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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다물은 한모금만 맛보아도

 

 

어린시절에 나는 신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상하기 좋아하였다.

듣고 또 들어도 왜서인지 싫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무한대한 힘을 가지고 천하를 훨훨 날아다니는 신선들의 모습이 방불하게 떠올라 두눈을 감고 환상속에 빠지군 하였다.

빈부의 차이가 없고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나라, 누구나 화목하여 친형제처럼 살고있는 세상, 사랑과 존경만이 오고가는 꽃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세계, 부러운것이 없고 선행이 지배하며 즐거움만이 넘치는 무릉도원…

상상해볼수록 그런 세계가 끝없이 부러웠고 그런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더욱 부러웠다.

내가 성장하던 나날에도 가끔 이런 공상은 뇌리에서 살아나 동심에 잠기군 하였다.

그러면서 생각하였다. 그런 세상, 그런 세계는 언제 가면 펼쳐질가 하고.

그런데 실지 그런 리상향이 펼쳐지는 곳이 있으니 그곳은 다름아닌 내 조국이였다.

지중해개발은행 리사장이며 이딸리아종합투자그룹 리사장인 쟝까를로 엘리아 발로리선생은 《태양은 영원히 빛난다》라는 자기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세계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1602년에 우리 이딸리아의 작가 깜빠넬라가 창작한 공상소설 <태양의 도시>에 대하여 잘 알것이다.

누구나 다같이 일하고 다같이 잘사는 리상향에 대한 그 시기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소설은 1516년에 영국의 모어가 쓴 <유토피어>에 이어 당대 사회의 인기를 모았다.

<태양의 도시>가 발표되여 400여년, 공상적인 <유토피어>가 나온 때로부터는 근 500년세월이 흐르도록 인간이 동경해온 리상향, 그 리상향을 인류는 수세기가 지난 오늘 현실로 목격하고있다.

주체의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나는 조국체류의 나날에 그 실상을 수없이 보고 들었다.

그 모든것을 다 이야기할수는 없다.

바다물이 짜다는것을 알려면 한모금만으로도 충분한것이기때문이다. 그리고 저울은 작지만 천만근을 달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오늘 서방의 그릇된 선전으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화국에 대하여 옳은 인식을 가지고있지 못하다. 이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공화국에 대하여 잘 알고있지 못하고있다.

알고있는것보다 모르고있는것이 더 많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릇된 인식은 모르는것보다 나을수 없으며 모르는것은 알아야 하고 진실앞에서는 언제나 성실해야 한다.

 

 

녀성기업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뽈레옹과 그의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높이가 49. 4m, 너비가 44. 8m인 빠리개선문(에뜨왈개선문 또는 나뽈레옹개선문이라고도 한다.)에 대하여 독자들은 잘 알고있을것이다.

네 면에 문이 있으며 문안에는 나뽈레옹을 따라 침략, 원정한 장군들의 이름(386명)이 새겨져있고 문의 상단에 6개의 큰 전투장면이 부각되여있는 개선문을 말이다.

그 개선문은 1806년 나뽈레옹(1769-1821)이 집권하고있던 시기에 건설을 시작하였으나 나뽈레옹의 실각과 담당설계자의 사망 등으로 중단되였다가 30년이 흐른 1836년에 이르러서야 완공되였다.

평양의 아름다운 모란봉기슭에는 이 프랑스의 빠리개선문보다 건축미학적으로나 담고있는 뜻으로 보나 비교할수 없이 훌륭한 개선문이 웅장하게 자리잡고있다. 김일성주석님께서 혁명활동을 시작하신 첫 시기부터 눈보라만리, 혈전만리를 헤치고 넘어 조국해방의 새봄을 안고 개선하신 1945년까지의 빛나는 투쟁업적을 천세만세 길이 전하기 위하여 조국인민들이 일떠세운 대기념비적건축물이였다.

해설원의 말을 들으며 주석님께서 헤쳐오신 항일의 불바다만리, 혈전만리에 의해 조국해방이라는 력사적위업이 비로소 성취되였다는것을 더 잘 알게 되였다.

그런데 우리 인민은 조국에 개선하시는 주석님께 솔대문밖에 지어올리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그옆에는 김일성경기장, 개선영화관, 서평양백화점, 개선청년공원을 비롯한 현대적인 공공건물들과 문화봉사시설들 그리고 근로자들의 살림집들이 모란봉의 아름다운 자연풍치와 조화를 이루고있었다.

