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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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방송을 통해 공사에 동원된 모든 구분대들이 골재장에 모이라는 소리가 울렸다. 여기저기서 대렬을 짓는 씩씩한 구령소리들이 잇달렸다.

유승철은 군관들만 남아서 작업을 계속할것을 지시했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군관들답게 처신합시다.》

하지만 모두 젊었는지라 공연을 관람하는 좋은 기회를 놓친데 대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유승철이도 그들 못지 않게 공연을 보고싶었다. 아니, 공연보다는 선률을 만나는것이 중요했다. 출근을 앞두고 안해와 다투었는데 아니할짓을 했다는 괴로움이 어떤 매듭처럼 속에 또아리를 틀고앉아 내껏 속을 번거롭혔던것이다.

처음에는 심상히 시작된 대화였다.

밥상을 차리던 안해가 쭈밋거리며 승철이더러 군사대학에 언제 가는가고 물었다. 눈빛이며 어조에 어떤 간절한 기대감이 실려있었다.

《모르겠소.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게 군인이지. 왜?》

선률은 응대없이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의 얼굴에 은근히 내비치는 어두운 그림자때문에 승철은 밥술을 들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가고 다우쳐물었다.

《…승철동지가 군사대학에 가면 전 어떻게 할가요? 생각이 많아지는군요. 그렇게 되면 저도 인차 평양에 가야 할지?…》

승철은 돌성처럼 견고하게 쌓였던 믿음이 일시에 와르르 허물어지는것 같아 마음이 허우룩해졌다. 안해가 분명 화선을 떠나고싶어한다는, 믿고싶지 않아 애써 부인하던것이 사실로써 증명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도 쉬쉬하며 떠도는 소문을 들어 평양에 소환되기를 바라는 안해의 마음을 모르는바가 아니였다. 그러나 안해스스로가 결심을 달리하기를 침묵속에 기다려왔다. 예술선전대가 어버이장군님을 모시고 훈련장에서 공연을 한 뒤로 더는 그런 문제에 관심하지 않을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선률에게 미안한 감정이 없지 않았다. 자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옛시절의 꿈을 안고 평양의 화려한 무대에로 훨훨 날아갔을 안해였다. 하지만 선률이만은 결코 그런 허영이나 쫓는 녀자가 아니라고 굳이 믿고싶었다.

승철이가 선률에게 반한것은 그의 남다른 매력때문이였다. 인생에 대한 당당한 주견을 가지고 화염내 풍기는 전호가에 선 그리고 성실한 땀으로 복무의 길을 수놓으며 그것을 긍지로 안고사는 군복입은 예술인이라는것이 바로 승철의 가슴속에 새겨진 선률의 모습이였다.

2. 16예술상수상자로서 마음만 먹으면 만수대예술단이나 인민군협주단 같은 중앙예술단체들에 갈수 있지만 인생길을 화선으로 그었다는 그것으로 하여 더욱 돋보였다. 그런데 승철이가 긍지로 여기는 그 소중한 감정을 안해는 리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군사대학에 가면… 인차 인민군예술학원에 가겠다는 소리로구만.》

선률의 곱게 쌍겹진 눈이 사뭇 동그래졌다. 이내 자기를 다잡으며 파릿해진 얼굴에 애섧은 미소를 그렸다.

《알고있었군요. 호, 아버지와 전화로 만났댔어요. 당신이 군사대학을 졸업하면 평양에 배치받기십상인데 그때 가서 저의 소환문제를 론해도 늦지 않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할지… 종잡기 어려워요.》

아니, 그것은 선률이가 아닌 다른 녀자가 뱉는 소리였다. 그렇게 생각되였다.

《하지만 난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이곳에 올것을 결심했소. 그래도 선률인 평양에 가겠소?》

《예?…》

선률이가 멍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동자에 원망이 가득 실렸다.

《무엇때문에… 제가 보기 싫어서 그런 결심을 했는가요? 허파에 바람찬 녀자처럼 보이는게 역스러워서…》

《제길, 마음대로 생각하오.》 승철은 어조가 점점 퉁명스러워지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해하지 못하겠어요. 왜 하필이면 그런 식으로 대하는지, 다들 저의 재간을 아껴주느라 애쓰는데 왜 당신만은 짐스러워하고 외면하는가요? 달라졌어요.》

승철은 이마살을 찌프렸다. 상상이 점점 빗나가며 전혀 낯선 어떤 녀자의 이지러진 모습이 눈앞에서 어룽거렸다.

