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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회


제1장 잃어진 신호나팔


3


봄은 산과 들을 푸른빛으로 단장하는 계절이다. 웅크리고 지내던 사람들도 가슴을 쭉 펴게 만든다.

새들도 활기차게 무리지어 날았다. 종다리는 하늘끝에 날아올라 봄노래를 읊조렸다.

여기저기 널린 밭에 사람들이 떨쳐나왔다. 한해 량식을 마련하는 첫 씨앗을 묻는것이다.

기송동지의 집밭은 여러군데 널려있었다. 그것도 산비탈이다. 그러다나니 된장마가 지면 곡식들을 말끔히 휩쓸어버리군 했다. 그러나 식구들은 밭에 온 정성을 묻었다.

기송동지도 식구들속에 끼여 괭이질을 했다. 형이 없으니 막내인 기송동지도 일손을 잡아야 했다.

기송동지의 일솜씨는 다부졌다. 괭이를 부푼 땅에 박는대로 두엄기가 흠뻑 배인 땅이 벌컥벌컥 제껴졌다. 등에 땀이 돋았지만 괭이질을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며 누나, 형수도 쉼을 모르고 괭이질을 했다.

그리로 마을 야장쟁이의 딸 렴죽심이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그는 감숭하고 통통한 얼굴에 목이 좀 밭고 가슴이 쭉 내밀려보였다. 보통 이악쟁이가 아니다.

사내애들과 처녀애들의 말싸움이 붙으면 처녀애들을 뒤에 젖혀놓고 사내애들에게 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내애들은 그를 악발이라고 놀려대기도 했다.

렴죽심이 기송동지를 띄여보고 소리쳤다.

《분단장동무, 구공청에서 오래.》

기송동지는 괭이질을 멈추었다. 렴죽심은 아동단에 든 몇명 안되는 처녀애들중의 한명이다.

죽심은 다시 소리쳤다.

《빨리 오래. 급한 일이래.》

기송동지는 어머니에게 눈길을 보냈다. 함께 들으신 어머니는 일손을 멈추지 않으며 푸근한 어조로 이르시였다.

《빨리 가보렴.》

어머니는 북구나 서산리에서와 다름없이 이 마을에 오셔서도 마을의 인심을 사며 지내시였다. 모두 정을 담아 《회령집》이라고 불러주었다.

그만큼 어머니는 깊은 인정으로 마을사람들을 대해주시는것이다.

김기송동지는 손을 털고 바삐 숲속길을 헤쳤다. 렴죽심은 다리가 밭았지만 기송동지의 뒤꿈치를 밟으며 따랐다.

8구공청은 부암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채영이라는 산속에 자리잡고있었다. 원시림이나 다름없는 숲속에 작은 귀틀집이 한채 있었다.

희맑은 얼굴에 웃음기가 넘치는 민성기구공청비서가 그들을 반겨맞아 주었다. 거기에 곽찬수선생도 함께 앉아있었다.

《중요한 과업을 주려고 불렀다. 남선지구공청에 급한 련락을 할일이 생겼거든.》

구공청비서의 말이였다.

구소재지인 8도구는 너무 넓어 북선지구와 남선지구로 가른다. 여기는 북선지구에 속하고 8도구 남쪽은 남선지구라 한다.

구공청비서는 성냥개비처럼 가늘게 감은 통신쪽지를 기송동지에게 내밀며 물음은 죽심에게 던졌다.

《너 남선지구 공청책임자네 집을 알지?》

《알아요.》

《얼굴도 알지?》

《서로 아는 사이인데요 뭐.》

렴죽심은 방긋이 웃으며 서슴없이 대답했다.

렴죽심은 남선지구 책임자네 집이 있는 대마록구에 자주 다니였다. 거기에 이모네 집이 있었던것이다.

구공청비서는 기송동지에게 물었다.

《쪽지를 어디다 감추겠니?》

잠시 눈을 깜박이던 기송동지는 제꺽 대답했다.

