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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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성태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일정을 변경시키게 했다.
그는 음악가동맹 부위원장을 만난 결과를 보고드리면서 일군들의 편협한 사고때문에 일이 빚어진데 대해 사죄했다.
《됐소. 만나서 들어봅시다. 내 곧 떠나겠으니 로상에서 만나기요.》
승용차는 평양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차가 최속으로 달리였지만
전후 종파사대주의자들의 해독행위로
정신문화의 한 형태인 문학예술은 한 나라의 문명을 표현하며 더우기는 인민의 정신도덕적인 힘으로 된다. 고대와 중세, 현대를 막론하고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며 지혜와 슬기를 자랑해온 인민은 그 어떤 압제에도 굴함없었고 그러한 인민을 가진 나라는 온갖 력사의 돌풍속에서도 자기의
그래서
최승희는 어머님께서 중히 여기시며 무용을 해도 조선의 넋이 깃든 무용을 해야 한다고 걸음걸음 이끌어주신 무용가였다.
그가 해방산기슭의 저택을 찾아와 어머님을 뵈옵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시였다. 어머님의 상처입은 손을 꼭 감싸쥐며
그러나 어머님께서는 탓하지 않으시고 조선의 무용을 지켜낸것을 장하게 내세우시였고 무용으로
최승희는 어머님을 뵙던 일이 잊혀지지 않아 예술축전차로 외국에 갔던 기회에 털토시를 가지고왔었다. 빙천설지의 만주땅을 헤치며 모진 고생을 다하신 어머님께 자그마한 성의라도 드리고싶은 마음이, 불민한 과거를 탓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하지만 최승희가 축전에서 돌아왔을 때는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였다. 소원을 풀길 없었던 그는 어머님의 인자하신 음성이 그리워, 그 따뜻한 미소와 손길이 그리워 정신없이 울었다. 머리를 풀어헤친채 어머님묘소에 엎드려 통곡하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최승희도 종파들의 롱락물이 되여 마음고생을 크게 겪었다. 종파들은 이름있는 무용가를 너절한 음모에 끌어들이려고 획책했고
승용차는 어느새 중부지대의 산악을 가로지른 평양-원산관광도로에 들어섰다.
동굴을 통과하시니 문성태가 곧은 자세로 길가에 서있었다.
《식사도 못했겠구만. 어떻게 된 일인지 사연부터 들읍시다.》
《일이 벌어진 날이 음악가동맹 부위원장동무의 생일날이였습니다. 많은 음악동료들이 그를 축하해주려고 집에 왔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나이많은 지기들이여서 그 동문 추억삼아 왜놈들의 학대를 받으며 음악을 연주하던 일이며 그 시기 음악가들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들에게 자기가 집필하고있는 원고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도 보았습니다. 민족수난기 음악가들의 창작생활과 우리의 민족음악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야만적인 책동을 해부하고 그 시기 노래들의 창작경위며 내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분석하였습니다. 좀 과하게 내세운감은 있으나 민족의 재보를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 글줄마다에 배여있었습니다.
뒤끝에 일제시기의 류행가를 불렀는데 노래음조가 어둡고 선률이 우리 식이 아니다나니 그 시기의 노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오늘의 시대정신을 외면한 도피현상이라고 비판한것입니다.》
《이젠 됐소. 한시름 덜게 되였구만. 허, 녀석들 춥지 않은게지? 하긴 장독과 아이들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했지.》
《결국은 사람들속에서 류행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계몽기가요에 대한 리해가 바로 서있지 않은 까닭에 생긴 문제요.
종파사대주의자들이 민족음악유산을 허무주의적으로 대한 후과가 이렇게 뿌리깊이 남아있소. 한규일선생이 자기가 안고있는 민족음악유산에 대한 견해가 부정당하여 허무감을 느끼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문성태는 고개를 수굿하며 좀 그런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해방전에 모진 고생을 다하며 나라잃은 슬픔을 겪어본 음악가인데 자기가 모욕받은것보다는 귀중한 음악유산이 해를 받은게 더 가슴아팠을게요. 언젠가도 한 일군이 〈락화류수〉를 불러서 문제시되였길래 지적해준적이 있었소. 영화에서 부정인물이 부른 노래라고 해서 비판하게 되면 나중엔 〈아리랑〉이나 〈봉선화〉도 못 부르게 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오. 이건 민족수난기가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때문이요.》
《부위원장동무가 인민군대의 유진수동무에게도 자기가 집필하는 저서에 대해 이야기한것 같습니다.》
마치
《유진수동무는 찬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시기의 음악을 정리하는것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군인작곡가로서 허용하기 힘들다고 말해주었다는것입니다.》
그럴수 있었다. 모든것을 정바르게 평가하고 곧게만 보는데 습관된 군인다운 립장에서는 그렇게 하는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그 역시 음악가이다보니 민족수난기의 음악이 력사의 이끼속에 그냥 묻혀있기를 바라지는 않았을것이다.
