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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넋을 따라서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길을 그려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자기의 한생이 아름다운 미술작품처럼 그려지기를 간절히 원하며.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소원만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인생길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인생길이란 매 개인에게 있어서 전인미답의 길이라고 볼수 있다. 거기에는 큰길이 있는가 하면 오솔길도 있으며 때로는 험한 고개와 깊은 강도 놓여있다. 해빛넘치는 화창한 날도 있지만 눈오고 비뿌리는 궂은날도 많은것이다.

그런 행로이기에 인생길의 선택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수 없다.

한사람이 길을 가다가 두갈래의 분기점에 들어섰다고 보자. 어느 길을 택할것인가.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그는 막대기에 기대를 걸었다.

막대기를 세워놓았다가 그것이 넘어지는쪽으로 방향을 잡을 원시적인 방법을 택하였던것이다.

막대기가 가리킨 방향으로 가던 그는 길이 험해지자 되돌아와 다른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자기의 목적지에 가닿을수 있었다.

옛말같은 이야기지만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

길은 한번 가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갈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갈수 없는것이 인생길인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선조들은 이생이 아니라 일생이라고 한것 같다.

이런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길에서 선택은 얼마나 중요한것인가.

잘못된 선택으로 헤쳐나가기 어려운 가시밭길을 만날수도 있고 영영 헤여나올수 없는 수렁속에 빠져들수도 있기때문이다.

인생길의 옳바른 선택으로 하여 행복과 영광을 한껏 느낀 사람은 얼마이고 잘못된 선택으로 후회와 비애속에 생을 마감한 사람은 또 얼마인가.

결국 인생길의 선택은 인간의 생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흐르게 하는 레루우의 《전철기》라고 볼수도 있는것이다.

이 인생의 《전철기》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먼저 떠오르는것이 내가 조국에 나올 때의 일이다.

그 시기 나는 분명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때없이 내 귀전에 울리였다. 지어 꿈속에서도 들을수 있었다. 참된 인생길을 걸으라는 정다운 속삭임소리를.

누가 나를 불렀는가.

어머니조국이였다. 그 부름소리는 나의 마음을 조국으로 실어갔고 내 심장의 박동을 조국과 이어주었다.

내가 그 부름소리를 외면했더라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겠는가. 재부를 축적했을수 있고 호화찬란한 생활도 차례졌을수 있다.

그러나 자기밖에 모르고 제 나라, 제 민족은 안중에도 없는 금수보다 못한 인간, 진정한 삶의 가치를 모르는 인간, 참된 행복과 크나큰 긍지가 무엇인지 알수 없는 인간으로 남았을것이다.

남들이 도리머리를 하던 조국에로의 길이였지만 나는 조국의 부름소리를 온몸으로 감수하며 애국의 길을 선택하게 되였다.

 

 

지나온 인생길

 

 

후반생을 걷고있는 나는 자주 전반생에 대하여 돌이켜보군 한다.

희망에 살던 청춘기는 지나가고 인제는 추억에 사는 시절에 들어섰다는 생각이 갈마들수록 더 자주 떠오르는 그 시절이다.

내가 태여난 곳은 중국 흑룡강성 가목사시이다.

1950년 6월에 태여났으니 공화국에서 전쟁의 포화가 타오르던 때였다.

부모님들은 모두 농사에 종사하고있었다.

나의 아버지의 이름은 김해수이고 1910년 6월 24일에 부산에서 태여났다.

빈곤한 가정에서 자라 어린시절부터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다보니 영양상태가 좋지 못해 키가 작았고 건강한편도 아니였다고 한다.

평생 학교라는데를 가보지 못한 아버지여서 이름도 제대로 쓸줄 몰랐다.

하지만 기억력만은 대단히 좋았다. 어떤 때에는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것을 아버지가 언제 어디에서 그런 일이 있지 않았는가고 튕겨주어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가 만약 대학에만 갔다면 분명 훌륭한 학자가 되였을거예요.》 하고 자주 말하던 때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어릴 때부터 천한 일이란 일은 모두 하며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던 아버지는 마음씨좋은 어느 한 집에 일군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그 집에서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하여 주인들은 그를 일군이 아니라 한집안식구처럼 대해주고 나중에는 자기의 딸과 가정을 이루게까지 했다. 그 딸이 바로 나의 어머니였다.

가정을 떠메고나가야 했던 아버지는 자수성가하려고 뼈빠지게 일하였지만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나라잃은 백성의 가난과 설음은 새 가정을 이룬 우리 집이라고 에돌아가지 않았던것이다.

하는수없이 살길을 찾아 홀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 흑룡강성의 어느 한 산골에 괴나리보짐을 풀어놓은 아버지는 새 생활터전을 마련하려고 결사분투하였다.