《신발뒤축에 감은 피나무속껍질을 벗기고 그안에 감추지요 뭐.》

기발한 생각이여서 민성기구공청비서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통신원으로 기송동지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심은 대마록구까지 가는 산길을 잘 알기에 뽑았고 기송동지는 담차고 똑똑하기에 첫 통신임무를 주어보려고 뽑은것이였다.

곽찬수선생이 죽심의 손에 보자기에 싼 주먹밥 두덩이를 들려주었다. 가면서 점심을 에우라는것이였다.

곽선생은 기송동지와 죽심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당부했다.

《실수없어야 해. 놈들한테 통신쪽지가 넘어가면 큰 야단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아동단원답게 씩씩하게 대답을 하고 구공청을 나선 김기송동지와 렴죽심은 이어 실개울에서 삼신을 축축히 적셨다.

여기는 벼가 없기에 짚신을 삼지 못한다. 삼, 왕골, 부들, 강냉이오사리, 칡의 속껍질로 신을 삼았다. 삼으로 삼은 신발은 미투리라고도 부른다. 이 삼신이 제일 질기다.

그들이 미투리를 물에 적시는것은 꿋꿋한 맛이 풀려 걷기 편리하고 신바닥이 인차 다슬지 않기때문이다. 그리고 신발뒤축에 감은 피나무속껍질이 물기를 먹어야 쉽게 풀릴수 있다. 통신쪽지는 모두 연필로 깨알같이 쓰기에 물기를 먹어도 번지지 않는다.

김기송동지는 신발뒤축에 통신쪽지를 끼우고 피나무속껍질을 다시 꼼꼼히 감았다.

통신쪽지를 감추는 방법은 여러가지이지만 기송동지처럼 이런 생각을 하는 소년은 쉽지 않을것이다.

렴죽심이 앞장에 서고 김기송동지가 뒤를 따랐다.

몇개의 험준한 산발을 넘어야 하는지 몰랐다. 여러 마을에 들리기도 하고 길고 짧은 다리를 건너야 했다.

어떻게든 해가 지기 전에 목적지에 닿아야 했다. 기송동지와 죽심은 반달음치다싶이 했다.

행인이 설핀 산길은 어슴푸레하게 형체를 드러내고 간혹 떨기나무들에 덮씌워지기도 했다. 그래도 죽심은 용히 가는 길을 헛짚지 않았다.

바삐 걸음을 옮기느라 기송동지의 뒤잔등에 땀발이 축축히 내배였고 목이 밭고 키가 작은 죽심은 숨을 할딱거렸다.

기송동지는 첫 산에 접어들기 바쁘게 큼직한 몽둥이를 하나 꺾어들었다. 숲을 헤치기도 좋고 놈들과 맞서면 싸우기도 좋을것이였다.

가는 길에 기송동지는 앞을 막는 뱀을 세마리나 두들겨잡았다. 그때마다 죽심은 바쁜 뒤걸음을 치며 새된소리를 질렀다. 역시 처녀애는 처녀애였다.

해가 가파로운 산마루에 걸터앉아 목에 분홍빛노을을 둘렀을 때 기송동지와 죽심은 대마록구가 내려다보이는 강녘의 언덕에서 다리쉼을 했다.

렴죽심은 팥죽같은 얼굴의 땀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근심스레 말했다.

《어떻걸가? 아직도 15리를 가야 하는데.》

기송동지도 숨이 차올라 가슴을 들먹이였다. 목에서 단내가 확확 풍겼다.

기송동지는 죽심에게 미심결에 물었다.

《지름길은 없어?》

《있기야 있지 뭐. 이 강을 건느면 이어 대마록구야.》

김기송동지는 강폭이 꽤 넓은 조양하를 점도록 여겨보았다.

(이 강을 건늘수 없을가?)

이제부터 날이 어두워질테니 암만 눈이 밝은 죽심이래도 산길을 헛들수 있다. 그러면 밤새도록 산속에서 헤매야 할것이 아닌가.

구공청비서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는 어떻게든지 빨리 대마록구에 닿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강을 곧추 건늘 생각이 김기송동지의 온 마음을 휘여잡았다. 그런데 물이 얼마나 깊은지 알수 없었다.

