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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제1장 잃어진 신호나팔


1


3월부터 봄이라 하지만 여기 중국땅의 연길현 부암동에는 사나운 겨울이 그냥 웅크리고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가파로운 산들에 눈이 무둑하니 쌓여 하얗게 보였다. 마을옆으로 흐르는 연길하에도 얼음이 두텁게 깔렸다.

김기송동지가 사는 부암동은 다섯개 마을로 가른다. 상촌, 중촌, 하촌, 장재촌, 동골.

김기송동지는 하촌에서 산다.

하촌은 8도구에서 들어오면서 첫 마을인데 먼발치 동구밖에 부채바위, 장부바위라고 부르는 아슬한 큰 바위가 서있다. 이 바위로 해서 부암동이란 이름이 생겨난것이다. 그 바위가 어찌보면 마을어구를 지키는 파수군같았다. 연길하의 동쪽에 자리잡았다 하여 수동마을이라고도 불렀다.

하촌에는 집이 쉰채 잘된다. 거의 모두 조선사람들이 산다. 일본놈 등쌀에 견딜수 없어 고향을 뒤에 두고 이리로 옮겨앉은 사람들이다. 하기에 고향이 서로 달랐고 성도 각각이였다.

김기송동지는 골목길을 꺾어돌고있었다. 야학선생인 곽찬수가 불러 그집으로 찾아가는 걸음이다.

기송동지는 토끼털귀덮개도 걸지 않았다. 솜을 얇게 둔 바지저고리에 내의를 대신하여 작아진 바지저고리를 겹입었지만 땅을 휩쓸며 불어치는 맵짠 바람이 부는데도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나이에 비해 키가 조금 작은 축이지만 몸이 단단하고 강단이 느껴졌다. 동그란 얼굴, 검은 눈섭에 영채도는 눈, 봉긋한 입술, 탄력이 느껴지는 볼…

첫눈에도 여간 여돌차보이지 않았다.

김기송동지는 곽찬수선생의 집앞에 이르렀다.

《선생님, 계십니까?》

부엌문이 인차 열리며 무척 깨끗하게 생기고 상냥하기 이를데없는 아주머니가 반겨맞았다.

《어서 들어오세요.》

곽찬수선생은 중국신문을 들여다보고있었다 . 방안에 들어서던 기송동지는 눈이 커졌다.

바람벽 하나가 온통 책으로 채워져있었다. 책장의 층단을 따라 빼곡이 꽂힌 책들에는 조선어, 중국어, 영어로 제목이 찍혀있었다.

기송동지는 이렇게 책이 많은 집을 처음 보았다.

곽찬수선생은 룡정대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암동에 있는 개량사숙에 와서 교편을 잡았다. 일본령사관 경찰들은 이 사숙이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며 한해전에 페쇄의 대못을 꽝꽝 박아버렸다. 두명의 교원들은 딴곳으로 옮겨갔지만 곽찬수선생은 여기에 그냥 남아 야학을 통해 마을사람들을 계몽하느라 온 심혈을 쏟고있었다.

얼굴색이 맑고 갸름하게 생긴, 스무일여덟살 나보이는 곽찬수선생은 기송동지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넌 동무들의 인기가 대단하더구나!》

기송동지는 자리를 고쳐앉으며 어줍게 웃었다. 며칠전 일을 두고 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요즘 이 근방에는 혁명의 새로운 기운을 타고 마을마다 공청, 소년선봉대 등이 비밀리에 계속 생겨나고있었다. 다른 마을에서는 아동단도 생겼다고 했다.

하촌아이들은 모여서면 웅성거렸다.

《왜 우리 마을에서는 아동단이 서지 않을가?》

《가만 보면 공청과 소년선봉대는 생긴것 같은데…》

어느날 곽찬수선생은 공청의 지시로 야학을 끝낸 다음 아이들만 남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아동단을 무어준것이였다. 선생은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래 아동단 분단장은 누굴 시켰으면 좋겠니?》

아이들은 별빛눈을 반짝이며 힘있게 손을 들었다. 선생에게 짚이운 애들은 꼭같은 말을 하는것이였다.

