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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회


부루나를 넘어


하늘이 류달리 높푸른 가을날이였다. 그리 높지 않은 산릉선으로 잡관목숲을 헤치며 기골이 장대하고 이목구비가 준수하게 생긴 젊은이 하나가 서두르지 않고 스적스적 발길을 옮기고있는데 그의 왼팔목에 낀 가죽토시우에는 자그마한 청동방울을 단 보라매 한마리가 얌전하니 올라앉아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살피고있었다. 박달족장 단군의 수하에 있는 우고의 아들 아람이였다. 어깨에 걸멘 구럭속에 장끼와 까투리가 각각 한마리씩 담겨 걷는데 따라 흔들리고있다.

아람은 지금 당초에 목적한 꿩사냥도 잊은듯 어제 있은 제사때 일을 골똘히 되새겨보고있었다.

족장 단군이 주관하여 한해에 봄, 가을에 걸쳐 두번씩 하늘에 드리는 큰 제사였다. 봄에는 그해 풍년이 들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렸고 가을에는 풍년이 들게 해준데 대해 감사를 드리는 제사였다.

아닌게 아니라 올가을에는 벼와 수수, 콩 할것없이 골고루 잘되였다. 그래서 박달족사람들은 풍년가을을 끝낸 기쁨에 넘쳐서 흐뭇한 마음으로 제를 지냈던것이다.

제가 끝났고 사람들모두가 즐겁게 한담을 하며 나무그릇이나 질그릇들에 음식을 담아 나눌 때 우고가 아들을 옆에 불렀다. 여느때없이 은근한 아버지의 음성에 아람은 무슨 곡진한 얘기를 하려나부다 하고 내심 마음을 가다듬었다.

《얘야, 추수를 끝냈으니 넌 래일부터 또 사냥을 시작하겠지?》

사실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솟음치는 젊음을 주체키 어려운듯 짐승을 쫓아 말을 달리고 창을 날리는 아람이였다. 며칠만 사냥을 건늬여도 오금이 쑤셔나 참기 힘들어 하였다.

《사냥도 좋다마는 내 오늘 당부할 말이 있다. 야장일은 언제 다 배우려느냐. 나도 이제는 늙었다. 근력이 해마다 못해가는데 네가 나만큼 일을 배워내려면 아직도 멀지 않았느냐.

그게 그저 쟁인바치의 일이 아니라 우리 족장님을 받들어 박달족의 위세를 돋구고 살림살이를 꾸리는데서 우리의 큰 자랑거리가 아니냐.》

그의 말대로 그가 만들어내는 청동제무기들과 쟁기들은 종족의 큰 자랑거리였다. 그 쟁기들로 하여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번창해갔고 그 무기들로 하여 어느 흉맹한 종족도 감히 그들의 지경을 넘보지 못했던것이다. 우고가 만든 청동낚시에는 고기가 저절로 물린다고들 했다. 그가 만든 방울은 그 소리가 꾀꼬리우는 소리같다고들 했다.

특히 그가 만든 청동단검은 그 날카로운 날과 우아한 모양으로 멀리에까지 소문이 자자하였다.

언젠가 례물로 보낸 단검 한쌍을 받은 먼곳의 종족장은 천하의 보물처럼 여기며 준마 여러필을 답례로 보낸 일까지 있었다.

그러니만큼 이웃의 족장들은 어떻게 하나 그 기술을 전수하든가, 그 청동단검을 손에 넣지 못해 늘 애쓰고있었다.

아람은 늙은 아버지의 당부가 가슴에 크게 미쳐와 이제는 아버지의 비법을 배우는데 전심하겠노라고 공손히 다짐드렸던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말없이 야장간으로 나가려는 아람에게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저 매가 여러날 무료해하니 오늘은 날도 좋은데 하루만 가지고 나가보려무나.》 하며 마당가 조롱속의 매를 가리키는데 그 또한 자식의 심정을 헤아리는 아비의 자애깊은 마음이 느껴져 두말없이 매를 가지고 나왔던것이다.