《죽심아, 강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니?》

《몰라. 그러나 마을사람들이 강을 가로질러 주낙을 놓는건 봤어.》

《야, 그럼 강이 깊지 않구나. 그러면 우리도 넉근히 건늘수 있어.》

김기송동지는 생각이 떠오르면 이어 행동에 옮기는 성격이다.

기송동지는 벌떡 일어나 강기슭으로 내려갔다.

죽심은 바쁜소리를 쳤다.

《어디 갈려구 그래?》

《강을 건느자구 그래.》

《죽자고 그래?》

《죽긴, 주낙을 치는 곳이면 우리도 넉근히 건늘수 있어.》

《물이 얼마나 찬지 알아?》

《차면 얼음같겠어? 강이 풀린지 언제라구. 그리고 애와 장독은 얼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어? 군말말고 따라와.》

죽심은 기송동지에 대한 믿음에 겁기도 어지간히 덜어져 뒤를 따라 내려갔다.

김기송동지는 강녘에 이르러 저녁빛을 엷게 입은 조양하를 한동안 살피더니 이내 죽심이를 생각했다.

(나는 건늘수 있을것 같은데 죽심이가?…)

그러나 구공청에서 받은 첫 통신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강을 곧추 건늘수밖에 없었다.

기송동지는 뒤에 온 죽심에게 말했다.

《내가 앞에 설테니 뒤에서 몽둥이를 잡아. 놓치면 안돼.》

김기송동지는 큰숨을 몰아쉬고 강물에 닁큼 들어섰다. 별반 물이 차거운줄 몰랐다. 몸이 화로같이 달았으니 물의 찬기운이 오히려 시원했던것이다.

그러나 물속으로 들어갈수록 물살이 온몸을 사정없이 떠밀었고 발이 강바닥에 닿을수 없게 둥둥 띄워주었다. 그리고 물의 찬기운이 날카롭게 벼린 칼날같이 내장깊이까지 파고들었다. 심장이 얼음같이 굳어지며 박동을 멈추는듯싶다.

김기송동지는 깊은 물이 아니라 강의 차거운 기운에 물속에서 헤여나가지 못할것 같았다.

웬일인지 한많은 세상을 통탄하며 눈을 감으신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리고 행처는 알수 없으나 나라를 찾기 위해 한몸을 바치고계실 형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김기송동지는 온몸의 기운을 모두어잡았다.

(어떻게든지 통신쪽지를 전해야 해. 이건 첫 전투임무나 같거든.)

렴죽심은 너무나 몸이 얼어들어 바쁜소리를 치고싶었다. 그러나 소리치는 일이 창피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건너편 강기슭에 이르렀다.

기송동지는 몸이 얼음덩이로 변한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얼핏 떠오르는 생각에 이런 말을 명령하듯 내뱉았다.

《이제부터 뛰자. 뛸수록 몸이 풀려. 그리고 옷의 물도 찌게 될거야.》

죽음의 고비를 함께 넘긴 렴죽심은 무작정 김기송동지의 뒤를 따랐다. 돌멩이에 걸려 코밀이를 할번 했으나 이를 악물고 기송동지의 뒤를 따라 경주하듯 달렸다.

몸이 차츰 더워졌다. 물참봉이 되였던 옷의 물도 어지간히 쪘다.

남선지구 공청책임자네 집에 들어섰을 때 그 집 식구들은 소스라쳐 놀랐다.

남선지구 공청책임자는 만나고보니 기송동지가 몇번 본 사람이다. 구공청에 오느라 부암동을 지나갈 때 보았던것이다.

철색얼굴이 기름하고 키가 큰데다 성미가 서글서글한 남선지구 공청책임자는 기송동지를 찬찬히 여겨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너 김정숙의 동생이 아니냐?》

《옳아요.》

입술에 피가 발리고 얼굴이 새파랗게 얼다못해 검은빛이 도는 렴죽심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대신 대꾸했다.

