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은 정복할수 없는 나라이다
총포성없는 15일대전
돌이켜보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후 조선인민과 같이 그처럼 오랜 기간 미국의 핵공갈을 받아온 나라와 민족은 없다.
미국은 지난 조선전쟁때부터 공화국에 끊임없이 핵공갈을 가하여왔다.
1950년 11월 당시 미국대통령이였던 트루맨은 조선전선에서의 원자탄사용에 대해 공언하였다. 그에 따라 미전략항공대에 《극동에 즉시적인 원자탄투하를 위해 폭격기들을 날려보낼수 있도록 대기》할데 대한 지시가 하달되였다.
1951년 4월 미합동참모본부는 조선전선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원자탄으로 《보복공격》을 가하도록 명령하였다. 미국방성은 1953년초 공화국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검토하는 과정에 《최단기간내의 승리》를 위해 원자탄을 사용할것을 정부에 건의하였다.
미국의 핵위협은 전후에 더욱 가증되였다.
조선전쟁을 도발했다가 참패를 당한 미국의 정객들은 《원자탄을 사용하지 못한것이 한》이라고 하면서 전후 핵전쟁준비에 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1950년대 후반기 일본에서 반핵운동이 고조되여 친미정권의 유지가 위태롭게 되자 미국은 일본에 배비하였던 핵무기를 남조선으로 이동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57년에 미국의 첫 전술핵무기들이 남조선에 반입, 배비되였다. 이렇게 시작된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핵무기배비는 부단히 증대되여 1970년대 중엽에는 그 수가 1 000개를 넘어섰다.
남조선은 극동최대의 핵화약고, 핵전초기지로 전변되였다.
미국은 핵무기로 공화국을 공격하기 위한 여러가지 안을 짜놓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 하였다. 조선전쟁은 물론이고 1969년 《EC-121》대형간첩비행기사건때에도 미국은 공화국에 대한 핵공격을 계획하였었다고 한다.
미국이 남조선과 야합하여 해마다 진행하는 《독수리》, 《을지 프리덤 가디언》, 《림팩》 등 각종 명칭을 단 합동군사연습들에는 옹근 하나의 전쟁을 치를수 있는 방대한 규모의 북침핵전쟁수단들이 동원되고있다.
이처럼 공화국은 반세기 훨씬 이전부터 항시적으로 미국의 핵위협을 받아왔다.
공화국이 전후 수십년동안 조선반도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여오면서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 가입하고 조미기본합의문에 서명한것도 미국의 핵위협과 조선반도에서 핵전쟁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후에도 미국의 핵위협은 줄어든것이 아니라 더욱 증대되였다.
사실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공화국의 노력은 조선전쟁이 끝난 후부터 시작되였다.
공화국정부는 우선 평화적인 대화와 협상을 통한 비핵지대창설의 방법으로 미국의 핵위협을 해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59년에 아시아에 원자무기가 없는 평화지대를 창설할데 대하여 발기하였고 1981년에 동북아시아비핵지대창설안을 내놓았으며 1986년에는 조선반도를 비핵지대로 만들데 대하여 제안하고 그 실현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1984년 1월 10일에는 핵전쟁위험을 가시기 위한 조미회담에 남조선당국도 참가하는 3자회담의 개최를 제의하였으며 1986년 6월 23일에는 정부성명을 발표하여 핵무기의 시험과 생산, 저장과 반입을 하지 않으며 외국의 핵기지를 포함한 모든 군사기지를 허용하지 않을것이라고 엄숙히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반도비핵지대를 창설하기 위한 공화국의 모든 노력을 외면하고 공화국에 대한 핵위협을 가증시켜왔다.
공화국정부는 국제법에 의거하여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도 하였다.
1978년에 핵무기전파방지조약의 기탁국들인 미국과 이전 쏘련, 영국은 비록 조건부적이기는 하지만 이 조약에 가입한 비핵국가들에 대하여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핵불사용담보》성명을 발표한바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희망으로부터 1985년 12월 이 조약에 가입하였다.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는 핵무기를 가지고있는 나라가 핵무기없는 나라들에 핵위협을 가하지 말데 대한 내용도 담겨져있다.
