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16 회


지워지지 않는 흔적


구월산동쪽 화장골로 들어가는 길바닥의 펀펀한 바위우에는 《단군발자국》으로 전해지는 자취가 하나 있다.

5천년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그 자취는 그날의 사연을 전해주며 오고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은연중 걸음을 멈추게 한다.

아마도 대대로 후손들에게 그 무엇인가를 경계하려는듯 그처럼 본모습을 변치 않고있는지…

왕검은 준절히 일렀다.

《소밀, 너는 이제 곧 아사달(구월산)로 가서 어떻게 하나 그곳 궁홀족과 손을 잡아야겠다. 이 거사에 대해서는 여럿의 진지한 의논이 한두번만 있은것이 아니니 오늘 구태여 긴말을 하지 않겠다. 장차 이 땅의 모든 종족들을 합쳐 한집안으로 만들어야 할 우리 박달족의 먼 앞길에서 첫걸음인줄 잊지 말고 오직 인덕본심으로 매사를 깊이 헤아려 처신하라.》

《족장님의 뜻을 반드시 그대로 받들겠소이다.》

소밀은 아사달을 향해 떠났다. 그의 오른팔인 장수 소루가 함께 갔다. 말을 탄 군사 삼백이 위풍당당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아사달의 웅장한 모습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소밀은 점점 흥분되였다.

박달족장 왕검은 온 겨레의 뜻에 따라 동서남북 천리만리에 널려 사는 모든 대소종족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큰 집안으로 만들 웅지를 품고 젊은 장수 소밀을 비롯한 원로들과 여러차례 방도를 의논해왔다.

종족들이 지금처럼 저마끔 울타리를 치고 따로 살다보니 리해관계의 불일치는 물론 어느 한사람의 실수에 의해서조차 싸움이 자주 벌어지군 하였다.

더구나 먼 북방오랑캐들의 침습을 종족 하나하나의 힘으로써는 당해낼수가 없어 드물지 않게 참혹한 희생을 낼 때가 없지 않았다. 거듭되는 이런 사태는 애오라지 화목과 번성만을 바라는 이 땅의 겨레들을 위협하였고 하루빨리 물화를 크게 일으켜 문명하게 살려는 그들의 념원을 절망에 빠뜨렸다.

손가락 다섯이 제가닥으로 놀아서는 아무 일도 못 치나 한주먹으로 뭉칠 때 큰 힘을 내는 리치와 마찬가지로 여러 종족들이 한집안이 되고보면 서로의 싸움도 없을것이고 북방오랑캐도 두렵지 않을것이였다.

요컨대 수만겨레들이 힘을 합칠 때에만 나라를 세울수 있고 후손만대 문명하고 흥성하는 세월을 맞이할수가 있는것이다. 까닭에 종족통합은 이 넓은 땅 모든 겨레들의 장래와 잇닿은 최대중대사가 아닐수 없는것이였다.

(…이 대업의 첫 문은 내가 열어야 한단 말이지!)

소밀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처럼 큰일을 젊은 자기에게 맡겨준 왕검의 믿음이 고맙기가 그지없었고 피 한방울까지 깡그리 다 바쳐서라도 그 산같은 믿음에 반드시 보답하리라 굳게 마음다졌다.

어느덧 아사달의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때는 시월이라 하늘은 류달리 푸른데 온통 단풍으로 울긋불긋 단장을 한 아사달이 그밑에 장엄하게 우뚝 솟아있었다.

산비탈, 골짜기, 절벽… 어디라 할것없이 새빨갛게 불타는 단풍나무들, 어쩔수없이 그 고운 빛갈에 물이 들었는지 누렇고 불그스름한 변색의 바다를 이룬 참나무, 느티나무숲… 황금빛바탕우에 우뚝 솟은 바위들은 은탑, 은벽같았고 이것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 소나무들의 짙푸른 모양은 청보석, 진주에나 비길만 한것이였다.

온갖 산새들의 지저귐소리는 그윽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내물은 마치도 수정이런듯 알른알른하였다.

생신화려한 풍치에 눈은 금시 천리라도 내다볼듯 밝아지고 마음은 사뭇 하늘로 날듯…

아사달, 금은보석으로 이루어진 보물산, 숨이 막힐 지경으로 탐이 나는 보배산이였다.

