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 앞으로!

 

 

물거품이 된 《전쟁계획》

 

 

미군의 남조선강점 70년간 조선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과 모든 무장충돌들, 교전들의 배경에는 대규모의 미군무력을 장기주둔시키고 도발적인 군사행동을 일삼고있는 미국이 있다.

올해 8월에 조선의 북과 남사이에 교전직전까지 치달았던 위험천만한 사태도 다름아닌 3만여명의 미군이 투입된 《을지 프리덤 가디언》합동군사연습이 한창 진행되고있던 와중에 터졌다는데 문제가 있다.

미국의 이 위험한 전쟁놀음은 최근에 공개된 《작전계획 5015》와 같은 북에 대한 불의적인 선제공격씨나리오를 련마하고 실천적으로 추진하는 극히 무분별한 단계에 들어서고있다.

미국의 반공화국적대시정책의 악랄성, 횡포성은 미국이 랭전이후부터 부단히 갱신시키고 발전시켜온 《작전계획》들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여있다.

미국은 6. 25전쟁의 수치스러운 참패에서 응당한 교훈을 찾고 이 땅에서 물러갈 대신 남조선을 침략적군사기지로 철저히 거머쥐고 공화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려는 대조선적대시정책을 변함없이 추구하였다.

정전협정이 조인된 1953년 7월 27일 당일날 미국이 조선전쟁에 고용병을 파견한 추종국가대표들을 워싱톤에 모아놓고 북침을 다시 단행할 경우 군대와 전쟁장비를 들이민다는것을 확약한 《16개국선언서》를 체결하게 한것은 그 뚜렷한 증거이다.

미국은 1953년 12월 중순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전쟁참패를 만회하고 북침을 새롭게 시도할 목적밑에 《갱신정책》이란것을 들고나왔으며 그것을 공화국을 비롯한 아시아나라들의 힘이 커지기 전에 핵우세에 기초한 대량보복력으로 종전보다 더 큰 침략의 예봉을 돌려야 한다는 악명높은 《레드포드전략》으로 구체화하였다.

이 강도적인 전쟁교리에 따라 미국은 남조선을 북침핵전쟁수행의 병참기지로 전변시켰다.

미국은 도발적인 북침전쟁계획을 끊임없이 수정보충완성하고 불장난소동을 매일같이 벌려놓으며 정세를 긴장시키고 전쟁위기를 고조시켰다.

전후 미국이 작성한 북침전쟁계획인 일명 《작전계획》은 년대와 년대를 이어 보다 공격적으로 부단히 갱신되여왔다.

미국의 반공화국공격계획들은 대부분 태평양지역 미군사령부의 관할구역을 나타내는 《50》으로 시작된다.

공화국지역에 대한 《점령작전》을 명문화한 《작전계획 5027》은 1990년대초에는 《작전계획 5027-92》, 《작전계획 5027-94》로 수정보충되였으며 1998년에는 극히 위험천만한 《핵선제공격》개념을 반영한 《작전계획 5027-98》로 수정보완되였다.

그 무슨 《우발사태》와 《급변사태》 등에 대처한 《작전계획 5029》와 《작전계획 5030》, 《작전계획 5012》를 비롯하여 미국은 이미 북침을 위한 핵공격작전계획들을 단계별, 류형별로 완성해놓은 상태에 있다.

미국의 이러한 도발적인 작전계획들은 수십년동안 벌려온 《포커스 레티너》, 《프리덤 볼트》, 《팀 스피리트》, 《련합전시증원연습》, 《키 리졸브》, 《독수리》, 《을지 프리덤 가디언》과 같은 각종 명칭의 남조선미국합동군사연습들을 통하여 갱신되고 완비된것들이다.

이 전쟁연습들은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의 직접적산물로서 가장 현실적인 전쟁의 근원이다.

이 전쟁계획들의 내용과 작성시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미국은 전쟁목적을 감추기 위하여 저들이 작성한 전쟁계획을 작전계획이라고 지칭한다.

2000년대에 들어와 6자회담이 진행되는 기간에 부쉬행정부는 공화국을 향해 군사작전을 벌릴 의도가 없다는 메쎄지를 여러차례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얼굴이 두개인 미국정치인들의 수식사이고 제스츄어에 불과하다.

군사적공격은 외교적해결책과 함께 력대 미행정부의 항시적인 선택안으로 되여왔던것이다.

