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 조국 삼천리
화창한 봄날에
꿈속에서도 그려보던 성지 만경대였다.
내가 살던 마을의 한 동포청년이 조국을 방문하였을 때 만경대방문기념으로 가져온 타원형의 수예작품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우리 집에도 만경대에 가본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으로 부모들에게 남들처럼 조국에 가서 만경대방문을 하자고 몇번이나 졸랐는지 모른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말없이 담배만 피웠고 어머니는 고개를 떨구기만 하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라가 도탄에 빠졌을 때 살길을 찾아 조국을 떠나왔다는, 전쟁의 재더미를 파헤치고 락원을 일떠세울 때 그 무엇도 바친것 없다는 죄의식때문이 아니였을가고 생각된다.
허나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기에 너무도 어린 나이였었다.
그 소원을 나는 조국에 나와 이를수 있게 되였다.
내가 만경대를 찾은것은 화창한 봄날이였다.
그 시기는 내가 정한것이였다.
만경대는 평양시의 중심부에서 서남방향으로 약 20리정도 떨어진 대동강기슭에 자리잡고있다.
일만경치를 볼수 있는 고장이라 해서 만경대라 부르는 이 유서깊은 곳으로 가는 나의 마음은 벌써 만경대의 하늘가를 날고있었다.
지금은 이곳에 광복거리라는 뜻깊은 이름의 거리가 형성되여있고 대통로가 뻗어있으며
해방후 항일혁명투사들이 만경대로 가는 길을 포장하려고 하였지만
만경대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많은 사람들의 물결이 끝없이 흐르고있었던것이다.
조국인민들은 말할것 없고 나와 같은 해외동포들과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많은 외국인들도 벌써 방문길을 이어가고있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 누구나 만경대는 만민의 고향이라고 하던 말을 직접 확인하게 되였다.
생을 받은지 47년만에야 이곳을 찾아오는 내 마음은 송구하기 그지없었다.
철없는 아이들도 손에손에 꽃송이를 정히 들고 고향집을 찾아가고있었다.
내 손에도 이슬을 머금은 아름다운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그토록 찾고싶었던 만경대고향집에 내 손으로 엮은 꽃다발을 드리고싶었던것이다.
만경대고향집은 지난날 조선의 어느 농촌에서나 찾아볼수 있었던 벼짚이영을 한 수수한 초가집(
흙으로 바른 담벽, 토방, 헛간 등에서는 여전히 흙냄새가 풍기는듯 했다.
가족사진들과 개별사진들이 정히 모셔져있었다.
대대로 내려오면서 사용되였을 낡은 농기구들과 망돌도 있었다.
나의 눈을 더욱 아프게 한것은 마당 한켠에 놓여있는 찌그러진 독이였다.
해설원은
문득 방안에 있던 시계가 떠올라 의아해하니 해설원은 그것은 나라가 해방된 직후
바로 이런 추녀낮은 초가집에서 만민이 끝없이 칭송하는 인류의 태양
어린시절부터 가난과 고생을 너무도 많이 체험하신분이시기에
나는 고향집에 깃들어있는
하다면 그런 열정적이고 원칙적이며 열렬한 성격은 어떻게 배양된것인가.
나는 그 근저에는
만경대일가는 바로 이런분들이며
자그마한 사립문도 눈길을 끌었다.
그 사립문을 열고
허나 돌아오신이는 과연 몇분이였는가.
14살의 어리신 나이에 열고 나서시였던 이 사립문으로 20년만에 홀로 들어서시는
그날 밤깊도록 고향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분들을 생각하시며 잠 못 이루시였을
그 사립문으로 세상사람들이
만경대고향집앞에 키높은 들메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해설원에게 그 나무가 몇년이나 자랐는가고 물으니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격분을 참을수 없으셨던
지금 있는 들메나무는 1960년대에 심은것이라고 하였다.
어느 하나 무심히 볼수 없었다.
만가지 경치를 한눈에 볼수 있는 만경봉에서 감탄을 금치 못해하는 나에게 해설원은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참으로 인상적인 이야기여서 지금도 기억하고있다.
