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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회


단군과 삼랑성


건국의 다난다사속에 광대한 땅에는 열번째 봄이 찾아들었다.

봄! 갖가지 기화요초가 한껏 용모를 뽐내며 피여나고 천인가 만인가 모를 수목이 록음을 던지며 일어서는 이 계절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대궐의 후원처럼 함박메를 거슬러오른 단군의 심중은 가량할수 없는 흥에 떠있었다.

눈뿌리가 모자라게 아득히 펼쳐진 내 나라의 강산이 성스러운 창조물처럼 안겨왔다.

아! 조선을 일으키는 막중한 건국의 초행길에 흘린 피와 땀방울은 그 얼마였더냐. 새삼스러이 그 로고가 느껴질수록 기쁨과 긍지는 몸이 달도록 컸다.

광대한 땅에 터를 두고 하나의 겨레가 살고있었다. 푸른색으로 단장해가는 벌과 구름을 불고 남은 싱그러운 바람 한덩이가 반갑게 달려와 단군의 옷깃을 파고들다가 솨- 소리를 내며 어데론가 장난군들처럼 사라졌다. 허- 솔가스럽기란… 너희들이 내 마음을 제법 아는구나. 용안에 흐뭇한 미소가 넘실넘실 피여났다. 범도 뒤걸음치게 할 사나운 기상을 지닌 대왕에게도 이같은 무른 마음이 있었던가. 가뭇 공경의 눈길을 떼지 못하는 신하들의 마음도 즐거웠다.

《대왕마마, 찬 날씨가 여직 숙지 아니했사옵니다. 그만 돌아가시오이다.》

시종나인들은 또 한차례 간청의 말을 드렸다. 하늘을 향하여 제노라 웨치던 여러 박달종족들을 휘여잡아 강성한 첫 나라를 일으킨 임금, 아귀세고 존귀한 그 옥체를 돌보는 무거운 소임으로 하여 여쭈는 말소리는 낮으나 절절했다.

허나 지금 단군은 그런 말은 바람소리만큼이나 여기는듯 제 생각에만 깊이 빠졌다.

건국의 큰뜻을 성취한지도 짧지 않은 나날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그 어간에 세상은 많이도 변했다. 한피줄에서 가지치고 같은 말을 하면서도 자질구레한 구실로 제마끔 담을 쌓고 살아오던 박달민족이 이제는 너른 한지붕아래서 살게 되였다. 국호를 정하고 왕이 정사를 보살피고 제가평의회며 8가가 각기 국정을 보좌한다. 조선-아침의 나라에 선악의 시비를 가르는 법률이 서고 힘을 뽐내는 군사들이 위의를 갖추어 국가를 지키며 백성들은 생업에 힘을 아끼지 아니한다. 동방천하가 오늘은 자기의 호령에 숨을 죽이고 설설 기게 되였으니 자고로 천지개벽의 변이면 예서 더함이 어디 있고 이제 바라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이제 더 욕심을 낸다면 나라가 자자손손 복을 누리고 영존하는것이다.

사색을 붙좇던 단군은 《이게 다 그네들의 충성과 갈라 셈할수 없는 일이요.》 하는듯이 정찬 눈길을 신하들에게 주었다.

단군의 심중을 아직은 알길없는 신하들이지만 무언속에 삼가 국궁을 하며 존안을 우러렀다.

오래동안 임금을 받들어 생사의 험난한 고비를 헤쳤어도 말 안하는 사람의 속이야 어이 알랴. 하지만 머리속에 바위처럼 굳게 자리잡은 생각-그것은 너른 세상천지에서 가장 현명한 임금을 시조로 모시였다는 하나의 공통된 점이였다. 그래서 그들은 임금앞에서는 언제나 허리를 깊숙이 수그리는것이였다.

단군의 눈길이 문득 자기와 대여섯행보 거리를 두고 서있는 로신하 고에게 닿았다. 서리를 얹은듯 한 머리칼이 오늘따라 눈에 언뜻 띄운다. 임금은 눈빛이 흐려졌다. 그대는 어이 그리 빨리 늙으시오. 임금은 류달리 서운해지는 마음을 눈길에 실어보냈다.

개국 썩 이전 세월, 그러니 아버지 환웅이 추장으로 있은 시절부터 자신이 존경하여오는 로신하였다. 어렸을 때는 걸음마를 배워주듯이 박달메며 아달메의 험한 수림속을 데리고 다니며 창쓰기와 활쏘기를 익혀주었고 그후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건국의 기치를 들자 억척방패가 되여 묵묵히 자기의 곁에 있었다.

나라가 섰을 때 단군은 선참 그에게 웅가(군사를 주관하는 대신)의 벼슬을 하사하였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굳이 사양하였다. 남은 생에 지금처럼 신하로 있다가 숨지게 해달라는것이였다. 하여 그는 단군의 뜻을 받들어 세자인 부루의 무술을 가르쳤다.

단군은 지금 새삼스럽게 그가 늙었음을 보았다. 이마에는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서너줄 깊숙이 패이였고 허리는 활등같이 휘였다. 늙음을 어찌 도와서 막으랴만 단군은 만물이 흥하는 시절에 오직 그의 육신만 쇠하여지는것 같아 못내 가슴에 걸리였다.

슬프도록 측은해지는 마음으로 로신하를 바라보던 단군의 눈길이 또 한번 그의 얼굴에서 흐려졌다. 고뇌의 흔적이 숨길수 없이 력력하였다. 깃꺾인 수리개처럼 어깨팍도 처져있었다. 의혹이 가득 실린 묻는듯 한 임금의 시선에 고는 일순 놀라며 검버섯이 듬성듬성 박히고 해쓱해진 얼굴로 사례하고는 고개를 수그리였다.

까닭이 있었다. 있어도 단단히 씨박힌 까닭이다. 예나제나 사와 공을 대쪽처럼 갈라서 사를 위함이면 털끝만 한 내심도 드러내지 않는 그였다. 용안에 벌써부터 그의 마음속사연을 알려는 결심이 짙게 내비쳤다.

