이다. 귀밀로 떡도 치고 국수도 누른다. 귀밀풀로 창호지를 바르고 삐라며 격문도 붙인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부엌에 들어서기 바쁘게 형님에게서 절구공이를 앗으려 하셨다.

《형님, 내 할게.》

《일없어.》

어질고 말이 적은 형님은 절구공이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글쎄 내가 한다니까요. 형님은 힘들어요, 인남에게 젖까지 빨리니…》

끝내 그이께서 절구공이를 잡아쥐시였다. 형님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 집에서는 시누이와 형님사이에 이런 싱갱이가 자주 일었다.

옛말에 시누이가 형님의 흠만 잡아뜯으며 무던히도 못살게 군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시누이인 김정숙동지께서는 형님을 더없이 크게 보고 친언니처럼 따르며 그의 일손을 덜어주지 못해하시는것이였다.

이 집은 더없이 화목했다. 하촌마을치고도 이런 집은 없을것이다. 참으로 어렵게 살지만 고운 마음의 부자집이라고 할수 있었다.

부엌문이 벌컥 열리며 김기송동지가 뛰여들어왔다.

기송동지는 절구질을 하는 누나를 띄여보자 벙긋벙긋 웃으며 차렷자세를 취하고 경례를 올려붙였다.

《지도원동지, 아동단은 정렬했습니다. 분단장 김기송!》

그리고는 웃음을 까르르 터쳤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동생이 그 일을 알았다는것을 깨닫고 《너 놀릴래?》 하시며 사랑겨이 흘겨보시였다.

김기송동지는 행길에서 동무들과 놀다가 곽찬수선생을 만나 얘기를 다 들었었다.

애들은 환성을 터쳤다.

《야! 정숙누나가 지도원이란 말이지?!》

마을애들은 하나같이 김정숙동지를 무척 좋게 여기는터였다.

사연을 아신 어머니는 아궁앞에서 달래를 다듬으시다가 흐뭇한 미소를 담으시였다.

《모두 우리 집을 알아주누나.》

방에 들어간 기송동지는 인남이와 놀고싶었다.

뚱깃뚱깃 방안을 걸어 도는 인남이앞에 무릎을 꿇고 마주앉아 《야웅, 야웅》, 《멍멍》 하며 다가들었다.

인남이는 그것이 재미있어 갓 나온 이발을 드러내며 캐득캐득 웃었다.

그러자 기송동지가 이번에는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따웅! 따웅!》하며 덮칠듯 인남이앞을 막아섰다.

인남이는 겁기가 들어 뒤걸음치다가 엎어지며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부엌사이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기송동지를 핀잔하셨다.

《잘한다, 애기와 논다는게.》

이 일이 재미있어 기송동지는 방에 누워 발을 구르며 웃었다.

다음날 아침 온 집안이 상앞에 모여앉았다.

인남이의 생일이라 하지만 방금 부친 귀밀지짐이 작은 납작바구니에 담겨 두리반을 차지했다. 거기에 보시기에 담은 달래무침이 놓여있다.

이것이면 이 집에선 특식이라 할수 있었다.

어머니가 술병을 들고 방에 들어오며 기송동지에게 이르시였다.

《빨리 가서 태호 아버지를 모셔오너라.》

태호의 아버지 림원학은 기송동지일가가 이리로 이사온 다음 이 집 일을 성심성의로 돌봐주느라 했다. 친형네 집일을 돌보는 심정이였다.

두 집에선 조금만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도 서로 나누어먹었다.

오늘은 아버지도 멀리에 간 인남이의 생일이기에 크게 차린건 없지만 태호의 아버지와 함께 하려는것이였다.

기송동지는 8도구에서 림원학을 만났을 때의 일이 생각나서 사뭇 찌붓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분부니 가야 했다.

김기송동지는 집에서 신는 헌 미투리를 끌며 옆집인 태호네집 마당에 들어섰다.

《태호야, 태호야―》

기송동지는 방문앞에서 림태호를 불렀다.

눈에 웃음기가 사물거리는 태호가 문을 열었다.

기송동지의 말을 들은 태호는 아버지에게 그 말을 전했다. 방안에서 울리는 림원학의 말이 기송동지에게까지 들려왔다.

《내 몸이 편치 않구나. 못간다고 해라.》

집으로 돌아온 기송동지는 식구들에게 볼멘 소리를 했다.

