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은 정복할수 없는 나라이다
김빠진 《북조선붕괴론》
1993년 3월에 15일대전에서 쓰디쓴 참패를 당한 미국은 저들이 조작해낸 《핵문제》를 조미사이의 관계문제로 전환시킨 조선의 지략에 따라 조미협상마당에 나오게 되였다.
1993년 6월과 7월의 제1단계와 제2단계 회담은 조미 쌍방이 서로 핵문제와 관련한 원칙적립장들을 밝히고 큰 선에서 협상의 테두리를 확정한 과정이였다면 제3단계 회담은 핵문제를 일괄타결하기 위하여 쌍방이 각기 실제적으로 가닿아야 할 종착점들을 확정하고 그 실현에서 나서는 실무적문제들을 합의하여 회담을 결속짓는 대결전이였다.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 채택된 조미기본합의문은 두 나라 정부들이 핵문제를 해결하며 서로의 불신을 가시고 신뢰를 조성하여 쌍무관계를 개선해나갈것을 공약한 구속력있는 법적문건이였다.
그러나 사실 미국이 1994년 제네바합의문에 조인한것은 공화국이 그때로부터 얼마 못 가서 스스로 《붕괴》될것이라는 제나름의 타산에 기초한것이였다.
조선에서의 사회주의를 압살하려는 미국의 책동은 민족최대의 대국상과 때를 같이하여 본격적인 실천단계에 들어섰다.
제국주의미국은 사회주의위업수행에서
조선에서의
미국이 《북조선조기붕괴설》까지 내돌리며 《3. 3. 3》이라는 수자를 가지고 조선의 사회주의제도의 《종말》을 계산한것도 이무렵이였다. 조선이 사흘이 아니면 석달, 늦잡아서 3년이상 더 지탱하지 못한다는것이였다. 그들은 가소롭게도 조선의 《붕괴》를 기정사실화하고있었다.
미국은 침략무력을 유럽으로부터 조선반도와 그 주변으로 이동전개하면서 이전 쏘련을 겨냥하였던 핵무기까지 공화국을 반대하는데로 돌리였다.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은 힘으로 공화국을 압살하기 위한 군사적침략책동을 전례없이 강화하는 한편 정치, 경제, 사상문화, 외교의 모든 분야에 걸쳐 압력을 가하고 질식시키려고 사면팔방으로 악랄하게 덤벼들었다.
미국은 공화국에 대한 《핵의혹》소동을 확대시켜 정치적압력의 도수를 높이는 한편 로골적인 군사적위협과 전쟁도발책동을 벌렸다. 미국은 공화국의 핵시설에 대한 《공중기습타격》을 운운하면서 군사적위협과 도발책동을 공중과 바다, 륙지에서 매일과 같이 감행하였다.
1994년 7월 중순 미태평양함대의 비행대들은 미7공군 비행대들과 련합하여 남조선상공을 작전무대로 도발적인 북침타격연습을 개시하였다. 그런가 하면 해외기지들에서 날아든 전략정찰기들이 군사분계선상공을 끊임없이 왕복비행하면서 공화국북반부지역에 대한 정탐행위를 련속 감행하였다.
미국은 공화국을 군사적으로 위협하면서 남조선군과의 합동군사연습의 도수를 더욱 높였다. 미국은 해마다 갈라서 진행하던 《을지》와 《포커스 렌즈》전쟁연습을 1994년부터 통합하여 보다 대규모적인 《을지 포커스 렌즈》북침전쟁연습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남조선강점 미군과 남조선군뿐아니라 종래 미태평양사령부에 소속되여 《지원》역할을 하던 미7함대를 미국남조선련합군사령부에 작전적으로 완전히 배속시켜 참가하게 하였다. 한편 미국은 해마다 《독수리》합동군사연습을 벌리면서 그 규모를 확대하였다. 합동군사연습기간이 종래의 배이상으로 대폭 늘어났고 1995년부터는 남조선강점 미군뿐아니라 해외로부터 기여든 수많은 미군무력이 이 전쟁연습에 투입되였다.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련합세력의 무모한 군사정치적도발과 압력, 전쟁책동으로 말미암아 조선반도에는 전쟁의 불구름이 항시적으로 무겁게 드리우고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를 일촉즉발의 팽팽한 정세가 조성되였다.
미국은 공화국을 경제적으로 질식시키기 위한 전면적인 경제제재와 봉쇄책동도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제국주의반동세력들은 공화국이 1996년 5월을 넘기지 못할것이라는 《5월위기설》까지 내돌리며 각종 무역제재조치를 취하였으며 국제적인 통제수단을 총동원하여 경제봉쇄를 강화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몇해째 지속되는 자연재해로 나라가 겪는 경제적시련과 인민들의 생활난은 말그대로 극한점에 이르고있었다.