《기송이를 시켰으면 좋겠습니다.》

《분단장은 기송이가 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아동단 분단장으로 기송동지가 선거받았었다.

곽찬수선생은 그날일을 두고 기송동지가 동무들속에서 인기가 대단하다고 말하는것이다.

선생은 움쭉 몸을 일으키더니 웃방으로 올라갔다. 한참 있다가 내려오는 선생의 손에 신호나팔이 들려있었다. 개량사숙에서 쓰던 나팔이였다.

사숙문이 닫기면서 교구비품은 모두 곽선생의 집으로 옮겨오게 되였다.

선생은 그 나팔을 김기송동지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제부터 나팔을 네가 건사해라. 아동단에 활기를 주려면 나팔이 필요할거다.》

눈에 영채를 함뿍 실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기송동지는 나팔을 받아들며 목메여 말했다.

《고맙습니다.》

김기송동지는 큰 보물을 가슴에 받아안은것만 같았다.

(나한테 나팔이 생기다니!…)

기송동지는 나팔을 들고 그자리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싶었다.

김기송동지는 네댓살때부터 빽빽이풀을 입에 물고 거기에 곡조를 실어보려고 애썼다. 좀 커서는 굴피나무에 구멍을 뚫고 《아리랑》곡조를 제법 뽑았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취미와 소질을 가지고있었던것이다.

기송동지가 입학한 개량사숙에는 신호나팔이 하나 있었다.

신호나팔을 부는 상급생 두명은 기송동지가 신호나팔에 강한 호기심을 드러내자 싱긋 웃어보였다.

《나팔 불고싶니? 어디 불어봐.》

기송동지가 볼근육을 팽팽히 켕기며 나팔소리를 뽑아내자 그 상급생들은 놀랐다.

《히야― 넌 딱 나팔 불게 생겼구나!》

상급생들은 이 사실을 곽찬수선생한테 알렸다. 곽선생은 체육, 음악 등 모든 면에서 막히는데가 없었다. 그래서 신호나팔훈련지도도 곽선생이 맡고있는것이였다.

기송동지의 입모양을 찬찬히 여겨보던 곽선생은 흔연히 말했다.

《좋아, 너도 신호나팔을 불렴.》

기송동지는 평생소원이 이루어진듯싶었다. 집에 가서는 신호나팔을 불게 됐다고 한껏 자랑을 늘어놓았다.

기송동지는 수업후이면 신호나팔을 손에서 놓을줄 몰랐다. 나팔을 얼마나 불었는지 입술이 부풀어오르고 입안에 고이는 침에서 단맛이 느껴졌다. 이어 허기를 느꼈다. 그러나 집에 가야 먹을 음식은 없었다.

한달만에 김기송동지는 상급생들을 허양 따라잡았다.

곽찬수선생은 기송동지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너는 열성도 대단하거니와 음악에 대한 남다른 소질을 가지고있는것 같애. 힘껏 불어라. 너는 음악에 희망을 두어도 될것 같다!》

그런데 사숙이 페쇄되는 바람에 그 신호나팔도 더는 불수 없었다.…

그러던 그 신호나팔이 기송동지의 손에 들어왔다. 곽찬수선생이 더없이 고마왔다. 정열적이면서도 인정깊고 다심한 곽찬수선생은 아동단생활에 나팔이 필요한줄 알고 이렇게 나를 불러 나팔을 안겨주는것이 아닌가!

기송동지는 곽선생에게 머리를 깊이 숙여보였다.

《선생님, 나팔을 잘 건사하겠습니다.》

그리고는 하늘로 날아오르는듯한 기분에 휩싸여 선생의 집을 나섰다.

