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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은 정복할수 없는 나라이다

 

 

금창리의 전리품

 

 

조미기본합의문을 채택한 후 미국은 공화국의 《조기붕괴》를 예상하여 고의적인 시간끌기정책, 《연착륙정책》에 진입하였다. 미국은 《북조선을 함부로 건드리는것은 위험하다. 아직은 때가 이르다. 고장난 비행기를 연착륙시키듯이 서서히 안전하게 무너뜨리는것이 상책이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조선반도에네르기개발기구(케도)에 경수로제공권을 부여하도록 결정한 후에도 자금지출문제를 비롯한 여러가지 문제를 걸고 장애를 조성하면서 경수로건설을 의도적으로 지연시켰다.

이처럼 미국은 조미사이에 합의한 경수로제공문제에서 장애를 조성하고 합의문리행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면서 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종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조선의 사회주의의 현실은 미국의 타산이 잘못되였음을 보여주었다.

《북붕괴론》과 《연착륙정책》으로 공화국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리고있던 미국은 더이상 승산이 없게 되자 합의문리행을 지연시켜온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합법적인 파기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반공화국모략소동에 매달렸다.

1998년 8월 17일, 미국신문 《뉴욕 타임스》는 미중앙정보국이 정밀분석하였다고 하면서 넘겨준 한건의 정보자료를 인용하여 충격보도를 날렸다.

《북조선의 녕변동북 40km지역에서 새로운 핵개발계획의 중심지로 보이는 거대한 지하시설 발견》

신문은 미국간첩위성들이 녕변동북부에서 수천명의 로동자들이 동원된 대규모건설현장을 촬영하였고 《북이 비밀리에 건설하고있는 금창리지하시설이 핵무기개발을 위한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미행정부는 처음에는 좀 《반신반의》하는듯 한 태도를 취하다가 얼마 못가서 문제의 지하시설이 《핵시설일것》이라는 단정적인 립장을 정식으로 표명해나섰다. 1998년 11월 19일 당시 미국의 조선반도담당 특사 카트맨도 서울에서 가진 기자회견에 나타나 《문제의 지하시설이 핵활동을 위해 만들어지고 있다고 믿을수밖에 없는 충분한 증거들을 찾아냈다.》고 하면서 그 위치가 평안북도 대관군 금창리라는것이였다.

그런가 하면 미국방성관리들은 《건설중인 지하시설린근에 전력공급시설이 전혀 없는 점을 들어 이 시설이 식량저장이나 미싸일, 화학무기개발에 리용될수 없으며 핵무기개발외에는 다른 목적을 찾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미행정부는 북조선이 핵무기개발에 나섰다는 결론을 내리고있다.》고 하였다.

세상에 《금창리지하핵시설의혹》이라고 알려져 제2차 핵위기의 시발점이 된 모략극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당시 미국이 찾아냈다는 증거들이란 저들이 얼마든지 손쉽게 조작할수 있는 영상사진 몇장에 불과하였으며 《금창리지하핵시설의혹》은 세상사람들의 의혹만을 자아냈다. 미국무성 북조선담당관이였던 키논즈는 1998년 10월 12일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녕변에 대규모지하공사가 추진되고있다는 증거만 있을뿐 그것이 새로운 핵시설이라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도처에서 지하공사가 진행되는것은 북조선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이다. 공장들도 흔히 산기슭 지하에 건설해놓아 공장굴뚝이 아니라 산기슭에서 연기가 난다.》

하지만 미행정부는 미국회의 주요성원들과 남조선측에 북이 산밑에 새로운 원자로와 페핵연료재처리쎈터를 건설하고있는것으로 확신한다고 경고하고 그것을 막아야 한다고 하면서 일대 소동을 피웠다.

《금창리지하핵시설의혹》을 급격히 떠올린 미국은 공화국에 대한 선제공격을 운운하는것과 함께 《북핵사찰》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금창리지하핵시설의혹》을 코에 걸고 미의회는 1998년 9월에 조미기본합의문에 의해 공화국에 제공하게 된 중유공급을 동결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다음해인 1999년 3월 1일과 6월 1일의 두단계 기간을 설정하고 공화국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할것이라는 위협까지 거리낌없이 하였다.