당시 그곳에는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던 불쌍한 조선사람들이 모여살고있었는데 퍼그나 외진 곳이였다.

아버지는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면서 피땀으로 빈땅과 산기슭을 뚜져 밭을 일구었다. 언제 한번 피가 마른적이 없었던 아버지의 손은 키에 비하여 엄청나게 커졌다.

2년후에는 집에 기별을 보내여 나의 어머니와 자식들을 데려왔다.

아버지의 머리속에는 가정과 자식들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오직 농사일만 하였다.

아버지의 그 노력에 하늘도 감심하여선지 가을이면 농량이 넉넉하게 수확되군 하였다. 어떤 해에는 감자를 100마대(당시 감자 500g은 1원으로 사고팔릴 때였다.)도 더 수확하군 하였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흐뭇하게 웃음지으며 두툼하게 만 담배를 입가에 가져가 맛스럽게 들이키군 하였다.

우리 집에서는 집짐승도 키웠는데 그 수입도 적은것이 아니였다.

아버지는 고된 로동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술을 마시면서 타령조의 조선노래를 부르군 하였다.

술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나의 아버지는 대단한 애주가였다.

명절때면 술, 기름, 쌀 등이 얼마간씩 공급되였다. 물론 술은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것이였고 기름과 쌀은 어머니가 반가와하였다.

나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려고 술을 사오는 심부름을 도맡아하였다.

30전이면 술 1근(600g정도)을 살수 있었다.

어머니는 이따금 용돈을 주군 하였는데 나는 그것을 아끼면서 쓰지 않고있다가 아버지의 술과 동생들의 머리빈침이나 장난감 등을 사군 하였다.

내가 10살때의 일이다.

어느날 나는 아버지를 위해 술을 사러 길을 떠났다. 술을 사려면 크지 않은 강을 하나 건너야 하였다. 여느때에는 무릎까지 오는 강이여서 나는 그리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술을 사가지고 와보니 갑자기 내리는 폭우로 하여 강물이 몹시 불어있었다.

이런 때면 아버지는 항상 벼짚우장과 등불을 가지고 강기슭에서 나를 기다리군 하였는데 나는 그만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고 강물에 들어섰다.

그런데 물살이 얼마나 세던지 조그마한 나의 몸은 급류에 휘말려 퍼그나 떠내려가게 되였다. 당황하여 허우적거리면서도 술통을 꼭 쥐고있던 나는 간신히 나무가지를 잡고 위기를 모면할수 있었다.

이때 아버지의 부름소리가 멀리에서 간간이 들려왔다.

《정옥아!》

정작 아버지의 부름소리를 들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금 솟아올랐다. 그래서 대답도 변변히 못하고 울먹이며 아버지가 있는쪽으로 달려갔다.

물참봉이 된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서는 눈물인지 비물인지 분간 못할 방울들이 줄줄이 흐르고있었다.

나를 덥석 품에 안았던 아버지는 왜 자기 말을 안 듣고 강을 혼자 넘어왔는가고 하면서 엉치를 때리고 또 때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사랑이 담긴 매는 아프지 않은것이다. 아버지에게 드릴 술을 사왔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하고 기쁘기만 하였다.

그날 아버지는 당장 술을 끊어야지 이러다간 술때문에 귀한 딸의 목숨을 잃겠다고 몇번이고 말하였다.

아버지의 말은 거짓이 아니였다.

내가 강물에 떠내려가면서도 꼭 쥐고있던 그 술통을 아버지는 술이 있는 그대로 2년나마 벽에 걸어놓고 보기만 하면서 전혀 입에 대지 않았던것이다.

나의 어머니의 이름은 김분난이였고 대구에서 1924년 2월 28일에 넷째딸로 태여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매우 근면하였으며 음식을 잘 만들었다. 몸매 또한 쭉 빠지고 품행이 현숙하였으며 인물도 이를데없어 농촌에서 살기는 아깝다고 보는 사람마다 말하였다.

가정생활과 자녀교양 등을 잘하여 모범어머니로 소문이 자자했다.

나를 금지옥엽과도 같이 애지중지 키워온 어머니였다.

《자모패자》라는 말이 있다.

자애심이 너무 많은 어머니밑에서는 오히려 도리를 모르는 불량한 자식이 나오기 쉽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귀한 자식 매로 키운다는 말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나름이 아닐가. 뭐니뭐니해도 어머니의 사랑은 자기는 못 입고 못 먹으면서도 자식들에게는 더 좋은 옷을 입히고 더 좋은 음식을 먹이고싶어하는 마음이여서 녀성은 연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도 생겨났을것이다.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정말 끔찍하였다.

원래 나의 우로는 여러명의 오빠와 언니들이 있었다. 그런데 모두 홍역에 걸려 태여난지 얼마 안되여 땅에 묻히고말았다.