김기송동지는 골목길을 빠져나오면서도 나팔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1년나마 골방에 박혀있던 신호나팔은 누런색이 거멓게 죽고 손잡이에 감은 빨간색의 천도 볼품없이 바래였다.

(괜찮아, 이제 새것처럼 만들테야.)

행길에 나선 김기송동지는 사방에 대고 나팔을 불어댔다. 야무지게 울리는 힘찬 나팔소리는 추위를 쪼개며 멀리로 울려갔다.

집집의 문이 벌컥벌컥 열렸다. 애들이 나팔소리를 듣고 여기저기서 달려나왔다.

《야, 나팔!》

애들은 종주먹을 부르쥐고 기송동지가 서있는데로 달려왔다.

《너 나팔이 어디서 생겼니?》

《곽찬수선생이 주었어.》

《야, 멋있구나!》

애들은 저마끔 나팔을 불어보겠노라 덤벼쳤다.

맨 선참 기송동지의 손에서 나팔을 가로챈것은 림태호였다. 키가 쭉 빠지고 히물거리길 잘하는 그애는 늘 눈에서 웃음기가 물결쳤다. 그애네는 기송동지의 집과 처마를 맞대고 살고있었다. 태호는 기송동지와 제일 밭은 딱친구였는데 개량사숙이 없어지자 야학에는 다니지 않았고 그러다나니 아동단에도 들지 못했다.

태호는 덮쳐드는 애들을 다리질로 제끼며 나팔주둥이를 입에 가져갔다.

입술에 힘을 주자 볼만 터질듯 팽팽히 부어오르면서 빽빽― 하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같은것이 가냘프게 빠져나왔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도록 몇번이고 다시 나팔을 불었으나 역시 소리는 매한가지였다.

그는 나팔에 눈을 흘겼다.

《깍쟁이!》

좀처럼 제 소리를 내주지 않는다는 힐난인것이다.

다른 애들이 겨끔내기로 불었으나 나팔소리는 제대로 나지 않았다. 볼이 고무풍선처럼 불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뿐이였다.

한 애가 겨우 숨넘어가는 돼지의 비명같은 소리를 길게 뽑았다.

애들은 머리를 기웃거리며 나팔을 기송동지에게 도로 내밀었다.

《한번 불어봐.》

기송동지는 어깨를 으쓱 추스르며 허리에 한손을 얹고 기상나팔, 집합나팔, 행진나팔, 비상소집나팔 등 생각이 닿는대로 련거퍼 불어댔다.

류창한 나팔소리가 조용한 마을을 들썩 들었다놓았다.

애들은 감동에 찬 눈으로 기송동지를 쳐다보았다.

나팔에서 입을 뗀 기송동지는 동무들에게 호기있게 말했다.

《래일아침부터 기상나팔을 불테니 모두 달려나와야 해. 그다음 달리기도 하고 체조도 하고, 좋지?》

《좋아!》

《좋아!》

애들의 얼굴은 생기에 넘쳤다. 신호나팔소리에 맞추어 아동단생활을 하는것이 신바람났던것이다.

한 애가 태호를 걸고챘다.

《넌 안나와두 돼.》

《헹, 내가 나오겠대?》

히물거리길 잘하는 태호는 얼굴에 웃음발을 잔뜩 발랐다.

동무들과 헤여진 김기송동지는 먼저 나팔을 번쩍번쩍 윤이 나게 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면 기와쪼각을 얻어 떡가루처럼 보드랍게 가루내야 했다.

하촌에 기와를 얹은 집은 지주 리춘팔네 집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조짚이영을 얹었거나 거칠게 쪼갠 동기와를 얹었다.

기송동지는 리춘팔의 상판만 눈앞에 그려져도 분기가 치받쳤다.