《대뜸 알리누나. 얼굴이 꼭같거든. 정숙이는 우리 집에 서너번 왔다 갔다. 참말 믿음직스러운 처녀지.》

이 집 식구들은 그들의 옷을 갈아입힌다, 몸이 빨리 더워지게 아궁에 불을 지핀다 하며 야단법석이였다.

기송동지와 죽심은 피곤이 뼈속깊이 배여들었댔으나 뜨끈한 방에서 푹 자고나니 뜀박질을 하고싶을만큼 몸이 거뜬했다.

이 집에선 부랴부랴 저녁밥을 지어주었다.

다음날 아침밥은 식구들과 두리반에 앉아 맛있게 먹었다.

도중에 먹을 밥도 정성스레 싸주었다.

삽짝문까지 따라나온 남선지구 공청책임자는 기송동지에게 동전 두잎을 내주었다.

《가다가 엿이라도 사먹어라.》

기송동지는 사양했으나 받지 않을수 없었다. 죽심이 상그레 웃으며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동구밖에 나선 기송동지는 그제야 생각난듯 죽심에게 말을 건넸다.

《넌 이모네 집에 들리지 않겠니?》

죽심은 머리를 저었다.

《싫어, 이모네 집이 마을한복판인데 딴사람의 눈에 띄울수 있거든.》

기송동지는 기분이 붕 떴다. 행길에 널린 돌멩이들을 공을 차듯 멀리로 차던졌다.

기송동지와 죽심은 해가 하늘중천에서 따가운 빛을 뿌릴 때 8도구거리에 들어섰다.

장날이여서 거리는 사람들로 붐비였다. 장마당은 발옮겨디딜 자리없이 사람들로 찼는데 소음 또한 요란스러웠다.

촌에서 온 할머니들은 달래, 미나리, 메꽃의 긴 뿌리인 하얀 메를 바구니에 담아놓고 앉아있었다. 사실 그걸 다 팔아야 오가는 품값도 되지않을것이다.

기송동지와 죽심은 가락엿 세개씩을 샀다. 한개는 먹을 작정이였고 나머지는 집식구들에게 갖다주려고 점심밥을 싼 보자기에 함께 간수했다. 그 보자기를 죽심이 어깨에 가로 메였다.

죽심은 새물거리며 기송동지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내기를 할가?》

《뭘?》

《가락엿 꺾는 내기.》

《응, 하자!》

아직도 동심의 세계에서 훨훨 나는 기송동지는 제꺽 응수했다. 벌써 내기에서 이겨야겠다는 생각에 류달리 까만 눈에서 광채가 일었다.

애들은 설날같은 때에 부모들이 돈을 조금 주면 가게방으로 달려가 가락엿을 사들고 한집에 우르르 몰켜들어와 가락엿 꺾는 내기를 하군 했다.

눅진한 까만 엿에 물을 발라 계속 길게 늘군다. 그러면 까만빛이 바래지며 하얀색이 짙은 노란 엿으로 되고만다.

그 엿을 양초굵기만큼 길다랗게 늘여 알맞춤한 길이로 잘라 말린다.

까만 엿에 물을 발라 늘구는 과정에 공기가 새여들어 가락엿속에 동그란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했다.

애들은 한 애의 구령에 따라 가락엿 중둥을 뚝 꺾는데 어떤 애의 가락엿엔 구멍이 크게 나고 어떤 애의것엔 작게 난다.

구멍이 크게 난 애가 이겨 약속한 량만큼 엿을 받아먹는것이다.

이런 내기를 죽심이 하자는것이다.

조용한 집모퉁이에 들어선 기송동지와 죽심은 가락엿 꺾는 내기를 했다.

그런데 기송동지의 엿엔 구멍이 크게 나고 죽심의 엿엔 좁쌀알만한 구멍이 뚫렸다.

《다시! 다시!》

렴죽심이 앙탈을 부렸다.

그래서 다시 했는데 기송동지의 엿구멍이 역시 더 컸다.

죽심은 울상이 되여 《몰라,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기송동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에 우스개를 담았다.