특히 김일성경기장앞에 주석님께서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환영군중대회에서 력사적인 개선연설을 하시는 불멸의 화폭을 형상한 대형기념벽화가 있었는데 그것을 보니 력사의 그날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하며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고 열렬히 호소하시던 젊으신 주석님의 격앙된 음성이 쟁쟁히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개선문참관을 마쳤을 때 안내선생은 그옆에 자리잡고있는 《평양안경상점》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그리 크지 않은 2층건물로 나를 안내하였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그는 조국에서 기업을 운영하고있는 사람을 만나보고싶다고 하지 않았는가고 반문하였다.

그런 의향을 비친적이 있었다. 조국의 기업경영방법과 관리경험에 대하여 알고싶었던것이다.

내가 녀성이여서 그는 녀성지배인을 선택하였는지.

그의 이름은 송성희, 그의 아버지도 기업활동을 하던 송대관선생이라고 한다.

송대관선생은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장군님, 김정숙녀사와 연고관계가 깊은 기업가, 조국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진 기업가라고 한다.

억대의 자산을 쌓아올려서가 아니라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현명한 령도와 따뜻한 손길에 의해 조국과 민족을 아는 애국자로, 개인기업가로부터 사회주의경제지도일군으로 운명전환을 하였기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크게 소문날만 하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송성희지배인은 체격은 그리 크지 않았는데 두터운 안경을 끼고있었다. 나를 친절하게 맞이하고나서 기업과 관련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날 내가 큰 감명을 받은것은 기업활동과 관련한 그의 경험보다도 공화국에서 실시하고있는 후대교육사업중시의 내용들이였다.

그를 찾은 목적과는 거리가 좀 있는것이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다행스럽기도 하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생의 마지막시기에까지도 잊을수 없다고 하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펼치였다.

해방직후 건당, 건국, 건군의 력사적위업을 수행하시는 그토록 분망하신 속에서도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연필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돌리시였다.

그런데 그 작은 연필에 주목을 돌린 한 기업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송성희지배인의 아버지 송대관선생이였다.

무엇이 그를 돈벌이가 좋은 많은 기업들에 앞서 연필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는가.

《돈이 보이더구나.》

이것이 후날 이에 대하여 딸이 물었을 때 아버지 송대관선생이 웃으며 한 말이였다고 한다.

돈이 보였다고 한다. 연필에서 돈이 내다보였다고!

나에게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였다.

돈을 내다보지 못하는 기업가란 없다.

돈을 내다볼줄 모르는 사람은 기업을 운영할 능력이 없는것이다.

송대관선생은 해방된 조선에서는 분명 앞으로 많은 학교들이 생기고 수많은 어린이들이 글을 배우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일제는 조선땅을 강점하고있으면서 조선인민을 영원한 노예로 만들려고 연필공장 하나 지어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수많은 문맹자를 산생시켰는데 조선인민 거의다 문맹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나의 아버지도 그 수난자의 한사람이였다. 그래서 나를 기를 쓰고 학교에 보내여 공부를 시키는것으로서 연필 한자루 쥐여보지 못한 자신의 한을 풀려고 한것이 아니였겠는가.

글을 배우자면 연필이 있어야 했다.

이것을 기업가의 눈을 가진 송대관선생은 정확히 포착하였던것이다.

연필은 비록 작은것이지만 매우 귀하고 절실한것이다.

송대관선생은 그 작은 연필 한자루를 저울대삼아 자기 기업의 운명을 걸었다.

그리하여 건물을 세내여 작업장을 꾸리고 설비들을 마련하였으며 원료들도 부지런히 끌어들였다.

8명의 기능있는 사람들로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얼마후부터는 연필이 생산되게 되였다.

그 연필에 무슨 이름을 달것인가 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송대관선생은 마침내 《삼천리》라는 제호를 찍었다.

삼천리조선을 생각해서였다.

연필이 나왔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아직 이름도 없는 어느 한 잡화상점으로 찾아들었다.

연필문제때문에 걱정하시는 주석님의 심려를 덜어드리기 위하여 김정숙녀사께서도 그곳을 찾으시였는데 연필생산지를 알아보신 녀사께서는 연필을 몇자루 사시였다.

그러나 송대관선생은 자기를 찾아오신분이 누구이신지 전혀 모르고있었다.

그렇지만 그저 연필이나 사러 온 손님이 아니라는것만은 알았다.