산등성이에 다 올랐는지 갑자기 눈앞이 확 틔여왔다. 왼편으로 일찌기 단군이 무술을 닦을 때 명마를 타고 날아넘다싶이 하였다고 전하는 고비산이 솟아있고 오른편으로 너르개의 맑은 흐름이 굽이치고있었다. 몇만년을 그렇게 흘러왔는지 앞으로 몇만년을 더 흐를지 모를 용용한 흐름, 이편 기슭에는 고기잡이배 몇척이 점점이 있고 건너편에는 버들족들이 사는 움집마을과 자그마한 밭뙈기들이 보였다.

(참, 어느새 여기까지 왔을가. 강변에 와서 매사냥을 하겠다니.)

아람은 스스로도 어이없어 발길을 돌려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기슭에 거의 내려섰을 때였다. 갑자기 가둑나무숲에서 장끼 한마리가 화닥닥 날아오르는것이였다.

공교롭게도 고리가 제대로 되여있지 않았는지 요동을 치며 매가 저절로 손에서 벗어나는 순간 아람은 《아뿔사》 하고 무릎을 쳤다. 꿩이 벌써 강심쪽으로 날개짓을 하며 날아가고있었던것이다.

아람은 더 생각할새없이 기슭으로 장달음을 놓았다. 마침 강가에 자그마한 퉁궁이배를 손질하는 낚시군이 있었다. 그는 강건너편을 가리키며 급한 소리를 지르고나서 강복판으로 배를 밀어내고는 뛰여올라 꿩이 간 곳을 어림하여 그쪽으로 힘껏 노를 저었다.

얼마나 애지중지해온 매인가. 사냥군들이 말이나 사냥개, 매에 대한 애착이란 여간이 아니다. 그러나 유독 매란 놈만은 사냥군들의 심정에 아랑곳없이 꿩을 타고 앉아 실컷 뜯어먹고나서 배만 부르면 유유히 하늘로 날아올라 제 갈데로 가버리는것이다. 작년에도 이웃집총각이 매가 살얼음진 강을 건너가는 바람에 에돌아 여울을 건너갔다가 놓쳐버리고말았던것이다.

자그마한 퉁궁이배는 아람의 급한 마음에 비해 너무도 더디게 나가는것 같았다. 배가 건너편에 닿기도 전에 뛰여내린 아람은 덤불속을 뒤지며 꿩을, 아니 매를 찾기 시작하였다.

분명 이 근방 어디엔가 틀어박힌것 같았는데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어림해보니 자기가 강을 건너오는 사이에 매가 꿩을 포식한 후 이미 날아가버린것 같았다. 아람은 어이없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없이 푸른 하늘에 구름 한점 없다. 경험많은 사냥군인 내가 어찌다 이런 실수를 한단 말인가.

이때 어디선가 억새풀 설레이는 소리에 섞여 방울소리가 들리는것 같았다. 아니, 참말 그것은 아버지가 맵시있게 만들어 달아준 그 매방울소리였다.

그는 부리나케 소리나는쪽으로 가다가 웬 처녀와 마주쳤다.

처녀는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이 그를 바라보며 먼저 말했다.

《저, 혹시 저 매가…》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과연 자기의 매가 나무가지에 발목이 매여 푸들쩍거리고있는데 몇걸음옆에 초죽음된 장끼가 던져져있었다.

《이 어찌된 일이요?》

《조가을을 나왔다보니 매가 꿩을 쫏는지 오랜데도 주인이 나타나질 않더군요. 늦게 오면 매를 놓칠것 같아서… 우리 아버지도 매사냥을 좋아했거든요.》

처녀는 청하지도 않은 일을 한것이 점직한듯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아람이 거듭 인사하며 매를 잡으려다보니 처녀의 손등과 손목에 매발톱에 할퀸 자리인듯 빨간 피방울이 점점이 맺혀있었다. 서툰 솜씨에 매를 붙잡다가 그리된 모양이였다.

아람이 미안한 마음에 상처를 처매주려들자 그는 황황히 손을 감추더니 잡은 꿩을 가지고 가라는 청도 마다하고 곁에 있던 조이삭단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아람은 처녀의 뒤모습을 이윽토록 바라보며 그 자리에 한동안이나 서있었다.