조선은 조약의 이 내용을 중시하고 남조선에서 미국의 핵무기와 핵기지를 철수시키며 공화국에 대한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하고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할 목적으로 이 조약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핵무기를 가지고 공화국을 계속 위협하였기때문에 조선은 자기 기일내에 기구의 사찰을 받을수가 없었다.
공화국의 원칙적인 노력에 의하여 미국이 1992년 1월말에 《팀 스피리트 92》합동군사연습을 중지한다고 발표한 다음에야 공화국은 이 약속을 전제로 하여 조약에 가입한 후 1992년 1월 국제원자력기구와 핵담보협정을 체결하였고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허용하였다.
여러차례에 걸쳐 진행된 핵사찰과정에 조선의 핵시설이 핵무기개발과는 인연이 없으며 평화적목적에만 리용되고있다는것이 명백히 확증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국제원자력기구의 일부 계층들을 사촉하여 조선이 제출한 핵물질재고량초기보고서내용과 저들이 측정한 결과사이에 《불일치》가 있다는 주장을 들고나오게 하였다.
미국은 이어 1992년 7월 미국회 상하원 합동청문회에 국제원자력기구 총국장을 참가시켜 조선의 핵개발정형에 대하여 통보하게 한 다음 그에게 조선에 대한 《특별사찰》, 《기습사찰》을 진행하도록 강요하였다. 동시에 미중앙정보국은 위성사진을 합성하여 허위정보자료를 만들어 국제원자력기구에 넘겨주고 공화국의 두개 대상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하라고 기구 총국장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국제원자력기구는 공화국에 대한 《핵의혹》을 조성하기 위하여 기구규약과 담보협정을 위반하고 제3국이 제공한 날조된 정보자료와 인공지구위성사진자료를 공공연히 리용하였다.
영국신문 《데일리아와즈 인터내슈널》 1994년 4월 4일부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국제원자력기구는 북조선을 사찰하고 핵시설들이 평화적목적에만 리용되고있다는 <건강증명서>를 준바 있다. 그러나 미중앙정보국이 자기 간첩위성을 통하여 찍은 사진들을 제시하자 기구는 놀랍게도 제3국이 제공하는 자료들을 기구사찰에 리용할수 없다는 기구규약을 위반하고 북조선에 <특별사찰>요구를 제기하였다.》
원래 국제원자력기구는 핵산업의 총본산인 미국에 충실히 복무하고있으며 특히 미중앙정보국과 긴밀히 련결되여있다.
국제원자력기구 총국장은 1993년 2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두개 대상에 대한 《특별사찰》을 정식 제기하였다.
국제원자력기구가 《특별사찰》대상으로 찍은 《두개 장소》는 핵활동과는 관련이 없는 조선의 군사대상물이였다.
기구가 이 대상들에 대한 사찰을 강행하려는 리면에는 사찰을 통하여 조선의 군사기지들을 다 개방시키려는 미국의 음흉한 속심이 놓여있었다.
만일 조선이 기구의 부당한 사찰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곧 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탐행위를 합법화해주는것으로 되며 모든 군사대상물에 대한 전면적개방의 시초로 될것이였다.
오늘은 하나의 군사기지에 대한 개방을 요구하고 래일에는 또 다른 군사기지의 개방을 강요하는 식으로 하나하나 먹어들어가는것이 미국이 이라크에 써먹은 상투적수법이였다.
군사대상에 대한 《특별사찰》요구는 결국 미국이 조선을 무장해제시키고 자기앞에 알몸뚱이로 내세우자는 파렴치한 계책이였다.
조선은 미국의 사촉하에 《특별사찰》을 요구하는 국제원자력기구의 강도적인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공화국은 제3국의 정탐자료를 리용하지 말데 대해서와 핵활동과 관련이 없는 군사대상을 보겠다는것은 자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규탄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기구앞으로 보냈다.