《이 승철인 어제날의 그 사람일뿐이요. 달라진건 선률이요. 허영심에 자기를 잃었소.》

《그러니 이제껏 나를…》

선률의 눈에 어기찬 눈물이 피잉 고였다. 으깨문 입술이 새하얘졌다. 찌르는듯한 눈길로 쏘아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하여 승철은 더 말할 의욕을 잃고 언짢은 기분으로 문밖에 나섰던것이다.…

속에 딴딴한 매듭으로 맺힌 감정이 아직도 흉곽을 압박하며 괴롭힌다. 그렇다고 자기의 행동을 후회하고싶지 않았다.

갱마구리에 이른 유승철은 착암기를 틀어쥐였다. 착암기소리가 요란스레 공명되며 번거로운 속을 눅잦혔다. 얼마 못 가서 정전이 되였다.

함마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헉! 헉!… 땀줄기가 목덜미로 쓸어내렸다. 다른 군관들이 교대하자고 간청했으나 그냥 단숨을 몰아댔다.

정대잡이를 하던 중대장이 무엇이라 소리치며 갱구를 턱짓했다. 전지불이 번쩍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있었다. 사관들이였다.

《벌써 끝났소?》

승철은 허리춤에서 세면수건을 끌러 대강 땀을 문질렀다.

《군관동지들이 없이 무슨 재미로 보겠습니까?》

《우리 생각이 짧았습니다.》

김옥철이관장 말에 뒤를 달며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유승철은 가슴이 더워났다. 려단장이 외우던것처럼 이들이 과연 고무풍선처럼 들뜨기 좋아하고 공연이라면 임무조차 망각할 그런 군인들이였는가?… 누구에겐가 속시원히 웨치고싶었다.

《우리 군관들은 따로 임무를 받은게 있소. 난 동무들에게 공연을 관람하라는 지시외에 다른 임무를 주지 않았소. 뒤로 돌앗! 목표 골재장, 앞으로- 갓!》

《대대장동지, 그 명령만은 취소해주십시오.》

《함께 일하게 해주십시오.》

사관들이 저마끔 한마디씩 했다.

일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갱도를 따라 5중대 전체 군인들이 줄줄이 들어섰던것이다.

계획대로 한발파를 해치웠을 때는 이미 어둠이 밀려든 뒤였다.

예술선전대가 공연을 끝내고 다른 부대로 갔다는 뒤숭숭한 소리를 들으며 승철은 반토굴식의 병영앞에 놓인 긴 나무의자에 앉아 허리쉼을 하였다. 사실 공연은 못 보더라도 선률이만은 만나리라 생각했댔는데 일이 맹랑하게는 되여버렸다. 속이 텅 빈것처럼 쓸쓸해났다.

불빛이 어룽거리는 반토굴에서 병사들의 오락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둠속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성급한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지휘부 사업총화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군사부대대장이였다. 려단장이 찾는다고 알려주었다.

려단장은 아마 오늘 작업에 대한 보고를 받고나서 기분이 흡족해졌을것이다. 하지만 공연을 보지 못한 군인들의 허전한 마음을 지휘관의 기분좋은 인상으로 달랠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승철은 군사부대대장에게 오늘 작업에서 집단적혁신을 일으킨 군인들에게 감사를 주고 특히 김옥철을 평가해주라고 이르고는 지휘부가 위치한 가설건물로 향했다.

김호삼려단장이 네모진 얼굴에 유쾌한 웃음을 한가득 담고 그를 맞이했다.

《괜찮아, 한발파 제꼈더군. 아무렴 2대대장이 누구라구.》

《응당 할일이 아닙니까.》

《그 대답도 마음에 드오. 공연때문에 공사가 지장받을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공연이 끝나자마자 돌격전을 벌려 실적을 배나 올렸소. 군단장동지가 우리를 지원하겠다기에 뭔가 했더니 다 쪼간이 있었단 말이요. 대대장, 힘들더라도 오늘 밤에 임무를 하나 더 수행해야겠소.》

《?!》

김호삼이 황소웃음을 지었다.

《대대군인들은 푹 쉬우고 군관들만 야간작업을 하자는거요. 특히 동문 빠지지 말아야겠소. 책벌로 생각해도 좋아.》

유승철은 영문 모르고 밤도깨비의 방망이신세를 지는것 같아 이내 응대하지 못했다.

예술선전대말이요, 그 동무들도 오늘 밤에 우리와 함께 야간전투를 하겠다오.》

《떠나지 않았습니까?》 하고 승철은 물으려다가 속내를 빤드름히 드러내는것 같아 의혹짙은 눈길로 려단장을 바라보았다.

