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은 정복할수 없는 나라이다
하늘과 땅, 바다에서
1960년대 중엽에 이르러 미국의 전쟁도발책동에 의하여 조선반도정세는 매우 긴장되였다.
1962년에 《까리브해위기》를 조성하고 새 사회건설에 갓 들어간 꾸바를 요람기에 압살하려고 광분해온 미국은 1964년에는 바크보만사건을 일으키고 남부윁남에서 벌리고있던 《특수전쟁》을 북부윁남까지 계단식으로 확대하고있었다.
미국의 침략전쟁도발책동으로 세계 이르는 곳마다에서 랭전의 검은구름이 열전의 불구름으로 바뀌고있었으며 그러한 침략전쟁의 불꽃은 조선반도에까지 튕겨올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였다.
당시 미국대통령 죤슨은 남조선당국자를 워싱톤에 불러들여 북침전쟁준비와 관련한 구체적인 지령을 주었다. 한편 미국무장관을 비롯한 미륙군참모총장, 미태평양지구 총사령관 등 전쟁사환군들이 남조선에 기여들어와 전쟁도발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모의를 했다.
이에 발맞추어 공화국북반부를 겨냥한 미국남조선합동군사연습, 상륙작전연습 등 대규모적인 전쟁연습이 벌어지고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에 대비한 전면적인 전시동원체계확립을 위한 책동이 급속도로 진척되고있었다. 이와 함께 미국은 군용비행기와 함선을 수시로 공화국의 령공과 령해에 불법침입시키고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에 각종 중무기와 자동무기들을 비법적으로 끌어들여 정세를 의도적으로 격화시키고있었다.
이러한 정세는 정전후 처음 보게 되는 전례없는것으로서 전면전쟁으로 번져질 위험을 현실적으로 안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인 주체57(1968)년 1월 23일 공화국에 대한 정탐행위를 하던 미제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가 조선인민군 해군에 의하여 나포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공화국의 령해에 《푸에블로》호가 침범한것은 주권국가에 대한 란폭한 침해이며 조선에서 새 전쟁을 일으키려는 미국의 계획적인 책동의 일환이였다.
공화국의 동해안에 대한 정탐활동을 벌리면서 원산앞바다 깊숙이 기여들었던 《푸에블로》호는 미해군 전자정보수집함이였다.
미국은 이미전부터 정찰위성과 정찰기, 최신형레이다, 간첩선 등을 리용하여 다른 나라들에 대한 정보수집책동을 공공연히 벌리고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활동을 벌리고있는 미국의 간첩선을 나포한 전례는 없었다.
1960년대 미해군은 자기의 첫 간첩선인 《배너》호를 리용하여 해상정보수집활동을 벌리였다. 《배너》호는 원래 주로 마리아나제도의 산호섬들을 오가던 환경연구보조함으로써 퇴역직전상태에 있었다. 무게가 906t에 불과한 이 《배너》호는 1965년이래 여러 나라들의 령해를 거듭 침범하면서 간첩활동에서 일련의 《성과》를 거두었다.
미행정부는 이에 환성을 올리면서 이와 같은 배를 2척 더 만들것을 지시하였다. 그중 먼저 나온것이 《푸에블로》호였다. 두번째가 《팜비치》호였다.
《푸에블로》호는 1944년 미륙군의 일반보급선으로 처음 건조되여 필리핀 그 다음에는 남조선에서 활동하다가 1954년에 은퇴하여 1966년 4월 12일 다시 소환될 때가지 모항에 정박해있었다. 그후 1년 반동안 워싱톤주의 브레머톤에 있는 해군조선소에서 비밀전자정보선으로 개조되여 1967년 5월 다시 취역하였다.
《푸에블로》호가 공화국의 군사정보를 수집할데 대한 지시를 받고 일본을 출항한것은 1968년 1월 5일이였다.
배의 신호정보실에는 미국의 최첨단암호해득기중의 하나인 《KW-7》, 《KLW-1》도청수신기, 한대의 타자기 그리고 많은 량의 기밀문서들이 있었다. 문서파기를 위해 소형소각로와 서류분쇄기, 큰 망치와 도끼가 준비되여있었다.
《푸에블로》호는 1월 22일 지도상에 각각 명왕성, 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표시된 청진과 성진에 대한 전파도청행위를 진행하고 화성으로 표시된 세번째 목표인 원산앞바다로 기여들었다. 그 다음날 아침 이 간첩선은 원산앞바다 깊숙이 침입하여 도청행위를 감행하고 도망치다가 공화국의 해병들에 의해 나포되고말았다.
당시 《푸에블로》호내의 상황을 미국작가 제임스 뱀포드가 쓴 도서 《미국가안전보장국》에서 묘사한 글을 통하여 보기로 하자.