경제봉쇄로 하여 숨죽은 공장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두줄기의 궤도우에서 렬차들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였다. 도시와 마을, 가정들에서는 전기불도 제대로 볼수 없었다.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반동들은 공화국이 이러한 형편에서 어쩔수없이 손들것이라고 단정하고 로선변화, 정책변화를 공공연히 강요하였으며 《경제가 망하면 국가도 망한다.》는 미국식론리에 추종하는 사람들은 북조선도 어차피 《타협》의 길을 택할것이라고 속단하였다. 서방세계에는 《북조선개방설》이 나돌았으며 일부 주변나라들도 《개혁》, 《개방》을 조심스럽게 건의하였다.
당시 미중앙정보국 장관 도이츠는 북이 《수년내에 붕괴》된다고 예측하였다. 1996년 12월 11일부 로이터통신에 의하면 그는 같은 날 상원정보위원회 청문회에서 조선반도정세에 대하여 증언하면서 《북조선이 앞으로 2~3년안에 붕괴될것이 예견》된다고 말하였다.
미의회조사국의 조선반도문제전문가 래리 닉슈는 론문 《미국의 대북조선정책:북조선붕괴론과 그 파장》에서 미국측이 1994년의 제네바합의문 서명당시부터 이미 《북조선의 붕괴》를 념두에 두고있다고 밝혔다.
《제네바합의문이 조인된지 몇달후 필자는 당시 협상에 직접 참가한 클린톤행정부의 한 관료가 주최한 핵문제관련모임에 참가하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합의문의 몇몇 모모한 표현에 대해서 그에게 물었다. 그는 나의 우려를 리해한다고 하면서 <아무튼 북조선은 붕괴될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처음에 그가 내 질문을 슬쩍 피해간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당시 협상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그때부터 이미 미국관리들이 북조선의 <붕괴>를 자주 언급하고있었음을 알수 있다. 북조선<붕괴론>은 1996년초 북조선의 식량난이 계속 악화되고 미국의 고위관료들이 공개적으로 북조선의 <붕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본격적으로 수면우로 떠올랐다. 그러나 사실은 1994년 여름이래 미국의 관리들은 대북정책의 전제로서 <북조선붕괴론>을 이야기하고있었다. 1996년 5월초 국방성 부차관보 쿠르트 캠블은 일본국회 의원들에게 <지금의 문제는 북조선이 6, 7개월을 더 버틸수 있겠는가 하는것>이라고 말하였다.》
다시말하여 당시 미국은 공화국의 《궁극적인 붕괴상황》을 념두에 두고 공화국측과의 협상에 림하였으며 따라서 제네바합의문에서 공화국측과 한 약속들도 실행할 필요가 없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것이다.
이와 같은 망상에 기초하여 미국은 제네바합의문에 조인하였던것이다.
조인당시의 국무성 차관보 로스는 《애당초 틀거리합의는 북조선이 래일이라도 붕괴될것이라는 관측을 전제로 채택》되였다고 실토하였다. 갈루치자체도 국회증언에서 제네바합의문채택배경에 대해 《시간을 벌기 위한것》이라고 증언하였다.
외국군사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미국이 제네바합의문에 2003년이라는 수자를 써넣은데는 두가지 리유가 있었다.
첫째로, 경수로를 건설하는데는 보통 10년이 걸린다는것이다. 1994년부터 계산하면 바로 2003년이 된다. 이 수자는 매우 《타당성》이 있는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감독하에 공사를 진행하므로 지연되지 않을것이라고 판단할것이기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겉만 보고 내린 판단이며 미국은 될수록 공사를 지연시킬 작정이였다.
둘째로, 공화국이 10년안에 붕괴될것이라는것이였다. 미국은 우선 초강경으로 맞서는 공화국을 달래자면 타당성있게 건설기한을 정해야 하는데 그것을 10년으로 해놓으면 기한이 되기전에 공화국이 《붕괴》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될수록 공사를 지연시키는것이 유리하였던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허한것이였다. 일본도서 《
《최근 몇해어간에 일본이나 남조선 등에서는 북조선정권이 <붕괴>된다는것이 신빙성있는 소리처럼 이야기되여왔다.