자식들이 련이어 병으로 죽자 부모들의 근심은 하늘같았다.

바로 그런 때에 내가 태여났다.

어디서 듣고왔는지 아이들이 잘 자라는 집에 양딸로 보내면 병없이 키울수 있다는 말을 듣고 부모들은 큰 기대속에 나를 어느 한 집의 열한번째 자식으로 호적에 등록하였다.

그리하여 내 이름도 그 집 아이들의 이름자를 따서 《정옥》으로 되였다. (물론 그 집에 가서 살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자랄 때 늘 자기의 손으로 옷을 지어 입히군 하였는데 손바느질솜씨가 얼마나 정교하였는지 아이들 누구나 내가 입은 옷을 부러워하였다.

소학교때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거의 업고 학교에 데려가고 데려왔다.

내가 창피하다고 해도 부모들은 우리 집의 《귀공주》를 어떻게 걸어가게 하겠는가고 하며 한사코 등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그런 사랑이 있었기에 나는 소학교와 중학교에 다닐 때 언제나 공부를 제일 잘하고 외모가 단정한 소녀로 소문이 자자하였고 전기간 50명이 넘는 학급의 학급장을 할수 있었다.

지금도 이따금 그 시절이 떠오를 때면 부모님들의 부드러운 등이 그립다. 다시 어린시절로 되돌아가 그 등에 업힐수는 없을가 하는 천진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갔지만 어머니의 살뜰한 보살핌은 식을줄 몰랐다.

여담삼아 하는 말이지만 나의 부모님들은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로 자기들의 의사를 강요하지 않았다. 아마 자립성을 키워주느라고 그랬던것 같다.

그들은 무슨 일이 제기되면 나의 의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물었고 내가 스스로 내린 결심을 적극 지지해주었다.

단 한번만은 나의 결심을 막은적이 있었다.

중학교를 거의 졸업할무렵 어느 한 극단의 연출가인지 하는 사람이 배우후비를 물색하기 위해 우리 학교를 찾아왔었다.

그는 내 노래소리를 듣고 대번에 호기심을 가지며 배우생활을 하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물론 화려한 배우생활과 높은 명성에 대한 찬사를 섞어가면서 말이다.

앞날에 대한 끝없는 희망에 한껏 들떠있었던 나여서 대뜸 그의 말들이 현란하게 새겨졌지만 좀더 생각해보겠다고 하였다.

내 자랑같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렀다. 나의 노래소리는 우리 집안의 기쁨과 생기의 원천이였다. 했기에 해종일 밭일을 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선 부모님들은 내 노래를 들을 때면 얼굴에 밝은 미소를 지으며 등을 두드려주군 하였다.

아버지는 평생에 노래라는것을 몇번 불러본적이 없지만 듣기는 매우 좋아했다.

사람들은 목석같은 사람에게서 어떻게 저런 딸이 나왔는가고 혀를 찼다.

나의 목소리나 감정은 어머니를 많이 닮은것 같다.

어머니가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하는 《찔레꽃》이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하는 《고향의 봄》의 노래를 부르며 동자질을 할 때는 지나가던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추군 하였다.

그럴 때면 나도 어머니를 따라 함께 노래를 불렀다.

했기에 내가 극단의 배우로 가겠다고 하면 선듯 찬성할것이라고 짐작한 나는 어느날 부모님들에게 내 의향을 터놓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대번에 머리를 가로저으며 반대하였다.

한생을 농촌에서 농사만 하면서 살아오다나니 봉건이 대단히 강하였고 편견 또한 여간 심하지 않던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눈에는 배우라는 직업이 착취사회에서 노래를 파는 천한 기생이나 노리개로 보였던것이다.

언제나 자기 힘, 자기 노력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되여야 한다고 항상 가르치군 하던 아버지였으니 찬성할리 만무하였다.

이렇게 되여 나는 예술과는 먼 기업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그때는 아쉬움이 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크게 후회되지도 않는다.

이렇게 나의 부모님들에 대하여 자상하게 서술하는것은 내가 어린시절을 이런 극진한 사랑속에서 배고픔과 추위, 부러움을 별로 모르고 행복하게 자랐다는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부모라면 누구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극할테지만 나의 부모님들의 경우에는 류별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하여서는 어느 자식들이나 마찬가지일것이다.)

그 손길에 떠받들려 나는 구김살없이 성장할수 있었고 대학에도 갈수 있었다.

흑룡강대학과 할빈상업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나는 1970년대초부터 기업계에 몸을 잠그었다.

내가 처음 기업계에 나섰을 때 성공할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녀자가 하면 얼마나 하겠는가 하고 별로 기대를 가지지 않았던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도전하고싶었다.