이 과정을 지켜보고있던 미국은 국제원자력기구 서기국의 일부 계층과 성원국들을 조종하여 1993년 2월 25일 원자력기구 관리리사회회의에서 핵활동과 아무러한 련관도 없는 공화국의 군사대상들에 대한 사찰을 강요하는 부당한 《결의》를 채택하도록 하였다.
1995년 4월 《워싱톤 포스트》지에 련재된 장문의 기사를 보면 클린톤이 미중앙정보국을 시켜 국제원자력기구 사무국장을 미국의 의향에 따라 행동하도록 만들라고 명령했다는 내용이 암시되여있다.
이러한 강제사찰의 강도적본질은 그후 이라크사태에서 적라라하게 드러났다. 미국은 사찰의 미명하에 이라크의 대통령궁전까지 뒤지며 대량살륙무기가 있다는 《정보》를 조작하여 군사적공격의 구실로 삼았다. 나중에 이라크에 대량살륙무기가 있다는 《정보》가 허위날조였다는것이 만천하에 밝혀졌지만 때는 이미 늦어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피바다에 잠긴 후였다.
자주권을 생명으로 하는 공화국은 이러한 내막을 꿰뚫고 국제원자력기구관리리사회에서 채택된 2개의 군사대상들에 대한 《특별사찰》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특별사찰》에 응하지 않으면 《그레네이더나 빠나마, 이라크의 전철을 밟게 될것》이라느니, 그 무슨 《제재》를 가하겠다느니 하면서 위협해나서는 한편 전쟁모험의 길로 줄달음치기 시작하였다.
1993년 1월에 벌써 미국과 남조선당국은 2년전에 이미 중지했던 《팀 스피리트》합동군사연습의 재개를 공포하고 미군무력의 대기동을 개시하였었다.
미국은 조선반도와 그 주변수역에 《토마호크》순항미싸일, 《F-117》스텔스전투폭격기, 《B-1B》전략폭격기 등 핵무기를 적재한 신형전투기들과 함선, 각종 핵타격수단들을 대대적으로 집결시키고 미국본토와 하와이, 괌도, 일본 등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미군기지들에서 《신속반응전개무력》을 비롯한 20여만의 침략무력을 전쟁연습에 동원하였다. 미국은 조선의 전선과 후방을 립체적으로 타격하기 위한 《공지전》훈련을 기본으로 하면서 평양에 대한 핵탄두투하를 가상한 《B-52》의 폭격훈련, 원산과 흥남항에 대한 상륙작전을 가상한 포항앞바다에서의 대규모상륙훈련, 군사분계선지역에서의 총공격훈련 등 북침을 위한 대규모군사연습을 벌리였다. 전쟁연습기간에 미국본토와 세계 각지에 전개된 미군무력이 조선반도를 겨냥하여 대기태세에 들어가고 핵무기사용시의 지휘통신체계까지 발동되였다.
조선을 겨냥하여 무모하게 벌어지고있는 《팀 스피리트 93》합동군사연습은 조선반도의 정세를 극한점으로 몰아갔다. 심지어 미국은 조선이 한달이내에 《두개 장소》에 대한 특별사찰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수백대의 비행기로 녕변지구를 폭격하겠다고 떠들었다.
이것은 조선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서방의 신문과 방송들에서는 조선반도에서 당장 전쟁이 일어난다고 떠들었다. 서방의 TV방송들은 보도시간마다 미국의 초대형항공모함을 비롯한 수십척의 함선이 조선근해로 달리는것을 방영하면서 이제 몇시간후이면 조선땅이 날아날것처럼 고아댔다. TV들은 유엔에서 응징결의만 나오면 녕변지구에 대한 폭격에 나설 비행사들이 조종간을 쥐고 앉아있는 모습들을 방영하였다. 또한 신문과 방송들은 핵잠수함에 설치한 미싸일핵탄두의 위력을 선전하면서 그런 미싸일이 핵잠수함 한척에 수십개나 탑재되여있다, 그러니 수십척의 핵잠수함이 동시에 핵탄두를 날려보낸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겠는가고 하면서 세계를 공포에 잠기게 하였다.
