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9 회)

제 4 편

17

 

이날 저녁 문상우는 곽상하의 독촉을 받고 연예공연을 보러 떠나면서 아들내외와 두 딸들을 향하여 외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만큼 특별히 문단속을 잘하고 바깥에 나다니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여느날처럼 무섭게 굴지는 않았다.

사실 오가자는 말할것 없고 조선천지를 다 돌아도 있을것 같지 않는 구경거리가 바로 제 마을에서 생겨 몇십리바깥에서까지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드는판에 새파란 젊은것들을 집안에 가두어놓고 저 혼자 나다니자니 문상우로서도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낮에 《꽃체조》가 한창일 때 아들 시준이가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있는것을 띄여보고도 못 본체 했다.

풍금소리, 바이올린소리가 가을하늘로 랑랑히 울려가고 아이들의 맑고 챙챙한 노래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실없이 젖어들게 만드는데 꽃으로 몸을 단장한 학생들이 모여들면 꽃바다를 이루고 흩어져서 짝을 무으면 《조선독립》, 《혁명 만세!》 등 갖가지 글자를 새기는것이였다. 그것은 보기에도 놀랍거니와 그러한 일을 사람들의 눈에도 뜨이지 않게 꾸며내놓은 솜씨에 더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사람마다 혀를 내두르며 손벽을 치고 칭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주관하는 김성주선생께서 문상우네 집에 류숙하신다는것이 사실이냐고 먼 동네에서 온 사람들은 따져묻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그는 어깨가 으쓱해서 흥, 이 문상우를 어떻게 보고 이래, 오가자에 집이 없어서 김성주선생님이 문상우네 집에 오셨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일세 하고 단단히 오금을 박아주군 하였다.

밤에는 삼성학교에서 연예공연이 있다고 한다. 모르기는 해도 낮에 있었던 김성주지도자의 연설이나 꽃체조 그리고 학교안팎을 닥달하고 치장해놓은 잡도리를 보면 연예공연 또한 여간한것일수 없다. 우선 처처에 매달아놓은 축등이 벌써부터 휘황한 빛을 뿌린다.

《여보시오, 적은이.》

곽상하가 두루막자락을 여미며 은근히 말했다.

님자 오늘 생각이 어떤가?》

《무슨 생각 말이요?》

문상우는 곽상하의 묻는 뜻을 짐작하였으나 모르쇠를 놓고 되물었다.

《오늘 김성주선생의 연설이랑 들으니 어떻던가 말일세. 그 꽃체조랑 보니까 좀 생각이 별스럽지 않던가 말이야?》

《내가 김성주선생의 말씀이야 처음 들었겠소. 하지만 연설은 참 굉장합디다. 꽃체조도 굉장하고 뭐 다 굉장해요. 헌데 이게 다 써레기담배진내가 꽉 배인 우리 오가자에서 일어났으니 별일은 별일이라는 생각이 듭디다.》

《내 말이 바로 그것일세. 그 청암선생이 전날 말하지 않던가. 정말 그 늙은이 말대로 시절은 변한가부야. 님자나 나나 세상을 바로보는것 같지를 않습메.》

글쎄요.》

문상우는 가슴이 띠끔해서 말끝을 흐렸다. 어쩐지 온 세상이 들고일어나 조선독립을 하자고 김성주선생의 두리에 뭉쳐드는데 유독 저만이 달팽이처럼 좁은 울타리속에 들어앉아있는듯하였다.

삼성학교 정문에는 경축이라는 글자를 써붙인 축등이 쌍으로 걸렸는데 연예공연장에는 벌써부터 툭 터지게 사람들이 쓸어들었다.

《아뿔싸, 한걸음 늦었군. 자리를 잡아낼것 같지 않다.》

곽상하가 긴장해서 중얼거리더니 담배대를 휘저으며 앞서 걸었다. 문상우도 나이행세로 어험어험 큰기침을 깇으며 뒤를 따랐다. 늙은이앞에 길을 내라는 소리다. 그러나 그들의 걱정은 공연한것이였다. 낮에 있었던 행사때와 마찬가지로 김성주동지께서는 몸소 현관까지 나오시여 그들을 마중하시였을뿐아니라 무대 맨앞에 초석을 깔아놓은 자리로 안내해주시였다.

변대우로인이며 송석담, 문상목 같은 유지들은 이미 와서 좌정을 하고있었다.