《태호의 아버지는 혁명을 반대해. 나빠.》

어머니는 대바람 기송동지를 나무라셨다.

《그런 말 말아. 나라를 찾는거야 왜 싫다 하겠니? 독립군에서 너무 쓴맛을 봐서 그러지.》

김정숙동지께서도 동생을 타이르시였다.

《그런 말을 망탕 하면 못써. 삼촌은 지금 형편을 깨닫지 못해 그러는거지…》

김기송동지는 지나치게 엇나갔다는 뉘우침이 들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기송동지는 다시 토방에 나섰다. 태호네 집으로 간 기송동지는 아직 아침전이여서 누워있는 림원학의 팔을 잡아끌었다.

《삼촌, 빨리 우리 집에 가자요. 모두 기다려요.》

기송동지가 어찌나 끄는지 림원학은 자리에서 일어설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는 8도구에서 돌아올 때 자기가 한 말에 애들이 떵떵 맞서던 일이 지금도 속에서 내려가지 않았던것이다.

기송동지의 집에 들어선 림원학은 인남이를 덥석 품에 안았다.

《이녀석이 배꼽 떨어진 날인가?》

흐뭇이 하는 말이지만 쉭쉭 울렸다.

림원학은 인남이를 머리우로 들어올리려다 그만두었다. 밤이면 겨릅등을 켜군 하여 서까래가 약간 드러나보이는 천정에 그을음이 앉았다.

자칫하면 애기의 머리에 검뎅이가 발릴것 같았던것이다.


마을의 아동단은 활기에 넘쳐 움직였다.

김기송동지는 나팔이 잃어진 일이 얼마나 아수한지 몰랐다.

그것만 있으면 아동단생활이 더욱 생기를 띨것이 아닌가. 누가 나팔을 훔쳤을가?

날이 가도 의문은 지워지지 않았으나 찾을 길은 묘연했다.

림태호는 마을에서 외토리로 지냈다.

천성이 쾌활한 그는 동무들과 섭쓸리길 좋아했다. 괜히 동무의 다리를 걸어채고 머리를 쥐여박으며 롱을 걸군 했다. 그런데 요즘은…

오늘도 태호는 입에 침을 그득 물고 아동단원들의 활기찬 놀이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끝내 사정없이 떠미는 동심에 못이겨 그는 아동단원들의 놀이에 뛰여들었다.

여느 애들은 눈이 커졌으나 기송동지는 눈빛을 빛내며 환성을 올렸다.

《좋아, 매일 우리들속에 끼여라.》

기송동지는 어떻게든지 태호를 야학에도 끌고 아동단에도 들게 하고싶었던것이다.

이날 아동단원들과 섭쓸려 노는 태호가 아버지의 눈에 띄였다. 저녁에 림원학은 회초리로 사정없이 아들의 종아리를 갈겼다.

《쓸개빠진 녀석, 거기가 어디라고 뛰여들어!》

림태호는 다리를 두동강내는듯한 아픔이 머리끝까지 치받쳤으나 입술을 앙다물고 신음을 삼켰다. 그는 아버지를 매우 어려워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엄히 말했다.

《애가 마을녀석들하고 휩쓸려 놀지 않게 단단히 살피오. 다시 섞여돌면 다리갱이를 분질러놓고 말테요.》

아버지는 여느때는 조용하고 말도 적었지만 성이 나면 호랑이처럼 무서웠다.

어머니는 병자다. 좋던 몸이 심장병때문에 초대처럼 가늘어지고말았다.

독립군에 나간 태호의 아버지가 10년가까이 소식 한장 없어 태호의 어머니는 늘쌍 상서롭지 못한 생각에 쫓겼다.

워낙 시원히 트인 성격이 못되여서 지꿎게 자리잡는 근심과 공포가 심장병을 가져다주었던것이다. 몇번 입술이 새파랗게 굳어지며 눈을 까뒤집고 뒤로 쓰러졌다.

마을의원이 달려와 인중에 동침을 놓고 손발을 세게 주물러서야 피여나군 했다.

돼지염통에 령사를 박아넣고 진흙을 발라 불에 구워먹었지만 큰 효험을 보지 못했다.

태호의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 다음 병은 조금 나았다. 그러나 작은 자극에도 심장이 띠끔하며 화닥화닥 뛰였다.

어머니는 들일을 별반 나가지 못했다. 그러다나니 태호의 뒤를 계속 살피게 되였다. 태호는 집에 묶인 몸이 되고말았다.