하기는 근래에 고를 가까이 불러본 기억이 없었다. 왕위란 종족의 추장과는 견줄바 없이 만백성의 웃자리라는 엄청난 위엄으로 하여 언행과 행동의 규제가 까다로왔다.

그것은 자기와 신하들사이에 넘나들수 없는 간벽을 쌓아놓았다. 긴절한 국사를 론하러 오는 측근신하들까지도 이마적은 범의 눈살맞은 토끼처럼 몸을 옹송그리고 제앞에 나타남에 세자의 무술이나 돌보는 한직의 신하를 근접시킬 경황이 있었으랴.

함박메에서 내려오는 길로 단군은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고를 불렀다. 그는 여느때없이 숨이 차도록 임금앞에 달려왔다.

부복한 늙은 신하는 돌처럼 굳어진채 까딱 않고있었다. 옛정을 되살리며 단군은 훈훈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부복한 로신하가 거듭 일어나기를 권하지만 신하가 지킬 례를 수월히 물리칠 그가 아닌듯 조금도 몸을 흐트리지 않는다.

《신하가 임금앞에 평좌함은 나라법에 없는 무엄한 일인줄 아옵니다.》

《허, 그대가 나라법만 익혀 알고 군신간 정은 깨끗이 잊으셨소그려, 허허허…》 하고 임금은 일부러 웃음소리를 크게 내였다.

《그럼 할수 없지. 임금이 신하한테 지는수밖에… 헌데 이즈음 신상에 무슨 근심이 있는게 아니요?》

또다시 봄바람같은 말소리가 고의 머리우에 떨어졌다.

순간 용안을 향해 신하의 머리가 우뚝 들렸다. 그것은 마치 바위를 떠이듯 힘있고 꿋꿋하였다.

《신은 나라님의 명을 받들지 못하는 죄인이옵니다.》

《으응?… 그건 웬 당치않는 말이요?… 이제껏 충을 베개삼아 살아오는 그대가 아니요. …》

다음 말을 듣기가 바쁜 임금은 튀여나듯 몸을 자리에서 솟치며 로신하를 내려다본다.

단군은 도저히 그럴수 없다는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임금님, 래일의 나라님이신 왕세자마마께서 호가(중앙의 대신급관료들을 통솔하는 단군 다음가는 벼슬)의 작위를 받으시기 급하게 무예를 멀리하시니 이 어찌 일이 됐사오리까. 왕세자마마께서 선례를 만드시면 어린 왕자님들도 우를 본삼자 할터인즉 창과 칼을 버리고서야 웬 묘술로 왕통을 이어가리까. 이를 생각하면 소신은 괴로운 심신을 달랠길 없사옵고 어명을 게을리 받든 죄로 하늘향해 머리를 들수 없사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늙은 고의 목소리는 쇠를 두드리듯 쩡쩡 울렸다.

(그랬었구나. 까닭은 거기에 있었구나. 아!… 헌즉 그대는 참말로 죄지은 신하요. 어이하여 그 일을 물어서야 말을 하오?)

고통스럽게 두눈을 감은 단군은 할 말을 잊은채 잠자코 있었다. 고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나라님의 창검에 녹이 쓸면 국사는 엉망이 되옵니다.》

삽시에 불같이 타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단군은 큰 주먹을 으스러지게 그러쥐였다.

죄를 받아야 하리로다. 그대 먼저 내가 죄를 받아야 하리로다.

눈초리는 사나와지고 얼굴에는 퍼런빛이 나돌았다. 일전에 단군은 측근신하들의 성가신 권고를 물리칠수가 없어 세자 부루에게는 호가, 차자 부소에게는 응가(형벌을 주관하는 대신), 삼자 부우한테는 로가(병을 다스리는 대신)의 벼슬을 내리였었다. 헌데 그 일이 이런 페단을 낳을줄이야…

대궐이 고요한 속에 고양이걸음처럼 소리없는 나날이 흘러갔다. 그러나 그와 함께 단군의 머리속에는 무거운 결심도 자리잡고있었다. 계절을 자랑하는 봄도 삼춘에 접어들어 떨어지는 살구꽃이 함박메며 대궐의 후원을 하얗게 덮을무렵, 나라의 서쪽변방인 갑비고차(강화도)쪽에서 흉흉한 소문이 들려오더니 곧 꽁지에 불을 달고 조정에 닿았다.

떼를 지은 남쪽의 종족이 갑비고차에 달려들어 인명을 해하고 재물을 로략질한다는 급보였다. 나라가 서서 처음 난 변에 조정은 죽가마처럼 끓어번지고 창검을 틀어잡고 활을 등에 멘 군사들이 가슴들을 쑥 내밀고 나라님의 엄명을 기다렸다.

단군은 전복을 입고 무언속에 침소를 오락가락 거닐었다. 추장시절부터 의례히 싸움을 앞두면 전복을 걸치는 버릇에서였다. 그는 무거운 전복이 좋았다. 어두운 구리빛얼굴이며 꾹 다문 입, 총세고 긴 눈섭은 장대한 체구에 어울려 우뢰와도 같은 위엄을 풍기였다.

강대국의 존왕의 분노가 터지는 날엔 이 세상은 천쪼각만쪼각 흙덩이바사지듯 할지도 몰랐다.

박달민족의 맛을 보여야 하리로다. 감히 이 나라 지경을 넘보는 악의 무리들. …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마상에 몸을 얹고 한달음에 달려가 도륙을 내고싶으나 성왕이 그만 일에 서뿔리 대궐문을 나설수도 없었다. 문득 요즘 생각해오던 결심이 땅땅히 덩어리로 굳어졌다. 세자를 전장에 내보내야 한다. 비로소 단군은 벅찬 짐을 벗은 나그네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여러모로 세자의 일을 놓고 속을 끓여온 자기였다.