《아, 우리 왕검님께서 어릴적부터 여기에 자주 오셨던 뜻을 이제는 알만 하구나. 이런 절승에서 그처럼 직심스레 도를 닦았으니 뜻이 높고 덕이 클수밖에!》

마침 같은 생각을 하고있던차여서 소밀의 입에서도 《아무렴!》하는 대답이 얼른 튀여나왔다.

(내 이제 이곳 사람들을 한집안으로 만든 다음 꼭 여기에 와서 살리라!)

욕망은 점점 커졌다.

아사달의 가장 높은 사황봉으로부터 두개의 큰 산줄기가 뻗어있는데 산줄기들이 갈라지는 사북골안 막바지에 궁홀족 본촌이 넓게 자리잡고있었다.

소밀은 멀찌감치에 군사들을 멈춰세운 다음 소루를 시켜 궁홀족의 우두머리인 미루를 불러내왔다.

소밀이 먼저 점잖게 운을 뗐다.

《나는 박달장수 소밀이요. 우리 왕검님의 분부를 받들어 그대들과 손을 잡고 한집안이 되길 바래 이렇게 찾아왔소. 그러니 우리 서로 진지하게 의논을…》

미루가 날카롭게 그의 말을 가로챘다.

《뭐, 손을 잡고 한집안?!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저리 많은 군사를 끌고 왔소? 낯간지러운 소리 걷어치우!》

《?!》

뜻밖의 물음에 소밀은 당황했다.

좋은 뜻에서 서로 손을 잡고 한집안이 되자면 이를 의논하는데 군사가 필요없는것이다.

무어라고 대답한다?!

사실에 있어서 자신은 부루나를 떠나기 전에 벌써 좋은 말로는 합의가 이루어지기 힘들것이라고 여긴데로부터 힘의 시위로 상대를 누를 타산밑에 많은 군사들을 달고 오지 않았던가.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것처럼 미루가 다궂듯 한수 더 떴다.

《말로 안되면 친다, 이 소리겠다?》

《…》

급기야 속이 켕긴 소밀은 궁지에 빠지기 시작한 자신을 알아차리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슬그머니 악이 받친 그로서는 이젠 내놓고 위협으로 나갈수밖에 없었다.

《우리 박달사람들은 무슨 일에서나 빈손으로 돌아서는 법이 없소!》

《그 손이 피투성이가 되기 전에는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게요.》

미루가 사납게 부르짖고는 홱 돌아서 가버리자 칼을 틀어잡으며 소루가 왈칵 성을 냈다.

《저걸 그저!》

《가만!》

피!

소밀은 흠칫했다.

《무슨 일에서나 피를 흘려 뜻을 이루려 해서는 안된다.》고 하던 왕검의 간곡한 당부가 귀전에 울려왔던것이다.

왕검은 선대족장이였던 아버지 환웅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다스리는데서 권력보다 덕을 많이 앞세웠다. 힘으로만 다스리는것은 악한자, 천한자의 행실이라고 왕검이 그토록 경멸하는것을 잘 알기에 다 그를 진심으로 받들었으며 지어 칼날밑에도 굽어들지 않던 적수들조차 그의 덕망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기도 하였던것이다.

그러니 저 록록치 않은 궁홀족을 싸워서 눌러놓는다면 왕검은 그것을 승리로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대의를 거슬린 나쁜짓으로 크게 징벌하려 할것이였다.

박달겨레앞에 멀리 뻗은 구만리 먼길에서 그 첫걸음을 망쳤다고 펄펄 뛰는 왕검의 분노한 모습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듯 하여 소밀은 등골이 다 오싹해졌다.

소루의 격한 목소리가 그의 괴로운 생각을 중단시켰다.

《우리가 저 미루한테서 말 몇마디밖에 들은것이 없지만 그것이면 그네들의 속마음을 넉넉히 가늠할수가 있소. 죽으면 죽었지 굽어들지 않겠다는 소린데, 까짓거 들이치면 어떻소? 빈손으로야 어떻게 족장님을 뵈옵겠소?》

《그렇게 덤비지만 말고 다른 방도를 생각해보게.》

《생각해보나마나지. 저 미루의 독품은 소리를 듣고도 그러우?》

《그렇더라도…》

매사를 인덕의 본의밑에 깊이 헤아려 처신하라던 왕검의 분부를 잊어서는 안되였다.