이곳은 절승경개로 소문나 예로부터 고서 《조선지리지》에도 명기되여있는지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평양의 량반, 지주들은 저마끔 이 고장의 땅을 사서 조상들의 묘를 썼다. 그리고 저들의 묘를 보아주는 사람들이 거처할수 있도록 집을 지어주었는데 그것을 산당집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의 넋을 황홀하게 만드는 경치가 드물게 좋은 곳인지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던 이 고장으로 어느날 당대의 이름있는 풍수쟁이가 찾아와 우물가의 녀인들에게 물을 청하였다.
풍수쟁이란 묘자리나 집자리를 보아주는 사람인데 묘자리나 집자리를 잘 잡아야 자손이 번성하고 집안이 편안하며 나라가 흥한다고 하는 풍수설이 공인된 학문으로 되고있던 당시에는 이들이 어디 가나 반겨주는 인기있는 손님이였다.
살구꽃,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향기가 가득찬 아름다운 산천을 점도록 바라보던 그 풍수쟁이가 후날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한 유명한 예언을 하였다.
그는 동네녀인들이 정히 떠주는 물을 마시고나서 주변의 산천경개를 둘러보다가 이런 범상치 않은 말을 하였다.
《내 풍수를 보아주며 다녀보지 못한 고장이 없는데 이 만경대처럼 물과 바람, 땅생김새와 나무, 풀이 조화되여 그야말로 한눈에 일만경치를 다 볼수 있는 고장은 처음이라오. …만경대는 귀인이 내릴 땅이 분명하오.》
그가 말한 귀인이란 조선민족의 운명을 구원해주고 이끌어갈 위인을 말하는것이였다.
당시는 우리 나라가 포악한 일제의 식민지로 완전히 굴러떨어져 망국노의 설음이 강산에 넘쳐나던 때였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풍수쟁이의 말을 깊이 음미해볼수록
만경대고향집에서 멀지 않은 만경봉기슭에 자그마한 상점이 있었다.
그곁을 지나면서 얼핏 보니 《만경봉2상점》이였다.
이곳에는 또 어떤 사연이 깃들어있을가 하고 생각하며 발길을 떼지 못하고있는데 아직 처녀시절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듯싶은 중년의 판매원이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퍽 오래전의 일인데
우리
너무도 소박한 생활을 하고계신다는것은 알고있었지만 어떻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있던 그는 진렬대에 있는 그래도 좀 나은 당과류들을
그러자 우리
너무도 속상하였지만 어쩔수 없어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드리자
절대로 그것만은 안된다고 말씀올렸지만 끝내 값을 치르신
얼마후 판매원은 자리에 주저앉아 자책의 눈물을 쏟고야말았습니다.
글쎄 우리
인민들의 행복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아올리시고 그 나날에 얼마나 많은 로고를 바쳐오신 우리
그이께 이 세상의 제일 좋은것을 드리고싶은것이 인민들의 한결같은 마음이였지만 그날 그 판매원은 너무도 큰 잘못을 저지른
우리
조금도 가식이 없는 진정의 토로였다. 너무도 가슴뜨거운 이야기였다.
입술을 깨물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판매원녀성의 눈가에서도 그것을 새겨듣는 나의 눈가에도 뜨거운것이 솟구쳐올랐다.
(
나는 쓰고 또 써도 다 전하지 못할 그 하많은 이야기를 어쩌면 이 상점이야기 하나만으로도 대신할수 있지 않을가 하고 생각하였다.
글을 쓰는 이 시각 세상에 없는 가슴뜨거운 이야기가 독자들을 통해서도 우리 인민들에게, 녀성들에게, 후대들에게 그리고 세상사람들에게 널리 그리고 길이 전해지리라는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나는 그날 만경대고향집을 배경으로 하여 여러번이나 뜻깊은 기념사진을 찍었다.
화창한 그날의 만경대고향집방문,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단순히 한 대상에 대한 참관이 아니였다. 어느 명승지에 대한 관광은 더욱 아니였다.
나에게 우리 민족이 수천년력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고 태양으로 높이 모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