나라의 대를 이어갈 몸으로 벌써부터 무술련마를 게을리하다니… 나이 스물이면 작은 나이가 아니다. 한몸보다도 국사의 중함을 알 때다. 그런데… 그런데 세자는 여직 글줄이나 외우는 음지에 피여나는 꽃 한가지였다. 어찌 보면 광풍앞의 풀잎같기도 하였다. 고의 말이 백번 옳은 말이다. 창칼을 버리고야 일망무제한 나라지경을 어이 돌보며 길들지 않은 맹금같은 조정백관과 종족장들을 무슨 수로 휘여잡아 정사를 펴랴.

하지만 그럴수록 가슴 한구석에 무겁게 매달리는 또 하나의 생각이 있다. 모색이며 거동일랑을 아무리 살펴봐야 세자는 꼭 계집같았다. 동자질을 안하는게 천만다행이라 해야 할것이다. 억지다짐으로 섬섬약질을 전장에 내보냈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이면 두번 없을 막중한 랑패를 금을 주고 보상한단 말인가. 세자는 한 아비의 아들이기 전에 나라의 아들이다.

갈림길에서 헤매는 바쁜 길손처럼 마음을 종잡지 못하던 단군은 답답한 가슴을 달랠길 없어 훌쩍 말우에 올랐다. 오래간만에 주인을 태운 밤빛말은 기쁜듯이 두어번 오흥- 소리를 길게 내고는 네굽을 안고 무술장으로 씽씽 달렸다. 해는 여직 룡메(룡악산)쪽에 바지랑대만큼이나 높이 떠있으니 세자가 무예를 익혀야 할 때였다. 임금이라도 세자는 막 대할수 없는것이 나라법이다. 보자. 가서 내 눈으로 확인하자. 남의 말만으로야 어이 다 알랴. 그는 자기의 노여움이 공연하기만을 바랐다.

맞받아 불어오는 선풍은 단몸을 서서히 식혀주며 머리까지 거뿐하게 만들었다. 구름을 밟으며 하늘을 훨훨 나는 기분이다. 동서남북 이 땅 각처를 메주밟듯 달리던 추장시절이 잊어버린 귀물처럼 그리워진다. 단군은 마상재라도 부리고싶도록 기분이 동떴다. 사내싼 꼴은 하나도 없이 가문의 전통인 무예를 싫어한다니 세자는 제 씨받이가 옳은지 의심할 정도다.

고-그대가 날 제때에 일깨워주었소. 하지만 내 살붙임에 설마 본의에서 그럴리야…

큰 메를 향하여 힘차게 말을 달리던 단군은 이어 안침한 골안에로 실오래기처럼 뻗어들어간 길에 접어들었다가 곧 무술장에 닿았다. 장방형으로 꾸린 넓은 공지가 버림받은 사람마냥 쓸쓸히 그를 맞았다. 삽시에 마음이 허전해지고 눈앞은 텅 비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선산지키는 꾸부렁나무모양으로 홀로 있던 고가 가쁜숨을 내쉬며 헐레벌떡 달려와 그앞에 너푼 엎드렸다. 울컥하고 치미는 분노를 가까스로 누른 단군은 그에게 물었다.

《왕자는 어디 갔소?》

속심을 묻은 말소리는 한없이 조용하나 그것은 마치 천둥소리처럼 무섭게 울렸다.

《세자비와 함께 함박메에 화전놀이 갔다하옵니다.》

말의 마디마디엔 가슴을 압박하는 괴로움이 내비쳤다.

(괘씸헌-)

드디여 단군의 분노는 하늘에 닿았다. 그는 홱 하고 말을 돌려 오던 길을 달리였다. 말꽁무니가 먼지발과 함께 아득히 사라지자 괴괴한 정적이 찾아든 무술장에는 머지않아 벌어질 심상치 않은 일의 조짐이런듯 큰 성메쪽에서 쏟아져내리는 세찬 바람이 닥쳐들었다.

널직한 대궐안에는 평의회며 제가의 대신들, 어깨를 돋군 웅가의 장수들이 그득 들어찼다. 짐승뿔이 꽂힌 투구를 눌러쓰고 갑옷들을 떨쳐입은 그들은 길고 짜른 창들을 손으로 틀어쥐고 허리에는 단검들을 찼다. 끝에서 번쩍 빛을 뿜는 창이며 칼들은 벌써부터 침범자들의 숨통을 노리고있었다. 이제 이중의 누구에게 어명이 떨어지고 명패가 하사되면 당장 군사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떠나게 된다. 가슴을 쭉 펴고 그루박듯 서있는 장한 신하들이 태반이나 개중에는 자라목을 하고 졸아든 몸을 달달 떠는 사람들도 보였다. 싸움판에서 어리석게 살기만을 바랄수는 없는 일이다. 싸움은 놀음이 아니였다.

단군이 정좌하자 세자 부루가 그에게 국궁을 하며 례를 드리고 뒤를 받아 신하들이 부루의 행동거지를 따르며 례를 표한다. 서리서리 위엄을 풍기며 신하들을 굽어보던 단군의 입에서 벼락같은 어명이 떨어졌다.

《세자는 일만군사를 이끌고 갑비고차의 오랑캐를 징벌하오. 그간 호가의 일은 웅가가 맡도록 하오.》

얼어붙었던 탑전에서 백관은 약속이나 한듯이 동시에 흠칠 몸을 떨었다.

이로써 숨가쁜 정숙은 깨여졌다. 세자를 전장에 보내다니… 나라의 대통을 이을 옥체를… 너무 커져서 눈밖에 안 보이는 얼굴들이 존안을 우러렀다. 왕은 실언을 모르는 법입니다. 무슨 그런 롱을 철없는 저희들에게 하시오이까. … 그들은 소리없는 말을 무수히 외우며 자기들의 생각이 틀림없기만을 진심으로 바랐다. 아직은 대왕의 깊은 속을 알리 없는 그들이였다.