평화회담의 막뒤에서 미국의 군사파쑈광들은 언제나 전쟁을 할수 있는 준비태세를 갖추고있으며 그래서 이를 위한 전쟁계획은 이보다 훨씬 이전에 세워지고 훈련 또한 실제로 진행되는것이다.

미국의 전면적인 반공화국공격계획인 《작전계획 5027》의 경우를 놓고보자.

《작전계획 5027》의 작성년대나 내용은 구체적으로 확인된것이 없다. 보도들에 의하면 이 전쟁계획은 1960년대에 처음으로 작성되여 10년에 한번씩 검토수정되였다는 설도 있고 1974년에 작성되여 2년에 한번씩 수정되였다는 자료도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작전계획 5027》은 북이 공격해오면 불가피한 경우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했다가 미군증원무력이 도착하면 반격에 나서 회복한다는것을 골자로 하고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기이후 공화국을 서울 이북에서 격퇴한다는 개념으로 바뀌였고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미륙군에서 개발한 공지전개념과 적후방을 타격하는 종심공격전술을 도입한 공세적인 방어계획으로 바뀌였다.

공지전개념은 종심공격과 전술핵을 두 축으로 한 《작전계획 5027》의 핵심요소로서 나토군의 작전계획에 도입된 뒤 1983년 《팀 스피리트》연습을 통해 반공화국공격계획에 처음으로 도입되였다.

그러나 1989년이후에는 《평양진격》, 《무력통일》로 《작전계획 5027》의 목표가 변화되였다.

《작전계획 5027》의 존재가 처음으로 공식 밝혀진것은 1994년 3월 23일이였다. 이날 남조선 국방부 장관이 《국회》에서 미군과 남조선군사이의 합동전쟁계획인 《작전계획 5027》이 있다고 공개하였다. 리병태가 언급한 《작전계획 5027》의 정식명칭은 《미국남조선련합사령부작전계획(CFC OPLAN 5027)》이다. 일명 《5단계 <5027작전>》, 《작전계획 5027-5》로 불리웠다.

《작전계획 5027》은 원래 남조선《방어》를 위한 미8군의 작전계획이였다. 남조선강점 미군이 부분적으로 철수하고 1978년 미국남조선《련합사령부》가 창설되면서 《CFC OPLAN 5027》로 변경된것으로 알려져있다.

《작전계획 5027-5》는 랭전종식후 미국이 주되는 침략의 예봉을 돌리면서 나온 전쟁정책의 산물이다.

부쉬1세는 1991년 만전쟁이 종결된 직후 합동참모본부에 조선반도《유사시》의 각본인 《작전계획 5027》을 재검토하도록 지시하였다. 클린톤도 취임하자마자 이미 검토된 《작전계획 5027》을 재검토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가 합동참모본부로부터 클린톤에게 제출된것은 1993년 12월 10일이였다.

《작전계획 5027-5》가 세워진 1993년-1994년기간은 공화국과 미국사이의 핵협상이 진행되던 시기와 일치된다.

공화국은 조선전쟁이 끝난 때로부터 외국군대의 철수를 의제로 미국과 회담을 진행할것을 인내성있게 요구하여왔다.

공화국의 노력에 의해 1954년 제네바에서 첫 조미회담이 진행되였는데 미국의 배신적인 책동으로 하여 아무 성과없이 끝났다. 미국은 그후 근 40년동안 공화국과의 회담을 한사코 거부하면서 군사적으로 압살하기 위한 전쟁책동에만 열을 올리였다.

미국은 1990년대에 들어와 공화국의 그 무슨 《핵의혹》을 떠들어대면서 군사대상들에 대한 특별사찰을 강요하였으며 1993년에는 이미 중지되였던 《팀 스피리트》합동군사연습의 재개를 공식 선포하였다.

공화국은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의 탈퇴와 준전시상태를 선포함으로써 미국의 강경정책에 초강경으로 맞섰으며 이에 기가 꺾인 클린톤행정부는 그해 6월부터 공화국과의 회담장에 나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1993년 6월 제1단계 조미회담이 뉴욕에서 진행된 결과 미국이 공화국에 대한 핵위협을 중지하고 자주권을 존중하며 평화통일을 지지할것을 공약한 조미공동성명이 채택되였다. 제2단계 조미회담은 같은 해 7월 제네바에서 진행되였다.

이 기간 미국은 공화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예견한 《작전계획 5027-5》를 계속 수정하여 그 침략성을 강화하였다.