다음날부터 아람은 야장간으로 나가 일을 거들면서 아버지의 솜씨와 비결을 익히기에 더욱 힘썼다.

《자, 이건 화살촉을 만들 청동이란 말이다. 활촉이란 한번 시위를 떠나면 그만 아니냐. 그러니 굳이 비싼 주석을 많이 넣어 만들 필요가 없지. 그저 날카로와서 단살에 푹 꿰뚫게 되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이 창날이나 단검을 만들 때는 다르다.》

우고는 얼추 모양이 잡힌 창날 한개를 들어보이며 아람에게 차근차근 일렀다.

《석을 넣을 때 이만큼한 몫을 두는게 제일 적당하다. 많이 넣으면 굳기는 하지만 자칫하면 찌르고 베일 때 깨여질수 있으니까.》

아버지는 땅우에 비률을 그려보이며 자상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치레거리들을 부을 때는 매끈하고 색감이 잘 나타나는것이 기본이니 석을 많이 넣고 또 거기에다 연을 약간 더 두어야 한다. 래일부터는 이 일을 네가 주관하여 해보아라.》

처음 배워주는것도 아닌데 래일 당장 어데 떠나려는 사람처럼 별스레 다심하게 군다고 여기면서 아람은 아버지도 이젠 늙었나부다 생각하였다.

그럴수록 아버지의 기대를 어기지 말아야 하겠다는 결심이 새로와졌다. 우고는 이미 부어놓은 단검 하나를 골라서 마무리작업을 시작하였다. 아람은 늘 보아오는 일이지만 아버지의 손끝에서 다듬어져 점차 완성되여가는 칼모양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끝부분이 뾰족하고 뿌리쪽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넓어졌다가 갑자기 밋밋한 도드리를 이룬 독특하고 우아한 곡선을 드러낸 칼날, 그아래 나팔모양의 검자루에 섬세하고 정교하게 돋쳐지는 무늬들, 이것이 세상에 널리 소문나기 시작하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박달족의 청동단검이였다. 물론 그것이 수천년을 내려가며 후세에 비파형단검이라 불리워지고 단군나라의 대표적기물처럼 되리라고는 아람은 물론 아무도 아직은 알리 없었다.

밖에서 떠들썩 찾는 소리가 나더니 건장한 군사 하나가 들어서며 공손히 인사를 하고나서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고어른, 족장님께서 긴히 쓸데가 있다고 하시면서 단검이 다 된것이 있으면 세자루만 가져오라고 했소이다.》

《거기 앉아서 좀 쉬면서 기다리게나.》

군사는 나무토막 하나를 끄당겨 깔고앉아 우고의 일손을 지켜보면서 그 육중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연방 환성을 올렸다.

《참, 이래서 린근종족들이 이걸 그토록 탐내는게 아닙니까. 우고어른의 손은 정말 보배손이웨다!》

《너무 그러지 말게. 사람이 아무 일을 하든 제 소임에 정통해야 하는걸세.》

《그런게 아니오이다. 우고어른앞이래서가 아니라 사실말이지 그 뭐랄가, 어른이 만드는 기물들은 하나같이 그 생김새부터가 우리 박달족사람들의 기상과 마음을 그대로 담아내는것 같다고 모두들 말한다니까요.》

우고는 군사가 힘들게 갑자르며 말하건말건 묵묵히 하던 일만 계속하는것이였다.

갑자기 동네복판이 소란해졌다. 여기저기 움집이며 초막들의 어설픈 문짝이 여닫기고 애녀석들이 서로 부르고 찾는 소리들이 들렸다. 언제부터인가 길들여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된 크고작은 강아지들이 이리 짖고 저리 내닫고 하였다.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였다.

마을앞을 내다보던 아람은 낯선 행렬을 보게 되였다. 밤색의 키큰 수말우에 큰 활을 메고 허리에 비수 두자루를 지르고 색다른 차림을 한 무사 하나가 장히 거드름스럽게 올라앉았고 그뒤로 여러명의 군사가 따르고있었다.