《일정이 변경되였소. 오늘 밤에 야간전투를 벌리고 래일 아침에 공연을 한번 더 하기로 했소. 어쩌겠소, 이 호삼이도 영 목석은 아니야. 부하들이 공연도 못 보고 냅다 굴진전투를 벌렸는데 속이 편할것 같애?》

대대군인들이 유승철의 뒤를 따라 공연관람을 포기하고 작업장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으면서 만족감과 함께 자기가 군인들의 심리를 너무 무시하지 않았는가 하는 자책감도 없지 않았던 김호삼이였다. 그래서 정치부장에게 공연을 한번 더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던것이다.

천막밖에서 인기척소리가 나더니 예술선전대장이 들어섰다.

《려단장동지, 다 준비되였습니다.》

《오늘 2대대장이 본때를 보일거요.》

유승철을 알아본 예술선전대장이 반색했다.

《오래간만이요. 공연할 때 보이지 않더군. 선률동무도 함께 왔소.》

유승철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통나무책상우에서 모자를 찾아 쓰던 김호삼이 승철을 불렀다.

《참 대대장동무, 성악지도원 말이요, 이 려단장이 빨리 반살미를 내라는 의미인지 자꾸 일감을 안겨주거던. 자, 받소.》하며 그는 책상밑에서 배가 불룩한 배낭을 끌어올렸다.

《하 글쎄, 이렇게 군인들의 작업장갑을 한배낭 마련했구만. 직접 주라고 하니 뭐 아직도 점직해하던데 모르겠소, 이 어리숙한 려단장을 골려주자는 노릇이 아닌지… 엉큼하거던.》

그제야 유승철은 아침에 웬 배낭이 아래목에 놓여있던것을 상기했다. 속갈피에 더운 감정이 흘러들며 몸을 훈훈하게 적셨다. 확실히 자기라는 위인은 속통머리가 좁았다. 알게 모르게 남편을 위하는 안해의 마음을 너무도 몰리해한것이다.

언제공사장은 곳곳에서 타오르는 홰불로 하여 대낮처럼 밝았다. 예술선전대가 야간전투를 지원한다는 소문이 퍼지여 교대를 마친 군인들도 스스로 연장작업을 하고있었다. 처녀들의 색다른 웃음소리가 봄날의 짙은 향기처럼 작업장의 활기를 돋구었다.

한선률은 공병중대군인들과 함께 혼합물을 나르고있었다. 병사들과 어울려 허리를 그러쥐고 까르르 웃는 모습이 승철의 마음을 누긋하게 했다.

선전대장이 유승철을 성악지도원에게로 떠밀었다.

승철은 맞들이에 혼합물이 담겨지기를 기다리며 선전대의 애어린 녀배우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선률을 향해 어청어청 걸음을 놓았다.

선률이 약간 놀란듯한 그러나 이내 자기를 수습한 평범한 눈빛으로 그를 일별했다. 녀배우들이 유승철에게 인사하며 저희들끼리 수군거렸다.

《어마, 성악지도원동지, 수건을 놔두고 왔습니다. 뻐스에 있겠는데…》

한선률과 짝을 이루던 녀배우가 불현듯 수건생각이 났는지 난처한 기색을 지었다. 이쪽저쪽의 눈치를 살피며 뒤걸음치더니 종주먹을 쥐고 뻐스를 향해 뛰여갔다.

《늘 이렇다니깐. 어쩌겠소, 대대장동무밖엔 채를 쥘 사람이 없구만. 그렇다고 가족주의를 해선 안되오.》

선전대장이 한마디 끼여넣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 집사람이야 내가 도와야지요.》

속으로 바라면서도 남들의 눈에 우습게 보일것 같아 떠박질리운 일감을 맡는다는 식으로 두덜대며 승철은 맞들이채를 잡았다.

승철이와 선률은 경사진 나무다리를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언제꼭대기에 올라 혼합물을 쏟을 때까지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뒤채를 들고 따라서던 승철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찰나에 선률의 몸이 휘청거렸다.

《배낭을 받았소.》

아니, 그것은 승철이가 하고싶었던 말이 아니였다. 무엇인가 부드러운 말을 건늬고싶었는데 생각과 달리 퉁명스런 소리가 입밖으로 튀여나간것이다.

《보기 싫은 녀자에게도 말할줄 아는가요?》

내쏘는 소리에 승철은 이마살을 찌프렸다. 선률의 뒤잔등에 찌르는듯한 눈길을 박으며 소리내여 혀를 찼다.

그들은 다시 묵묵행진으로 혼합작업장에 이르렀다.

승철은 혼합물을 푸려고 허리를 굽히는 공병중대장을 툭 건드렸다.

《공병, 나하고 좀 교대하기요. 허리를 상했는지 통 힘을 못쓰겠군.》

선률의 맵짠 눈길이 승철의 얼굴에 날아들었다.