미행정부도 그 무슨 단호한 대응을 떠들어대면서 공화국에 대해 위협적인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미국대통령 클린톤은 《북조선의 위협은 이라크사태에 못지 않는 심각한 문제》라고 하였는가 하면 당시의 미국무장관 알브라이트는 1998년 11월 13일 《핵시설의혹을 받고있는 녕변부근 지하시설에 대한 사찰을 허용할것》을 요구하였다. 미국무성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문제의 지하시설에 대한 의혹규명은 구두보장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면서 사찰이 허용되지 않을 경우 조미핵협정의 존재자체가 문제시될것이며 미국의 대북조선정책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것이라는 미국정부의 위협적인 립장을 밝혔다.

당시의 미국방장관이였던 코헨도 《북조선의 지하핵시설사찰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무한정 기다리지 않을것》이라면서 《사찰이 수용되든가 아니면 사태가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라도 해결되지 않으면 결정적인 조치가 취해질것》이라고 떠벌이였다. 미국무성은 《북조선이 지하시설에 대한 사찰을 끝내 거부할 경우 미국의 단호한 대응이 결정되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을것》이라는 립장을 공공연히 밝혔다.

《금창리지하핵시설의혹》문제는 그 어떤 지하동굴에 대한 해명문제가 아니라 조미간의 정치적, 군사적대결로 심각하게 확대되여나갔다.

1999년 2월 17일부터 진행된 뉴욕조미회담에서 공화국은 미국에게 이른바 《금창리지하핵시설》에 한번 와보겠으면 와보라, 그러나 공화국의 군사비밀에 해를 끼친데 대한 보상금은 지불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은 3월 16일까지 4차에 걸친 회담끝에 《힘》으로 조선에 강요하려던 《사찰》을 《참관료》를 지불하는 조건에서 《초청에 의한 참관》으로 해야 한다는 공화국의 주동적인 제의에 동의하게 되였다.

결국 금창리에 대한 《사찰》은 《참관》으로 바뀌여졌다.

1999년 5월, 미국실무대표단이 《금창리지하핵시설》을 《참관》하기 위하여 공화국에 발을 들여놓았다. 참관단은 미국무성 조선과 부과장 죠엘 위트를 단장으로 하여 국방성, 에네르기성의 핵전문가 등 14명으로 구성되여있었다.

그들의 참관은 공화국의 충분한 협력을 받으면서 여러날동안 면밀하게 진행되였다. 하지만 비싼 《참관료》를 지불하고 금창리에서 미국이 본것이란 텅 빈 굴간뿐이였다.

《참관》을 마치고 돌아간 미국은 5월 25일 《핵개발의혹》이 제기된 금창리지하시설에 관하여 현시점에서는 무혐의로 북조선이 1994년의 조미핵합의를 위반하지 않았다는 최종보고서를 발표하지 않을수 없었다. 5월 27일에는 대표단의 금창리참관과 관련하여 현장에서 플루토니움재처리시설과 원자로 등 《핵의혹》을 립증할만 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미국무성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요미우리신붕》은 이렇게 평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금창리시설에 대해 <결백>이라고 판정한것으로 된다.

금창리의 의혹시설에 대해 미정부가 북조선의 핵개발, 동결, 페기를 결정한 1994년의 미조합의에 위반되는것이 아니였다고 일단 결론을 내림으로써 지난해 8월 미국신문 <뉴욕 타임스>의 보도로 부상한 금창리지하핵시설의혹문제는 현재로서는 종지부가 찍혀진셈이다.》

메사했던지 아니면 《참관료》가 아름찼던지 미국은 공화국측에서 더 와보겠으면 와보라고 하였지만 다시 참관하겠다는 소리를 하지 못하고말았다.

조선반도를 전쟁위기국면으로 몰아가던 금창리사건은 결국 미국의 어이없는 망신으로 마무리되였다.

세계는 또 한차례의 조미대결에서 미국의 패배로 끝난 금창리에 대한 《참관》에 대해 떠들었고 그것은 남조선언론계의 《태풍》으로 되였다.

남조선잡지 《말》 1999년 8월호는 《그처럼 길고 지루한 대결끝에 미국이 얻은것이란 텅 빈 금창리굴간에 식량을 가득 채워준것이였다.》고 조소하였다.

미국이 《참관료》로 금창리지하구조물에 가득 채워준 5억US$분의 쌀, 그것은 북이 선군정치로 미국에게 당당하게 받아낸 조미대결전의 전리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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