아람이 처음 맞다든 사람에게 웬 행차인가고 물었더니 강건너 버들족장이 보낸 사신일행인데 단군족장님을 만나러 왔다고 일러주는것이였다.

아람은 행렬이 눈앞에서 사라진 다음에도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고개를 기웃거렸다. 말을 타고 가던 장수가 어딘가 낯이 익었던것이다.

(저자를 어디서 봤던가?)

한동안 기억을 더듬던 아람은 저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옳아! 바로 그자가 틀림없어!)

작년 봄 어느날이였다. 아람은 그날 저녁 파수보는 군사들을 데리고 순찰을 하다가 마구간에 도적떼가 들었다는 기별을 받고 달려갔었다. 족장을 비롯한 수하장수들이 타는 준마들만도 여러필이 있는 마구간이였다. 아람이 당도했을 때는 적들이 번을 서는 군사들을 찔러눕히고 막 말들을 끌어내는 참이였다.

도적무리들을 사로잡고보니 강건너 버들족장이 보낸 패당이였다.

단군족장은 포로들을 관례에 따라 노예로 삼은것이 아니라 집을 주어 자유롭게 살게 해주었고 그들은 족장의 덕을 칭송하며 쇠돌을 캐는 일을 열심히 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혼잡통에 우두머리만을 놓치게 되였으니 그가 바로 버들족장의 수하장수인 막새, 저자였다. 아람은 그때 홰불밑에 드러났던 그의 얼굴이 이제야 떠올랐던것이다.

(저 뻔뻔스러운자가 대낮에 이곳에 버젓이 나타나다니…)

아람은 족장이 있는 곳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족장의 처소에는 여느때보다 경비가 더 삼엄하였고 마당가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웅성거리고있었다. 족장의 남다른 총애를 받는 아람은 다른 때라면 무랍없이 출입하였으나 오늘만은 선듯 그렇게 되지 않았다. 명색이 이웃족장의 사절과 만나는 자리라 누가 보나 무엄하달밖에 없을것이였다. 그러나 밖에 그대로 서있자니 그 흉물스러운자가 무슨 계교를 가지고 온것 같아 마음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한편 안에서는 족장 단군이 근엄하게 상좌에 앉아 사절들을 례를 갖추어 대접하여 한창 이야기가 시작되고있었다.

버들족장의 장수 막새가 그 두꺼운 얼굴가죽에 가까스로 공손한 웃음을 피워올리며 주어섬기고있었다.

《우리 버들족사람들은 언제나 부지런히 일하여 올해에도 풍작을 이루고 먹고사는데 부러운것 없이 지내고있사옵니다.

우리 족장님은 언제나 이웃족장과 화목하게 지낼것을 바라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있소이다.》

막새는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눈길을 들어 단군의 기색을 훔쳐보았다. 그러나 단군은 주의깊게 그의 얼굴을 바라볼뿐 낯빛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 이웃종족들에게 행악질이 일쑤이고 기회만 있으면 로략질을 일삼는 그들에 대한 질책도, 그 파렴치함에 대한 조소의 기색도 없이 마치 어서 용건이나 꺼내놓으라는 투였다. 막새는 저으기 안심한듯 계속 입을 놀렸다.

《우리 족장님은 이번에 저더러 박달족장님에게 한가지 청을 드리라고 했소이다. 다름이 아니라 박달족이 갖고있는 진귀한 청동기물이 있지 않소이까. 그걸 만드는 으뜸가는 쟁인바치 한사람을 우리에게 주시면 그대신 건장한 노예 100명을 드리겠다고 했나이다.》

막새는 이만하면 어떠냐는듯 단군을 치떠보았다. 그와 대등한 자리에 마주앉았던 박달족 장수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어이없다는 태도였다.

