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조선지배전략실현의 전초기지로

 

독재《정권》의 산파, 보호자

 

남조선의 한 잡지는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미국은 단순히 한국의 외교적파트너가 아니다. 미국은 한국사회의 정치적격변기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여 근현대사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존재였다는 사실에 부언이 필요치 않다.》

8. 15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조선정치사의 갈피갈피마다에 스며있는 독재《정권》의 출현과정에서 남조선정치의 방향을 규제한것은 다름아닌 미국이였으며 여기에 남조선강점 미군이 조절자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남조선에서 사대와 독재, 반통일을 부르짖는 우익보수세력이 장기간 집권하여 장장 반세기가 훨씬 넘는 오늘까지도 남조선이 외세의 식민지예속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는것은 바로 여기에 원인이 있다.

이렇게 놓고볼 때 미국이야말로 남조선독재《정권》의 산파이고 보호자이다.

미국은 남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에서 친미사대적인 우익보수세력을 형성하고 괴뢰정권을 조작함으로써 식민지지배정책을 집행하게 하는 신식민주의적지배방법에 매달려왔다.

그것은 8. 15해방후 새 사회를 지향하는 남조선인민들의 념원을 반영하여 나온 진보적인 정당, 단체들이 남조선정치세력의 절대다수를 이루고있었고 일제잔재세력은 머리도 쳐들지 못하고있었던 사정과 관련된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비법적으로 남조선을 강점한 미국은 총칼로 진보세력을 탄압하는것과 함께 저들의 지지세력, 친미세력을 육성하는데 광분하였다.

미국은 숭미사대주의가 체질화되고 미국의 식민지지배정책에 충실한 리승만세력과 친일분자들 그리고 권력욕, 치부욕에 환장이 된자들을 규합하여 저들의 정치적지지세력을 빨리 형성하는데 그 무엇보다 힘을 넣었다. 뿐만아니라 일본군대에 복무하던자들을 핵심으로 하여 식민지고용군을 조작하기 위해 책동하였으며 적산분배라는 명목을 내걸고 매판기업들을 육성하였다. 그리고 이 세력들을 《반탁》, 《단선단정》, 반북대결소동을 통하여 철저히 훈련시키고 검증하였다.

이에 기초하여 미국은 조선인민의 의사와는 배치되게 남조선에서 괴뢰정권을 조작하고 리승만을 괴수로 하는 반동적인 우익보수세력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남조선에 형성된 반동적인 우익보수세력은 총체적으로 보면 철저히 미국에 의해 육성되고 외세의존을 생명으로 하고있는 친미사대집단, 민족의 리익을 서슴없이 침해하는 매국반역집단이였다.

당시 일본의 한 잡지가 지적한것처럼 남조선《정부》는 《<독립국가>라는 선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미국의 식민지적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현지기구였으며 원조라는 미명으로 불리우는 <점령자금의 배분위원회>에 불과》(《세까이》 1961년 7월호)하였으며 《미국이 38°선이북에 있는 조선반도의 절반을 될수록 빨리 획득하기 위하여》(《뉴욕 져널 엔드 아메리칸》 1949년 9월 17일) 필요한것이였다.

리승만《정권》의 조작은 남조선을 영구강점하고 조선을 분렬시키며 전 조선반도에 대한 침략적지배정책을 실현하려는 미국의 파렴치한 음모의 산물이였으며 이로 하여 남조선의 정치, 경제적예속과 대미굴종의식의 지반이 다져지게 되였다.

미국의 남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가 계속되는 과정속에서 반동적인 우익보수세력은 더욱더 반민족적이고 반인민적인 사대매국집단으로 전락되였으며 이 매국세력의 장기집권은 남조선사회발전과 나라의 통일에 막대한 후과를 미치였다.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더욱더 강렬해지는것이 자주성을 지향하는 인민대중의 념원이고 투쟁의지이다.

남조선인민들의 반미, 반괴뢰투쟁은 4. 19인민봉기로 발전하였다.

미국은 4월 19일 즉시 《특1호》를 발동하여 리승만역도에게 지체없이 경찰병력을 총동원하여 시위진압에 나서라는 살인명령을 내렸으며 《계엄사령부》를 조직하고 중무장한 남조선군병력과 땅크, 장갑차들까지 서울시내에 투입시켜 대살륙전에 내몰았다.

