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회)

제 2 편

9

(2)


김성주동지께서는 활달한 붓글씨로 담화내용을 기록하면서 까다로운 문제를 자꾸 끄집어내는 그의 진지한 표정을 지켜보시였다.

그 표정에는 장차 국제당에서 있을수 있는 말썽에 미리 대처하자는 호의도 엿보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자신의 말과 같이 조국도 사랑하고 혁명도 사랑하지만 너무 오래동안 조국현실과 멀리 떨어져서 혁명의 일반적원리문제에 대해서만 말하고 사색하는데 버릇이 되여 조국의 생동한 표상은 적지 않게 희미해진듯한 느낌도 들었다.

김혁이의 얼굴이 또다시 떠오르시였다. 그가 이 자리에 있다면 저 김광렬의 모습에서 자기의 지난시절을 읽어볼것이고 무엇인가 태를 치고 짓태울것만 같은 심중의 고백을 터뜨렸을것이라는 생각이 드시였다. 바로 자신이 지금 김혁을 대신하여 그가 터뜨리고싶었을 심중의 목소리까지 그에게 전달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시였다.

광렬동무.》

김성주동지께서는 끊임없이 붓대를 놀리는 김광렬의 팔을 붙잡고 말씀하시였다.

《뭘 자꾸 씁니까? 나하고 이야기를 합시다. 이 이야기는 순수 리론문제도 아니고 말마디에 대한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 혁명, 우리 조국의 운명에 대한 문제입니다. 광렬동무가 쓰지 않는다고 그것을 기억 못하겠습니까?》

김광렬은 김성주동지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결단성있게 벼루를 드르륵 한옆으로 밀어내놓고 붓을 놓았다.

그리고는 만나서 벌써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전혀 볼수 없었던 웃음을 처음으로 히죽이 웃었다. 그것은 놀라운 인상이였다. 그렇게 딱딱해보이는 사람이 그런 웃음을 지을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수없는, 마치 장난꾸러기와 같은 순진한 웃음이였다. 웃는 바람에 웃이 한대가 빠진것이 드러나서 그의 인상을 더 부드럽게 해주었다.

《이거 보겠습니까?》

김광렬은 김성주동지를 바라보며 손으로 자기의 벗어진 머리를 가리켜보이면서 누가 들을가봐 저어하듯 입속말로 소곤소곤 말하였다.

《내 머리가 무엇때문에 이렇게 굳어졌는지 압니까? 바로 1920년 2차대회에서 국제공산당에 가입할수 있는 스물한가지 조건을 결정하지 않았습니까? 일국일당제원칙도 그속에 있지요. 조선공산당이 제명된것도 그 조건에 걸렸지요. 그러다나니 내 머리는 그 21개조로 꽉 들어차버렸습니다. 허허허, 그래 말씀하시오. 나도 혁명을 잘하자는것이지 원칙의 준수자체를 목적으로 삼자는것은 아닙니다.》

그다음은 한결 말이 잘 통하는듯 하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정적으로 말씀하시였다.

《복잡한 론쟁이 필요없습니다. 실천은 진리의 시금석입니다. 동무도 아까 말했지요. 일제는 림박한 중국침략을 앞두고 조선사람들과 중국사람들의 사이를 리간시키려고 갖은 책동과 모략을 다하고있습니다. 그런 실례는 허다합니다. 일제는 중국인민들의 민족적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음에도 없는 조선사람들의 리권을 보호한다는 구실밑에 일부러 중국사람들의 리익을 침해하고있습니다. 이번 폭동의 배경이나 처리에서도 그런 간교한 타산이 명백히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일국일당제원칙이 있다고 해서 조선혁명의 성격이나 일제의 이런 정책은 안중에도 없이 중국사람들을 자극할뿐인 폭동을 계속 조직하도록 추동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방향으로 나간다면 머지않아 일제가 정작 중국침략을 시작했을 때 그것을 반대하는 공동전선을 펼수 있을것 같습니까? 우리가 일제를 반대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면서 이런 졸렬한 현실을 빚어낸 교조주의적 사고방식을 타파하지 않는다면 장차 일제와의 싸움을 하기 전에 응당 일제를 반대하는 한전선에서 싸워야 할 사람끼리 피투성이싸움을 하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 크게 우려됩니다.》

김광렬은 안경알속에서 의심쩍은듯한 눈매를 까딱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듣고있었다. 때로는 고개를 떨구기도 하고 때로는 눈길을 돌리기도 하였다. 대체로 그런 때는 그가 그이의 론증이나 주장에 공감된 때였다.

자기가 한 말이나 주장이 직접 분석될 때는 얼굴이 벌개져서 안절부절하다가 문득 생각난듯이 차를 따라놓기도 하였다.

이야기는 반나절 가까이나 걸렸다. 김광렬은 미안한 표정을 짓기도 하였으나 어느덧 그이의정적인 말씀에 끌려들어 시간가는줄을 모르고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마감에 그는 벌떡 일어나며 그이의 손을 덥석 그러잡았다.

