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제 1 편
1
하늘도 땅도 화끈 달아올랐다. 어디를 보나 불볕이 이글거려서 눈을 쪼프리지 않고는 아득한 지평선도, 끝없는 하늘도 바로볼수가 없다.
지평선 저끝에 드리운 보라빛하늘변두리에서는 무엇인가 바글바글 끓으며 반짝이는데 어찌 보면 그것은 땀을 뽑히우다못한 땅덩어리의 고뇌가 엉겨붙은 소금버캐같기도 하다.
초원 한끝에서 종달새 한마리가 놀랄만큼 청높은 목소리로 우짖으며 이글이글 타번지는 불덩어리같은
바람 한점 없다. 풀대도 수수대도, 길가에 껑충하니 선 느릅나무도, 곱슬버들도 모두가 데쳐놓은듯 휘주근하게 잎을 드리우고있다. 한창 피여나는 두엄내같은 씁쓸하고 들크무레한 풀내가 물씬물씬한다. 그것은 지심깊이에서 억센 생명을 키워내는 대지의 신선한 체취같기도 하였다.
그 구수한 냄새를 가슴가득 들이마시며 소옥은 저만치 앞서서 춤추듯 걸어갔다.
만물이 지독한 복더위에 숨을 죽여버린 이 초원 한복판에서 생기를 띠고있는것은 오직 소옥이 한사람뿐인듯 하였다.
카륜 쟈쟈툰어방이 비록 벽촌이기는 하지만 길장철도를 끼고있는데다 사회혁명가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고 지난달에 있은 카륜회의때에는 유명한
그래서 그런지 소옥은 마치 들놀이에 가는 아이들처럼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앞에 서서 걷다가는 풀이며 하늘이며 장마며 기차시간이며 하는것에 대해 무엇인가 새로운것을 생각해내여 일부러 뒤따라오시는
소옥은 또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은회색치포자락밑으로 한쪽무릎을 재치있게 구부리고 들꽃 한송이를 꺾어들더니 이쪽을 돌아보며 하얀 이속을 드러내고 웃는다. 무엇인가 또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모양같다.
소옥이가 멎어서는 바람에 무의식중 걸음발을 늦추신
소옥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꽃냄새를 맡아보며 말없이 걸음을 옮겨놓자 차광수가 좀 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성주동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다시한번 잘 생각해보지 않겠소? 난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만.》
《아니, 왜 또 그러오?》
안경알속에서 어딘가 수심이 비낀듯한 침착한 눈길이 소옥의 뒤모습을 지켜보고있다. 진한 눈섭과 넓은 이마와 검은 눈동자는 차광수의 지성과 열정을 나타내고있었지만 그것들은 땀발을 타고 무시로 흘러내리는 검고 굵은 안경테에 가리워 잘 드러나지 않고 지금은 약간 기우뚱한 고개가 그의 신중성만을 강조하고있는듯 하였다.
차광수의 신중한 표정은 리해할만 한것이다.
달포전에 카륜회의가 있었고 그 결정을 직접 맡아서 집행할 조선혁명군이 고유수에서 조직되여 각 대의 핵심들이 국내로, 국경지대로, 광활한 남북만주의 각 곳으로 흩어져갔다.
포부는 크고 과업은 방대하고 정세는 준엄하였다.
좌경망동분자들이 저질러놓은 5. 30폭동의 후과를 수습하기도 아름찬 형편에서 종파분자들이 또다시 돈화일대와 할빈에서 폭동을 준비하고있다는 통보가 날아들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적들의 반동공세가 더욱 강화되고 압록강국경일대에서는 특히 적들의 간교한 음모가 대대적으로 진행되고있다는것이였다.