당시 미국방장관 코헨은 1995년 회계년도 《국방보고》에서 《미국에 있어서 그곳(동북아시아)의 잠재적인 적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특히 1993년 조선핵문제가 제기된 후 미국은 강경과 유화정책을 동시에 실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국제원자력기구를 통해 조선에 압력을 가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에 대응할수 있는 여러가지 준비를 면밀히 갖추고 <작전계획 5027>을 작성하였다.》고 실토하였다.

《작전계획 5027》은 2년에 한번씩 세부가 개정되였다.

미국은 제2단계 조미회담기간에 《팀 스피리트》합동군사연습의 중지를 비롯하여 공화국과 합의한 4가지 동시행동조치를 어기고 국제원자력기구를 동원한 제재책동을 본격화하였다. 이에 대처하여 공화국은 기구에서 탈퇴하는 초강경조치를 취하였다. 미국은 반공화국제재책동이 수포로 돌아가자 제3단계 조미회담에 끌려나와 제네바합의문에 수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94년 3월 13일 남조선 국방부 장관 리병태는 《작전계획 5027》과 관련하여 《현재의 한미련합방위전략에는 적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한 응징보복전략개념이 이미 내포되여있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이 도발해올 경우 한미련합 또는 한국군 단독으로 강력한 응징보복을 실시하고 도발양상에 따라서는 이를 통일전역수행의 기회로 련계하는 전략개념을 세우고있다.》고 하였다. 그후 미국은 일본반동들까지 제2의 조선전쟁책동에 끌어들이는 《작전계획 5027-96》을 수립하였다.

그후 제네바합의문이 리행단계에 있고 제네바에서 4자회담이 진행되고있던 시기인 1998년에는 그때까지 5단계로 구성되여있던 《작전계획 5027》에 《전쟁종결후의 점령통치》라는 6번째 단계의 내용이 추가된 개정판인 《작전계획 5027-98》이 수립되였다.

4자회담은 1997년 12월에 시작되여 1999년까지 6차례에 걸쳐 진행되였지만 아무런 결실없이 끝나고말았다.

미국은 4자회담을 통해 조미사이에 평화협정을 맺고 미군을 철수시킬데 대한 공화국의 정당한 요구를 거부하고 회담의 막뒤에서 공화국을 집어삼키기 위한 《작전계획 5027-98》을 작성하고 완성해나갔던것이다.

《작전계획 5027》의 2000년 개정판인 《작전계획 5027-00》은 반공화국침략전쟁수행에 최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할것을 예견한것으로서 역시 조미사이의 핵 및 미싸일회담들이 진행되던 막뒤에서 수정, 완성되였다.

미국은 이 조선전쟁씨나리오들을 유고슬라비아를 반대하는 꼬쏘보전쟁에서 공화국에 대한 공격을 가상한 온갖 신형무기시험, 전술운용방법을 시험해보았으며 《작전계획 5027-98》에 따르는 전쟁교범을 완성하였다.

유고슬라비아로 말하면 국토면적과 지리적조건이 북과 류사하며 제2차 세계대전시기 빨찌산투쟁경험과 무기운용체계도 같았다고 한다.

1994년부터 몇년어간에 《작전계획 5027》이 《5027-5》, 《5027-96》, 《5027-98》, 《5027-00》 등으로 계속 변화되였지만 달라지지 않는것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반도의 전 지역을 가로타고앉는다는 《무력통일》야망이다.

그후 《작전계획 5027-00》과 함께 《작전계획 5029》도 작성되였다고 한다.

《작전계획 5029》로 말하면 제4차 조미회담이 있은 직후인 1999년 8월 당시 남조선강점 미군사령관이였던 죤 틸렐리가 미군남조선군련합작전으로서 그 무슨 《붕괴》에 대처할수 있는 계획을 작성하고있다는것을 인정하여 그 존재가 밝혀진것이다.

틸렐리는 이 작전계획의 내용공개를 거부하였으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있다.

이 작전계획의 골자는 전쟁개시 90일전에 남조선강점 미군특수작전사령부와 미중앙정보국산하 특수작전단, 괴뢰군특수부대들을 공화국북반부지역에 은밀히 침투시켜 심리전, 테로, 교란 등으로 《급변사태》를 의도적으로 일으킨 다음 대규모무력침공으로 공화국을 《점령》한다는것이다.

