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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선땅은 어떤 곳인가(2)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새 민주조선건설시기에도 찾으셔야 할 곳, 돌보셔야 할 일이 많으시였지만 1948년 6월초 조국땅 한끝인 여기 라선땅을 찾아주시였다.

꿈에도 소원이던 해방을 맞은 감격에 토지까지 분여받은 기쁨으로 환희에 넘쳐있는 평범한 농민들을 친히 만나주신 그이께서는 땅의 주인,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해나가도록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고 그 방도에 대하여서까지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그 전해에도 이곳 인민들이 잡초만 무성하던 진펄을 개간하기 위해 많은 자금을 제기하였을 때 인민을 위한 일에 아낄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푼전을 쪼개야 하는 나라의 어려운 형편이였지만 그들의 청원을 고스란히 풀어주신 주석님이시였다.

그 액수는 120만원이였는데 당시로서는 참으로 엄청난 자금이였다.

하여 공사는 불과 몇달사이에 성과적으로 끝나 농민들은 그토록 소원이던 벼농사를 지어 흰쌀밥을 먹을수 있게 되였다.

그이의 마음속에는 그 언제나 인민이 첫자리에 자리잡고있었다.

그날 일군들도 만나주신 그이께서는 사업작풍을 바로가지고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책임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시면서 그 방도에 대하여서도 밝혀주시였다.

전쟁의 상처가 아직 가셔지지 않았던 1954년 7월에도 이곳을 또다시 찾으신 주석님께서는 령세농민들의 생활을 추켜세울 방도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고 바다를 끼고있으면서도 물고기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인민들의 생활을 념려하시여 국가적인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인민들을 위하는 마음은 끝이 없으시였기에 조국땅 한끝인 이곳에 대한 그이의 현지지도는 끝없이 이어졌으며 관심하시는 내용과 폭은 깊고도 넓었다.

언제인가 자그마한 상점을 찾아주시였을 때에는 나어린 판매원에게 하루에 상품을 얼마나 파는가, 농민들이 어떤 천을 많이 요구하는가, 고무신이 팔리는가, 일제때처럼 발벗은 사람은 없는가, 고기값은 얼마인가 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보시고 신선한 청어가 있는것을 보시고는 평양에서도 구경할수 없는 생선을 여기 산골에 와서 구경한다고 못내 기뻐하시였다.

사실 한 나라를 이끄는 수령에게 있어서 산골상점 같은것은 스쳐지날수도 있는 곳이다.

더우기 그때는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되던 시기여서 수많은 중요하고도 긴박한 사업들이 그이를 기다리고있었다.

허나 인민생활문제를 두고 제일 큰 마음을 쓰시는 그이에게는 어느것 하나 무심히 스쳐지날 대상이 아니였던것이다.

후날 라선시내에 있는 어느 한 상점에 우연히 들려본적이 있었다.

그쯘하게 갖추어진 상품들을 일별하던 나의 시선은 한곳에 멎어섰다.

주석님께서 친히 정하여주시였다는 206가지 일용세소상품에 대한 목록표였다.

그이께서 친히 정하여주시였다는것도 놀라웠지만 그 상품종류에서 또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재털이, 색안경, 손바늘, 돋보기, 숟가락…

로인들로부터 어린이에 이르기까지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세소상품들이 모두 들어있는 그 목록표를 보고 또 보며 조국인민들이 어떤 사랑의 품에 안겨 살고있는가를 더 깊이 깨닫게 되였다.

인민들이 살고있는 곳이라면 그이께서는 그 어디나 찾으시였다.

우암산고개에서 10리가량 가면 우암리라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다.

륙지가 개미허리처럼 바다로 쭉 삐여져나간 공화국의 동쪽끝의 맨 마지막포구가 있는 마을이다.

군소재지에서 우암리는 70여리나 떨어져있어 그곳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섬사람들처럼 동떨어져 외롭게 살았다. 크고작은 고개를 서너개 넘고 진펄길을 종일 걸어야 했기때문에 그곳으로는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또 그곳 사람들도 웬만한 큰일이 있기 전에는 마을밖을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한동안 더 나가야 부포마을에 들어설수 있다.

바로 이런 외진 곳이였지만 주석님께서는 멀리 있는 자식들에게 더 마음을 쓰는 친부모의 사랑을 안고 찾아오시여 크나큰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험한 길로 간신히 움직이던 승용차가 끝내 멎어 더는 전진하지 못하게 되였을 때 그이께서는 차에서 내리시여 진창길에 서슴없이 들어서시며 빠진 승용차를 떠미시면서 끝내 마을을 찾아가시였다.

일군들이 그이께 이런 험한 길로 가실수 없다고 말씀올렸을 때에는 이런 내용의 말씀을 하시였다고 한다.