이런 때 카륜, 고유수일대에 틀고앉아 직접
《그래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게 무어요? 내가 해룡으로 간다는것이요, 소옥이를 할빈으로 보낸다는것이요?》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소.》
차광수는 여전히 뚝뚝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실 고유수를 떠나기 전에도 말했지만 악질특무놈들이 압록강일대에서 날뛴다는것이 아무리 중요한 문제라 하더라도 그때문에 성주동무자신이 바로 그 악독한 놈들을 맞받아갈 필요가 어데 있단 말이요? 모르긴 해도 후꾸다란 놈이 제 끄나불들을 가지고 가짜공산주의자들을 조직하여 조선사람들의 한복판으로 내보낼 때 첫째로 념두에 둔것이 성주동무자신일수도 있단 말이요. 최창걸동무도 그 통보에 직접 그렇게 쓰지 않았소?》
《허허허, 또 문제를 어마어마하게 세우는군. 그러기에 내가 가짜공산주의자들을 찾아간다는거요, 뭐요? 차동무, 그 문제는 그만하기요. 고유수에서 이미 다 토론하고 떠났고 카륜에 도착해서도 다시 토의하지 않았소.…
사실 우리가 카륜회의결정을 집행하는데 무엇이 중요하다, 무엇이 중요하다 해도 결국 우리 인민자신의 힘으로 우리 혁명을 수행하자니 제일 중요한것이 국내에다 거점을 꾸리는 문제가 아니겠소. 그런데 우리가 국내로 보내자고 하는 공영소조가 바로 그놈들의 코앞에 있단 말이요. 공영동무는 천하가 다 아는 순박한 호인인데 가짜공산주의자라는것이 입으로는 조선독립을 웨치고 다니는 총독부 경무국의 악질특무들이 아니요? 서뿔리 련락원이나 띄워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요. 게다가 해룡과 청원일대의 조직형편도 내쳐둘수 없는 형편이니 어찌겠소. 그러니 이 문제는 다시 론의하지 맙시다. 기왕 길을 떠났는데 아무렴 내가 여기서 발걸음을 돌릴것 같소?》
《그런데 간밤엔 소옥동무 문제는 말도 없더니 웬일이요?》
《어제밤에야 첫째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으니 둘째 문제로 넘어갈 경황이 없었지요.》
차광수는 다시 심중한 낯빛이 되여
《그건 차동무답지도 않군. 시험을 치는데는 요령이 있어야 한단 말이요. 첫째 문제가 잘 안 풀릴 때는 제꺽 다음문제부터 풀어놓고 여유가 생기면 그때 다시 첫째 문제로 돌아오면 될것 아니요. 그러나저러나 소옥동무를 왜 못 보내겠다는거요?》
차광수는 피뜩
《저것 보시오. 어찌나 좋았던지 그야말로 할빈으로 달리는 마음이 화살같다는 표정이 아니요.》
《그게 뭐 나쁘오? 중대한 혁명과업을 받아안고 흥분해서 달려가는것이야 얼마나 좋은 일이요.》
《그럴수도 있겠지요, 승소옥동무는 워낙 열렬한
《흠, 차동무가 경험있는 소리를 하는것 같다… 그래 소옥동무와 김혁동무사이가 그런 사이라는것은 확실하오?》
《아니, 그걸 여태 모른단 말이요?》
차광수는 놀랍다는듯이 걸음발을 늦추고
《글쎄, 그러루한 소문은 들은것 같은데 좀 미타해서 그러오. 차동무야 김혁동무와 남다른 사이니까 자세한 내막을 알겠지.》
《틀림없소. 김혁이가 불길이라면 소옥이는 기름이요. 둘이 부딪치면 활 불타오르고말게요. 적의 눈초리가 가시밭같은 할빈에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단 말이요.》
차광수는 안타깝게 두손을 내흔들며
《허허허, 그렇다면 내가 옳게 판단했구만.》
차광수는 영문을 몰라 걸음발을 늦추고 눈을 슴뻑거렸다.
《사실 그렇다면 이게 얼마나 좋소? 차동무, 소옥동무와 김혁동무의 관계가 그런 사이가 아니란다면 솔직히 말해서 수많은 혁명군대원들가운데서 하필 소옥동무를 선발할것도 없단 말이요. 소옥동무가 장춘이나 길림 같은데서 지하공작을 한 경험이 일정하게 있기는 하지만 그게 뭐 대단한것은 아니지 않소.》
《그렇다면?》
차광수는 일부러 말끝을 얼버무렸다.