그러면 <북조선붕괴론>은 믿을만 한 충분한 사실에 기초하고있는가? 력사적으로, 정치학적으로 그럴만한 근거가 있는가? 검토해보면 북조선이 <붕괴>된다는것은 한갖 소문에 지나지 않으며 아무런 과학적근거도 없는 소리이다. <북조선붕괴설>의 근거로 든것은 북조선에서의 식량부족과 경제위기이다. 식량부족에 대하여 말한다면 북조선이 1995년이래 이상기후현상으로 수해와 해일, 가물과 같은 거듭되는 자연재해를 겪다보니 해마다 식량이 부족되는것은 사실이지만 견디여내고있는것 같다. 미국은 경제위기를 붕괴의 근거로 들었는데 얼핏 듣기에는 설득력이 있는것 같지만 과거의 력사적사실자료를 보아도 전혀 근거가 없다. 인류력사상 수많은 왕조나 국가들이 흥하고 망하였지만 식량부족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멸망한 실례는 없었다. 그러므로 기근에 의한 붕괴설을 주장하는것은 너무나 성급한것이며 부질없이 넘겨짚은 관측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정치학적립장에서 보아도 근거가 없다. 어느 나라든지 다 그렇지만 북조선에서는 남조선이나 다른 나라들에서 일상사로 일어나는 시위폭동들이 전혀 인연이 없는 일이다. 미국정부가 인정하고있는바와 같이 북조선에는 반정부조직도 존재하지 않으며 불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국민이
1990년대말에 들어와 미행정부 고위관리들은 《북조선붕괴설》이 물거품이 되였다는것을 제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지난 시기 미국에서 《북조선붕괴설》을 앞장에서 선전한것은 미중앙정보국이였는데 1998년에 들어와서 그 론조가 달라졌다. 영국군사주간지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 1998년 1월 7일호는 중앙정보국 장관 테네트가 상원정보특별위원회에서 한 국제정세전반에 대한 증언에서 《북조선붕괴》에 대해서 주장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미방위정보국이 《북조선붕괴설》을 주장하였으나 미중앙정보국은 즉시에 그것을 명백히 부정하였다고 전하였다.
미국무성과 국방성도 《북조선붕괴설》을 실증할만 한 그 어떤 근거도 없다는것을 시인하였다.
클린톤이 두번째 임기 말기인 1999년에 대조선정책을 재검토한것도 《북조선붕괴설》이 물거품이 된것과 관련된다. 당시 미정계에서는 공화국이 1994년에 예측하였던대로 《붕괴》되지 않았으며 또 《붕괴》되지도 않을것이라고 아우성치면서 제네바합의가 공화국에 교섭기반을 강화하는 핵무기나 미싸일을 개발하기 위한 《시간벌기》의 기회나 주었다는 주장이 터져나왔다. 그리하여 클린톤은 《대북조선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새로운 정책을 제시》할 의무를 지닌 《대조선정책조정관》이라는 직제를 내오고 거기에 국방장관이였던 페리를 임명하였던것이다.
클린톤의 위임에 따라 《대북정책보고서》를 내놓은 페리는 1999년 9월 17일 미국 PBS TV방송과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질문: 압력을 행사해 북조선이 《붕괴》될것으로 가정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였다.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페리: 북조선관측자들은 북조선이 악화된 경제위기로 곧 무너질것이라고 판단하고있다. 협상을 하면 안되며 무너지기를 기다려야 한다는것이다. 나는 그런 상황을 상정해놓고 그에 의거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북조선이 곧 《붕괴》되리라고 가정하는것은 경솔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북조선정권이 우리가 원하는대로 되리라는 판단하에서 협상할것이 아니라 지금 상태 그대로의 북조선정권과 협상해야 할것이다.
그후 페리는 같은 해 10월 12일 국회에 《대북정책보고서》를 제출한 후 미국회 상원 외교위원회 동아시아태평양분과위원회에서 《우리는 북조선이 무서운 경제적곤경에 처해있지만 그것이 북의 체제를 파괴하는 요인으로 되지는 않을것이라고 판단하였다.》라고 증언함으로써 미국이 그토록 바라던 《북조선붕괴론》이 물거품이 되였음을 시인하였다.
공화국인민들은 제국주의의 온갖 비렬한 압력과 봉쇄 그리고 혹심한 자연재해로 하여 그처럼 엄혹했던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을 의지로 이겨내고 승리적으로 헤쳐온 영웅적추억을 안고있다.
당시 공화국을 방문하였던 서방의 한 정치가는 공화국인민들의 기개에 감탄을 금치 못하여 이런 글을 남기였다.
《지금 세계유일초대국이라고 자처하는 미국에 도전할 유일한 나라가 북조선이라고 말하고있다. 그 리유는 북조선에 막강한 군사력과 군대가 있다는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리유가 미국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있다. 그것은 북조선에 막강한 경제력과 로동계급이 있다는것이다.》
미국이 떠들어대던 3년, 5년은커녕 20년도 더 지나갔지만 미국은 아직도 그 무슨 《북체제붕괴》망상에 사로잡혀 허송세월하고있다.
미국은 그러한 허황한 망상때문에 공화국과의 대결에서 언제나 수치와 망신만을 당하여왔다는것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