어느날 저녁이였다.

도토리처럼 달달 구는 홍춘삼이 두어말은 될 좁쌀자루를 어깨에 메고 림태호네 집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그 자루를 부엌두렁에 동댕이치다싶이 하고 바람같이 사라지며 한마디 던졌다.

《리참의원님이 보내는거야요.》

리참의원님이란 리춘팔을 이르는 말이다. 왜놈들은 간도에 《조선인거류민회》라는 주구단체를 내왔다. 사람들은 《민회》라고 줄여불렀다. 《민회》는 조선사람부락 100호정도에 한놈에게 《참의원》이라는 벼슬을 뿌려주었다. 그 참의원으로 리춘팔이 된것이다.

방에 있던 림원학은 하늘에서 떨어진 돌덩이가 지붕을 뚫고 부엌에 떨어진것만큼이나 놀랐다. 찌붓한 목이 한옆으로 한껏 기울어졌다.

(모를 일이다. 춘팔이가 우리 집에 갑자기 쌀을 보내다니?)

가슴이 뜨개바늘에 찔린듯한 태호의 어머니는 대바람 불안에 휩싸였다.

남편에게 묻는 목소리가 떨렸다.

《웬일이야요? 저 쌀은 무슨 쌀일가요?》

림원학은 움쭉 일어섰다. 생각같아서는 제가 져서 리춘팔네 집에 내동댕이치고싶었다. 그러나 제 가져온걸 저들이 져가라는 배짱으로 쌀자루는 건드리지 않고 리춘팔네 집으로 향했다. 그 집에 홍달수가 있을것이다.

림원학은 소작농이지만 서슴없이 대문을 찌꿍 열었다. 마당에 마침 홍달수가 서있었다.

소작농들에게 별스레 딱딱하고 야박스럽게 구는 홍달수는 대바람 얼굴이 이지러졌다가 인츰 살가운 표정을 지었다.

《원학이, 마침 왔군. 참의원님이 임자를 아주 좋게 여겨. 마을것들하구 어울리지 않는다며? 반대까지 하구, 그게 어디야! 그래서 참의원님이 쌀을 보낸거야.》

림원학은 너무나 뜻밖의 말에 몸을 흠칫 떨었다.

(뭐? 뭐? 나를 좋게 본다구?)

이건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림원학은 홍달수와 시비를 가르고싶었지만 그러다가 언질만 잡힐것 같아 몸을 돌리며 쐑소리를 뿌려던졌다.

《좌우간 쌀을 도루 져가오. 우린 묽은 타개죽을 먹지만 그건 넘보지않아. 당장 가져가오!》

그리고는 대문을 후려닫고 바깥에 나섰다.

그로부터 열흘쯤 지나서였다.

저녁상을 차려놓았지만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태호네는 밥을 먹지 못했다.

밤이 깊어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태호는 서너번 행길까지 달려나가보았다.

그때 리춘팔네 집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졌다.

밭에 씨앗을 다 묻은 뒤라 농민들은 좀 숨을 돌릴수 있었다.

림원학이 마을돌이를 하다가 집에 저녁 먹으러 가는데 뒤로 홍달수가 달음치며 따라왔다. 그는 림원학을 부르며 그의 팔을 부여잡았다. 마주 선 홍달수의 머리는 림원학의 겨드랑이에 들었다.

홍달수가 비린청으로 다급히 말했다.

《빨리 가세. 참의원님이 찾아. 집엔 손님도 오셨어.》

림원학은 찜찜한 생각이 들었으나 따라걷지 않을수 없었다.

리춘팔네 토방에는 저녁어스름에도 번들거리는 검은 가죽장화가 한컬레 꼿꼿이 서있었다.

그옆에 신총이 몇줄기 끊긴 먼지낀 미투리를 벗어놓으려니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림원학은 주저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에는 술상이 요란스레 차려져있었다. 리춘팔과 손님은 술을 몇순배 돌렸는지 벌써 얼굴들이 불그레 달아있었다.

림원학의 거름내와 발구린내에 두놈은 순간 상을 찌프렸다. 그러나 이어 환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리춘팔이 여느때없이 곰살궂게 말했다.

《원학이, 내옆에 오라구. 어서! 사양말구.》

림원학은 배심좋게 그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저기 놓은 초불이 방안을 환히 밝혔다. 여느때는 남포등을 켰으나 배가 부하고 둥실한 얼굴이 수수떡빛인 손님이 귀하다고 초불치장을 한 모양이다.