첫눈에 벌써 범상치 않은분이 오셨다는 예감이 들었던것이다.

그는 정중히 안내해드리며 로동자는 몇명이고 원료와 자재는 어떻게 구하며 하루 연필생산량은 얼마라는것까지 자세히 말씀올렸다.

그는 후날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그분이 그렇게도 소문이 자자했던 항일의 녀장군이시였단말인가.

이것이 나의 첫번째 놀라움이였다.

그 다음의 놀라움은 녀사께서 연필생산에 너무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계시는것이였다.

녀사께서 품으신 그 관심은 돈을 내다보고 가진 나의 관심과는 거리가 너무도 먼것이였다.

새 조선의 아이들을 믿음직한 인재로 키우시려고, 조선의 미래를 활짝 꽃피우시려고 마음쓰시는 녀사의 깊은 마음이 그이의 눈빛에, 음성에 짙게 어려있었다.

나는 연필에 돈을 걸고 기껏해서 기업을 걸었지만 녀사께서는 조선의 수많은 아이들, 조선의 미래를 결부시키시였다.

돈과 조선의 미래.

나는 마치도 산밑에서 아득한 산봉우리를 올려다보는듯 한 심정이였다. …》

녀사께서 깎아드리신 연필로 글을 써보신 주석께서는 매우 만족해하시며 다음날 바쁘신 일들을 뒤로 미루시고 연필생산현장을 찾으시였다.

흑연과 석탄가루에 어지러워진 로동자들의 손을 허물없이 잡아주시며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치하해주신 주석님께서는 앞으로 질좋은 연필을 더 많이 생산하라는 고무도 해주시였다.

그때로부터 얼마후인 1946년 2월에 진행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제1차회의에서는 연필문제가 중요한 의정으로 상정되게 되였으며 조선인민자체의 힘과 기술, 원료로 연필을 생산할데 대한 력사적인 결정이 채택되게 되였다.

반만년의 유구한 조선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수립된 인민의 정권인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시간을 다투며 해결을 기다리고있을 때였던가.

그런데 그 력사적인 첫 회의에서 연필문제를 중요의정으로 제기하고 토의하게 되였으니 동서고금 그 어느 나라에서도 있어본적이 없는 일이 아닌가.

그 의의깊은 사변에는 조선의 미래를 떠메고나갈 후대들을 위해 김일성주석님께서와 김정숙녀사께서 바쳐오신 크나큰 정력과 심혈이 깃들어있었다.

그후 송대관선생은 돈만 아는 개인기업가로부터 민족적량심을 지닌 애국적기업가로 되게 되였다.

연필 한자루가 그의 운명을 결정지은것이였다.

돈에 눈이 어두워있던 송대관선생의 두눈은 주석님과 녀사를 만나뵙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으면서 참된 삶이 빛나는 인생길을 환히 내다보게 되였다. 돈에 묶이워있던 송대관선생의 가슴은 나라를 위한 마음으로 넓어지게 되였고 인생궤도도 정확히 그어지게 되였다.

송성희지배인은 백두산장군들의 후대들을 위하는 뜨거운 마음은 교과서에도, 그 교과서를 찍어내는 인쇄공장에도, 수많은 학교들에도, 학생들이 리용하는 학용품들과 교복에도 끝없이 어려있다고 감동에 젖어 말하였다.

하나의 물방울에도 우주가 비낀다고 나는 그 연필이야기를 통하여서도 조국에서 나라의 미래를 떠메고나갈 후대들을 위해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큰 심혈을 기울이고있는가에 대하여 잘 알수 있었다.

문득 라선땅의 무창리라는 곳에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무창리는 조국땅의 제일 한끝에 있는 라선땅에서도 제일 외진 곳이다.

이곳은 원래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살길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이 부대기농사를 하면서 생겨난 궁벽한 산골마을이였다.

이 마을로 들어가자면 《망덕령》이라고 부르는 령을 하나 넘어야 하였는데 그것은 수난의 세월 그 령을 넘어서면 망한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였다. (해방후에는 《풍덕령》으로 고쳐졌다.)

1959년 3월 중순 이곳에도 몸소 찾아오신 주석님께서는 그곳 인민들의 생활을 일일이 알아보시고 인민생활을 추켜세우기 위한 방향과 방도들을 구체적으로 밝혀주시였다.

이날 그이께서는 아이들의 학교문제에 대해서도 알아보시였다.