《난 네 엿을 먹으면 얹혀. 나는 작아도 사내거든.》

이러는데 거리 저켠에서 귀청이 터질듯한 요란스런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눈길을 돌리니 왜놈기병종대가 거침없는 속도로 이쪽으로 달려오고있었다.

행인들은 경악해서 비명을 터치며 길녘으로 풍겨났다. 한 녀인이 머리에 인 광주리를 떨구어 감자가 사방으로 뿌려져 디굴디굴 굴렀다.

그런것엔 아랑곳없이 기병종대는 감자들을 짓뭉개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오봉광산쪽으로 향하는 모양이다.

뒤따라 100명은 실히 될 왜놈보병부대가 땀투성이 얼굴로 무릎높이 정보행진을 했다. 땅이 쿵쿵 울렸다.

그놈들의 오만한 표정, 당당한 자세는 이렇게 부르짖는것만 같았다.

《이젠 여긴 우리 땅이야!》

기송동지는 명치끝에 바늘이 박히는듯 했고 눈물이 솟아올랐다. 죽심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얼굴을 싸쥐였다.

기송동지는 두달전 야학에서 곽찬수선생이 들려주던 말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선생은 몸을 떨며 통분한 어조로 말했다.

《여러분, 여기 동북땅이 일본놈세상이 되고말았습니다. 지난 3월 1일 왜놈들은 〈만주국〉이라는 허수아비정권을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곽찬수선생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1927년에 장개석은 일본 고베에 가있는 손중산의 부인 송경령을 찾아갔다. 송경령의 막내동생인 송미령과의 결혼을 승인받기 위해서였다.

그때 장개석은 일본수상, 외상과 밀담을 벌렸다.

동북땅을 내놓겠다, 그러되 중국 이남을 더는 탐내지 말라, 모택동공산군을 모두 격멸해달라.…

1931년 9. 18사변이 터졌다. 그때 장학량의 무력만 해도 30만명이나 되였다.

그런데 불과 2만밖에 안되는 일본군에게 총 한방 쏘지 못하고 넉달만에 동북땅을 떼우고말았다.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대항하지 말라고 명령을 떨구었고 전국민에게 국제련맹리사회에 건의했으니 극력 자중할것을 강박했다.

1932년 3월 1일 일제침략자들은 천진에 숨어살던 부의를 내세워 《만주국》이라는 꼭두각시정권을 장춘에 세웠다.

김기송동지는 왜놈들이 동북땅을 타고앉았지만 이 산골에까지는 오래있어야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왜놈의 기병과 보병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된것이 아닌가.

기송동지는 어깨가 처져 시무룩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죽심이도 울먹해서 말없이 걸었다.

이때 뒤에서 그들을 찾는 어른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송아! 죽심아!》

돌아보니 태호의 아버지 림원학이였다.

기송동지와 죽심은 흐린 기분을 가시지 못한채 반가운 표정을 짓느라했다.

《삼촌, 어떻게 여기 오셨나요?》

기송동지의 물음에 림원학은 흥심없이 대꾸했다.

《응, 장작 팔러 왔다.》

그의 한 어깨에는 빈지게가 지워져있었다.

림원학은 키가 크나 몸이 강말라보이고 목이 한옆으로 삐뚜름히 기울었다. 독립군생활을 하다가 총알에 목을 상했던것이다. 그때 후두도 다쳐 목소리가 쐑쐑거렸다.

《너희들은 어디 갔다오는 길이냐?》

림원학이 물었으나 기송동지는 대답을 피하며 어줍게 웃었다.

림원학은 짐작되는것이 있는지 더는 물으려 하지 않았다.

사실 김기송동지일가가 서산리에서 여기 부암동으로 이사오게 된것은 이 림원학때문이였다.

김기송동지의 아버지 김춘산선생님과 림원학은 독립군의 한부대에서 싸웠고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림원학이 김기송동지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아래여서 기송동지는 그를 삼촌이라 불렀다.