징조가 처음부터 불길하다. 빈손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상 소루의 말대로 치는수밖에 없겠는가. 치면 피가 흐르고 피를 본 사람은 독해진다. 독을 품은 사람은 그가 비록 집안에 들어온다해도 우리속에 갇힌 이리마냥 마음은 항상 이를 갈고있을것이다.

우리네 왕검님은 결코 이러한 한집안을 바라지 않는다.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 오늘날 여기서 피가 흐르면 이곳 사람들의 원한을 살뿐아니라 동서남북 여러 종족들의 반감도 크게 일으키게 될것이다. 그러면 우리 박달족을 그네들은 원쑤대하듯 할것인즉 하다면 종족통합의 큰뜻을 이루지 못할것이 아닌가?!

어떻게 하면 싸움이 없이 궁홀족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따르게 만들겠는가?…

부하들과 함께 이틀동안이나 거듭 론의를 벌렸으나 이렇다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모대기던 소밀은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야 한가지 궁여지책이나마 얻을수 있었다.

(씨원치는 않지만 별수가 없으니 해보자.)

정밤중이였다.

박달군사 열대여섯이 소루의 지휘하에 궁홀족군사들이 파수를 서는 산릉선을 감쪽같이 넘어섰다. 도적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본촌에 이르러 벼락같이 달려들어 변두리의 두집을 덮친 이들은 굳잠에 들었던 사람들에게 자갈을 물려가지고 릉선 파수들사이로 살며시 빠져나오는데 성공하였다.

날이 밝았다. 그제야 비로소 두집의 식구들이 지난밤사이 박달군사들 손에 몽땅 붙잡혀간줄을 알게 된 궁홀족사람들은 와글와글 끓었다. 격노한 그들은 창과 칼을 틀어잡고 박달군사들이 진을 친 벌판으로 물밀듯이 쓸어나왔다. 기세는 험악했다.

두편사이가 시시각각으로 좁아져 무서운 싸움이 터질 아슬아슬한 순간이였다.

소밀이 몇걸음 맞받아나가며 앞뒤산이 쩌렁쩌렁 메아리를 일으키도록 고함을 질렀다.

《너희들이 덤벼들면 내 손에 있는 너희 사람들의 목숨이 당장에 끊어질줄 알라!》

번뜩이는 칼을 휘두르며 맨 앞장에서 성난 호랑이마냥 달려오던 미루가 이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말뚝박히듯 우뚝 서버렸다. 그러더니 황급히 돌아서서 두팔을 쩍 벌리고 뒤따르던 제편의 앞을 막았다.

《다들 섰거라. 우리 사람들이 위태롭다!》

산비탈의 돌사태마냥 내달리다가 급작스레 멈춰선 궁홀족사람들속에서 이를 부드득 갈며 부르짖는 노성이 터져나왔다.

《야, 이 더러운 놈들아! 사내라면 칼로 결판을 낼게지 도적고양이같이 살살 기여들어 사람을 도적질해? 여우같은 놈들. 퉤!》

《알고보니 네놈들이란게 잠든 사람이나 홀쳐갈줄 아는 시라소니들이로구나. 그 주제에 우릴 뭐 어째보겠다구, 흥!》

《군사들을 끌고 와서 위세를 보여도 끄떡없으니까 인질사냥을 해? 똑똑히 들어라. 인질 몇이 아니라 몽땅 다 잡아가도 결코 우릴 손에 넣지 못한다, 못해!》

《우리 사람들 머리칼 한오리라도 건드리는 날엔 네놈들을 모조리 궁홀귀신을 만들어놓을테다!》

《…》

격분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며 궁홀족사람들은 당장 덮칠 기세로 펄펄 뛰였다.

소밀은 실망했다. 인질을 손에 넣고있으면 저편에서 부득불 숙어들줄 알았는데 도리여 그것이 붙는 불에 키질을 한셈이 되지 않았는가.

엄엄한 군사들의 위세로 주눅이 들게 만들려던노릇은 도리여 상대편의 앙심만 북돋아주었고 인질이라는 미끼를 쓰면 낚시를 물줄 알았는데 낚시를 물고 끌려올 대신 치를 떨고있으니 참으로 긁어 부스럼이 되고말았다.

소밀은 자기의 서뿌른 타산에 의해 생긴 패배를 인정하자니 가슴이 알알했다.