그러나 굴할줄 모르는 봉기자들의 투쟁은 리승만독재《정권》의 기반을 크게 흔들어놓았으며 미국은 더는 쓸모없게 된 리승만으로 하여금 4월 26일 하야성명을 발표하도록 하여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리승만독재정치종말이후 미국은 식민지통치를 수습하기 위한 모략극으로 허정《과도정부》에 이어 장면《내각》을 련이어 조작하고 이른바 《자유》와 《민주주의》를 고창해나섰다.

그러나 미국에게는 맥을 추지 못하는 장면보다 혈기왕성한 군사깡패가 필요했다.

1959년에 벌써 미국회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 플브라이트는 남조선에서 《군인정치에 의한 교체를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고 1961년에 미국대통령으로 들어앉은 케네디앞에서 당시의 일본주재 미국대사 랴이샤워는 《한국의 미래를 계승할 사람들은 전쟁마당에서 자라난 새로운 젊은 군인들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여 미국정책작성자들속에서 비밀리에 모의되여오던 우익군사불한당들에 의한 군사정변은 미국의 정책으로 채택되고 그 준비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였다.

미국의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키고있는 대상자로 박정희가 뽑힌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였던것이다.

그후 남조선에서는 《유신》독재가 장기간 계속되고 이것으로 하여 남조선사회는 파쑈가 란무하는 반민주사회, 암흑사회로 전변되고 조국통일의 앞길에 엄중한 장애가 조성되게 되였다.

온갖 고통과 불행을 강요하는 오랜 기간의 군부파쑈독재에 대한 남조선인민들의 원한은 극도에 이르렀으며 반독재투쟁, 조국통일운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치렬하게 벌어졌다.

1970년대말에 이르러 군부파쑈독재를 반대하는 광범한 인민들의 부산마산항쟁으로 하여 남조선에서 미국의 식민지지배체계는 밑뿌리채 뒤흔들리고있었다.

당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기세를 볼 때 자주, 민주,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세력들의 조직화만 실현한다면 시대의 지향에 맞는 《정권》의 출현은 시간문제였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또다시 인민들의 완전한 버림을 받은 당시의 파쑈독재자를 그대로 두고서는 식민지통치를 유지할수 없는 조건에서 독재자를 하루빨리 제거하여야 하며 저들의 식민지지배실현에서 가장 믿을만 한 군부안의 새 친미세력에게 권력을 넘겨주어 군부독재를 연장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1979년 10월 25일 당시 남조선강점 미군사령관이였던 죤 베시는 아시아협회가 주최한 만찬회에서 《가령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26일 김재규는 박정희를 쏘아죽였고 《내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하였다.

그해 11월 5일부 《뉴욕 타임스》에는 《죽인것은 한국인이지만 지시한것은 미국이다》는 기사가 실렸다. 또한 10월 30일 미국의 국무장관 밴스는 《박대통령의 후계자선출은 한국의 내정문제이지만 상담을 해온다면 미국의 의견을 전할수 있다.》고 말해 남조선정치에 대한 개입의사를 확고하게 피력했다.

전두환군부파쑈독재《정권》의 출현은 철저히 미국에 의해 조작된것이며 이것은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할 민주정권의 출현을 바라는 남조선인민들의 한결같은 념원에 대한 용납 못할 도전이였다.

남조선에서 전두환군부파쑈독재《정권》의 출현은 권력쟁취를 위한 단순한 군사쿠데타가 아니라 미국의 조종에 의한 새로운 식민지괴뢰정권의 조작이였다.

미국은 전두환집권을 위해 5. 18광주학살에 개입하였다.

남조선군부의 아무리 높은 상층이라고 하여도 미국의 허가와 감시를 벗어나 군대를 움직인다는것은 생각할수 없으며 더우기 군부안에서 미국의 지지없는 군사쿠데타의 성공은 상상할수 없다. 미국의 지령에 따라 남조선괴뢰군이 잔인하고 류혈적인 방법으로 광주인민봉기를 탄압한데서도 알수 있는바와 같이 군사파쑈독재《정권》은 철저히 미국의 리익을 대변하고 실현하는 친미사대《정권》으로서 남조선인민들의 지향과는 극히 상반되는 반민족적, 반인민적《정권》이였다.