《계몽기가요들에는 민족의 얼이 배여있소. 왜놈들에 대한 항거의식과 광복을 바라는 이 나라 인민의 마음이 반영되여있소. 그런데 지난 시기 일부 편협한 사람들은 그때의 노래를 일제식민지통치의 잔재라고 일면적으로만 평가했소. 그렇게 되면 민족유산을 잃는것은 물론이고 우리 나라 음악사에 공백이 생기게 되오. 우리의 민족음악유산은 우리가 지켜야 하오.》
《건설장에 나가 지원자로 일하고있습니다.》
《량심있는 음악가요. 부부장동무, 저녁에 그 동무를 불러야겠소. 전화로 장소를 알려주겠소.》
《이제 인공지구위성개발현장에 들려보자고 하는데 차라리 나와 함께 움직입시다. 하지만 한규일동무에게 잊지 말고 련락해야겠소. 내 차에 가서 줴기밥 한덩이로 점심식사나 하고 떠나기요.》
《그러니 식사도 못하시고…》
《부부장동무라고 식사를 했겠소? 함께 먹읍시다.》
늘 그러하듯이
×
며칠전에 연구소당비서로부터 그가 앓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의사들을 보내주시였는데 혹시 병이 더 깊어지지 않았는지 걱정되시였다.
차에서 내리신
《한시간전에 자강도로 떠났습니다.》
《자강도에?…》
《제기된 첨단제품생산때문에 아무래도 걸음해야겠다면서 바삐 떠났습니다.》
《몸상태는 어떻소?》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많이 나았습니다. 워낙 체질이 약한데다가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다나니 피로가 겹쳤던것 같습니다.》
좀 낫다니 다행이였다.
박송봉은 어머님께서 잊지 못해하시던 연길에서 싸우다 희생된 투사의 아들이였다. 어머님께서는 해방후 중국동북에 나가있던 림춘추에게 박길의 아들을 꼭 찾아야 한다고 부탁하시였는데 그래서 만주의 어느 길거리에선가 하루하루 빌어먹으며 떠살이하던 박송봉이 투사들의 손에 이끌려 조국으로 나올수 있었다.
뼈만 남아 피골이 상접한데다 머리가 더부룩하고 누덕누덕 기운 베잠뱅이를 걸친 류랑고아의 모습을 보신 어머님께서는 눈물부터 지으시였다. 박길의 아들을 이제야 찾았다고 하시면서 품에 꼭 안아주시였다.
박송봉은 어머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동트는 새벽녘 안개발이 드리운 대지를 바라보며 그가 자식들앞에 했다는 소리는 자서전에도 기록되여있다.…
《그 사람은 내가 돌봐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자기 몸을 전혀 돌보지 않거던.》
전에 오셨을 때에도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먼 지방에 출장을 가서 못 만나셨는데 이번에는 또 자강도에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박송봉이였다. 당에서 하늘의 별이 요구된다고 하면 자기 한몸이 별이 되여서라도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였고 과업을 주시기 전에 먼저 떠맡아나서는 일군이 박송봉이였다.
은백색의 운반로케트가
동체에 손을 얹으시였다. 금속의 차겁고 짜릿한 촉감이 이상하게도 어떤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지시였다. 가만히 두드리시였다. 떡떡 맞서는 소리가 울림이 좋은 팀파니의 리듬처럼 들렸다. 마치
《부부장동무, 제국주의반동들이 촘촘히 늘인 봉쇄의 그물을 뚫고 저 하늘로 솟구쳐오를 위성을 그려보니 이 가슴이 다 넓어지오. 오늘은 우리 인민이 허리띠를 조이지만
문성태가 앞섶에 손을 맞잡으며 경건한 눈길로
남에게 붙어서는 한시도 못산다, 제것이 있어야 하며 자기의 힘이 강해야 한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시며 우리의 위력한 공장터전들을 잡아주시였고 연구집단을 창설해주시였다.
《박송봉동무가 언제 돌아서겠다고 했소?》
《이틀이 걸릴것 같다고 했습니다. 승리기계동무들이 제품생산에서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떠났습니다.》
《나라의 만년기틀을 마련하는 사업인데 모든것을 최상의 수준에서 보장해야 하오. 우리 로동계급은 꼭 해낼거요. 부부장동무에게 련락해서 건강에 주의를 돌리라고 당부하오.》
동체곁에서 물러서며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오늘 저녁에 인민군공훈합창단(당시) 공연을 조직했소. 과학자, 기술자들을 모두 데리고와야겠소.》
길게 누운 은백색의 동체들을 다시 바라보시는
《저 동체들은 어떤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생명체들이요. 이 나라 인민의 사상과 정신이 깃든 창조물이라고 할수 있지. 후손들은 잊지 않을거요.…》
습관적으로 가슴우에 두팔을 엇걸어끼며 천천히 걸음을 떼시였다.
《이제 헤쳐갈 길은 갑절 어렵소. 하지만 이
문성태는 어떤 희생적인 대가를 치르어서라도 인민의
《…
《고맙소. 하지만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