신하들의 눈길에 나타난 물음속내따위는 개의치도 않는듯 단군은 위엄으로 지그시 분위기를 눌렀다. 그리고 시종신이 받쳐들고 온 명패를 세자에게 하사하였다.

희고 힘줄이 보이지 않는 말쑥한 세자의 손에 명패가 쥐워졌을 때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 그들은 크게 뜬 두눈으로 거짓 아닌 진실이 눈앞에 펼쳐졌음을 확인하였다.

거침없는 큰 목소리들이 연방 울려나왔다.

《임금님, 방금의 어지를 거두어주옵소서. 신들이 있는 한 그 어지만은 정녕코 받들수 없사옵니다.》

맨 먼저 웅가대신이 한발 나섰다. 이어 구리빛얼굴에 돌절구처럼 몸이 바라진 장수 두엇이 단김을 코로 내뿜으며 한무릎들을 꺾었다.

《정녕 신들을 믿으신다면 어지를 거두어주옵소서. 절대로 그럴수 없사옵니다,》

《갑비고차는 인적도 드문 사지옵니다.》

임금앞이지만 그들의 눈들에서는 불줄기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단군은 룡상에 굳어진채로 까딱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다만 메부리처럼 드놀지 않는 결심만 내보일뿐이였다.

《어명을 가벼이 알고 두번다시 발설하는자는 가차없이 참하리니 그리 알고 물러들 가라.》

와뜰 놀래우는 이 말에 또다시 바늘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만치 조용해졌다. 단군은 시종관을 뒤딸리운채 성큼성큼 침방으로 향하였다.

임금이 사라진지도 동안이 지났으나 부루는 절구질하는 가슴을 붙안은채 멍하니 서있었다. 자기에게 이런 경우가 차례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적 없는 그였다. 내심에 나는 새도 한호령으로 떨굴듯 하던 그다. 하늘이 높은줄 몰랐고 모두가 그앞에서는 죄지은 사람들처럼 설설 기였다. 허나 출전명을 받은 지금 그는 범의 굴을 찾아가는 풋내기사냥군마냥 속이 두근거리고 찾아드는 불안을 물리칠수 없었다.

요진통에 자기를 몰아넣은 부왕의 처사가 못내 못마땅하였다. 나라안에 그득한 구척장신의 장수들을 제쳐놓고 놓으면 잃을듯 쥐면 깨질듯 고이 기른 세상에 두몸도 아닌 세자를 굳이 죽음의 문전에 보내야 한단 말인가. 믿고 의지해온 마음의 기둥이 한시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물과 불보다도 모진것이 인정이였다. 임금이 되면 아들도 몰라보는것이 바로 사람의 속이런가.


창검의 숲을 떠이고 원정군은 전장을 향했다. 벌써 며칠째 하늘을 가리게 빽빽이 자란 수림을 헤치며 가는 로상에서 부루는 난생처음 사람이 겪는 험한 고생을 체험했다. 고난이 겹쳐들수록 그는 부왕의 못마땅한 처사를 머리에서 털어버릴수 없었다. 원통하도록 속에서는 불이 일고 온몸이 화끈 달았다. 붙는 불에 기름을 끼얹듯 궁성을 떠나기 전 왕의 침소에서 울리던 왕후마마의 울음기섞인 목소리는 귀가를 뱅뱅 돌며 떠나질 않았다.

《나라님에겐 자식도 없으시오? 피가름한 자식이 없는가 말이요. 너무하시오. 사지판에 세자를 내보내면서 눈 한번 깜빡 않으니… 잉태한 세자비가 이 일에 놀라 락태라도 하면 왕가는 안팎으로 쫄딱 망하는셈이요. 어휴- 이 가슴아…》

왕후마마는 가슴까지 두드리며 몸둘 곳을 몰라하였었다.

곤경에서 부루는 따근한 모성애를 느끼며 저도 모르게 손으로 축축해진 눈굽을 눌렀다. 문득 그는 수많은 눈들이 자기를 지켜보고있음을 느꼈다. 놀란 그는 허둥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기는 세자이며 이번 싸움의 수장이였다. 누가 자기의 약한 꼴을 본다면 이야말로 다시없을 랑패중의 랑패였다. 다행히 모두가 끙끙 힘을 쓰며 먼길을 축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솥뚜껑만큼씩 한 방패와 활집을 멘 군사들의 등골에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려 저고리를 두쪽으로 나눈다.

시종군사들의 뒤에는 고가 갑옷으로 늙은 몸을 싸고 재빛말우에 몸을 얹은채 따르고있었다. 젊은이다운 기상과 굳센 의지가 철철 넘치는 그는 기다리는 곤난을 가랑비만큼이나 여기는듯싶다. 이제껏 볼수 없던 그의 모습은 부루의 마음에 기둥이 되고 새 힘을 주었다.

고맙소. 고맙소.

로신하앞에 고개가 숙어지는 그였다. 어려운 때 사람의 진가를 안다는것이 이것이리라. 충성스런 신하의 진심을 오히려 멀리하며 철부지처럼 속을 태운 자신이 쑥스럽도록 부끄러웠다. 활을 쏘라면 깍지타발을 하고 창을 들라면 무겁다고 내던졌다.

《세자가 이따위 싫은 놀음을 꼭 해야 돼- 난 싫어. 하기 싫단 말야.》

그는 백발을 머리에 얹어가는 신하앞에서 작은 발로 땅을 콩콩 구르며 엇드레질을 했었다. 그러나 고는 열번의 엇드레질에 스무번을 타일렀다.

《그러면 아니되옵니다. 세자의 일은 나라가 지켜보옵니다.》

그는 성낼줄은 더욱 몰랐다. 성을 내야 할 마당에선 언제나 느슨히 웃어주었다. 그러나 자기가 호가벼슬을 하고 이제는 체면도 있으니 더는 점적해서 무술련습을 못하겠다고 나자빠지자 비로소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아주 잊어버린듯 했다. 서늘해진 얼굴에는 그물을 붙여놓은듯 얼기설기 주름만 늘었다. 아마 그는 오늘일을 미리 내다보고있은듯 했다. 그래서 그리도 안타까와했으리라.