(저 사람들이 결코 빈말을 하지는 않을것이다. 이거야말로 자승자박이 아닌가?)

저편에서는 인질들을 죽인다는 으름장에 놀라 일단 칼을 내리우기는 하였지만 제 사람들을 찾지 못하는 날에는 틀림없이 칼을 들고 덤벼들것이다.

어떻게 한다? 인질들을 그냥 놓아줘? 아니, 박달장수가 그런 망신스런짓을 하다니…

두편이 장바 댓기장사이를 두고 창끝을 마주 겨눈채 두 장수의 눈치만 지켜보고있었다.

일촉즉발의 팽팽한 공기속에서 소밀은 온몸에 진땀이 내배도록 머리를 분주히 쥐여짜보았으나 좀처럼 신통한 궁리가 트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둥처럼 무한정 버티고 서있지도 못할노릇이였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인질들가운데서 머리 허연 늙은이 하나가 목이 터질듯 고함을 질러댔다.

《형제들! 우리 몇사람을 살리자고 머리를 숙여서는 결코 안되네!》

순간 곁에 있던 소루의 떡메같은 주먹이 그의 가슴을 들이쳤다.

《어!》

급소를 맞았는지 늙은이는 외마디비명과 함께 혀를 가로물고 거꾸러졌다.

이 광경을 직접 본 궁홀족사람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만큼 높아졌다.

칼창을 틀어잡은 그들은 사품치는 강물마냥 와르르 달려나왔다. 사생결단의 기세는 무서웠다. 뜻밖에 빚어진 사태앞에서 소밀은 당황했다.

칼부림? 물리칠 자신은 있다. 그러나 흐르는 피는… 아니다!

소밀의 호령소리가 천둥마냥 울려퍼졌다.

《물러서라!》

박달군사들은 인질들을 그 자리에 놓아둔채 급히 자리를 떴다.

궁홀족사람들은 붙들렸던 저희 사람들을 데리고 총총히 돌아갔다.

소밀은 호되게 소루를 꾸짖었다.

《넌 어째서 시키지도 않는 그따위짓을 하느냐? 그렇게 하면 우리가 더더욱 궁지에 빠진다는걸 몰라서 그랬느냐?》

소루가 고개를 푹 떨구고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대꾸하였다.

《아, 그거야 말을 못하게 하려던노릇이 그만, 그가 할 말을 다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간 무슨 변이 일어날지 모르겠기에…》

《…》

사실 소밀은 소루가 버르집어놓은 일로 해서 궁지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참말로 무슨 다른 큰 변이 났을것은 뻔한 일이였다. 그러니 소루의 행실이 박달군사들과 소밀자신에게는 다행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했으나 군률과 자존심은 이런 속마음을 드러내놓는것을 허용치 않는것이다. 하여 본의아닌 으름장을 놓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제 또다시 제멋대로 손발을 놀렸다간 무사치 못할줄 알라구!》

발잔등의 불은 털어버렸지만 거사를 놓고볼 때 이것은 분명 랑패였고 망신이였다.

(칼을 휘두를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씨원하게 와닥닥 해치우련만…)

칼의 유혹이 끈질길수록 소밀은 자신에게 반발하여 완강히 머리를 저었다.

(안돼! 그러면 어떻게?)

목숨을 내던져 될 일이라면 주저없이 선뜻 내대여 왕검족장의 믿음에 보답하련만 목숨을 바쳐서도 믿음을 지킬수 없으니 정말 괴로왔다.

서로의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을 소중히 여길줄 아는 바로 거기에 사람이 짐승과 다른 차이가 있거늘,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모대기던 그에게 드디여 《궁리》가 트이였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소루를 데리고 진을 나선 소밀은 조용히 산릉선을 타고넘어 궁홀족의 본촌이 등지고있는 산봉우리뒤로 돌아가보았다. 봉우리중간에서부터 꼭대기까지 흙이라고는 한줌도 없고 늙은 소나무만 몇대 드문드문 서있는 비탈진 바위바닥이였다.

조바심이 가득하던 소밀의 얼굴에 금시 웃음이 어렸다.

《형님, 어찌된 일이요?》

소루가 의아스레 쳐다보며 물었다.