단군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래, 우리에게서 탐나는것이 쟁인바치 한사람밖에는 없다는거겠소?》

《그렇소이다. 그리고 그 노예 백명으로 말하면 우리가 저 남쪽에 사는 족과의 싸움에서 사로잡은것들이온데 그중에는 별의별 재주를 가진자들이 다 있소이다.》

그와 마주앉았던 박달족 수하장수가 더 참지 못하겠다는듯 질그릇 깨지는듯 한 소리로 말허리를 자르며 단군을 향하여 아뢰였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족장님, 그렇게 만든 창이나 칼이 우리 잔등을 찌르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한단 말이오이까. 이때까지의 행패를 봐도 그렇고… 절대로 보내면 안되는줄 아오이다.》

그러자 바빠난 막새가 제꺽 뒤를 달았다.

《꼭 그렇게만 생각하실거야 없지요.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서로 오해도 많은가본데. 우리도 청동기물을 많이 만들어 다른 족들과 교역을 널리 하자는것이오이다. 여기서야 이제는 훌륭한 쟁인바치들이 여럿 있을텐데.》

《가만, 여러 말 길게 할것 없소. 가서 이렇게 이르시오. 100명이 아니라 그 열곱을 준대도 쟁인들은 줄수 없다고 말이요. 우리 박달족사람들이 무슨 노새나 천필도 아니니까.》

이야기는 끝났다는듯이 족장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할수없이 문밖으로 나오는 막새를 험한 기상으로 흘겨보며 아람은 족장에게로 급히 다가가 소곤거렸다.

단군의 낯빛이 구겨지더니 그의 입에서 역증기있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 어찌란 말이냐. 그때 잡도리했어야지 저렇게 제발로 나타난걸 나더러 잡아가두란 말이냐. 두말말고 곱게 보내주어라.》

뒤로 물러난 아람은 주먹을 부르쥐고 사라지는 막새의 일행을 노려보았다.

요즘 와서 아람에게는 꿈같은 세월이 흘렀다. 오늘이 벌써 다섯번째든지 여섯번째든지…

매 한마리가 맺어준 인연이였다. 처녀의 이름은 노을이라고 불렀다. 처음 만난 이후 아람은 노을의 자태가 자나깨나 눈앞에 밟혀와 애가 달았었다.

때없이 강가에 나가 거닐다가 건너편 기슭에 나와있는 처녀의 비슷한 모습을 띄여보고 무작정 헤여 건너간것이 두번째였다.

아람과 노을은 유난히 버드나무가 많은 강언덕에 앉아 젊음을 속삭이고있었다. 말라가는 풀대가 설렁거리는 풀밭에 아람이 팔베개를 하고 벌렁 드러누우며 중얼거렸다.

《노을이라. 해빛이 있어 노을이 곱거던. 안 그래?》

이제는 둘사이가 이런 희떠운 수작까지 서슴없이 붙이게쯤 되였다.

《그럼 해빛은 누구란 말이야, 자기란 말야?》

노을이 입술을 빼물며 빈정거렸다.

《글쎄 나야 뭐. 그러나 우리 단군족장님은 정말 대단한분이야. 그분의 훈계와 가르침이 있어 박달족사람들이 순박하고 화목하게 살아간단 말이야. 족장님은 늘 우리들에게 진리를 통달하고 공을 닦으면 죽어서도 영원한 복락을 얻을수 있다고 가르치고계시지. 사람은 성실하고 신의가 있어야 하며 사랑과 구제, 은혜를 갚을줄 알아야 한다. …》

노을은 그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새기려는듯 그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있다가 저도 몰래 한마디 하였다.

《우리도 그런 족장님을 모시고 살았으면.》

아직 본적은 없지만 노을의 생각엔 버들족장에 대면 까마귀와 두루미보다도 더 차이가 있을것 같았다. 게다가 자기는 박달족에게 빈번히 피해를 끼치는 버들족장의 치하에 있는 사람이다. 생각할수록 둘사이의 앞날이 불안하고 근심만 앞선다.

《가만, 내가 뭘 가져왔는데.》

부스스 일어나 앉은 아람의 두툼한 손바닥이 펼쳐지자 해빛에 눈부시게 빛나는 청동팔찌 한개가 나타났다. 가장자리에 기묘한 무늬가 새겨진 팔찌였다.