하지만 로신하는 지난 일을 깨끗이 잊은듯 지금처럼 외롭고 고통스러운 때 의지가 되게 함께 가는것이다. 허나 부루는 신하의 마음까지는 헤쳐볼수 없었다.

고는 하직의 례를 드리는 마당에서 임금이 베푼 무언속의 은총을 잊을수가 없었다. 성왕께서는 자기를 보는 때에 남이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분명 이런 말을 눈빛에 전했었다.

《신의 충정을 내 잘 아는바요. 그래서 세자를 맡기요. …》

가슴이 찌르르해지도록 성왕의 후은이 고마왔다.

나라님, 어찌 늙은 몸을 이같이 믿어주시옵니까. 고맙소이다. 고맙소이다. 다 늙어 쓸데없는 이 몸을 깡그리 바쳐 세자마마를 위함이 신의 마지막기쁨이옵니다.

이렇게 그는 결심하고 말을 달리는중이였다.

수림은 원행을 힘겹게 다그치는 군사들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였다. 악을 쓰며 그곳을 벗어나면 강이며 진펄이 길을 막았다. 부담마들이 모로 자빠져 허우적거리고 군사들은 맥이 빠져 헉헉거리였다. 그럴 때마다 이영을 두툼히 씌운 큰 움집들에서 사람들이 엎어지듯이 달려나왔다. 짐승가죽을 걸친 남정들도 있고 베천으로 옷을 지어 입은 녀인들도 있었다. 녀인들의 치마고름을 붙들고 선 아이들은 빛나는 눈을 깜빡거리는것으로 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의문을 표시했다. 눈을 퀭히 뜨고 영문을 몰라하던 사람들은 출전하는 제 나라 군사들임을 알아차리자 바람을 일구며 달려가 질그릇들에 랭수며 음식을 내왔다.

원정대는 길을 다그쳤다.

꼬리가 보이지 않는 대오는 수백호가 넘는 마을을 꿰지르며 강물처럼 흘러갔다. 벌컥벌컥 문들이 열리며 사람들이 목을 쑥쑥 뽑는가 하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모여들었다.

체소한 로인 하나가 어딘가를 구멍이나 낼듯이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윽하여 주위에 대고 온화한 무슨 말 몇마디를 하였다. 목에는 호신부를 걸고 채좋은 수염과 유표한 의복에 기품도 준수한것으로 보아 마을의 좌상인듯싶었다.

금시에 사람들이 어깨성을 쌓으며 선두군사들의 앞을 막아나섰다. 물길에 동이 생긴듯 대오는 전진을 멈추고 일순 머리만 커졌다.

《이건 뭐야-》

거의 동시에 여러 장수들의 입에서 사나운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한데 뭉치여 굳어져버린듯 어깨성은 조금도 끄떡함이 없었다.

《우리도 이 나라의 백성이거늘 세자마마를 그저 지나보낼수 없소이다.》

해를 그려붙인 천신기를 알아보고 부루에게로 다가온 로인이 말고삐를 꼭 잡은채 사연을 아뢰였다. 거의 동시에 나무보습을 멘대로 밭들에 널려서 새김질을 하던 소들이 돌괭이에 맞아 쓰러지며 하늘을 향해 다리를 버둥거리였다.

《로인, 이게 무슨 일이요. 소들을 다 잡다니…》

흠뻑 놀란 부루가 눈을 치뜨며 큰소리를 질렀다. 고시(이때 농사를 주관해보던 신하)에게서 소를 길들이는 일이 얼마나 품먹는것인가를 줄곧 들어온 그였다. 이것은 부루를 놀래우는 또 하나의 변이였다. 지금은 농사일이자 소라고 고시가 자랑삼아 말하지 않았는가. …

불이 이글거리는 가마안으로 각을 뜬 소고기들이 들어갈 때에야 로인은 마치 이제사 즐거운 일이나 당한듯이 수염을 한가로이 내리쓸며 입을 벌렸다.

《적들을 치러 가는 제 나라 군사들을 훌렁 그저 보내면 우린 무슨 꼴이 되리까. … 일손인들 제대로 잡히리까. …》

부루는 그만에야 고개를 돌리며 아득히 먼 하늘가에 눈길을 던져버렸다. 뿌옇게 눈길이 흐려진다.

아, 기특한지고… 고마운 우리 백성들… 내 그대들의 진정을 여기서 아는구나…

하늘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눈물이 볼을 타고 걷잡을새없이 흘렀다.

섭섭해진 얼굴로 부루를 우러르던 그는 돌연 목에서 호신부를 벗겨들었다.

《세자마마, 이 령물은 자고로 우리 씨족의 보호인에게만 전하는것이오이다. 이것을 지니면 온갖 불행과 지어는 죽음까지도 감히 범접치 못하옵니다. 내가 백발이 된 오늘까지 눈버티고 살아오는것은 이를 넘겨줄 사람을 찾지 못해서였소이다. 지금 우리 족을 보호해주는 귀인을 만났으니 이런 다행이 없사옵니다. 성의로 알고 받아주옵소서.》

하늘에다 큰절을 한번 한 그는 바싹 마른손으로 호신부를 부루의 목에 걸어주었다. 아직도 따끈한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호신부가 몸에 닿자 겹쌓인 피로가 순간에 썰물처럼 밀려갔다. 뼈가 휘도록 무거운 짐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고맙소이다. 고맙소이다.》

부루는 목이 꽉 메여 이 말밖에 더 다른 말을 할수 없었다.