《나는 김혁동무와 소옥동무를 함께 공작하게 해주고싶었소. 그것도 단순한 감상적인 생각에서 출발한것은 아니요. 차동무가 늘 말하다싶이 김혁동무는 시를 쓰라면 어디에 내다놓아도 손색이 없겠지만 혁명을 하러 나선 지금형편에서 가장 로련한 지하공작원이 될수 있겠는가 하는 점에서는 그닥 큰
《그래 어떨것 같소? 그런 김혁동무에게 소옥동무가 중대한 통보를 가지고 간단 말이요. 그렇게 되면 김혁동무가 누구앞에서보다 더 신중해지지 않을가… 사실 할빈같은 번화한 도시에서 남자들끼리 접촉하고 함께 돌아가기보다는 청춘남녀가 함께 있는것이 훨씬 자연스러울거요. 그러니 위장에도 좋겠지만 소옥동무도 김혁동무를 잘 아는만큼 늘 옆에서 누이처럼 돌봐줄것 같단 말이요. 또 반대로 소옥동무에게 어떤 위험이 닥쳐온다 해도 김혁동무가 온몸으로 막아주지 않겠소. 그리고 두사람이 다 서로 도와줄뿐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앞에서 가장 훌륭하게 행동하자고 할것이요. 사랑이란 그렇게 고상한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오.》
《정말 성주동무도 김혁이 못지 않은 공상가요.》
차광수는 이렇게 말했으나 이미 아까와 같은 고집스러운 어조는 아니였다.
《이를테면 시인이라는 말같은데 내가 시를 쓰라면 못쓰겠지만 밑천 안 드는 공상이야 왜 남만큼 못해보겠소. 사실 우리 혁명이 간고하긴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끼리 함께 사선을 헤쳐갈 때 곁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겠소. 나는 우리의 멋쟁이혁명가인 김혁이와 〈길림의 꾀꼴새〉로 소문난 소옥이가 함께 할빈의 번화가를 걸어가는 모습을 그려보면 절로 힘이 나고 우리 혁명이 얼마나 그럴듯한 혁명인가 하는 자부심이 생긴단 말이요.》
차광수는 황토먼지가 피여오르는 길을 내려다보며 묵묵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왜 말이 없소?》
《나로서는 둘째 문제도 풀기 힘들다는것을 느꼈기때문이요.》
《그건 무엇때문이요? 할말이 있으면 단단히 론리를 세워서 내대여보오. 론쟁을 해봅시다. 아직 카륜역까지 댓마장은 실히 남았는데 그사이면 한두문제쯤 충분히 론쟁할수 있소.》
《아니, 그만두겠소. 성주동무의 생각에 내 심장이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단 말이요. 앙상한 론리를 내대봐야 뭘하겠소. 다만 걱정은 여전히 가셔지지 않소.》
《그렇게 빨리 자기 주장을 철회해버리면 싱겁지 않소. 그러나저러나 차동무의 말을 듣고보니 나 역시 소옥동무에게 다시한번 임무의 중요성을 강조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여기 그늘이 좋은데 땀을 좀 들이고 가지 않겠어요? 차시간때문에 어차피 정거장에서 기다려야겠는데…》
소옥은 벌써 양산을 접어들고
행인들이 의례 쉬고 가군 하는 곳이였다.
차광수도 어깨에 걸쳤던 괴나리보짐과 학생복저고리를 한데 뭉그려 나무밑에 집어던지고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기 바쁘게 물속으로 뛰여들었다. 헤덤비며 머리를 물속에 잠그던 그는 별안간 《아이쿠.》 소리를 지르며 한길이나 뛰여올랐다.
강가의 풀숲에 앉아 손끝으로 물을 튕기며 미소를 짓고있던 소옥은 눈이 둥그래지고
《웬일이요?》
《이것 보시오.》
차광수는 물살에 밀리워 한쪽다리가 겨우 귀바퀴에 걸려있는 안경을 벗어들었다. 물에 잠겼던 안경은 물방울을 뚝뚝 떨구며 눈부시게 해빛을 반사하였다.