《아이, 어쩌면.》

노을이 손벽을 마주치며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버지가 만드신거나요?》

《아니, 이건 아버지에게서 배운대로 내가 한번 만들어본거야.》

처녀는 팔찌를 들여다보며 탄사를 련발했다.

갑자기 사나운 말울음소리와 함께 한쌍의 젊은이들 눈앞에 여러쌍의 말다리가 나타났다.

소스라쳐 튕겨 일어난 아람의 눈앞에 여러 무사들을 거느린 바로 막새, 그가 있었다.

《호, 이건 낯선 젊은이다. 이봐, 강건너서 오지 않았어?》

(무례하게, 네가 나를 몰라보다니.)

충동적으로 허리춤에 손이 가던 아람은 여기가 버들족의 고장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런게 아니예요, 작은아버지.》

처녀가 막새의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무엇이 아니라는것인지 생각해볼새도 없이 아람의 귀전에는 작은아버지라는 노을의 말이 우뢰처럼 들렸다. 가슴속에 오기가 치밀어올랐다.

《여보, 당신이 우리 땅을 밟은건 한두번이요? 게다가…》

무엇을 향한 분노때문인지 말문이 막혔다.

막새는 여유작작한 태도로 두 젊은이를 훑어보았다.

《그러니 피장파장이로군. 젊은이, 자네들 일이 잘되길 바라네.》

어깨너머로 던지는 비수같은 말. 아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강가로 휘청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귀전에 노을의 애절한 음성이 울렸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뜻도 없이 중얼거리며 아람은 배를 띄웠다. 경황없이 노를 젓는 그의 머리속을 온통 채우는것은 무엇인가 소중한것을 유린당한 기분이였다.

노을이라고 친척이 없으란 법은 없지만 하필 그게 막새 저자일줄이야.

돌아오는 아람의 머리속에는 이제 자기들의 앞길에 무언가 검은구름이 드리울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떠나지 않았다.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잘 들어맞는 모양이다. 일은 끝내 터지고야말았다. 며칠후 밤늦게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우고가 없어졌던것이다. 이런 경우 없어졌다는 말이 적중한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저녁녘까지는 일터에 있었던 우고가 이튿날 아침이 되도록 집에도 나타나지 않았던것이다.

이 일로 온 마을이 발끈 뒤집혔다. 족장 단군이 직접 아람의 집을 돌아보고나서 군사를 풀어 산속과 강가 할것없이 종적을 찾게 하였다. 아무 실마리도 없었다.

아람은 아버지의 실종이 확인되는 첫 순간 벌써 막새의 흉한 얼굴이 떠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게다가 강녘에 사는 어떤 사람이 한밤중 강가로 나가는 길에서 여럿의 인기척을 들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모든 사람들은 대뜸 강건너 버들족의 작간으로 지목하였다. 얼마전에 바로 우고 같은 사람을 달라고 왔다가 거절당한 일도 있지 않는가.

어떤 사람들은 격분하여 길길이 뛰면서 당장 군사를 일으켜 버늘족을 치고 우고를 찾아와야 한다고 들고일어났다.

그러나 족장은 소동을 중지시켰다.

아람은 족장을 찾아갔다. 아람은 단군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저 혼자 강을 건너가 아버지를 찾아오겠다는 청을 드렸다.

어딘가 자책 비슷하게 들리는 그의 말이 끝나자 단군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타일렀다.

《아무도 버들족의 처녀를 사랑했다구 자넬 나무라지 않아.

그리구 그때문에 자네 아버지가 일을 당한건 아니구. 더구나 아버지가 확실히 그곳으로 갔는지도 아직은 모르지 않는가. 그건 나한테 맡기구 기다리라구.》

아람이 혈기때문에 일을 그르칠가 념려한 단군은 그에게는 다른 일을 맡기고 그날로 날랜 군사 몇을 변복시켜 버들족의 지경으로 들여보냈다.

과연 이틀후에 들어온 소식인즉 버들족장의 지시로 우고를 랍치하여 삼엄한 경비속에 가두어놓고 자기들을 위하여 무기를 만들것을 강박하고있다는것이였다.