《오흐흥-》

고삐를 채운 밤빛말은 날개라도 돋친듯 땅을 차며 고산준령을 단숨에 넘었다. 검질기게 자기를 괴롭히던 부왕에 대한 원망은 왜서인지 봄눈녹듯 사라져 바이 찾을 길이 없었다. 그의 뒤를 벌떼처럼 박달군사들이 따르고있었다. 말을 타고 하늘에 오를듯 한 세자의 기상을 새로운 눈으로 우러르며 절로 신들이 난 군사들도 씽씽 걸음발을 다그쳤다.

그러나 그들모두의 기쁨은 고의 기쁨에 비할수 없었다. 그는 단군이 있을 수도성하늘가를 향해 얼굴을 들었다. 잠간이라도 단군에게 자신의 기쁜 마음을 아뢰고싶었다. 그러면 단군도 얼마나 흡족해하랴.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고 푸르렀다.


넓은 대궐안은 빈집처럼 조용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상을 치른 집마냥 썰렁하고 간혹 울음소리들도 새여나왔다. 내전에서는 궁인들이 볼세라 왕후가 소리없는 눈물을 흘리고 세자궁에선 세자비가 양푼만 한 질그릇에 심은 애어린 박달나무를 마주하고 주야로 세자가 무사하기만을 기원했다.

《…우리 목숨을 지켜주는 신령님께 비오이다. 저의 소원 들으시와 굽어 살펴주사이다. 힘든 싸움길 떠나가신 세자마마께서 머리털 한오리 상하지 않게 해주사이다. …》

신하들은 단군과 왕후의 비위를 어떻게 맞출지 몰라 등신들처럼 서성거리였다.

이게 모두 나로 하여 야기된 일이 아닌가…

대궐을 오락가락하는 단군의 심중은 바위처럼 무거웠다. 왕이기 전에 자식의 아버지인 자기였다. 약골의 자식을 사지판에 밀어넣은것이 단솥에 물붓기로 우둔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때늦은 후회감도 없지 않았다. 아비를 원망할 부루의 모습도 그려보았다. 든 정은 몰라도 난 정은 안다고 이 며칠새에 갑절이나 그리워지는 자식이였다.

단군은 이틀전에 받은 상보의 내용을 머리에 떠올렸다. 부루가 갑비고차의 코앞이라 할수 있는 바다기슭에 이르러 보내온것이였다. 자신이 거기에 가있기라도 하듯 단군은 상황이 방불히 안겨왔다.

…망망하고 검푸른 바다는 이후에 있게 될 큰 싸움을 벌써 알아차린듯 은근히 설레이고있었다. 파도가 끝모르게 거품을 밀어던지는 바다기슭의 백사장에서 원정군사들은 그뒤 솔산에서 굴러온 아름드리 소나무들의 허리를 뭉청 잘라서는 도끼로 배를 쭉쭉 타갠다. 그런 다음 다시 몇번 더 타개며는 선재가 된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모두들 미립이 트지 않아 땀을 철철 흘리며 뚝심만을 뽑을뿐이지만 그들속에 듬성듬성 박혀있는 낯선 장정들의 덕으로 일자리는 나고있었다. 그들은 여기 바다가마을사람들이였다. 큰 몸을 다람쥐처럼 놀려가는 그들의 일손에서는 불이 일듯 하였다.

군사들은 그 사연을 알고있었다. 얼마전 이곳에 도착한 군사들은 마을사람들의 가슴을 퍼렇게 멍들게 한 사연부터 먼저 들었다. 눈앞에 바라보이는 갑비고차에는 그들과 한씨족의 사람들이 살고있었다. 사나운 바다는 이들을 서로 갈라놓고있었지만 정만은 어쩔수 없었다. 바다는 오히려 인정이 두터워지도록 다리를 놓아준듯 했다. 희귀한 어물들이 바다를 통해 찾아오고 곡물이며 피륙, 귀물 따위들이 그득그득 실린 배들이 바다를 건너 섬으로 떠나갔다. 이를테면 뭍에서는 시집간 외동딸을 생각하는 마음이고 섬에서는 친정집을 애써 위하는 딸의 마음이였다. 오는 정 가는 정에 바다길이 빌새가 없었다. 그러던 여기 섬에 다시없을 불행이 찾아들었다.

털이 부시시한 웃몸을 드러내고 사타구니를 겨우 가린 알몸뚱이나 다름없는 침범자들이 까마귀떼처럼 달려든것이다.

웃음소리며 노래소리는 곡성으로 바뀌고 고깔모양의 검은 연기가 구름을 덮으며 타래쳐올랐다. 장정들은 방어하기 좋은 곳들을 찾아 몸을 숨겼다. 허나 당장은 뻘건 두주먹밖에 없는 그들이였다.

뭍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불속에서 활활 타번지는 갑비고차를 보는 뭍사람들의 가슴에도 재가루만이 남아있었다. …

단군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외우는 사람들의 하소연을 듣는듯 두눈을 감아버렸다.

간악한지고… 간악한지고…

그곳 백성들의 아픔이 그대로 뼈에 사무치게 느껴왔다. 이것은 또한 부루의 아픔이기도 하였다. 왕후의 곡성이나 세자비의 눈물과는 대비조차 안되는 엄청난 나라의 아픔이였다.

부루가 이를 보지 못하였다면 어찌할번 하였는고…

단군의 머리속에는 불타는 갑비고차와 이리떼같은 오랑캐만이 있을뿐이였다. 벌을 주어야 하였다. 나라의 벌을 세자가 알고 세자가 직접 주어야 하였다. 그래야 먼 후날에도 악의 무리들이 이 땅을 감히 엿볼수 없을것이였다. 부루는 아비의 이 마음을 꼭 알아주리라. 그는 자식을 믿고싶었다. 만약 자기의 뜻을 저버리면 세자도 그리고 친아들도 아니였다.


어느새 그의 주위에는 사뭇 긴장하고 초조한 표정을 한 측근관료들이 서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단군은 은근히 마음을 조이였다. 혹시나하는 생각에 단군은 웅가대신이 조심히 내미는것을 성급히 받아들었다. 패보도 아니고 첩보도 아닌 고가 자기에게 보낸 글이였다.