《일이 뜻대로 돼간다!》

《?!》

《이 봉우리뒤쪽은 나무가 없어서 숨지도 못하고 산불이 일어도 미치지 못할것인즉…》

《숨기는 누가 숨고 산불은 웬 산불이요?》

소밀은 누가 들을세라 경계하는듯 그의 곁에 바투 다가서서 몇마디 소곤거렸다. 그러자 소루가 당장에 얼굴이 환해지더니 무릎을 탁 치면서 《아, 그럼 그럴테지. 우리 형님이 뉘라고! 다 보는데가 있으니 족장님께서 이런 중대사를 맡기셨지!》 하고 뛸듯이 좋아하였다.

진중으로 되돌아온 소밀은 령을 내렸다.

《이제 곧 일거에 저기 마을앞 골바닥을 가로지른 궁홀진을 들이치되 한사람도 죽이거나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저네들이 진을 버리고 저 뒤산으로 도망쳐 올라붙도록 사납게 몰아대기만 할것이다!》

박달군사들이 질풍같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내달았다. 격투가 벌어졌다. 궁홀족은 박달군사들을 당해낼수가 없었다. 창칼을 휘두르며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어쩌지 못해 한걸음두걸음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그럴수록 소밀의 부하들은 더욱 기세를 올려 펄펄 뛰며 칼질을 해댔다. 그러나 어느 칼끝에도 피는 묻지 않았다.

본촌마을을 지나 뒤산밑에까지 뒤걸음친 궁홀족들은 미루가 무어라고 고함을 지르자 모두 부리나케 산으로 올라갔다.

산중턱에 널려있는 밭들은 가을이 끝난지라 번번하였다. 도망치는 사람들은 이 번번한 밭을 지나 뾰족한 봉우리의 수림속으로 속속 잦아들었다. 그들은 나무와 바위에 의지하여 어지러이 활을 쏘았다. 때를 같이하여 박달군사 한절반이 소루의 뒤를 따라 산릉선을 재빨리 타고넘어 궁홀족들이 몸을 숨긴 산봉우리뒤를 에워쌌다.

산줄기우에 삐죽 솟은 봉우리는 어느새 박달군사들의 포위속에 들고말았다.

비탈밭들을 지나 산허리까지 밀고 올라온 박달군사들이 소밀의 령에 따라 숲변두리를 빙 에두르며 불을 지르자 봉우리중턱을 가로질러 띠를 이룬 불길은 시시각각 우로 치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연기에 휩싸인 궁홀족가운데서 아우성이 터졌다.

나무 한대 없이 바위투성이인 번대머리봉마루에 뿔피리소리가 길게 울리였다. 그에 따라 숱한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들었다. 그들앞에서 미루가 무어라고 몇마디 웨쳐대자 그들모두는 바싹바싹 다가드는 불길을 등지고 봉마루뒤로 사라져버렸다.

한동안이 지나자 불타는 봉우리 남쪽릉선을 타고넘으며 궁홀족사람들이 본촌을 향해 꼬리를 물고 내려왔다. 전부 하나같이 빈손이였다. 병장기들을 놓아버린것이였다. 그뒤에서는 소루가 이끄는 박달군사들이 따르고있었다. 소루의 부하들이 봉우리뒤면을 에워싸고있다가 불에 쫓겨 봉우리를 넘어오는 궁홀족들의 앞을 가로막았던것이다.

소밀의 타산이 에누리없이 들어맞은것이였다.

불을 놓는 앞쪽군사들과 함께 있던 소밀은 충실한 부하인 소루의 일행을 내려다보면서 마음속으로 찬탄을 거듭하였다.

(내 이번에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뜻을 이루었구나!)

왕검족장의 믿음에 보답했다는 긍지와 함께 대업의 첫 문을 열어제낀 자부심으로 하여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기의 두손을 뜨겁게 잡고 《큰일을 했군. 내가 믿은 보람이 있어!》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을 왕검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하늘을 뒤흔드는듯 한 겨레의 환호는 금시라도 귀가에 쟁쟁히 울려오는것만 같았다.

소루가 미루와 함께 다가왔다.

소밀은 미루에게 량해를 구하였다.

《그대들을 놀래워 미안하게 되였소. 내가 이런 수를 쓰지 않고서는 그대들과 한집안이 될수 없겠기에 부득불 행한노릇이니…》

미루가 차겁게 말허리를 꺾었다.