아버지가 한많은 세상을 뜨셨을 때 기송동지의 집에서는 이 비보를 맨 먼저 림원학에게 알렸다. 그길로 달려와 장례를 도맡다싶이한 림원학은 떠나면서 기송동지의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형수님, 의지가지없는 여기서 혼자 살겠소? 우리 마을에 가서 함께 삽시다. 그러면 내가 형님과의 의리를 잊지 않고 애들의 삼촌구실을 하지요.》

그리고는 달구지를 몰고와 짐까지 실어갔고 자기 집옆에 자그마한 새집도 지어주었던것이다.

림원학은 기송동지의 손을 잡으며 쐑쐑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 점심전이지? 저기 가자.》

기송동지는 손을 뽑으려 하며 웃어보였다.

《삼촌, 우리한텐 먹을게 있어요. 조금 가다 먹으려 했댔어요.》

기송동지는 죽심이 어깨에 멘 보자기에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림원학은 들은체도 않고 중국우동집으로 기송동지와 죽심을 이끌고갔다.

중국음식점이 다 그렇듯이 이 우동집도 방안에 기름내가 푹 배였다. 문짝대신으로 드리운 휘장에 검은 기름때가 진득진득했고 네모박이식탁에도 기름기가 자르르 흘렀다.

림원학은 기송동지와 죽심의 풀린 눈과 더딘 걸음걸이에서 무척 먼길을 갔다오는것임을 제꺽 눈치챘다. 그래서 장작값의 절반을 아끼지않고 푸짐히 먹이려는것이였다.

우동 두그릇을 앞에 받은 기송동지의 눈은 기쁨에 반짝거렸다. 그러나 죽심은 류달리 긴 참대저가락으로 한그릇의 절반을 림원학의 그릇에 덜었다.

림원학은 펄쩍 뛰였다.

《왜? 다 먹어라. 난 한그릇이면 돼.》

《그걸 다 먹으면 배가 터져요.》

역시 처녀애들은 다심하고 살틀했다.

기송동지는 우동발을 입에 물자 그 끝머리까지 단숨에 목너머로 흘러들어가는것 같았다. 다음그릇도 게눈감추듯 했다. 오래간만에 배부른감을 느꼈다.

셋은 집으로 향했다. 기송동지가 얼른 림원학의 지게를 졌으나 지게다리끝이 땅에 끌리였다.

림원학은 싱긋 웃으며 《너는 아직 강아지야.》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 지게를 도로 자기의 한 어깨에 졌다.

림원학은 무거운 얼굴로 걸음을 내짚었다. 걱정이 큰 산처럼 점점 커졌다.

(마을에서 암만해도 일이 날것 같군.)

…한때 독립군을 따라 10년나마 돌아다닌 림원학은 소태같이 쓴맛과 락망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독립군 두령들은 군자금을 모아오라고 불같이 다그어댔다. 지주며 잘사는 집 돈과 물건들을 걷어오기도 했지만 못사는 조선사람들의 집에도 뛰여들어 《당신들은 조선사람이 아니요?》 하면서 총까지 들이대고 군자금을 강박했다.

그런데 그토록 힘들게 모아온 군자금을 군비를 늘구는데 쓰는것이 아니라 우두머리들이 향락에 물쓰듯 한다는것이 헨둥히 알렸다. 독립군들끼리 의가 맞지 않아 티각거렸고 서로 더 큰 권력을 잡아쥐려고 피투성이싸움도 서슴지 않았다.

목의 부상을 구실삼아 독립군에서 빠져나온 림원학은 칼끝으로 뼈에 글을 새기듯 마음속깊이 결심을 다졌다.

(되지도 않을 독립을 바라며 헛고생만 했어. 독립은 하늘의 별따기야. 이젠 강심을 먹고 농사나 잘 지어 식구들을 먹여살릴테다.)

그런데 몇해째 잠잠하던 마을이 움씰거리며 설레이기 시작했다.

공청이며 반제동맹… 철없는 애들까지 들썽거린다.

림원학은 공포에 모대겼다. 이 젊고 철없는것들이 마을에 큰 화를 불러오려고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날치니 큰 사달이 아닌가.

그는 공청책임자며 여러 조직책임자들을 만나 간곡히 타일러주느라 했다. 그러나 도무지 이가 들지 않았다.