녀자라고 남자들보다 꼭 못하다는 법이야 없지 않은가.

그때 내가 마음속으로 존경하면서 리상적인 대상으로 정한 사람(비록 한번도 만나보지 못하였지만)은 아네트라는 프랑스의 녀성기업가였다.

그의 자서전적인 책은 언제나 내 손가까이에 놓여있었다.

1942년에 태여난 아네트(그러니 나보다 8년우였다.)는 1960년대초 세계조선업분야에 덮쳐든 불경기로 하여 다 기울어져가던 뻬나드조선소를 넘겨받게 되였다.

그의 아버지가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딸에게 넘겨주었던것이다.

아네트의 마음속에서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회사를 프랑스에서 제일가는 조선소로 일떠세우려는 욕망이 화산같이 타올랐다.

조선업분야의 기업가들은 22살의 아네트가 회사를 운영한다는 소식을 듣자 너도나도 비웃었다.

그러나 아네트는 야심을 품고 피타는 사색을 기울여 짧은 기간에 놀라울 정도의 지식과 경영방법을 터득하게 되였다.

어느날 그는 해변가에서 청춘남녀들이 조를 무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도 하고 배놀이도 하면서 즐겁게 노는것을 보게 되였다.

이러한 광경은 아네트에게 유람용뽀트와 물고기잡이용뽀트를 하나로 결합시킬 즉 두가지 목적에 다같이 쓸수 있는 새로운 배를 만들어낼 착상을 안겨주었다.

외부와의 접촉을 모두 차단한 뻬나드회사에서는 새형의 선박건조작업이 맹렬하게 벌어졌다.

반년이 넘도록 이 회사에서 단 한척의 선박도 나오지 않게 되자 많은 사람들은 아네트를 가엾게까지 생각하였다.

1966년에 들어서면서 프랑스의 항해관광은 다시 열기를 띠게 되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의 배를 가지고싶어하였다.

그해 여름 프랑스에서는 수산도구전람회가 열리였다.

아네트가 예견한대로 새롭고 혁신적인것을 좋아하는 프랑스의 부유층들은 그의 배가 마음에 들었던지 저마다 주문을 신청하였는데 그 수요는 100척을 넘어섰다.

대담하게 투자하여 현대적인 기계설비를 받아들이고 원가를 줄여 만들어낸 새형의 배는 시장에서 큰 경쟁력을 가지게 되였으며 아네트는 끝내 성공의 날을 보고야말았다.

아네트는 답보와 침체를 몰랐다.

1976년에 이르러 세계체육무대에서는 체육이 점차 체력과 지력의 대결로 되여가는 새로운 추이가 나타났다.

녀성의 감각이란 남성들보다 더 예민한것이다.

아네트는 이러한 추이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깊은 사색과 연구를 거쳐 당시 세계적으로 널리 류행되던 완전자동유람용뽀트를 수동식돛배형식으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의 경쟁자들은 아네트가 만든 시제품을 보고 그것은 퇴보나 다름없다고 비웃었지만 아네트의 배는 일약 인기를 독점하게 되였다.

시제품 《부스트》호는 국제시장에서 《가장 우수한 항해용 돛배》로 평가되였고 많은 주요경기들에서는 이 배가 사용되게 되였다.

아네트의 회사는 점차 확장되여 미국, 영국, 에스빠냐 등지에 자기의 지사를 두게 되였고 개인전용부두치고 《부스트》배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명성을 날리게 되였으며 결국 세계최대의 유람선제조업체로, 아네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스카수출상수상자로 되였다.

나는 그 이야기들에서 누구든 결심하기탓이며 깊은 사색과 탐구, 노력을 기울인다면 얼마든지 성공할수 있다는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되였다.

그 녀성기업가처럼 사색을 깊이하고 꾸준히 노력해온 나였기에 기업관리와 운영에 어느 정도 자신심이 있었고 또 축적된 자금도 작은것이 아니여서 기업은 상승일로를 걷게 되였다.

물론 실패가 없었던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것이였으며 나는 그것을 전화위복으로 만들군 하였다.

이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기회가 잘 맞아서라고 말하였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일을 창조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꾸준하게 그리고 무조건 한다는 립장, 이것이 내 사업에서의 성과의 비결이 아닐가.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하였고 내 인생은 성공한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축하해주었다.

그럴 때면 나는 생각했다.

(그만하면 나도 성공했다고 볼수 있지 않을가.)

자기 사업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고 가정에는 행복이 깃들었으며 신비로운 앞날이 끝없이 펼쳐질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의 이런 관념은 후반생이 펼쳐질무렵 완전히 뒤바뀌게 되였다.

행복이 무엇인지, 삶의 보람이 무엇인지 그리고 참된 인생이 무엇인지 너무도 몰랐던 나의 전반생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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