《그만두오! 우리 사람들은 생사를 결단하자고 결심했었소. 불속에서 한줌의 재가 될지언정 남의 손아귀에 쥐여서는 살수가 없어서 말이요. 하지만 나에게는 한피줄을 타고난 겨레들의 목숨을 건져야 할 하늘이 준 본분이 있기에 칼을 놓으라고 령을 내리지 않을수가 없었던것이요.》

《나는 그대가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고 보았기에 궁홀족사람들을 산으로 올리몰았던거요. 이제는 일이 다 바로잡혔으니 마음을 가라앉히오.》

《마음을 가라앉히라구? 어림없소! 그대들은 비록 우리 땅을 차지하였지만 우리들의 마음까지는 결코 차지하지 못하오! 그래도 한집안이라고 할수 있겠소?》

《?!》

불티가 다른 산발로 번져가지 못하도록 박달군사들은 불잡이에 몽땅 달라붙었다.

궁홀사람들도 한결같이 떨쳐나 힘을 합쳤다. 서로 맞서 으르렁거리던 사람들같지 않게 한데 어울려 불과 싸웠다.

소밀은 그들이 원한을 풀고 안정하도록 갖가지로 왼심을 쓰는 한편 그간의 상황을 낱낱이 고하라는 분부를 주어 소루를 왕검에게 떠나보냈다. 소란스럽고 분주하던 하루도 다 가고 어느덧 밤이 왔다.

고향을 떠난지 며칠만에 처음으로 비로소 두다리를 쭉 펴고 깊은 잠에 들었던 소밀은 누군가 잡아흔드는 바람에 벌떡 일어났다.

《왕검님께서 오셨소이다.》

《뭐, 뭐라구?!》

흠칫 놀란 소밀은 밖으로 뛰여나갔다. 어느 사이에 날은 다 밝았다. 궁홀족의 본촌앞의 넓은 골어구로 말을 탄 왕검이 마침 들어서고있었다. 말도 사람도 마치 물에서 방금 건져내기라도 한듯 땀에 푹 젖어있었다.

소밀은 자기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저분이 정말 왕검님이시란 말인가?… 무엇때문에 밤새껏 말을 달려서 예까지?)

그는 까닭모를 섬찍한 불안속에 왕검을 향하여 달려갔다.

골안이 꽉 차게 모여선 궁홀족사람들앞에 이른 왕검은 말에서 내려 《내 그대들을 바로 볼수 없구려. 우리 사람들이 그대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으니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알수가 없소. …》 하며 정중히 사죄를 하였다.

이 말에 소밀은 자기의 귀를 의심하게 되였다.

(큰 피해라니? 한사람도 상하지 않았는데?)

꿈속에서 깨여나지 못한듯 영문을 알수가 없었다. 앞에 다가서는 그를 알아본 순간 왕검의 부릅뜬 눈에서 푸른 번개가 번쩍이더니 천둥같은 노성이 터져나왔다.

《여봐라. 소밀, 그대는 무슨 일을 저질렀는고?》

노성과 함께 한발로 바위길바닥을 《꽝!》 하고 내리굴렀다. 순간 먼지가 풀썩 솟구쳐오르더니 귀청을 터치는듯 한 벽력소리가 온 아사달을 즈렁즈렁 울렸다. 격분한 나머지 어찌나 힘껏 발을 굴렀던지 그 발에 부딪친 바위가 움푹 패워나갔다. 그바람에 넋이 한절반 날아난 소밀은 무너지듯 그앞에 털썩 꿇어앉고말았다.

소밀의 나머지 넋을 마저 깡그리 날려버릴듯 천둥소리는 잇달아 골안을 들었다놓았다.

《소밀, 그대는 나의 믿음을 거역하여 무엇으로도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 서로 좋은 뜻에서 의합이 돼야 그게 한집안이지 칼부림을 써서 억지다짐으로 제 집울타리안에 끌어넣으면 그게 어찌 한집안일수 있겠느냐? 그대가 예서 한짓은 두집을 하나로 합치기는커녕 한집안도 두쪽으로 갈라놓는 죄행이니라. 박달사람의 존엄에 흙칠을 하는 인질을 잡다못해 아무 죄도 없는 궁홀족사람들의 목숨을 불로써 희롱한 그대의 죄 무엇으로 씻겠는고?》

소밀도 미련한 사람이 아닌지라 자기의 잘못을 인차 깨달을수 있었다.