박달족장은 곧 수하장수들을 모여놓고 우고를 구해낼 방도와 계책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우고가 버들족을 위해 병기를 만들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으나 늙은 우고가 무지한 버들족장의 박해를 견디여내겠는가가 근심되였다. 또 포악한 버들족우두머리들이 군사를 늘이고 새 병기들을 갖추지 못해 안달이 난 속심도 뚜렷한 이상 수수방관할수 없었던것이다.

백성들의 엉성한 움집과는 판이하게 버들족장의 화려한 장막안은 위세를 돋구느라고 범가죽과 번쩍거리는 쇠붙이들로 치장되여있었다. 거기에만도 얼마나 많은 노예들의 피눈물이 배여있겠는가를 누구나 한눈에 알수 있었다.

버들족장은 좁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고심하는중이였다.

우고를 몰래 랍치해오고 시치미를 딱 뗀다면 단군이 설마 쳐들어오기까지야 하랴 하는 배심도 있었다.

그리고 목숨으로 위협하고 재물로 달래서 우고가 저들을 위해 그 위력한 검과 창, 활촉들을 만들게 할 자신도 있었다. 그것만 가지면 무서울것이 없을것 같았다. 여러해동안의 싸움에서 돌멩이나 몽둥이를 쥔 무리들이 번쩍거리는 칼과 창앞에서 어떻게 맥없이 죽고 사로잡히는가를 뼈저리게 겪은 족장이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우고는 요지부동이라고 한다. 수많은 가축과 노예를 주마고 약속해도 들은척 안 하고 꺼꾸로 매달고 몽둥이찜질까지 했는데도 끄떡도 않는다는것이다. 족장은 골치가 아팠다. 자기 머리로써는 아무런 지혜도 더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막새가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있었다.

《족장님, 큰일났습니다. 큰일났어요.》

《뭐라고? 우고가 달아났는가?》

《달아난게 아니라 팔을, 아니 자기 손목을 잘랐습니다.》

《그래 죽었는가?》

죽지는 않았다고 했다. 파수를 서는 군사가 잠시 방심한 사이 그가 들고있던 도끼로 오른손목을 쳤는데 왼손으로 쳐서인지 빗맞아 피를 많이 흘렸을뿐 목숨엔 지장이 없을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막새는 우고가 죽을지언정 네놈들을 위해서 창칼을 만들지 않는다는걸 똑바로 전하라더라는 말도 했다.

《그러게 내가 달아나지 못하게 단단히 지키라고 하지 않았는가?》

《달아나지야 못했잖습니까?》

《이 자식아, 무슨 말대답이야. 그리고 박달족놈들이 건너옴직한 목에 군사를 더 내보냈는가?》

족장이 잡아먹을듯이 으르렁거리자 막새는 시르죽은 시늉을 했다.

이때 막새와 버금가는 장수 하나가 또 달려들어왔다.

《족장님, 그 늙은 쟁인바치를 빼돌리려는자를 잡았습니다.》

《뭐라구? 박달족놈들인가?》

《아니올시다. 노을이라구 이 마을에 사는 계집애올시다. 그년도 단단히 가두어놓았습니다.》

그는 막새의 눈치를 살피며 주어섬겼다. 막새는 먼산보기를 했다.

《다른자들의 동향은 어떤가?》

원래 민심따위엔 관심이 없던 족장이였다. 그런데 어쩐지 불안하였던것이다.

《말이 아닙니다. 파수군들가운데도 그 늙은걸 동정하는자들이 많아 지키는데 애를 먹는데 집집엔 별의별 해괴한 말을 다 돌리는자도 있습니다.》

그것은 들을수록 괴이한 이야기였다. 뒤산꼭대기에 (그 산은 령험한 바위가 있다고 해서 쩍하면 제를 올리는 장소였다.) 큰 박달나무가 있는데 거기서 커다란 버들가지가 돋아났다는 소문이였다. 그것이 장차 버들족이 박달족의 치하로 들어가리라는 징조를 나타내는것이라는 풍문이 돈다는것이다. 그리고 박달족은 장차 떠오르는 해와 같고 버들족은 기우는 달과 같다는 소문까지 겹쳤다는것이였다.