되놀이에 가지 못하는 누나를 도와 밭에서 수수 몇이삭을 베였다고 김정숙누나를 연자방아간에 끌고가 저녁 늦도록 일만 시키고 생일날에도 집에 내보내지 않던 고약한 놈!…

그놈은 지난해 추수폭동때 녀자치마저고리를 갈아입고 뒤문으로 빠져나가려다가 농민들에게 잡혀 숨통이 끊어질만큼 주어맞았다.

추수폭동때 앞장에 섰던 김기준형님은 지금 어디에 가있는지 몰랐다. 어디선가 중요한 지하공작을 한다는것만 풍문으로 알고지냈다.

기송동지는 을씨년스러운 마음을 간신히 달래며 리춘팔네 집둘레를 한바퀴 돌았다. 마침 풍경이 달린 한켠 지붕모서리밑에 손바닥만한 기와쪼각이 있었다.

그걸 집어든 기송동지는 집에 돌아와 물에 깨끗이 씻고나서 마당에 있는 떡돌에 놓고 돌멩이로 자근자근 부스러뜨렸다.

그러는데 산에 나무하러 갔던 김정숙동지께서 바쁜걸음으로 집마당에 들어서시였다. 깊은 눈속에서 풋나무를 하다나니 버선까지 온통 눈을 들썼다.

《나팔을 구했다며?》

김정숙동지의 반가움에 넘친 목소리다. 벌써 어느 애가 김정숙동지께 알린 모양이다.

기송동지는 벌떡 일어나서 토방에 놓은 나팔을 집어들고 큰소리로 말했다.

《봐, 아구리가 조금밖에 우그러들지 않았어. 새것이나 같아.》

그리고는 뽐내듯 나팔을 이리저리 돌려보였다.

기송동지는 누나에게 괜히 흰목을 빼고싶었고 때로는 어리광을 부리기도싶은것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목도리를 벗어 치마에 묻은 눈을 깨끗이 터시였다. 목도리를 풀다나니 머리에 얹혔던 눈도 부실부실 흩어졌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떡돌우에 널린 기와쪼각을 보시더니 부엌에 들어가 작은 쇠절구를 들고나오시였다. 그걸 마당에 놓고 부스러진 기와쪼각을 넣은 다음 퐁퐁 찧으시였다.

기송동지는 속으로 머리를 쳤다.

언제나 누나의 생각을 따를수 없었다.

떡돌에 암만 기와쪼각을 부스러뜨리고 갈아도 잔쪼각이 남을수 있었다. 그걸로 나팔을 닦으면 가는 금들이 수없이 패일수 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봏은 기와쪼각을 말초리로 올이 배게 짠 고운 채로 옹배기에 치셨다.

김기송동지는 누나가 몇차례 나무를 해오느라 힘들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동생을 대신해서 기와쪼각을 보드라운 떡가루처럼 봏아주는 누나가 좋아 토방에 걸터앉아 다리를 건들거리며 휘파람만 휘휘 불었다.

기송동지에게는 누나만큼 곱고 똑똑한 처녀는 드물거라는 자랑이 가슴에 그들먹이 차올랐다.

땡볕속에서 내내 일하지만 백설같이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잃지 않는 누나, 눈매며 입모양이 류달리 곱고 웃을 때면 볼이 옴폭옴폭 패이는 복성스런 우리 누나!…

김정숙동지께서는 야학만을 다녔지만 리론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몰랐다. 기송동지도 개량사숙이 문을 닫은 다음 야학에 다니는데 거기서는 야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갑반, 을반, 병반으로 갈랐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당당히 갑반이였다.

토론을 할 때 보면 김정숙동지는 수준있는 남자들을 앞서리만큼 폭넓고 조리있게 이야기를 펴나가군 하여 찬탄의 눈빛에 싸이군 했다.

김정숙동지는 김기준동지가 집을 떠나면서 헛간속에 감추고간 책들을 한권씩 꺼내여 밤깊도록 읽군 하셨다. 그러니 야학과 자습으로 자신의 지식을 차곡차곡 끊임없이 쌓아올리신것이였다.