그곳에 중학교가 없다는것을 아시게 된 그이께서는 중학교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고 물으시였다.

한 일군이 중학교까지의 거리는 25리가 되지만 학생수가 적어서 중학교를 내오지 못하였기때문에 학생들이 좀 떨어진 어느 한 중학교에 다닌다고 말씀드리였다.

주석님께서는 자신께서 넘어오신 령길을 헤아려보시는듯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다가 걱정어린 음성으로 중학교까지의 거리가 25리면 멀다고 하시면서 마을의 중학생수가 15명밖에 되지 않아도 그들을 위하여 중학교를 내올데 대하여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당장 중학교를 따로 내올수 없으면 소학교에 초중반을 병설하도록 하시였다.

그이의 높은 뜻을 받들고 그곳 사람들은 얼마후에 15명을 위한 아담한 중학교를 번듯하게 일떠세웠다.

조국에는 한명의 학생을 위한 분교도 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여서 나는 직접 확인까지 하였다.

그곳이 바로 지도상에 점으로도 찍혀질가말가 한 작은 섬에 있는 선봉소학교 알섬분교이다.

알섬에 대하여서는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것이다.

이곳을 나는 몇해전에 가보았다.

이 섬에는 배들의 항로를 밝혀주는 등대가 있다. 공화국기가 바다바람을 타고 힘있게 휘날리고있었는데 일년 열두달 언제나 휘날리고있다는 말이 참으로 인상적이였다. 조국에서는 주요명절이나 계기때에 국기를 게양하는데 이렇게 공화국기가 춘하추동 휘날리는 곳은 매우 드물었기때문이였다.

이 섬에 있는 학교는 평양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섬에는 4명의 등대원들과 그 가족이 생활하고있었다.

학교에는 책상이 2개, 의자가 3개 있었다.

등대장의 안해가 교원인데 그의 이름은 김순옥이며 제4차 전국교육일군대회를 비롯한 나라의 큰 대회의 주석단에도 여러번 앉았었다고 하였다.

결국 한명의 학생을 위해 분교가 있고 교원이 있는것이였다.

도무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되였다.

모든것을 기업가의 눈에서 보는데 버릇된 나였던것이다.

그러나 조국에서는 국가가 그 모든 부담을 감당하고있으며 적자를 보면서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김순옥선생은 이제 이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자기를 키워준 나라의 은덕에 꼭 보답할것이라고 확신있게 말하였다.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수는 당시까지 6명, 7번째 학생이 공부하고있는데 리호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였다.

사귐성이 좋아 나와 쉽게 말을 주고받게 되였다.

나이에 비해 퍽 숙성하였고 건강상태도 매우 좋아보였다.

학습성적도 뭍의 학생들과 짝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에게는 귀여운 녀동생이 있었는데 호국이는 그를 몹시 사랑하고있었다.

얼핏 생각하면 몹시 외롭고 고독한 곳이라고 볼수 있는 곳이였다.

심장으로부터 떨어질수록 맥박도 약해지는 법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그런 점은 조금도 찾아볼수 없었다.

주석님의 인민사랑의 세계를 그대로 지니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들의 생활에 사소한 불편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물보장대책도 세워주시고 현대적인 문화생활설비들을 거듭 안겨주시였다.

후대들을 키우는 사업을 한걸음 늦추면 조국의 전진이 열걸음 떠진다는것이 김정일장군님의 숭고한 후대관이였다.

그이께서는 이 섬마을의 아이들을 평양견학, 야영소에도 자주 불러주시고 분교까지 세워주도록 해주시였다고 김순옥선생은 감동에 젖어 말하였다.

안내선생의 이야기가 또다시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알섬과 같은 분교가 조국에는 1800여개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학교가 학생들을 찾아가는셈이지요. 학생이 3명이든 4명이든 그들을 위해 교원이 있어야 하고 교실은 물론 실험실이 있어야 하며 교구비품이 있어야 한다는것이 우리 조국의 국책입니다.》

아이들을 나라의 왕으로 내세우는 조국의 숭고한 후대사랑, 미래사랑에 떠받들려 세상에 부럼없이 생활하는 공화국의 아이들이였다.

이곳을 찾았던 한 외국인은 이렇게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였다고 했다.