일본에서 발행되는 잡지 《통일평론》(1981. 9)이 전한것처럼 이와 관련하여 《백악관은 긴급수습대책살인지령문을 남조선강점 미군사령관 윅캄에게 직접 통고》하면서 봉기진압작전을 《현지에서 조종지휘할데 대한 임무》를 하달하였으며 이에 따라 윅캄은 7만여명의 방대한 무력과 장갑차, 중포, 미싸일, 군용직승기와 심지어 항공모함전단까지 광주의 평화적주민들을 살륙하는데 투입하도록 명령하였다.

전두환자신도 1980년 5월 30일 한 기자회견에서 《미국대사는 광주에서의 잔학행위는 남조선사회의 안정화를 위하여 필요한것이라고 하면서 군부세력을 고무》하였다고 미국의 배후조종과 개입관계에 대하여 토설하였으며 5월 31일 미국의 카터행정부는 《우리의 우방이나 무역상대국이 단지 우리의 인권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과 단교할수 없다.》고 발표하면서 전두환의 쿠데타를 인정했다.

1980년 5월 31일에 발표된 이른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형식상으로는 대통령보좌기관으로 표방하였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립법, 사법, 행정의 3권을 모두 집중시킨것이였다. 바로 미국은 이 위원회의 상임위원장자리에 전두환을 앉혀놓고 그가 순조롭게 《대통령》이 될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마침내 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윅캄은 AP통신과의 회견에서 《한국의 10월 사태이후 미국의 대한정책이 가장 성공한 일중의 하나는 전두환정권이 수립된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보람도 크다.》고 하였다.

이렇게 전두환은 철갑모우에 《대통령》벙거지를 겹쓰고 《정권》탈취를 위한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광주인민봉기를 통하여 남조선인민들은 미국이 해방자, 원조자가 아니라 침략자, 략탈자라는것을 인식하게 되였으며 반파쑈투쟁을 반미투쟁과 결부하여 힘있게 전개하였다.

군사독재《정권》이 집권유지를 위해 무력과 위협공갈을 일삼았지만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은 막을수 없었다.

남조선에서 1980년대는 정의와 부정의, 진보와 반동사이의 대결이 가장 치렬하였던 시기, 친미군부독재의 잔명을 끝장내기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의 불길이 거세차게 타올랐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남조선운동권에서는 사회의 식민지예속성, 그로부터 출발한 모든 사회적모순들에 대한 전면적해부가 이루어지고 인민들의 의식화, 조직화가 강화되였다.

그와 함께 남조선인민들속에서 조국통일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때보다 높아지고 각계각층의 광범한 대중을 망라하는 통일단체들이 수많이 출현하였으며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이것은 자기에게 충실한 군부독재를 통하여 남조선에 대한 통치를 실현하여온 미국의 식민지지배에 어두운 그늘을 던지였다.

1987년 군부파쑈독재를 반대하는 남조선인민들의 6월인민항쟁을 통하여 미국은 식민지지배실현에서 군부독재에 한계가 있다는것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군부독재의 운명이 경각에 달하고 이미전부터 길들여온 민간출신의 친미보수세력이 아직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원만히 실현할수 있을 정도로 자라나지 못한것은 남조선을 계속 지배하려는 미국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미국은 그후 또 한차례의 군부독재를 연장하고 이 기간에 친미군부세력의 《사민화》를 통해 반동적인 우익보수세력의 유지와 확장에 적극적으로 달라붙었다.

《민간인》의 탈을 쓴 새로운 《6공》군부독재《정권》의 조작은 이처럼 철저히 군사독재《정권》의 연장을 획책하는 미국의 배후조종에 의한것이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 더이상 친미군부세력으로는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지탱할수 없게 된 미국은 친미사대분자인 김영삼일당을 친미군부세력의 품안에 끌어들여 《문민정권》을 조작하였다.

미국은 저들의 식민지지배를 유지하기 위하여 민간출신의 친미분자를 우두머리로 하여 여기에 저들에게 충실한 《유신》잔당들과 신군부독재세력을 결합시켜 새로운 식민지《정권》을 내오는데서 출로를 찾았다. 이를 위하여 미국은 남조선정계에 소위 《민주인사》, 《야당정치인》으로 알려져있으면서도 친미사대에 물젖어있고 권력욕에 환장이 된 김영삼일당을 군부독재세력의 품안에 끌어들이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리하여 남조선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와 미국의 마수에 의하여 또다시 인민들의 의사와는 거리가 먼 민간출신의 친미보수세력과 《유신》잔당들, 신군부독재세력들을 규합한 《3당합당》에 의한 《문민정권》이 조작되였다.