우리가 농촌에 나와서 좋은 길로만 다니겠는가. 이 차를 타고 가다가 빠지면 걸어서라도 가야 한다. 인민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다 가보아야 한다. …

걸어서라도! 인민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것이 솟구쳐올랐다.

(아, 그이는 인민사랑의 화신이시다! 인민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분이시다!)

그이의 좌우명은 이민위천이였고 그분의 정치철학은 민거백승이였다.

인민이 있는 곳, 인민행렬차가 그이의 집무실이였고 침실이였다.

조국에서는 아이들과 근로인민이 그이의 《왕》이였다.

주석님께서는 제일 좋은것은 아이들과 인민들에게 주셨다.

불교에서 공수래공수거(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뜻.)를 찬양하지만 천하를 안고오시여 그것을 고스란히 인민들에게 안겨주신 주석님이시였다.

공화국의 인민들은 누구나 그이께서는 언제 한번 호의호식하신적이 없이 인민들과 고락을 함께 하시였다고 한다.

해방후 평양을 찾아왔던 몽양 려운형선생은 주석님의 댁에서 식사를 하고 어떻게 말하였던가.

세계의 이름있는 위인들을 거의다 만나보았다는 그는 주석님의 댁에서 받은 검소한 점심상의 감자지지개를 동서양을 다니며 맛본 진수성찬에 비길수 없는 천하진미였다고 두고두고 회억했다.

인민들과 고락을 함께 하신 전설같은 이야기들은 하늘의 별들처럼 많고많은것이였으니 그것이 바로 그이의 일상적인 국사였고 일관하게 견지하여오신 정치였다.

그이는 분명 민족을 위해 하늘의 태양이 인간세계의 태양으로 환생하여 하강하신분이시였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인간에게 주었다는 아폴론의 광명, 프로메테우스의 불, 데메테르의 땅과 먹을것, 아테네의 지혜, 아프로디테이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합친것보다 더 위대한 인민의 세상을 현실로 펼쳐주셨다.

하기에 그리스도교계 보수파의 왕, 세계종교의 거두라고 하는 미국의 목사 빌리 그라함선생은 조선방문의 나날에 너무도 벅찬 현실을 직접 목격할수 있었다.

조선방문을 마치고 돌아갔을 때 한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은 왜 조선에 성경책을 전하지 못했는가요?》

사실 이것은 물음이기 전에 야유이고 조소였다고 봐야 할것이였다.

예수의 교리로 《박애와 사랑,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룩하여 세계를 행복의 에덴동산》으로 만들겠다던 그가 아니였는가. 수많은 사진기와 촬영기들이 그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었고 마이크들은 저저마다 그의 입가에 다가들었다.

선생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신성한 눈빛을 띠우며 말하였다.

《성서는 인간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담고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는 인간사랑이 국책으로 실시되고있었다. 무상치료, 무료교육, 식의주에 대한 국가적책임, 이것이 인민을 하늘같이 여기시는 김일성주석께서 내놓으시고 실천하시는 국책이다.

조선인민들은 그이를 하느님처럼 받들고있었다. 이러한 나라에 성경책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조선은 예수가 내려와도 할 일이 없는 인간천국이라는것이다.

이 말은 도이췰란드의 저명한 녀류작가이며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인 루이저 린저가 이북방문기에서 조선사회의 희한한 현실에 탄복하여 《하느님이 이북으로 이주》했다고 생동하게 표현한것과 일맥상통한것이였다.

나는 라선땅에 남기신 주석님의 인민사랑의 로정들에 내 마음을 따라세우며 승용차를 몰아갔다.

사연깊은 우암마을에 도착한 나는 주석님의 현지지도사적비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마을의 한 일군이 내 마음을 읽은듯 자기네들도 그전엔 이곳에 올 때면 말을 타고 다녔고 시집오는 녀인들도 10리밖에서부터 신발을 벗어들고 들어왔다는 이 마을이였지만 주석님께서는 인민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도 다 찾아가보아야 한다고 하시며 여러차례나 찾아주시였다고 하는것이였다.

그러면서 한 그의 말이 인상깊었다.

그이께서 찾으셨던 조국의 방방곡곡의 모든 곳들을 붉은 선으로 이어놓으면 붉은 조선지도가 될것입니다.》

그때 나는 그 일군의 풍부한 상상력과 표현력을 두고 시인적인 기질을 가지고있다고 생각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지도가 될수 있겠는가 하는것이 내 생각이였다.

그러나 조국에 체류하면서 그것이 사실이라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일군의 말은 상상력으로 치장된 과장이 아니였던것이다.

내가 제눈으로 본 표식비(공화국에서는 나라의 방방곡곡 그이께서 다녀가신 곳에 그리 크지 않지만 정성다해 비들을 세워놓았다.)만 해도 얼마나 많은지 셀수 없을 정도이다.