《그래 네 눈으로 가보았는가?》

《가보았는데 누가 벌써 찍어버렸는지 나무그루터기 몇개만 보고 다른건 찾지 못했습니다.》

《알겠다. 다들 나가라.》

버들족장은 머리를 싸쥐고 우황든 소처럼 끙끙거렸다.

이게 무슨 소린가. 박달나무에 버들가지가 돋다니? 문제는 그런 해괴한 소문을 만들어낸자에게 있는것이 아니라 그런 예언을 누구나 돌리고 민심이 흉흉해졌다는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박달족장을 공경하고 박달족을 동경한다는 눈치를 모르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이렇게까지 되였는가. 하늘이 이제는 나의 운을 거두어가려는가.

어디선가 아우성소리,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부하 몇이 나타났다.

《족장님, 박달족이 룡을 타고 강을 건너왔습니다.》

《룡을 타고 오다니, 오면 말을 타고 오거나 배를 타고 오겠지. 네놈이 낮잠을 자다가 헛것을 본게 분명하다.》

《정말입니다. 시꺼먼 룡이 강을 건느는데 룡머리에 단군족장이 말을 타고있더랍니다.》

겁에 질린 졸개들 눈에 긴 행렬이 착각을 불러일으켰겠지만 어쨌든 박달족군사가 몰려오는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형세는 급하다. 우고를 인질삼아 끌고 일단 피해야 하는가. 아니면 우선 맞받아나가 싸워야 하는가.

《빨리 내 말을 끌어오라.》

버들족장은 칼을 쥐고 마당으로 내달았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마당가에 나서자 자기 군사들은 벌써 어디로 줄행랑놓았는지 보이지 않고 자욱히 떠오르는 먼지타래속에 사방을 에워싸고 달려들어오는 박달족의 말발굽소리가 가까와지고있었다.

버들족장은 나왔던 문으로 도로 들어갔다,

박달족군사들의 앞장에서 말을 달려온 아람은 선참으로 버들족장의 처소에 뛰여들었다.

버들족장은 호랑이가죽우에 피를 쏟으며 죽어넘어져있었다. 아무래도 끝장이라는것을 알자 자결한것이 분명했다.

마을가운데 빈터에 박달족군사들이 모였다. 아람은 아버지를 부축하여 단군앞으로 나아갔다. 족장은 말에서 내려 우고의 고생을 위로하였다.

아버지에게서 노을의 이야기를 들은 아람은 그를 사방으로 찾아다녔으나 갇힌데서 분명 풀려났다는데 어디로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깨가 처져서 돌아온 젊은이를 보는 단군족장의 심중에는 복잡한 감회가 엇갈렸다.

이처럼 강이나 산줄기를 지경으로 크고작은 무리들이 언제까지 다투며 살아가야 하는가. 말도 통하고 풍습이나 체취도 낯설지 않은 사람들끼리가 아닌가.

아버지 환웅의 생전의 가르침이 머리를 쳤다.

(너는 장차 백성들에게 크나큰 리익을 주기 위해 인간살이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면서 다스림과 은혜를 베풀거라…)

단군은 여기저기에 몰켜서서 불안스레 기웃거리는 버들족사람들을 불러 모이게 하였다. 다시 말우에 오른 그는 큰 목청으로 웨쳤다.

《다들 듣거라. 사람살이의 기본은 모든 사람들에게 리익이 고루 돌아가도록 하는것이고 서로 사랑하며 혜택을 주고 도우는것이다.

오늘부터는 버들족이니, 박달족이니 하며 서로 반목하고 싸우는 일이 일체 없어야 할것이다. …》

백성들과 군사들에게 자기의 심중을 터쳐놓을수록 단군은 자기의 평생을 바쳐 모든 종족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강토를 일으켜세울 웅건한 결심이 북받쳐올랐다.

그의 눈앞에 남북으로 아득한 광활한 땅이 안겨왔다.


길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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