림원학이 제일 걱정되는건 기송동지의 집이였다.

기송동지의 형 기준동지가 혁명을 한다고 어딘가 가서 돌아올줄 모르고 기송동지의 오누이도 기를 쓰고 따라다닌다.

하루는 기송동지의 어머니를 만나 자기 걱정을 터놓았다.

그러자 속이 넓고 리치가 밝은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셨다.

《애들이 하는 일을 막아나서고싶지 않군요. 나라를 잃었는데 그걸 찾자는거야 백성된 도리가 아니겠나요.》

림원학은 입을 다시며 그 집에서 나와버리고말았다.…

그는 함께 걷는 죽심을 보느라니 그의 아버지 렴국찬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독립군의 다른 부대에서 싸운 일 있는 제 나이또래의 렴국찬은 야장도구를 몽땅 걷어들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는 떠나면서 마을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명월구에 가오. 거기에 먼 친척이 있는데 살기가 좋다기에 먼저 가보자는게요.》

그러나 뒤에서 들리는 말엔 그가 산에 들어갔다는것이다.

림원학은 부글부글 괴여오르는 속마음을 어린애들에게라도 터놓고싶었다. 그는 으흠으흠 잔기침을 깇고나서 말을 뗐다.

《너희들도 이자 봤지? 여기까지 왜놈들이 꽉 덮였어. 그걸 무슨 힘으로 당한단 말이냐? 바라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다구 덤벼쳐야 맨발로 바위차기야.》

기송동지와 죽심은 림원학의 말에 흠칫 놀랐다. 이건 혁명을 그만두라는게 아닌가.

죽심의 얼굴에 대바람 새파란 빛이 돌았다. 그는 아버지한테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태호의 아버지가 마을의 혁명호제회를 책임진 자기 아버지를 찾아와 나살이나 건사한 사람이 꼭뒤에 피도 안마른 젊은것들의 사품에 창피스럽게 끼여들지 말라고 일렀다는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단단히 오금을 박아 퉁을 놓았다고 한다.

《여보게, 독립군 10년에 더운 피도 다 강물에 흘려보내구말았군.》

이러한 태호 아버지가 우리보고도 내놓고 혁명은 가망없는 일이라고 하지 않는가.

속이 화끈 달아오른 죽심은 톡 내쏘듯 말했다.

《아저씨, 왜놈들이 암만 쎄도 피를 물고 맞서야 해요.》

림원학은 죽심을 흘겼다. 여돌찬 모습이 아버지를 꼭 빼물었다.

김기송동지는 말없이 걸음을 옮기며 림태호를 그려보았다.

무척 쾌활한 성미인 태호는 개량사숙에 다닐 때 학급장을 했고 공부를 썩 잘했다. 그는 개량사숙이 문을 닫자 더 공부할수 없게 된걸 무던히 애달파했다. 그러나 야학에는 나오려 하지 않았다.

제일 가까운 사이였던 기송동지가 태호에게 물었다.

《너는 왜 야학에 나오지 않니? 거기서도 배울게 많아.》

태호는 눈가에 얼핏 웃음을 띄우며 서슴없이 대꾸했다.

《난 거긴 안나갈래. 아버지도 얼씬 하지 못하게 해.》

야학은 혁명조직에서 운영한다. 그러니 야학에 나가면 혁명바람이 일가봐 태호 아버지는 막을것이고 태호는 아버지의 뜻이 옳다고 여겨 나오지 않을것이다.

김기송동지는 림원학이 어머니를 찾아와 한 얘기도 이미 알고있었다.

그래서 태호 아버지한테 맵짠 말을 하고싶었으나 친삼촌처럼 여기며 지내는터여서 입가에 웃음을 짓고 한마디 했다.

《삼촌, 지금싸움은 독립군때와는 달라요. 김일성장군님께서 앞장에 서시였단 말이예요.》

림원학은 아이들까지 무섭게 번졌다는 생각에 탄식하듯 한숨을 지었다. 더는 입씨름을 하고싶지 않았다.

셋은 어성버성한 기분을 안고 마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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