《달수, 후래삼배라고 원학이한테 실컷 부어주라구. 하하, 워낙 원학은 술을 지고 가진 못하지만 배엔 넉근히 넣는 술고래지?》

리춘팔은 호걸스럽게 큰소리로 웃었다. 그는 전주대같은 키에 목이 한뽐이나 솟아올랐는데 보통 하는 말도 목에 확성기를 단듯 크고 요란스러웠다. 그 목소리가 되직하고 성깔사나와 사람들은 뒤에서 게사니청이라고 비웃었다.

림원학은 어리벙벙했다. 그러나 술의 유혹은 이길수 없었다. 그는 늘쌍 술을 먹고싶었지만 째지듯 가난한 살림은 그걸 허락치 않았다.

무릎을 꿇고앉아 상전들에게 참한 인상을 보이려고 애쓰던 홍달수는 술주전자를 기울여 약간 덥힌 소주를 련거퍼 림원학의 사기고뿌에 부어주었다.

리춘팔과 손님도 무랍없는 거동으로 림원학의 고뿌를 채워주었다.

손님은 갓 나온 8도구경찰분서의 차형사였다. 왜놈들이 동북땅을 집어삼키자 주구들에겐 출세의 활무대가 활짝 열렸다. 그래서 산골에서 산림간수를 해먹던 이놈이 형사라는 벼락감투를 쓰고 이리로 날아온것이다.

림원학의 목에는 술의 대통로가 열린것 같았다.

리춘팔은 취기에 푹 절어 호기스럽게 팔을 걷어붙이며 림원학에게 말을 걸었다. 살갑게 하는 말인데도 싸움하듯 걸고 크다.

《임자, 쌀을 받았겠지? 마음놓고 먹으라구. 나라님도 가난구제는 못한다는 말이 있어. 허나 내가 원학이네 집이야 뒤를 대주지 못할텐가?》

너무도 마음후한 말에 림원학은 발끝에도 손끝에도 술기운이 푹 퍼졌지만 머리에 긴장을 모았다.

쌀자루를 가져온 날 홍달수한테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림원학은 더욱 정신을 가다듬느라 했다.

리춘팔은 림원학의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임자가 우리 일을 좀 도와줘야겠어. 마을것들의 동태를 나한테나 저 차형사님에게 제꺽 알리군 하란 말이야. 그러면 임자가 부치는 땅을 아예 주고말겠어.》

그제야 모든 일이 명백해졌다. 쌀을 가져온 일도, 오늘 이렇게 푸짐히 먹이는 일도 자기를 녹이려고 그런것이 아닌가.

림원학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그는 리춘팔이나 차형사 같은 놈을 보면 자기는 그래도 나라를 찾으려고 부모처자 버리고 10년가까이 온갖 풍파를 이겨낸 사람이라는 자부를 느끼며 살아왔다.

리춘팔만 해도 일제가 나라를 강점하자 그 턱주가리에 찰싹 가붙어 군용도로공사장의 십장노릇을 하면서 돈을 긁어모아 날쌔게 여기로 건너와 부암동일대의 농토와 산림을 몽땅 손에 넣은 놈이다. 그리고는 일본룡정령사관과 연길령사관으로 북나들듯 했다. 형사 저놈도 다를바 없을것이다.

림원학은 리춘팔의 어깨를 갈기며 한마디 던졌다.

《그것때문에 날 불렀나?》

《그래, 응할텐가?》

리춘팔과 차형사는 림원학에게 기대를 모았다.

림원학은 제손으로 사발에 술을 꿀꺽꿀꺽 쏟더니 목을 젖히며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사발을 던지다싶이 내치더니 큰 네모상의 가녁을 쥐고 두놈에게 훌떡 뒤집어씌웠다. 두놈은 분탕이며 온갖 음식을 얼굴에 홈빡 뒤집어썼다.

접시들이 두놈의 얼굴을 갈기고 앞가슴에 뛰여들기도 했다.

홍달수가 벌떡 일어나며 악청을 터쳤다.

《원학이, 이 무슨 지랄이야?》

림원학은 그 말을 듣는 귀가 없는듯싶었다.

독립군시절에 키운 배짱도 있는 림원학은 느직느직 일어나 쐑쐑 짓눌리는 소리로 울분을 토했다.