세계는 불안과 위구속에 자그마한 조선이 《유일초대국》의 횡포한 핵공갈과 전쟁책동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손에 땀을 쥐고 주시하였다. 폭풍전야의 조선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였다.
정세가 엄혹할수록 승리의 신심에 넘쳐있으며 적들이 압력을 가해오면 올수록 단호하게 맞받아나가는것, 적들이 한걸음 접어들면 열걸음, 백걸음 맞받아나가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는것이 선군조선의 드센 배짱이며 기질이였다.
드디여 미국과 정면대결로 맞서려는 수뇌부의 대용단이 내려지고 전국, 전민, 전군을 조국과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결사전에로 불러일으키는 명령이 하달되였다.
1993년 3월 8일 전국, 전민, 전군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할데 대한 조선인민군
계속하여 조성된 엄중한 정세에 대처하여 공화국과 인민의 안전을 수호하기 위한 자위적조치로서 첫째, 전국, 전민, 전군이 1993년 3월 9일부터 준전시상태로 넘어갈것 둘째, 조선인민군 륙해공군부대들과 조선인민경비대, 로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전체 대원들은 높은 혁명적경각성을 가지고 적들의 일거일동을 예리하게 주시하며 원쑤들이 언제 어느때 덤벼들어도 일격에 소멸할수 있게 만단의 전투동원태세를 갖출것 셋째, 전체 인민들은 우리 당의 주체적인 전쟁관점으로 튼튼히 무장하며 한손에는 마치와 낫, 다른 손에는 총을 들고 사회주의경제건설에서 일대 앙양을 일으킬것이라는 내용이 하달되였다.
3월 9일 온 나라가 준전시상태로 넘어간 가운데 조선인민군 륙해공군부대들과 조선인민경비대의 전체 장병들은 적들의 그어떤 군사적도발도 일격에 쳐물리칠 멸적의 기세높이 일제히 전투진지들을 차지하였다.
적들의 《팀 스피리트 93》합동군사연습이 실동단계에 들어간데 대처하여 조선인민군의 땅크, 장갑차, 포병부대들이 기동하고 강력한 타격집단들의 기동훈련이 맞받아 진행되였다.
적들의 뒤통수를 족치는 철추와도 같은 군사적대응에 이어 정치사상적대응이 따랐다.
혁명의 수뇌부의 두리에 일심단결되여 일떠선 군대와 인민의 위력에 온 세계가 경탄하고 원쑤들은 전률했다.
단 한번의 명령으로 온 나라 천만군민의 힘을 순간에 미증유의 타격력으로 전환시키시는 그
전세계 모든 기자들이 백악관으로 몰려갔다. 이제 전쟁을 하고말고의 선택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북이 강제사찰을 받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공화국을 공격하느냐 안하느냐의 상황으로 변한것이다. 이러한 공화국의 조치를 두고 남조선의 한 교수도 《기막힌 묘수이자 예술》이라고 했다.
미국의 한다하는 정치가, 군사전략가들이 머리를 싸쥐고 만들어놓은 정치군사적공세《명안》이 일시에 뒤죽박죽되고 파국의 균렬이 나기 시작하는것을 피부로 느낀 미국은 공포에 질렸다. 당장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던 호전분자들은 입을 다물었으며 미국대통령 클린톤은 밤을 새워가며 안보담당보좌관들과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밀담을 벌리였다.
이어 준전시상태가 선포된지 4일만인 1993년 3월 12일 나라의 최고리익을 수호하기 위한 조치로서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공화국정부성명이 발표되였다.
공화국은 정부성명에서 나라의 최고리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한다는것을 엄숙히 선포하고 이것은 미국의 핵전쟁책동과 국제원자력기구 서기국안의 일부 계층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응당한 자위적조치이며 공화국의 이러한 원칙적립장은 미국이 공화국에 대한 핵위협을 중지하고 국제원자력기구 서기국이 독자성과 공정성의 원칙으로 돌아설 때까지 달라지지 않을것이라는것을 천명하였다.