거기에는 가장 난문제이던 바다를 건느는 일이 풀리여 곧 싸움에 진입하려 한다는것과 함께 이런 글이 씌여있었다.

《…저희들의 힘으로는 원정군을 이끌고 직접 접전하려는 세자마마를 말릴수 없사오니 어지를 내려 그만두게 하여주옵소서. 간절한 청이옵니다. …》

속으로 단군은 다행한 숨을 내쉬였다. 처음에 그는 전장에서 무슨 불상사라도 생겼는가 하여 어지간히 놀랐었다. 그도 늙었다. 한생 손에서 창검을 놓을새없이 전장을 달린 그가 싸움판을 두고 걱정을 앞세우는것이다. 아마도 자식이 거기에 가있어 더할것이였다.

신하들은 벌써 서편의 내용을 알고있는듯 했다.

《갑비고차엔 세자마마가 건너가면 안되옵니다. 어서 어지를 내리옵소서.》

이번만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을듯 웅가는 큰 메같은 장대한 몸을 버티고 서서 단군에게 말하였다. 자기를 우러르는 신하들을 둘러보며 단군은 그만이 아닌 모두의 진심을 알았다. 신하들이 고마왔다. 언제나 자길 위해 속을 쓰는 이들, 이들을 위해서도 자기나 세자가 처신을 잘해야 하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짐은 그런 어지를 내릴수 없소. 나라법에 없는 어지를 세자는 받들지도 않을거요.》

근엄히 말한 단군은 서쪽하늘에 미더운 시선을 주었다.


여라문명씩은 잘 탈수 있는 목선들이 마련되자 선봉장을 비롯하여 장수들이 부루에게로 달려왔다. 출전명을 받기 위해서였다. 군막에는 다치면 터질것 같은 팽팽하고 무거운 긴장감이 드리웠다. 격랑을 헤치고 불속에 뛰여드는 어려운 전투가 장수들의 눈앞에서 기다리고있었다.

부루의 령에 따라 바다기슭에 《덩-》, 《덩-덩-덩-》 북소리가 울리면 군사들은 바다를 갈매기처럼 두려움없이 건너 섬을 향해 돌진할것이다. 그 결심이 벌써부터 가슴을 쑥 내밀고 선 장수들의 모습에 어려있었다. 청동으로 부어 빚은듯 한 장수들의 억센 기상을 바라보던 부루의 눈앞에 이번에는 아우성치는 갑비고차백성들의 참상이 안겨왔다. …

몸을 태우는 분노에 부루는 자기가 언제 출전령을 내렸는지조차 알수 없었다. 장수들이 크게 대답소리를 울리며 군막을 나설 때에야 그는 자기가 터뜨린 참을수 없는 분노의 호령중에 《출전하라-》는 말이 섞여있었음을 알았다.

고는 성왕을 다시 모신듯 세자를 우러렀다. 이제 그는 애숭이왕자가 아니였다. 군막이 쩡하게 울리도록 령을 내리는 이 나라의 왕이였다. 로신하의 눈가에는 자기만이 맛보는 기쁨의 이슬이 반짝였다.

갑비고차를 빙 둘러싸고 목을 조이듯 다가가던 원정군사들 한패가 와- 함성을 지르며 섬의 대안에 붙자 미친듯이 화살을 날리던 적진은 풍지박산이 되였다.

눈에 퍼런 불을 매단 군사들은 내지로 죽을둥살둥 내닫는 오랑캐의 잔등에 창을 쿡쿡 박아댔다.

수종군사들과 이 광경을 보아가는 부루의 마음도 군사들과 함께 달리고있었다. 찌르고 패는 백병전이 벌어졌을 때 부루도 더 이상 군막안에 몸을 두고있을수만 없어 밖에 나섰다. 손에는 부서뜨릴듯이 억세게 장검이 쥐여져있었다.

시종군사들은 죽기내기로 세자의 길을 막아나섰다.

《세자마마, 이러면 아니되옵니다. 옥체보중하옵소서.》

《아니다. 이 나라에 세자가 있음을 알려야 한다. 세상에 없을 고약한 놈들-》

부루는 험한 눈빛으로 전장을 쏘아보며 원쑤를 씹어라도 먹을듯 으드득 이를 갈았다. 바빠난 고가 어푸러지듯 그앞에 부복하였다.

《세자마마. 옥체에 오랑캐의 더러운 피를 묻힐수 없사옵니다.》

땅을 타이르듯 잔잔하나 울음기까지 섞인듯 한 그의 말소리에 부루도 일순 걸음을 주춤하였다.

무엇이?… 더러운 피!… 그것을 묻힐수 없다고…

부루는 고의 말을 한마디한마디 속으로 외워보다가 놀란듯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 그놈들의 속에 더러운 피가 꽉 차있길래 내 손으로 징벌해야 하오. 우리 백성을 욕보이고 나라지경을 어지럽힌 오랑캐무리들…

《신은 내 손에 창검을 쥐여주던 사람이 아니요. 어찌 한입으로 안팎이 다른 말을 하오. …》

고를 보는 부루의 눈에서는 칼날이 쏟아져나오는듯 하였다.

로신하는 세자의 결심을 굽힐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가 가는 길은 나라의 래일로 이어지는 길이였다.

세자마마, 고맙소이다. 고맙소이다. 늙은 신하의 평생소원이 풀렸사옵니다.

고는 눈앞이 흐려옴을 느끼며 부루의 뒤를 따라 씩씩한 걸음을 내짚었다. 젊은이같은 기운이 내보이는 그의 가슴속에는 자기를 바쳐 세자를 위하려는 바위같은 결심이 자리잡고있었다.

진이 깨진 적들은 눈을 까뒤집고 죽을 목에 든 미친개처럼 여기저기를 허둥거리며 헤쳐지기 시작했다.