한마디로 군사독재《정권》의 추악한 사생아인 김영삼《정권》은 《문민》의 간판밑에 남조선청년학생들과 인민들에 대한 파쑈적탄압을 악랄하게 감행한 《문민》파시스트집단이였다.

김영삼일당의 반민족적, 반인민적정책으로 하여 북남관계도 역시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되였으며 남조선경제는 악화일로를 걸어 국제통화기금사태라는 비극을 가져오게 되였다.

이처럼 식민지지배를 위하여 미국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미국의 모략과 간섭으로 하여 남조선인민들의 의사와는 반대로 반동적인 우익보수세력이 권력을 틀어쥐게 됨으로써 남조선인민들은 장기간의 파쑈독재하에서 신음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자주성을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이 강렬해질수록 력사의 전진을 가로막아보려는 반동들의 책동은 더욱 악랄해지고 교활해진다.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피어린 투쟁의 결과로 1990년대말에 들어와 남조선력사상 처음으로 우익보수세력은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였으며 그후 미국과 반동적인 우익보수세력의 발악적인 책동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인민들의 반미투쟁, 반보수투쟁의 결과로 2002년 《대선》에서도 또다시 우익보수세력은 자기의 집권야망을 실현할수 없게 되였다.

조국통일운동에서 전환적국면을 열어놓은 새 세기 6. 15자주통일시대에 와서 남조선인민들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치면 조국의 평화적통일도, 민족공동의 번영도 이룩해나갈수 있다는것을 실생활을 통하여 체험하게 되였다.

남조선인민들은 공동선언을 리행하기 위한 투쟁을 통하여 미국이 조국통일의 근본장애물, 조선반도평화의 파괴자라는것을 똑똑히 인식하게 되였다.

남조선의 친미보수《정권》을 되살리지 않고서는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원만히 실현할수 없다고 본 미국은 조국통일과 남조선사회의 진보적발전을 가로막기 위하여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미국지배층은 2007년 《대선》을 계기로 저들의 식민지지배정책을 대변할수 있는자를 권력의 자리에 올려앉히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1945년 미군이 인천항에 상륙한이래 미국은 언제나 남조선정치인들의 동향을 주도세밀하게 미리 파악해오고있다. 미국의 수법은 20세기나 21세기나 변함이 없다.

미국이 반미적동향이 짙은 남조선인물들을 장악하고있는것은 그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적절한 대응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철저한 검증작업에서 통과된 리명박이 집권하자마자 《한미관계우선론》을 들고나온것은 결코 우연한것이 아니다.

남조선에서 미국의 제일가는 주구, 특등하수인인 리명박은 집권초기부터 《민족공조보다 국제공조가 우선이다.》, 《북의 견해보다 미국의 립장을 우선시해야 한다.》, 《10년간 비틀거리던 <한미동맹>관계를 이제는 확고한 궤도에 올려놓았다.》는 매국망언들을 늘어놓았다. 리명박《정권》은 겨레의 지향은 아랑곳하지 않고 북남관계를 전면파괴하고 남조선사회를 완전히 외세의 롱락물로 만들어버렸다.

현 남조선집권자도 권력의 자리에 올라앉자마자 미국남조선《련합군사령부》부터 찾아가 《피를 흘린 혈맹》이니, 《새 정부는 한미동맹을 미래지향적으로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것》이라느니 뭐니 하며 온갖 교태와 아양을 다 떨었다.

언제인가 미국무성에서 고위관리로 근무하던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을 움직이고있는자들은 자기들이 직접 한국의 배신자, 매국노들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손아귀에서 마음대로 굴린 다음 한국국민들이 매장하도록 오점과 추문을 내돌리며 시기를 보아 실각시켰다가 자기들에게 정 불리할 때에는 숨통을 끊어 완전히 매장해버린다. 두번다시 말 못하게 공동묘지에 매장하는것까지 걱정해준다.》

식민지《대통령》을 떼고 붙이는데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미국상전들만이 할수 있는 결단이고 위협이였다.

괴뢰정권의 수장자리에 특등하수인을 올려앉혀놓고 남조선정치를 쥐락펴락하려는 종주국인 미국의 전략은 어제도 오늘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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