공화국의 핵무기전파방지조약탈퇴선언은 경거망동하는 침략자, 도발자들에게 내린 드센 철추였다.
공화국의 조약탈퇴선언의 진동소리에 온 세계가 또다시 깜짝 놀랐다. 령토의 크기나 인구로 보아 미국과 대비조차 할수 없이 작은 조선이 미국의 코를 꿰여잡고 휘두르는것을 보고 폭풍같은 반향이 일어났다.
조선중앙방송을 통하여 핵무기전파방지조약탈퇴를 선언한 공화국정부성명이 전세계에 울려퍼지자 즉시로 세계 5대륙의 모든 통신, 방송, 신문들은 공화국의 핵무기전파방지조약탈퇴성명을 긴급중대소식으로 앞을 다투어 대서특보하였다.
세계의 정계, 사회계, 언론계는 《북조선의 정치사상적, 군사적힘의 과시》, 《조선의 결정은 미행정부를 쇼크상태에 빠지게 하였다.》, 《강타 또 강타! 북조선이 먼저 급소타격!》, 《주패장을 쥔 북조선, 케오당한 미국!》, 《북조선의 매운 공격, 단호한 용단, 든든한 배심앞에 미국은 쇠망치에 얻어맞은것처럼 아찔했을것이다.》고 평하였다.
특히
오스트랄리아방송은 3월 12일 공화국정부성명이 발표되자 곧 이 소식을 전하고 《오늘은 지구가 깨여지기 시작한 날》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대결은 북조선
공화국의 조약탈퇴소식에 넋을 잃고 당황망조해한것은 미국과 추종세력이였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북조선핵문제》를 유엔안보리사회에 끌고 가겠다느니, 《제재》를 가하겠다느니 하면서 입버릇처럼 외워대던 그들이 공화국의 단호한 탈퇴선언이 나가자 기가 죽어 큰소리 한번 치지 못하였다.
미국은 공화국의 조치에 대하여 《뜻밖의 일》이라느니, 《심각한 문제》라느니 하면서 취소해줄것을 간청하였다.
한편 미국내 강경보수파들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행동할것을 요구하였다. 미국무성 동아시아 및 태평양지역담당 차관보는 《북조선은 단결력에 있어서나 군사력에 있어서 특수한 나라이기때문에 미국에 어떤 타격을 가해올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일본은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이 북조선의 공격목표로 될수 있다.》고 하면서 《탈퇴결정을 철회하도록 평양과 대화를 하는것이 중요하다.》고 우는소리를 하였으며 남조선당국자들은 기세등등하던 미국이 주눅이 든것을 보고 사색이 되여 입도 제대로 벌리지 못하였다.
군사적위협과 핵압력소동으로 조선을 굴복시키려고 허장성세하며 달려들던 미국의 핵몽둥이는 여지없이 꺾어지고말았다.
결국 미국은 《팀 스피리트 93》합동군사연습을 기일을 앞당겨 결속한다는것을 공포했고 국제원자력기구는 《특별사찰》소동을 포기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직 미국의 전쟁연습의 폭음이 울리고 포연은 감돌아도 그것은 이미 패배한 적들의 단말마적인 몸부림에 불과하다는것, 적들은 전쟁의 기회와 명분, 내외세력의 지지 그리고 저들
준전시상태의 조기해제명령은 미국에 대한 또 하나의 심대한 타격이였으며 조미간의 준엄한 정치군사적대결에서 조선이 력사적승리를 이룩하였다는것을 온 세상에 선포한 선언이였다.
력사에 《총포성없는 15일대전》으로 명명된 1993년 3월의 조미대결전에서 조선은 승리하였다.
1993년의 준전시상태선포와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의 탈퇴는 20세기말과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치렬하게 진행될 조미대결에서 조선의 승리를 운명지어줄 중대한 사변의 하나로 력사에 기록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