김성주동무, 참 고맙습니다. 나는 이처럼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개인적인 견해를 말할 권리는 없지만 나도 어쨌든 조선사람입니다. 나는 조선사람으로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로서 말합니다. 김성주동무의 주장은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인것입니다. 아까도 말했습니다만 지금은 아직도 독창적인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활동가들이 국제당안에도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조선혁명에 대한 리해를 깊이 하고있는 동지들은 솔직히 말해서 그리 많지 못합니다. 나부터가 이를테면 국제당의 중요문헌들만 알았지 조선혁명의 산 현실에 대해서는 깊은 리해가 없었습니다. 나는 오늘에 와서 우리 혁명의 성격과 임무 그리고 그 발전의 전망을 환히 알게 되였습니다. 나는 우선 개인으로서 카륜회의방침을 지지합니다.

광범한 인민대중의 힘을 묶어세워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전개한다는것은 참으로 통쾌합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적무장이 태여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과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나는 김성주동무의 말을 듣고 이것이 이미 약속된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아직은 국제당의 명의로 말할수가 없습니다. 급히 이 문제를 지도부에 반영하겠습니다.》

《나는 그 해답을 기다렸다가 행동할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조직들이 파괴당하고있고 많은 사람들이 갈길 몰라 헤매다가 체포되고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이길로 곧장 동만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물론 해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자체로서 세울수 있는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그러나 동만으로 당장 나가는 문제만은 며칠동안만이라도 기다려주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지금 간도일대의 정세는 교하정도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직접 일제령사관경찰과 헌병들이 날뛰기때문에 대단히 위험합니다. 우리가 먼저 내보낸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의 통보를 기다려보는것이 어떻겠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잠시 생각하시다가 말씀하시였다.

《그렇다면 동만일대에 대한 그 통보를 될수록 기다려봅시다. 그리고 내가 할빈을 떠난 다음 필요할 때마다 이자 나와 함께 온 한영애동무와 련계를 계속 가져주십시오.》

김광렬은 김성주동지의 말씀을 듣고 호인같은 웃음을 띠였다.

《참 고맙습니다. 그럼 오늘중으로라도 자료를 종합해보겠습니다.》

《뭐 고마울게 있습니까? 사실은 내가 신세를 지는셈인데…》

《아닙니다. 사실…》

김광렬은 수집음을 타는 소녀처럼 잠시 쭈밋거리더니 별안간 노기어린 목소리를 터뜨렸다.

《여기에 별의별것들이 다 왔댔습니다. 자기야말로 조선공산당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우쭐대면서 비굴하게 눈치를 슬슬 보며 상상하기 어려운 초혁명적인 언사를 휘둘렀습니다. 그리고 자기야말로 국제당로선에 충실하다는것을 인정해달라고 애걸했습니다. 나는 그때마다 조선말을 할수 없었습니다. 화요파나 엠엘파의 많은자들이 아마 김광렬이라는 사람이 리해성 없고 돌로 깎아놓은것처럼 딱딱하고 랭정하던 인간을 중국사람인줄로만 알고있을것입니다. 오늘 김성주동무를 만나 이렇게 마음놓고 우리 말을 하고 고국에 대한 향수에 잠겨보니 어쩐지 가슴이 젖어듭니다. 언제 또 만나게 되겠는지… 나는 곧 모스크바로 가겠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청이요?!》

《청이라 할지 권고라 할지. 모스크바에 국제당에서 운영하는 공산대학이 있는데 그곳에서 공부하고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내 보기엔 성주동무가 아주 적격자입니다.》

《그러니 류학을 가라는 소리군요?》

《예. 지금같이 정세가 어수선할 때 안전한 곳에서 공부를 더 하는것도 나쁘지 않지요.》

김성주동지께서는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의 마음이 고마우시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첫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산대학에 가고싶은 생각도 간절하시였다. 언제인가 그런 대학이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으시였을 때 벌써 마음이 쏠리시였다. 공산주의를 하겠다고 나선 청년이라면 누구나 그 대학에 가고싶어했지만 선뜻 기회가 차례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만주지방에 《모스크바류학가》라는 노래가 다 류행되고있겠는가.

허나 지금 그이의 눈앞에는 번화한 거리, 모스크바대학의 아늑한 교정이 아니라 짓밟히고 신음하는 조선민족의 비참한 모습이 더 강렬하게 떠오르고있었다.

가고싶어도 지금은 갈수 없습니다.》

그밖에는 더 다른 말씀을 하고싶지 않으시였으나 자신을 생각해서 권고했을 김광렬에게 너무 미안한것 같아 말씀을 다시 이으시였다.

《날 생각하는 그 마음은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파괴된 조직을 두고, 신음하는 민족을 잠시나마 잊고 내가 어디로 가며 만약 간다고 하여도 편안히 발편잠을 자겠습니까. 난 이럴 때일수록 모스크바가 아니라 인민들속에 들어가겠습니다. 민중은 나의 대학이고 인민은 나의 변함없는 선생입니다. 그들속에 혁명실천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풀수 있는 열쇠도 방도도 있습니다.》

그이의 절절하신 말씀에 김광렬은 감동에 젖어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했다. 마침내 그는 심장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듯한 웅근 음성을 터치며 그이께 말씀올렸다.

《이제야 조선이 진정한 애국자, 위대한 혁명가를 맞이한것 같습니다. 그럼 류학문제는 잠시 미루더라도 포기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정세가 좀 유리해지면 우린 또 권고하겠습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참된 혁명적우정을 느끼며 그의 손을 굳게 틀어잡으시였다.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