《허허허, 차광수동무가 신중하다는 말은 공연한 소리군.》
지금도 그는 서글픈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하는것이였다.
《안경이 혁명하는데 얼마나 거치장스러운 물건인지 알기나 하고들 웃는지… 사실 이게 리종락동무같은 변장용 개화경이라면 얼마나 좋겠소.》
《안경을 끼고도 혁명을 잘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소. 그러나저러나 안경을 끼고 물속에 들어가는것이야 차동무의 특수한 건망증인데 그게 혁명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걸고드는거요.》
《왜 상관이 없겠어요.》
소옥이 깔깔 웃으며 한마디 하였다.
《차광수동무는 혁명의 원리도, 사회현상도 모두 그 안경을 통해서 봤으니 안경만 벗는 날이면 다른 견해가 생길지도 모르지요. 방금 한 말도 안경을 썼을 때 하고는 퍽 다르게 들리는데요 뭐.》
나무그늘에 와앉았을 때
《고유수에서 과업을 줄 때도 말했고 어제밤 진명학교에서 진행된 협의회에서도 말했지만 종파분자들이 5. 30폭동의 연장으로 새로운 폭동바람을 불러일으키자고 도처에서 미쳐날뛰는 가운데 특히 돈화와 할빈지구가 위험하다는것이 강조되였소. 그게 무엇때문인지 알만 하오?》
《대강은 알고있어요. 돈화는 원래 종파들의 세력지반이 일정하게 있던 곳이고 할빈에는 국제당련락소까지 있으니까 그런데서 폭동을 일으켜야 더 유명해지고 국제당이나 중국당의 인정을 받기가 쉽다는것이 아니겠어요.》
소옥이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암송하듯이 또박또박 대답하였다.
차광수는 그가 틀린 소리라도 할가봐 왼심을 쓰며 지켜보다가
《옳게 말했소. 그래서…》
《그래서 소옥동무가 이렇게 부랴부랴 할빈으로 가는건데… 이미 돈화에는 진한장동무가 있고 할빈에는 김혁동무가 나가있소. 그 동무들이 그런 사정을 기본적으로는 다 알고있소. 우리가 카륜회의에서 새롭게 천명한 로선과 방침을 관철하자면 우선 종파분자들이 저질러놓은 5. 30폭동의 후과를 수습해야 하겠기때문에 우리는 그런 부문에서 이미 적지 않은 사업을 했고 지금도 많은 력량을 투입하고있소. 김혁동무가 카륜회의결정을 가지고 할빈지구에 가서 하고있는 사업이 바로 5. 30폭동의 후과를 수습하고 우리의 새 로선과 방침을 침투시키는거란 말이요. 그런데 왜 소옥동무를 또 보내는가? 어제 채수항동무가 돈화에 갔소. 말하자면 지금 수행하고있는 일반적인 사업 이외에 당장 준비되고있다는 무모한 폭동을 사전에 막고 폭동에 궐기한 인민들의 혁명기세를 잘 조직화하기 위한거요. 그래서 돈화에 이미 진한장동무와 같은 믿음직한 조직원이 있지만 채수항동무와 같은 가장 로련한 공작원을 련락원으로 보냈단 말이요. 그런데 할빈의 사태는 더 험악하오. 종파들가운데서도 한다하는 〈거물〉들이 밀려드는데다 그쪽조직들이 아직 우리가 결정한 새 로선을 잘 모르다나니 흔들흔들한단 말이요. 만일 할빈에서 폭동이 터지는 날이면 그 상처는 치명적일수도 있소. 그래서 적의 특무들도 그쪽을 노리고있단 말이요. 그러니까 동무들 둘이서 우리 혁명에 또다시 다가오는 이 위험을 어떻게 하나 막아내야 하며 그 어렵고 복잡한 과업을 끝까지 실속있게 수행하자면 우선 동무들자신이 어디까지나 안전해야 한단 말이요. 적들앞에서 자기 정체를 드러내기 두려워않고 큰소리나 치는것이 용감한가 생각하는 천진란만성을 버려야 하오. 동무들의 임무는 그야말로 책임적이요. 이런것을 김혁동무에게 정확하게 전달할뿐아니라 어떻게 집행하는가 하는것을 잘 살펴봐야 하겠소. 소옥동무는 직접 우리의 위임을 받고 가는것만큼 만일 김혁동무가 부정확하게 나갈 때는 제때에 바로잡아야 할 의무와 권한을 가지고있단 말이요.》
말없이
옆에서 소옥이의 거동을 지켜보던 차광수는 자기의 우려가 충분한 현실적근거를 가지고있다는 또 하나의 유력한 증거를 잡아쥔듯 하여 미간을 찌프렸다.