《좀 빨랑빨랑 나오지들 못하고 바쁜 사람들에게 공연한 수고를 시키는군.》

변대우로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거나말거나 좋은 자리가 생겨 기분이 훌 떠버린 곽상하와 문상우는 누구에게나 웃음을 보내고 각근히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공연장을 좀 송구한 마음으로 돌아보군 하였다. 마을의 청장년들은 말할것 없고 아낙네들, 처녀들도 적지 않게 모여들어 좋아라 웃어대고 소곤거린다.

깨끗이 비다듬고 차리고 나서서 모두 훤한게 보기도 좋거니와 얼마나 기뻐들 하는가. 그런데 자기네 딸이며 며느리들은 지금도 컴컴한 방에 누데기를 걸치고 바깥세상을 그리워하고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한편으로 녀자란 의례 그래야 하는것이니 설사 남들이 뭐라하든 조상전래의 풍습은 어길수 없다고 마음을 다지기도 하였다.

드디여 공연이 시작되였다. 삼성학교 아이들의 합창으로부터 시작된 연예공연은 녀학생들의 춤, 채수항의 요술, 리세호의 독창에 이어 계영춘이 바이올린독주를 하더니 김해산의김봉희의 독창으로 바뀌였다.

김봉희가 무대우에 나타나자 오가자사람들이 모두 술렁술렁하는 가운데 특히 오가자유지들속에서 론의가 분분해졌다.

《아니, 저게 자네 딸이 아닌가?》

문상목이가 이렇게 묻자 김해산은 점잖게 대답했다.

《우리 애지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 저 계영춘선생의 말이 우리 봉희가 오가자에서는 노래를 그중 잘한다나봅디다.》

《그래? 그 놀랍군. 그러니까 님자는 제 딸이 벌써 이 10월혁명기념행사에 참가하는줄 알았군?》

《알았지요. 나를 보나 두억시니같은 제 에미를 보나 노래를 할 래력이 못되는데 그 참 조화란 말이웨다.》

이건 완전히 동문서답이다. 일상 사회운동자들을 좋지 않게 말해오던 김해산이가 이렇게쯤 나오는것을 보고 문상목은 불끈해서 한마디 쏘아주고싶었으나 이미 리세호가 풍금반주를 시작했고 뒤에서 떠들지 말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말았다.

공연장소는 갈수록 열기를 띠여갔다. 놀라운 인물들이 무대에 뛰여나와 깜짝깜짝 놀랄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재주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오가자사람들을 그야말로 희뜩 자빠지게 놀래운것은 가극 《꽃파는 처녀》였다.

소개자가 나와서 한별동지께서 몸소 지으신 가극 《꽃파는 처녀》 보게 된다는것을 말하고 들어가자 이어 처량한 바이올린소리와 풍금소리가 울려나오는 가운데 설화가 시작되였다.

꽃분이의 아버지가 지주의 집에서 머슴을 살다가 죽은 이야기, 아버지가 못다 문 빚값에 얽매여 오빠가 머슴을 살고 지주놈의 행패때문에 동생의 눈이 멀었다는 이야기, 오빠가 분을 참을수 없어 지주놈의 집에 불을 지르고 뛰다가 들켜서 징역을 가고 그 빚을 걸머진 어머니가 또 머슴을 살게 됐다는 기막힌 이야기가 구슬픈 음조로 엮어졌을 때 사람들은 벌써 가슴이 조이여 숨소리를 죽이였다.

구슬픈 바이올린소리가 혼자 흐느끼는 가운데 꽃분이는 머슴살이고역에 병든 어머니와 눈먼 동생을 살리기 위하여 환락의 거리에 꽃을 팔러 다니게 됐으니 장차 그의 기구한 운명이 어찌될것인가 하고 설화자가 의미심장하게 여운을 끌며 이야기를 맺자 어느 먼 골짜기에서 울려오듯 꽃분이의 노래가 울려왔다. 막이 서서히 제껴졌다.


꽃사시오 꽃사시오

어여쁜 빨간 꽃

향기롭고 빛갈 고운

아름다운 빨간 꽃


애조를 띤 맑고 그윽한 노래소리와 함께 무대우에 꽃바구니를 한옆에 낀 처녀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문상우에게는 어쩐지 이 모든것이 퍽 낯익은것으로 느껴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설화의 내용은 언젠가 김성주동지께서 지주의 악랄성을 깨우쳐주시면서 들려주신 내용과 비슷하였다. 그러나 낯익다는것은 그것만이 아니였다. 꽃분이의 목소리, 생김생김까지 다 익숙한것이다. 이제는 눈도 전같지 않아서 무대우가 똑똑히 보이질 않았다. 그래 눈정기를 가다듬고 열심히 살펴보는데 노래는 계속되였다.