《용서하시오이다. 이 못난것이 왕검족장님의 뜻을 깊이 새기지 못하여 이렇듯 큰죄를 지었으니 너그러이 용서하시오이다.》

《뭐 너그러운 용서를? 어떻게? 제가 지닌 덕이 없는탓에 모자라는 궁냥을 산을 태워 불길로 메꾸려구? 그래 이 산이 그대 하나의 궁색이나 면하는데 써먹는 그대의 집 섶단인줄 아는가? 이 땅의 모든 산, 모든 들, 모든 물은 다 사람들모두의 재산이니라. 여기에 흠집을 내는자는 제 부모의 품에 칼끝을 대는것이나 같아!》

피를 끓이듯 절절한 책망의 한마디한마디가 소밀의 가슴속을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사람의 몸에 상처를 입혀서 피를 흘리게 하여야만 죄가 아니다.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죄 그보다 못지 않게 큰죄가 아니랴. 더구나 이 땅은 우리 겨레모두가 함께 살아야 할 터전, 애지중지 손이 닳도록 아껴야 할 산천에 불질을 했으니… 아, 나는 죽어야 해. 아니, 내 하나 죽는것으로 그 값이 치러지지는 않아. 아, 이 미련한것이 무슨 천벌맞을짓을…

《이 땅의 아름다운 산천과 겨레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니 어찌 용서를 바라겠소이까.》

《옳다. 그대가 죄를 씻는 길은 목숨을 내놓는것밖에 없다.》

무시무시한 사형선고와도 같은 목메인 대답이 비통하게 울리였다. 죄없이 피해를 입은자에 대한 존중은 가해자에 대한 처벌로 담보된다. 이것은 피해자는 물론 정직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유일한 방도이다.

궁홀족사람들과 자기네 족장을 맞으러 달려나왔던 박달군사들은 두사람을 지켜보면서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왕검의 준절한 태도에 감동을 금치 못해 그의 말 한마디한마디를 되새겨보는지도 몰랐다.

모두 기색이 엄숙하였다.

갑자기 터졌던 우뢰소리가 사라진 뒤 정적이 깃들듯 왕검의 노성이 멎자 소나무가지에서 떨어지는 솔잎소리조차 들릴듯 골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궁홀족사람들은 이날 아침 족장의 중임을 그만두려는 미루를 설복하려고 모였었다.

지난밤 원로들의 모임에서 미루가 《자기의 존엄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내가 무슨 족장이겠느냐.》고 하였으나 궁홀족사람들은 이를 절대로 받아들일수가 없었던것이다.

이 일, 저 일이 다 자못 심중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였다.

이윽하여 적막은 그것을 가져왔던 왕검자신이 깨뜨렸다.

궁홀족사람들앞에 고개를 숙이고 나선 왕검은 무거운 어조로 거듭 사죄를 하였다.

《내가 아래사람들을 잘못 가르친탓에 그대들이 큰 피해를 입었소. 화근인즉 내게 있으니 벌은 내가 받겠소.》

두두룩한 바위우에 왼손을 척 올려놓은 단군은 오른손으로 단검을 쭉 뽑아 왼손을 내리찔렀다.

《앗!》

곁에 있던 미루가 날쌔게 그의 칼든 손을 붙잡았으나 이미 왕검의 왼손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있었다.

사색이 된 미루가 왕검의 피흐르는 왼손을 꽉 움켜쥐고 뜨거운 진정을 토로하였다.

《족장님, 오늘 이렇게 왕검족장님을 만나뵙고보니 정말로 만백성이 우러르며 따를 어진분이시오이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 깊은 인덕과 높은 성품을 오늘 이렇게 제눈으로 똑똑히 보았소이다. 이 어찌 하늘이 우리 궁홀족을 위해 마련한 기회가 아니겠소이까. 우리도 왕검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겠소이다. 궁홀족 우리들도 박달족과 같은 한겨레일진대 어찌 우리의 마음이 같지 않겠소이까. 박달족과 우리는 하나이오이다. 하나!》

미루의 말에 호응하는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골안이 들끓었다. 아사달이 들끓었다.


리 빈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이전페지   다음페지

도서련재
제1회 제2회 제3회 제4회 제5회 제6회 제7회 제8회 제9회 제10회 제11회 제12회 제13회 제14회 제15회 제16회 제17회 제18회 제19회 제20회 제21회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