《…그무렵 <푸에블로>호주위에는 북조선어뢰정 3척이 도착하였으며 기수가 뭉툭한 <МИГ-21>기가 상공을 선회하고있었다.
부쳐는 내부통신체계를 긴급히 파괴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기술참모 레이시에게 배를 침몰시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다. 그는 배의 방수칸막이가 4개이므로 그중 2개에 바다물을 채우면 된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하려면 3시간이상이 걸린다. 레이시는 이보다 더 빠른 길은 주요엔진실의 랭각수, 취수구 및 방수구를 열고 주기관실에서부터 보조기관실로 구멍을 뚫는 방법이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하면 배는 47분이면 가라앉게 될것이였다. 하지만 문제는 구명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렇게 하려면 승무원을 많이 잃을것이라는 점이였다. 1월의 찬바다물속에서 있다가는 몇분도 못되여 다 죽게 될것은 뻔했으므로 부쳐는 이 방법을 포기하였다.
사람들을 무모한 죽음에로 몰아넣을수는 없기때문이였다.
몇초후 북조선구잠정의 57mm기관포에서 10~20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와 거의 동시에 어뢰정이 30mm기관포를 발사하기 시작하였다. 신호정보실 요원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함교꼭대기에 있던 승무원들이 조타실로 몸을 피하였다. 부쳐는 발목과 배에 작은 산탄을 맞고 쓰러졌고 모두가 갑판에 엎드렸다. <긴급파괴작전에 들어가라.>는 부쳐의 명령이 떨어졌다. 배에서는 계속 무전을 보냈다. <도움이 필요된다. 지원을 바란다. SOS. 제발 지원병력을 보내달라. …>
부쳐는 이제 도망칠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더이상의 저항은 쓸데없이 승무원들의 희생만 초래할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신호정보실에서의 정보파괴상황에 따라 더이상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기로 결심하였다.
2시경 부쳐는 비밀문서의 파괴상황을 알아보고 시간을 벌기 위해 <전원정지>명령을 다시 내렸다. 배의 정지와 거의 동시에 1 800m근처에서 발포가 시작되였다. 수많은 총탄이 <푸에블로>호의 철판동체를 뚫고 들어왔다. 배의 세탁실과 무기고, 상급사관실 등 여러 통로에 총알이 박혔다. 소방병인 호지스는 함장실근처에서 파괴용서류를 몇가지 집어드는 순간 바닥에 쓰러졌다. 다리가 거의 절단되였고 배에서 내장이 쏟아져나왔다. 근처에 있던 다른 소방병인 웨크도 면도날같은 산탄에 맞았고 해병대하사인 치카의 넙적다리에서도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또 다른 통로에서는 무전수인 크랜들이 바닥에 엎어져있었다. 그의 다리에는 톱날같이 날카로운 파편이 비죽 솟아있었다. 2시 32분 <푸에블로>호에 대한 공격을 담당한 조선인민군장병들이 배에 올라탔다. 군관 2명과 병사 8~10명이였다.
<매 순간 지시사항을 발표할 때마다 수행하라는 의미로 총이 철컥거리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라고
스튜 러셀은 당시를 회상하였다. 총이 철컥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들이 우리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1807년 버지니아주 케이프 핸리근해에서의 포격을 받아 그들의 승선을 허락하고
용감한 공화국의 해병들은 나포한 《푸에블로》호의 코를 꿰여가지고 원산항으로 유유히 돌아왔다.
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의 나포는 공화국의 정당한 자주권의 행사였으며 극동과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미국침략자들에 대한 응당한 징벌이였다. 미국신문 《뉴욕 타임스》도 《푸에블로》호의 나포는 미국에 있어서 치욕으로 된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렴치한 미국은 도적이 매를 드는 격으로 《푸에블로》호가 공해상에서 나포되였다느니, 간첩행위를 하지 않았다느니 하는 거짓말을 꾸며대면서 군사적위협으로 우리 인민을 굴복시키려고 어리석게 책동하였다.
미국대통령 케네디가 암살된 다음 그 후임으로 백악관에 들어앉은 죤슨은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자 요꼬스까에 사령부를 둔 미7함대의 주력기동부대를 조선해역에 파견하였다.
구축함과 원자력잠수함, 보급선들을 거느린 원자력추진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조선해협을 통과하여 북상하였다.
조선동해에 원자력추진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 항공모함 《레인져》호, 대잠항공모함 《요크타운》호를 중심으로 숱한 미군함선들이 집결하여 공화국을 공격할 태세에 들어갔다.