앓는 엄마 약 구하려

정성담아 가꾼 꽃

꽃사시오 꽃사시오

이 꽃 이 꽃 빨간 꽃


이게 무슨 소린가? 문상우는 한쪽무릎을 일으켜세웠다. 4년전 마누라가 저세상으로 떠나갈 때 생각이 피뜩 떠오르면서 눈을 비비였다.

《아니 저게 누구여? 저게 옥실이가 아닌가?》

변대우로인이 좌우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문상우는 털썩 하고 주저앉았다. 이런 변이 어데 있는가 변로인 저편에 자리잡은 형 문상목이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이어 꽃분이의 어머니로 분장한 변옥경이가 기침을 쿨럭쿨럭하며 등장하고 김해산의봉희가 눈먼 동생으로 되여 지팽이를 짚고 언니를 부르며 나타나자 옥실이에게 집중되였던 관심이 차츰 분산되였다. 무대우에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불어나자 이건 무슨 놀음놀이가 아니라 바로 오가자사람들의 생활을 그대로 옮겨놓은듯하였다. 그우에 지주로 분장한 팔옥의 청년이 개화장으로 변옥경이며, 옥실이를 사정없이 들고패자 랑패요 뭐요 하던 생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온 장내사람들이 모두 제일처럼 격분에 치를 떨었다.

《저런 죽일 놈 봤나, 남의 유부녀를 사정없이 매질하다니.…》

《아이구, 저러다가 저 내인이 죽겠수다. 아무리 신파를 놀기로서니 제 친구의 처를 저렇게 치는 법이라구 어데 있소?》

《그러게 지주란 싹 없애치워야 해요!》

이런 속삭임과 웅성거림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마침내 변옥경은 숨이 지고 옥실이와 봉희는 땅을 치며 어머니를 부른다.

《불쌍한것, 신파에서까지 에미를 잃었군.》

문상우는 저도 모르는 사이 두루막고름을 눈귀로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눈물을 흘리는것은 비단 문상우뿐 아니였다. 뒤에 진을 치고 앉아있는 아낙네들과 처녀들속에서는 쿨쩍거리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불쌍한것! 눈까지 멀다니.…》

문상우는 꽃분이의 동생이 정말 제 딸 같이만 생각되여 큰소리로 중얼거리고 곽상하는 그를 위로하느라고 무릎을 꽉 눌러주었다.

강영진이가, 분장한 꽃분이의 오빠가 조선혁명군이 되여 등장하자 온 장내에 환성이 터져올랐다. 그가 씩씩한 목소리로 일제와 지주를 반대하여 싸워나가자고 호소하는 노래를 부르자 무대우의 농민들뿐아니라 군중이 몽땅 들고일어났다.

곽만득이가 불쑥 주먹을 휘두르며 웨쳤다.

《혁명군의 말이 옳소. 우리도 싸웁시다!》

온 장내가 와- 들고일어났다.

《우리도 사가놈과 싸우자!》

누군가가 이런 구호를 선창하였다. 그러자 지체없이 《싸우자! 더러운 놈들!》하고 모두 호응해나섰다.

계영춘이가 무대우에 뛰여올랐다. 그는 이로써 10월혁명 13주년기념연예공연을 마친다고 말하고 한층 목청을 돋구어 웨쳤다.

《우리가 방금 〈꽃파는 처녀〉에서 본것은 그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올시다. 이것은 바로 여러분들이 겪고있는 생활이웨다.

그러므로 우리도 꽃분이처럼 이 세상 리치에 눈을 뜨고 한별동무가 이끄는 조선혁명군을 따라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싸워나갑시다! 일제와 지주의 횡포한 착취와 억압을 반대하여 굳게 뭉쳐 싸워나갑시다.》

와- 하고 온 장내가 한꺼번에 받아웨쳤다.

사가놈을 쳐없애라!》

혁명군두리에 뭉쳐 싸우자!》

구호소리, 웨침소리가 고조되는 가운데 오가자의 밤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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