《뭐? 나보고 밀정? 사람을 알길 우습게 알았구나. 개는 기르다가 팔면 목사리를 끊고 100리라도 주인집으로 돌아와. 네놈들은 개만도 못해. 나는 마을사람들이 가망없는 싸움에 상할가봐 걱정한거야.》

림원학은 몸을 후들후들 떨며 방문을 젖히고 밖으로 나섰다.

음식찌끼화장을 한 형사놈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림원학에게 권총을 쏘려 했다.

리춘팔이 형사의 손을 날쌔게 움켜잡으며 사정했다.

《여기서 총소리를 내지 마십시오. 그럼 재미없습니다.》

추수폭동때 너무도 혼뜨검난 리춘팔은 차형사의 손에서 권총을 나꿔챘다.

형사는 씨근덕거리다가 홍달수에게 단도쥔 손을 내밀며 명령했다.

《따라가다 제껴!》

이번에도 리춘팔은 차형사의 단도쥔 손을 와락 거머잡으며 몸을 떨었다.

《자중하십시오. 지금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다음날, 마을에 어둠이 덮였을 때 림태호가 김기송동지를 찾아왔다.

숟가락을 쥐고 토방에 나선 기송동지에게 태호는 근심에 싸여 말했다.

《아버지가 아침에 나무하러 갔는데 아직 오지 않아.》

《그래?》

기송동지는 태호가 고마왔다. 그래도 근심스러운 일이 생기니 여기부터 찾아온것이 아닌가.

기송동지는 마을을 돌며 아동단원들을 비상소집시켰다. 나팔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가. 비상소집나팔만 한번 불면 모두 순간에 모일텐데.

아이들은 몇자루의 홰불을 켜들고 산에 붙었다. 어깨에는 모두 곤봉이 메워졌다.

깊은 골짜기로 밟아들어가던 애들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앞에 눈이 화등잔만큼 커지며 우뚝우뚝 멈춰섰다.

태호의 아버지가 나무지게를 진채로 앞으로 꼬꾸라져 숨을 거둔것이 아닌가.

처참하게 으깨여진 머리에서 피가 얼마나 쏟아졌는지 골바닥에 넓게 퍼진 피가 더께로 굳어졌다. 량쪽어깨도 온통 피투성이이다.

분명 어느 놈이 숨어서 길목을 지키다가 물푸레몽둥이같은것으로 머리며 어깨팍을 사정없이 후려갈겼을것이다.

동무들속에 끼여섰던 림태호가 정신이 뒤집혀 와락 아버지한테 덮쳐들었다.

《아버지! 아버지!―》

태호의 피터지는듯한 애절한 부르짖음이 호젓한 골짜기로 퍼졌다. 태호는 아버지한테 그냥 안겨들며 몸부림쳤다.

기송동지는 아찔한 속에서도 생각을 모았다. 어느 놈이? 암만 생각을 톺아야 그럼직한 놈이 짚이지 않았다.

기송동지는 동무 두명을 마을로 띄웠다.

빨리 마을에 알려야 했다. 그래야 태호 아버지도 업어 내려갈수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 대여섯명의 마을어른들이 달려올라왔다.

그런데 한 어른의 등에 태호의 어머니가 업혀있었다.

산에 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한껏 마음을 조이고있던 태호 어머니는 소식을 듣자 즉시 까무라쳤다. 그러나 어떻게 정신을 다스렸는지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산으로 올리뛰였다.

그러다가 또 쓰러졌다. 그래서 마을어른이 업고 여기에 이른것이였다.

태호 어머니는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주검이 된 남편을 보다가 스르시 머리를 그의 가슴에 떨구었다. 약하디약한 심장이 그만 고동을 멈춘것이다.

이리하여 림태호는 한시에 량부모를 잃은 외토리고아로 되고말았다.

림태호네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마을사람들은 살인자가 누구냐고 목청을 돋구었다. 그러나 칠칠야밤의 막대기질이였다.

림태호가 며칠전 홍달수놈이 쌀을 가져온 말만 했더라면 판단의 화살은 곧추 과녁을 들이맞혔을것이다. 그러나 림태호는 산에서 내려오는 길로 기송동지의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물 한모금도 먹으려하지 않았다.

장례가 끝난 며칠후 림태호는 고모를 찾아간다며 봉림동으로 향했다.

기송동지와 동무들이 마을의 어구인 부채바위까지 따라갔으나 눈길 한번 돌리려 하지 않았다. 늘쌍 웃음기가 넘실거리던 태호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진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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