그리고 수소폭탄을 탑재할수 있는 《B-52》전략폭격기, 《F-4》 등의 전투폭격기편대 등 수백대의 비행기들이 미국본토에서 남조선의 오산, 군산 등지에 날아들어왔다.
미국은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고 《군사적보복조치》를 취할것을 결정하였으며 그에 따라 침략무력을 대대적으로 우리 나라 연해에 집결시키고 《원산을 폭격하겠다.》느니, 《비행장을 하나 폭격하겠다.》느니, 《<푸에블로>호를 돌려주지 않는 경우 미국은 핵무기를 사용할수 있다.》고 위협해나섰다.
그후 사태발전에 대해 일문도서 《
《흐루쑈브와의 핵대결에서 승리하였고 윁남에서 북부지역에 대한 폭격을 계단식으로 확대하고있던 미국과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은 북조선, 이렇게 놓고보면 그 누가 보아도 북조선에는 승산이 없었다. 쏘련도 중국도 북조선에 지원이나 련대성을 표시하지 않았다.
만단의 준비태세를 갖춘
당시 미해군의 작전계획작성자들은 만약 미군비행기들이 북조선령공을 침공하면 즉시 100대중 70~80대가 격추당할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미군정찰기들이 북조선을 촬영한데 의하면 학교, 공장들과 달리는 렬차들에도 다 고사무기가 설치되여있고 그것들이 모두 발사태세를 취하고있었다고 한다. 미군관계자들은 북조선의 반항공체계가 윁남전쟁시기의 하노이나 랭전시기의 모스크바의 반항공체계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판단하였던것이다.
다른 나라였다면 미군은 공격을 가하였을것이며 적어도 포탄 1~2발은 쏘았을것이다. 그런데 미군은 조용히 물러났다.
일본의 출판보도물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것인지 감히 해석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이 사실을 보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미군은 꾸바위기때에 대서양함대를 총동원하여 해상봉쇄를 하였으며 한순간에 미국을 괴멸시킬만 한 핵무기를 가진 흐루쑈브에게 항복할것을 강요하였고 흐루쑈브는 그 공갈에 굴복하였다. 그런데 <푸에블로>호사건에서는 도대체 누가 사죄하고 누가 승리하였는가?
굴복한것은 미국이였다. <푸에블로>호는 나포되고 승조원들은 북조선에 억류되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7함대는 조용히 조선해역을 떠나 물러갔던것이다. 미국병사들의 포로생활은 236일이나 계속되였으며 같은 해 12월 23일에 미국정부가 령해침범을 인정하고 사죄문을 발표해서야 겨우 석방되였던것이다.
이때
이처럼 북조선은 미국과의 군사적대결에서 한걸음도 물러섬이 없이 력사적승리를 이룩하였던것이다.
케네디에 의한 꾸바위기는 기록영화 등으로 미국만아니라 전세계에 반복방영되였는데 <푸에블로>호나포사건을 둘러싼 조미간의 군사적대결과 미국의 굴복은 그 이상의 력사적의의를 가지는 사변으로서 TV나 영화기록에 크게 수록될만한것이였다.》
《푸에블로》호사건이 해결된지 반년도 못된 1969년 4월 15일 그때는 미국에서 죤슨 다음으로 닉슨이 집권한 시기였다.
미국지배층은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돌아간지 넉달도 못되여 《푸에블로》호사건에서 당한 패배의 수치를 만회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공화국의 령공으로 《EC-121》대형간첩비행기를 뻐젓이 들여보냈다.
만단의 출격태세에 있던 우리의 비행사들은 즉시에 리륙하여 결정적인 타격으로 미제의 대형간첩비행기를 공중에서 박산내였다.
미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고 담보한 사죄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또다시 조선령공을 침범한것은 그 어떤 약속도 헌신짝처럼 줴버리는 미국의 파렴치성을 그대로 보여준것이였다.
미국의 록키드회사에서 제작하였고 시속 480km, 행동범위는 1만 4 000km, 약 5t 500kg의 전자기구를 적재한 최신형의 전자정찰기인 《EC-121》은 공화국에 대한 정탐행위를 하며 돌아치다 동해바다에 수장당하였다.
이 비행기에는 조선말에 능통한 6명의 인원을 포함하여 31명이 타고있었는데 모두가 황천객이 되고말았다.
《EC-121》정찰기의 격추당시 어느 한 나라의 통신은 《북조선비행대의 기습전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것이여서 그처럼 현대적인 과학기술장비로 무장한 미국의 대형정찰기
대형간첩비행기를 단방에 박산낸것은 현대공중전에서 조선식전법의 승리이며 공화국의 군사력과 배짱의 시위였다.
《EC-121》정찰기에 대한 무자비한 타격은 삽시에 세계의 모든 나라에 커다란 충격과 파문을 가져다주었으며 미행정부로 하여금 얼이 나가게 만들었다.