손을 비비며 이를 갈던 섬사람들이 이제야말로 적들을 장작패듯 할 심산으로 팔을 걷고 나섰다. 앞뒤로 살길이 막혀버린 적들은 덫에 든 삵모양으로 마지막악을 썼다.

부루는 가슴노리를 검은 털로 쑥 덮은 장신의 오랑캐가 우리 군사와 싸우는것이 눈에 띄우자 그리로 성큼 말을 몰았다.

주인의 타번지는 마음을 알아서인지 굽을 안은 말은 부루의 귀가에서 바람소리가 앵앵 일도록 달렸다. 부루가 접전하는 곳에 거의 이르렀을무렵 심상치 않은 서슬을 감촉한 오랑캐놈이 몸을 독뱀처럼 홱 들며 말을 타고 달려드는 적수를 노려보았다. 가만있으면 자기 몸은 바가지깨지듯 박산이 나든가 아니면 마주 향한 군사의 칼에 모가지없는 귀신이 될 판이다.

이판저판 죽을 판이라 놈은 하늘에 죽는다고 기별을 하는지 《으흐흐흐…》 하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부루를 향해 악쓰며 힘껏 창을 던졌다.

시종군사 두엇이 골안이 울리도록 《앗-》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부루의 무술은 여직 자기의 가슴을 겨누고 날아드는 창을 피할 정도에 이르지 못하였다. 뾰족한 창끝이 그의 가슴에 맞구멍을 내려는 찰나 비호처럼 뒤를 쫓던 고가 마상에서 새처럼 가벼이 몸을 날리며 부루의 몸을 덮었다. 《퍽-》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일었다. 그 소리에 전장이 일순 정지된듯 하였다.

《고-》

부루는 잔등에 창을 꽂은채로 쓰러진 로신하를 미친듯이 부르며 두손으로 안아일으켰다. 한참만에야 신하는 자다가 일어나는 사람처럼 조용히 눈을 뜨고는 눈물을 머금은채로 자기를 내려다보는 세자를 향해 시름없는 미소를 지었다.

《세자마마… 무…사…하옵니까.》

가까스로 이어지는 고의 말에 부루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인지 피인지 모를 진득진득하고 축축한것이 부루의 볼을 타고 흘렀다.

《천행이옵니다. 호신부가 묘하옵니다.》

진담인지 롱담인지 모를 말을 가까스로 다시한 그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세자를 우러렀다. 다시 보지 못할 얼굴이니 영원히 가슴에 새겨두려는것이다. 피가 다 빠졌는지 이제는 혀가 생각대로 돌지 않았다. 고는 내심의 말을 한마디만 더해보려고 안깐힘을 쓰나 입안에서만 뱅뱅 돌뿐 새여나갈줄 몰랐다.

내가 왜 이럴가… 제길…

고는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속에서 제가 하려는 말을 되새겨보았다.

단군성왕님, 기뻐하소서. 나라의 장래는 굳건하옵니다. 그래서 불충불효한 신은 만시름을 잊고 편히 가옵니다.

입을 벌려보려고 하나 이미 기운이 진한 뒤였다.


승전한 군사들이 수도성에 돌아오는 날 단군은 백관을 거느리고 멀리 교외에까지 나가 그들을 맞이하였다.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승전기며 천신기는 장하게 펄럭이나 보고싶은 신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전장에서 숨을 거둔 사람이 나타날리 만무하다. 첩보와 함께 이미 고의 소식을 알고있는 단군이였다.

그의 눈길은 먼 서쪽하늘가를 더듬고있었다. 눈물이라고는 모르는 그의 눈에서 이슬이 빛났다.

작별의 따끈한 말도 해주지 못하고 떠나보냈는데 정녕 아주 갔단 말인가. 천신기는 돌아왔는데 그대는 어이하여 돌아오지 못하는가. 야속하오. 짐을 두고 어찌 그대만 훌렁 못 올 길 간단 말이요.

백인지 천인지 모를 심장의 말이 눈길에 실려 고가 누워있을 서쪽하늘가 갑비고차로 날았다. 목숨을 바쳐 치국의 초석을 마련한 신하의 모습을 가슴에 새기는듯 단군은 굳어진 몸으로 오래동안 서쪽하늘을 마주하였다.

선봉장은 단군에게 한장의 서신을 드렸다. 문안의 인사와 함께 갑비고차에 다시는 오랑캐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성쌓는 일까지 돌보고 환궁하겠다는 내용의 부루의 글이였다. 고의 뜻대로 나라와 창검을 가슴에 새긴 부루가 보고싶도록 대견했다.

녀석두… 그래도 웬간하면 왔다가 다시 갈노릇이지…

가슴이 뭉클해왔다. 잃었던 귀한 보배덩이를 다시 찾은듯 한 기쁨이 온몸을 휩쌌다.

《형이 보고싶으냐?》

단군은 자기곁에 나란히 서있는 부소와 부우에게 번갈아 눈을 주며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자기 마음과 쌍둥이같은 말이 그들에게서도 흘러나왔다. 단군은 여부가 있겠냐는듯 고개를 두어번 끄덕거리고.

《그럴테지… 나도 보고싶다. 하지만 하는 일이 중해서 올줄을 모르는구나. … 아마 큰일을 하는가보다.》 하고 무슨 일을 의논이나 하는것처럼 말하였다.

동그란 두 왕자의 눈들이 아버지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떠날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약속이나 한듯이 옹골찬 말들을 내쏘았다.

《저희들이 가보면 아니되옵니까?》

《잘 생각했다. 내가 하기 어려웠던 말을 너희들이…》

단군은 대견한듯 두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쪽하늘에 노을이 타듯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 노을을 맞받아 두 왕자가 가고있었다.


후세력사에서는 강화도의 전등산에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성을 삼랑성(三郞城)이라고 전한다. 고조선의 름름한 세 사나이-즉 세 왕자가 쌓은 성이라는 의미다. 세 사나이-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리 일 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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