지어는 공화국에서 해일과 지진 등 대규모자연재해가 발생할 경우에도 그것을 《급변사태》로 보고 침략을 단행하는것으로 되여있는데 세상에는 미국처럼 자연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인도주의구호사업은커녕 그 기회에 들이치는 극악무도하고 반인륜적인 전쟁계획을 세우는 전쟁광신자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다.

2001년에 발족된 부쉬행정부의 제2의 조선전쟁씨나리오인 《작전계획 5030》은 제2차 핵위기발발후 공화국의 핵문제와 관련한 회담이 진행되던 초시기에 수립되였다.

《작전계획 5030》은 공화국을 반대하는 부단한 군사적도발로 정세를 긴장시키고 군사적대결의 도수를 높여 공화국의 경제적잠재력을 악화시키는것을 주되는 작전내용으로 하고있다.

여기에는 공화국의 방위능력을 떨어뜨려 반공화국공격작전을 손쉽게 실행하자는것과 함께 북내부에 공포를 조성하고 사상을 혼란시켜 군대와 인민의 신념과 의지를 꺾어보자는데 그 음흉한 목적이 있었다.

미국의 이러한 전쟁계획들을 두고 남조선의 한 언론은 이렇게 평하였다.

《미국이 말하는 전쟁이란 단순히 나를 지키고 방어하는 소극적인 수준을 초월해 상대방을 지배하고 정복하는것이다.

그것만이 최종적승리라고 말할수 있다. 그렇다면 국제법이나 정전협정과 같은 외교적장치들은 현상을 유지하는 장치에 불과한것이고 전쟁에서 불변하는 목표는 승리하는것 즉 현상을 힘으로 타파하는데 있다.》고 평하였다.

이처럼 《외과수술식공격》방식을 리용한 《작전계획 5026》으로부터 시작하여 전면공격계획인 《작전계획 5027》과 《내부와해》와 《체제붕괴이후의 처리》를 예견한 《작전계획 5029》, 《작전계획 5030》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지금까지 작성발표한 작전계획들은 모두 하나의 고리로 련결된 단계별 제2의 조선전쟁씨나리오로서 그 작성시기가 신통히도 공화국과 미국사이의 대화와 일치되였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공화국을 군사적힘으로 압살하기 위한 미국의 랭전후 전쟁전략에 따르는 필연적인 일치였다.

2001년 부쉬가 대통령으로 집권한 때로부터 미행정부의 대조선정책을 주시해온 많은 관측통들은 미국의 대조선정책을 《3C》정책으로 표현하였다.

여기에서 《3C》는 Confrontation(대결), Capitulation(굴복), Collapse(붕괴)라는 영어단어의 첫 글자를 말한다.

즉 《3C》정책은 공화국과의 대결을 계속하며 양보할것이 아니라 굴복시키며 비밀리에 공화국을 《붕괴》시킨다는것이다.

이 악랄한 부쉬교리에 따라 미국이 이미전에 작성하였던 조선반도전쟁계획은 기존의 《작전계획 5027》외에도 우발계획인 《5026》과 《5028》, 《북급변사태》 대비계획인 《5029》, 미태평양사령부가 수립한 《5030》 등 무려 5개나 되였었다.

미국이 전세계에서 한 지역에서만 여러개의 전쟁계획을 갖고있는 곳은 조선반도가 유일하다.

력사에는 주권국가를 침략하기 위해 이처럼 여러가지 전쟁계획들을 짜놓고 추진해온 전례가 없다.

조선반도와 그 주변에서 일어나고있는 전쟁위기와 사건들은 이렇듯 미국의 주도하에 계획되고 산생된것들이다.

미군의 남조선강점은 조선반도와 그 주변에서 어느 하루도 그칠새없이 벌어지는 도발적인 군사행동들, 북침전쟁연습들의 근원으로 되고있다.

미국이 자기의 대병력을 남조선에 주둔시키고 남조선의 군통수권을 틀어쥐고있는 한 북남관계도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게 되여있다.

그러나 시대가 멀리 전진하고 랭전이 끝난지도 오래된 오늘 미국은 저들의 케케묵은 아시아태평양《재균형전략》에 따르는 남조선강점이 시대착오라는것을 똑똑히 깨달아야 한다.

이제는 조선반도에서 전쟁도발책동으로써는 얻는것보다 잃는것이 훨씬 더 커졌다는것을 미국은 알아야 한다.

60여년전 보병총을 가지고 맞섰던 공화국이 오늘은 미국의 핵위협을 핵으로 억제할수 있고 미국의 핵도발도 핵으로 보복할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당당히 말할수 있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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