아마 우리 조국땅이 중국이나 로씨야만큼 컸다면 어떻게 되였을가 하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나는 주석님께서는 그 넓은 대지도 끝없이 찾고찾으시여 붉은 지도를 새기시였을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인민을 위해 태여나시고 인민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신 그이가 아니신가.

이런분을 나는 인민을 위해 이 땅에 왕림하신 《신》으로밖에 달리 칭송할수 없었던것이다.

지금 글을 쓰는 나의 눈앞에는 한점의 그림이 떠오른다.

언제인가 평양에 있는 조선미술박물관에서 본 잊을수 없는 화폭이다.

너무도 인상깊어 제목과 화가이름, 창작년대까지도 기억해두었었다.

제목은 《어린이들속에 계시는 어버이수령님》이고 김린권이라는 화가가 1963년에 창작한 유화이다.

어느 한 공원 같은데 어려움도 없이 주석님의 중절모를 쓴채 세바퀴자전거를 타고있는 아이, 놀이감자동차를 끌다말고 그이앞에 의젓하게 뒤짐을 지고 서있는 어린이, 능청스럽게 의자뒤로 올라가 장난하던 손으로 주석님의 손을 잡고 무엇이라 조잘대는 나무총을 멘 장난꾸러기, 미처 자리를 잡지 못했는지 신발이 벗겨지는줄도 모르고 부지런히 의자우로 기여오르는 꼬마, 부잡스러운 총각애들과는 달리 주석님의 가까이에 다가와 얌전하게 서있으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해하는 처녀애, 키가 닿지 않는지 의자뒤에서 머리만 내여밀고 주석님을 올려다보는 어린이…

그려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주석님과 아이들사이의 혈연의 모습을 담은것만 같아 마음이 축축히 젖어들게 하는 감동깊은 《사진》이였다.

주석님께서는 이렇게 인민들과 한치의 간격도 없으시였다.

그들과 허물없이 마주앉으시여 소박한 말도 귀담아들으시고 정책에 반영하시였다. 인민들을 위한 일에는 끝이 없으시였고 인민들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시였다.

주석님의 인자하고 자애로운 영상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이에 대한 끝없는 경모의 정으로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라선땅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력사의 발자취도 뜨겁게 어려있는 영광의 땅이다.

그이께서는 나라가 해방된 1945년 11월 25일에 항일의 녀성영웅이신 김정숙녀사와 함께 이곳에 첫 자욱을 새기시였다.

그때 이곳 인민들은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로만 들어왔던 백두산녀장군과 함께 백두광명성이신 김정일장군님의 출중하신 모습을 뵈옵고 너무도 크나큰 환희에 휩싸여 환성을 올렸다고 한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여러차례나 라선땅을 찾아주시였는데 1975년 3월 16일도 그중의 하루였다.

그날은 김일성주석님께서 선봉종합농장을 창설해주신지 16돐이 되는 날이였다.

이 뜻깊은 날에 이곳을 찾으신 그이께서는 주석님께서 걸으신 사랑의 로정을 그대로 이어가시며 일군들에게 인민들을 더 잘살게 해주시기 위해 한평생을 바치시며 나라의 한끝 마지막동네까지 찾아주신분은 오직 우리 수령님뿐이시라고, 조국땅 한끝 우암리에 세운 현지지도사적비는 참으로 뜻깊은 사적비라고 깊은 뜻을 담아 말씀하시면서 주석님의 은덕을 길이 전해가는데서 나서는 문제들을 일일이 밝혀주시였다고 한다.

주석님의 업적을 대를 이어 빛내여가시는것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의 하나로 여기신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자신은 오직 그이의 전사라고 여기신분이시였다.

그날 그이께서는 농산과 수산, 축산업을 더욱 발전시켜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더욱 높일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도 주시였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참으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수령님과 꼭같은 위대한분이시라는것을 깊이 새기게 되였다.

어찌 그렇게 생각지 않으랴.

주석님께서 이곳을 찾아오신 날도 1959년 3월 16일이였고 장군님께서 찾아오신 날도 1975년 3월 16일이였다.

로정도 꼭같은 로정, 날도 꼭같은 3월 16일.

인민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다 가보아야 한다고 하신 주석님의 뜻을 받드시여 그이께서 걸으신 그 길을 따라 공화국의 마지막 마을까지 찾아주신 장군님의 충정의 세계와 인민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나의 가슴을 더욱더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945년 11월에 라선땅에 첫 자욱을 새기신 그날부터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무려 10여차례나 이곳을 찾아주시였다고 한다.

라선시인민들은 라선땅에 깃든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장군님의 혁명업적과 크나큰 사랑을 길이 전해가기 위하여 2015년 4월에 그분들의 동상을 정중히 모시였는데 그 바닥에는 그분들의 영생을 절절히 바라는 념원을 담아 내가 성의껏 마련한 고급석재들도 정히 놓여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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