《푸에블로》호나포사건으로 대통령자리에서 쫓겨난 죤슨의 전철을 다시는 밟지 않겠다고 공약을 하고 대통령자리에 올라앉은 닉슨이였지만 또다시 그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서방의 언론들이 야유하였듯이 죤슨의 뒤를 이어 조선침략의 항로에 들어서서 첫걸음을 내짚었던 닉슨은 그 초입에서 조선의 강타를 당한채 셈세기에 들어가게 되였다.
온 세계는 조선이 또다시 미국의 면상을 보기 좋게 후려갈긴데 대하여 《어떻게 작은 나라 조선이 거대한 악마의 제국인 미국놈의 뺨을 후려갈겼는가? 어떻게 조선이 미국의 침략에 대처할수 있는 그러한 강력한 힘을 가질수 있게 되였는가?》고 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닉슨이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사임하고 포드가 집권한지 3년만에 일어난 판문점사건에서도 미국은 대망신을 당하였다.
판문점은 평화와 안정이 깃들새없이 불과 불, 철과 철이 첨예하게 맞서고있는 최대의 열점지대이다.
바로 이곳에서 미제는 1976년 8월 18일 도끼를 가진 불한당들을 내몰아 판문점공동경비구역안의 나무를 제멋대로 찍어내는 행위를 감행하였다.
지어 적들은 우리측 경무원들이 그러한 비법행위를 그만둘것을 경고하자 미리 대기시켜놓았던 수십명의 불한당들까지 내몰았다.
적수공권의 조선인민군 경무원들은 일당백의 무쇠주먹으로 달려드는 놈마다 강타를 먹였다.
그 기상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놈들은 졸지에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버렸다.
며칠후 평양에서는 판문점에서 위훈을 세운 전투원들에 대한 표창수여식이 성대히 열리였고 거의 같은 시각 워싱톤에서는 미군부와 미국무성의 관리들이 참석한 가운데 판문점에서 즉사한 두명의 미군장교를 추모하는 장송곡이 울리였다.
이상의 사건들에서 보는바와 같이 하늘과 땅, 바다에서의 대결에서 미국은 언제나 공화국에 참패를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미국의 망신인 《푸에블로》호를 한시바삐 반환받아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높아지는 속에 백악관을 아연실색케 하는 사건이 또다시 일어났다.
1990년대말 원산항에 있던 《푸에블로》호가 갑자기 신출귀몰하여 평양의 대동강가에 나타났던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북조선이 《푸에블로》호를 화물선으로 위장하여 북조선기발을 올리고 9일동안 남조선주변의 국제해역을 통과하여 대동강가에 끌어왔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푸에블로>호의 항해시 일본함선들이 검사하기 위해 모여들었으나 일반화물선으로 알고 물러갔다.
북조선의 항구들을 감시하는 서방정보전문가들이 위성사진들을 검토하고도 <푸에블로>호의 기동을 알아채지 못한것은 나쁜 징조이다. 그 작은 배의 기동도 알아내지 못했으니 북조선에 있어서 미국의 <전파안보발기>는 어리석은것으로 보일것이다.
<푸에블로>호사건에서 다시 찾은 교훈은 부쉬행정부가 심중한 직접외교를 거절하면 후과가 더 위험해진다는것이며 관여가 힘들고 실망을 자아내고 자주 불만족스러운것이지만 그것이 우리 손에 남아있는 유일한 선택안이라는것이다.》
도서 《미국가안전보장국》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여있다.
《<푸에블로>호는 평양을 지나는 대동강변의 한 부두로 옮겨져 관광객들에게 공개되였다. 관광객들은 <푸에블로>호나포작전에 참가하였던 2명의 북조선해군들로부터 당시의 상황을 들으며 사건을 기록한 비데오를 본다.
이와 같은 상황에도 국가안전보장국의 일부 전직고위급관리들에게는 <푸에블로>호의 마지막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과거 <푸에블로>호에 다량의 신호정보장비를 설치하였던 국가안전보장국의 계약업체들은 <푸에블로>호가 북조선의 동쪽해안에서 서쪽해안으로 이동할 때 이를 되찾지 않은데 대해 분개하였다.》
과거 조선침략에 나섰다가 대동강가에서 물귀신이 되여버린 침략선 《셔먼》호가 수장된 바로 그 자리에서 미국의 치욕스러운 침략범죄와 처참한 말로를 폭로하던 《푸에블로》호는 오늘 전승기념관으로 다시 옮겨져 미국의 《강대성》의 신화가 조선에서 산산이 깨여지고있다는것을 보여주는 력사의 산 증거물로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