김기송동지는 자주 이런 생각을 했다.

(야, 우리 누나가 학교공부만 했더라면 정말 대단할거야.)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길이 몽땅 메꾸어졌다. 그러다나니 누구도 야학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김정숙동지께서는 맑은 목소리로 형님에게 말씀하셨다.

《형님, 야학에 가자요.》

《아니 길이 보여야 가지.》

《글쎄 나를 따라와요.》

아직은 낮의 여광이 남아있어 앞이 어슴푸레 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삼태기에 아궁안의 재를 듬뿍 퍼담으시였다. 그리고는 발에 익은 길을 따라 걸으시며 막대기로 아직도 불기운이 있는 재를 줄줄이 뿌리시였다.

깊은 눈길에는 외줄기 검은 줄이 패이였다. 그러니 야학을 끝내고 돌아올 때 암만 캄캄해도 이 검은 줄을 따라 집으로 돌아올수 있을것이다.

야학에 먼저 나온 곽찬수선생은 야학생들이 오늘은 눈때문에 올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김정숙동지께서 형님과 함께 야학에 나타난것이 아닌가.

곽찬수선생은 배우려는 의욕이 불덩이같은 김정숙동지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다음부터 다른 야학생들도 눈이 강산같이 내려도 김정숙동지의 본을 따라 길에 더운 재를 뿌리며 야학방에 다니군 했다.…

나팔을 가져온 다음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기송동지는 말코지에 걸린 나팔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상점에서 사온 나팔 못지 않게 새것처럼 손질되여있었기때문이였다.

환희와 감동으로 세차게 뛰노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기송동지는 나팔을 찬찬히 여겨보았다.

나팔의 겉을 눈부시게 닦은건 말할것 없고 나팔아구리의 깊은 안까지 알른거리게 닦아있었다. 아마도 누나가 막대기에 천을 감고 기와가루를 묻혀 본바탕색이 나타날 때까지 내처 닦은 모양이다.

나팔은 관이 감기면서 깊은 홈타기가 패여져있다. 누나가 장도칼에 얇은 천을 감고 어찌나 꼼꼼히 닦았는지 어디라없이 반짝거린다. 그리고 나팔손잡이에 생생한 빨간 천을 감았고 금술은 뉘집에서 노란 물감을 구해다 현란한 빛을 뿜게 만들었다.

기쁨을 누를수 없어 기송동지는 부엌으로 달려내려가며 소리쳤다.

《엄마, 나팔이 새것처럼 됐어!》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고계시던 어머니가 일러주셨다.

《누나가 어제밤 꼬박 새웠다.》

기송동지가 마당으로 나가는데 김정숙동지께서 물동이를 이고오셨다.

얼굴에 온통 웃음을 띤 기송동지는 누나를 향해 나팔을 흔들어보였다. 누나옆에 이르자 삑― 하고 나팔을 불어댔다.

깜짝 놀란 김정숙동지께서는 웃음을 지으며 핀잔하셨다.

《귀청 터지겠다.》

어둠이 걷히며 날이 밝아왔다. 집집의 굴뚝에서 뿜어지는 연기는 추위에 삼키우며 가냘프게 퍼지였다.

행길에 나선 김기송동지는 여기저기 돌아서며 기상나팔을 호기있게 불어댔다.

집집의 닭우리에서 굳잠에 들었던 수닭들이 자기들이 늦은것을 깨달았는지 목을 빼들며 나팔소리에 화답했다.

집문들이 열리며 아이들이 뛰쳐나왔다. 마당에 바지괴춤을 붙잡고 달려나오는 아이도 있고 한쪽에만 짚신을 신고 외다리걸음을 치다가 들고나온 신발을 마저 신는 아이도 있었다.

마을행길은 때없이 활기를 띠였다.

신호나팔로 해서 아동단생활은 더욱 생기를 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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