《학교가 학생들을 찾는 나라는 오직 조선뿐일것입니다. 주체의 나라로 만방에 빛을 뿌려가는 귀국의 무궁번영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똑똑히 깨달았습니다. 후대들을 귀중히 여기고 후대교육사업에 모든것을 아낌없이 돌리는 바로 여기에 사회주의조선의 양양한 미래가 있는것입니다.》

이 모든것을 되새겨보는 나의 가슴속에서는 가장 위대한분들의 숭고한 뜻에 떠받들린 우리 조국의 미래는 끝없이 창창하리라는 확신이 굳게 자리잡았다.

송성희지배인과 작별하고 호텔로 가는 차창가에는 《조선을 위하여 배우고 배우자》는 노래를 부르며 줄지어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비껴들었다.

새로운 의미로 안겨오는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이였다.

1972년에 벌써 전반적11년제의무교육을 실시한 공화국에서 최근년간에는 또 어떤 사변적인 일이 일어났는가.

지식경제시대, 정보산업시대의 요구와 세계교육발전추세를 과학적으로 통찰하신 김정은원수님의 세심한 가르치심과 정력적인 령도에 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6차회의에서는 전반적12년제의무교육을 실시할데 대한 법령이 발포되였고 하여 2014~2015학년도부터 전반적12년제의무교육강령에 따라 교육이 시작되게 되였으며 2~3년안에 전반적12년제의무교육을 완전히 실시할수 있는 담보가 확고히 마련되게 되였다.

제국주의자들의 악랄한 고립압살책동을 과감히 물리치며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의 전환적국면을 열어나가고있는 환경에서 전반적12년제의무교육을 무료로 실시한다는것은 사실상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은 공화국의 경제사정이 어렵고 한W의 전기, 한g의 석탄, 한방울의 물도 극력 아껴써야 하는 조건에서 소학교학제를 1년 늘이고 6년제중학교를 3년제초급중학교와 3년제고급중학교로 갈라 운영한다는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써는 생각조차할수 없는 일이며 경제학적으로 보아도 선뜻 리해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교육발전을 국가의 중요한 전략적문제로 내세운다고 하는 나라들에서도 인재양성에 유리하게 학제를 늘이는 사업이 중요한 문제라고 인정은 하면서도 투자가 많이 드는것으로 하여 그것을 어쩔수없이 장기적인 전략적기간에 수행하여야 할 사업으로 결정하는것이 응당한 관례로 되고있다.

그러나 후대들을 위한 사업을 당과 국가의 제일중대사로 내세우시고 후대교육사업에 억만금도 아끼지 않으시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래일을 위한 오늘에 사는 조국의 군대와 인민의 불타는 애국열의와 조선식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을 굳게 확신하시고 한푼의 자금이 귀중한 어려운 조건속에서도 교육부문에 국가적투자를 집중하며 전반적12년제의무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사업을 전국가적, 전인민적, 전사회적인 사업으로 내밀도록 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우리 조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문명한 나라로 더욱 찬연한 빛을 뿌리게 되였다.

나는 조국의 학교들을 많이 보았는데 제일 인상깊은것의 하나가 건물의 정면에 붙인 《조선을 위하여 배우자!》라는 구호였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구호였다.

어느 나라에서나 학생들이 공부하는 목적은 하나이다.

좋은 직업과 높은 수입, 안락한 생활과 양양한 출세를 위해서이다. 즉 자기자신을 위해서이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탓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생각지 않는 사람을 둔재로, 저능아로 취급하는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조선의 학생들은 그와는 전혀 달랐다. 조국을 위하여 배우고 배우자는 노래를 부르며 분초를 아껴 열심히 공부하는 그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키워주었으며 배움의 나래를 활짝 펴게 해준 공화국의 은덕을 잊지 않고있었다.

그처럼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강행군시기에도 변함없이 교정의 대문을 열고 반겨맞아준 자기 조국을 위하여 그들은 배우고있었던것이다.

목적이 숭고하고 뚜렷하면 결과는 위대하고 아름다운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의 눈앞에는 떠오른다. 그리고 귀전에선 쟁쟁하게 울려온다.

지난해 천도개벽된 무도영웅방어대(이 섬들은 모두 일촉즉발의 상태에 있는 서남전선의 해상에 위치하고있다.)를 찾으시여 6명의 어린이들을 위한 무도유치원과 4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순위고급중학교 무도분교를 돌아보신 김정은원수님께서 못내 기쁘시여 환히 웃으시던 모습이. 그리고 이런 유치원과 학교는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에서만이 일떠설수 있는 세상에 다시없을 요람이라고 하시던 음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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