다시 길을 걷게 됐을 때 차광수는 일부러 한발 떨어져서 소옥을 눈짓해 불렀다.
그런 눈치를 채신
《
차광수는 처음부터 딱딱한 어조로 직판 말했다. 소옥은 놀라서 돌아보았다.
그야 뻔하지 않는가. 방금도
긴 살눈섭이 슴뻑거리는 소옥의 그 눈길은 말보다도 훨씬 섬세하게 처녀의 미묘한 마음속을 표현하고있었지만 차광수는 그까짓것은 대수롭지 않다는듯 투박하게 말해버렸다.
《
《어마, 그건 무엇때문에?…》
소옥은 이번에는 무척 놀란것처럼 했지만 뒤를 잇지 못했다. 차광수의 솔직한 대답을 듣기가 두려웠던것이다. 그러거나말거나 차광수는 같은 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바로 그때문에 반대했소. 김혁이같은 양은쟁개비가 하루아침에 로숙한 공작원이 될수 없을것은 뻔한데 여기에 소옥이같은 남자번지개까지 보내놓으면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라고 말이요.》
소옥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겨놓으며 차츰 표정이 엄숙해졌다. 가슴속깊이 아무도 모르게 묻어둔 처녀의 소중한 비밀이 백주에 드러났을 때 부끄럽고 당황했던 마음은 차츰 차광수의 투박한 말뒤에 숨어있는 자기와 김혁이에 대한 진정한 혁명적우정에 감싸여지면서 마치 먼길을 떠날 때마다 다심한 걱정을 해주는 친부모의 말을 듣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광수는 방금전에
소옥은 겁먹은듯한 커다란 눈을 뜨고 마른침을 꼴깍 삼킬뿐 대답을 못했다. 차광수는 무슨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는듯이 인차 말을 계속했다.
《나 역시
차광수는 어느새 부드럽게 번져가는 자기 어조에 놀란듯 전처럼 엄한 표정으로 돌아가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나는
차광수는 마지막말을 그답지 않게 갑자르며 힘들게 말했다.
소옥은 이번에도 말을 못하고 고개를 더 숙여버렸다.
한참 침묵이 흐른 후 차광수는 어딘가 개탄 비슷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옥동무, 똑똑히 기억하시오. 김혁이는 재능있는 시인이지만 모범적인 애인은 못될거요. 속을 썩일 각오를 해야 할거요.》
소옥은 여태 얌전히 숙이고있던 고개를 들고 피씩 웃었다. 여태는 이래저래 암시나 하는 정도였지만 이처럼 찍어서 애인이라는 말을 하는데는 가만있을수 없다는것이였다. 그러나 차광수는 그 웃음을 달리 해석하고 성이 난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웃소? 아마 내가 아직은 소옥동무보다 김혁이를 더 잘 알거요.》
《그야 그렇겠지요. 내가 아는 김혁동무야 시를 쓰고 연설을 하고 녀자들을 깔보는 그런것밖에 있겠어요. 허지만 차광수동무는 동경때부터 한하숙방에서 3년씩이나 술주정을 받아주었다니 모를게 없겠지요.》
일부러 경박하게 구는듯한 소옥을 한심한듯이 가로훑어보던 차광수는 입맛을 다셨다.
《김혁이가 동양3국을 다 돌아다니며 소란을 피우더니 마침내 신통한 짝을 만났군.》
그 개탄조가 얼마나 절절한지 소옥은 그만 입을 싸쥐고 앞장서 걸으시는
뒤에서 차광수도 어쩔수 없다는듯이 껄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