승철은 사람들의 오해를 살것 같아 서둘러 자리를 떴다.

등뒤에서 또다시 웃음소리가 났다. 어이싸 어이싸 하며 흥취를 돋구는 먹임소리도 잇달렸다. 군인들이 안해를 도와 맞들이를 들고간다는것을 그는 몸으로 체감했다.

결코 그가 바란것이 아니였다. 자기 기분에 포로되다나니 상서롭지 못한 집안의 허물을 남들앞에 불쑥 드러낸것이 불쾌했다. 다시 돌아가 안해에게 용서를 빌고싶었다. 그러면 방금전의 불미스런 일은 아주 하찮은것으로 치부되고 하여 자기는 물론 안해도 신뢰감이 어린 가벼운 웃음속에 맞들이를 다시 잡을수 있을것이라는 천진한 생각이 들었다.

평양의 화려한 무대를 바라는 안해의 소원이 잘못된것일가? 아니,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게 되는 희망이고 리상이였다. 자기가 절벽처럼 그의 앞길을 막아선다면 안해는 일생토록 이 승철을 원망하게 될것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휘틀조립장에 이른 승철은 손에 닿는대로 일감을 찾아쥐였다. 휘틀용판자를 켜는 군인들을 돕기도 했고 제재기앞에서 새하얗게 속살이 드러난 각목을 받기도 했다. 대대장의 뜻하지 않은 도움에 목공조의 군인들은 휘틀조립이 떠지는것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더욱 재게 일손을 놀렸다.

아츠러운 기계톱소리에 낯을 찡그리며 통나무를 배밀이하던 승철은 누구인가 등을 툭툭 치는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선전대장이였다. 무작정 유승철의 손목을 잡아끌더니 사람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이르러 탁 밀쳐버렸다.

《숱한 사람들앞에서 그게 뭐요?》

《뭘 어쨌다는겁니까?…》

《성악지도원이 어떤 상태인지 아오? 지금 최대로 몸을 주의해야 할때란 말이요. 우리 취사원들이 귀띔해서야 나도 알았소. 그래서 떨구려고 했는데 동무를 만나겠다고 부득부득 따라섰단 말이요. 젠장, 그래가지구서두 아버지가 되겠다구? 지금 선률동무에겐 무한정 안정이 필요된단 말이요. 알겠소?》

승철은 멀뚱한 눈길로 선전대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인지…》

《자기가 알아보오. 어제 성악지도원이 정치지도원동무를 찾아가서 안타까운 심정을 터놓았다는구만. 음악가로서 평양의 훌륭한 무대에서 노래부르는게 소원이지만 초소를 뜨지 않기로 결심했다는거요. 그러나 우린 그렇게 보지 않아. 우에서도 요구한다는데 가는게 옳지.》

《!》

《마음을 귀중히 여겨주라구. 그런데도 그를 모욕해? 원, 업고다녀도 시원치 않겠는데. 성악지도원이 뻐스에 혼자 있을게요.》

유승철은 군단예술선전대뻐스가 현장지휘부마당에 서있던것을 상기하며 그쪽으로 잰걸음을 놓았다. 뻐스는 텅 비여있었다.

골재장쪽에서 군인들의 환성이 터졌다.

불현듯 정적깃드는가싶더니 손풍금소리가 울렸다. 청신하고 깨끗한 노래소리가 손풍금반주에 맞추어 밤하늘에 날리고있었다. 분명 안해의 목소리였다.

나무휘틀을 쌓아 마련한 가설무대의 좌우켠에서 무대조명인듯 몇개의 홰불이 황황 타오르고있었다. 관람자들이 계속 불어났다.

《어데 갔다 인제야 나타났습니까? 나도 저렇게 노래하는 녀자와 친해야 할것 같습니다.》

싱검둥이 공병중대장이 승철의 곁에 다가서며 수군거렸다.

《대대장동지가 없어지니 성악지도원동무도 봄는 녹듯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린 부부회의를 하는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젠장, 모두 성악지도원의 노래를 들어보자고 벼르던 참에 개판이 되였다고 투덜댔습니다. 그런데 군단정치부장동지의 손에 이끌려 다시 나타났군요.》

승철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가설무대에 나선 선률을 점도록 바라보았다. 재청을 요구하는 군인들의 목소리를 가려들으며 노래가 끝났다는것을 느꼈다.

환한 얼굴에 청신한 웃음을 띤 선률이 손풍금수에게 노래반주를 부탁했다. 골안이 떠나갈듯한 박수소리가 터졌다.


민들레 곱게 피는 고향의 언덕에

하얀 연을 띄우며 뛰놀던 그 시절


군인들이 노래를 따라불렀다. 철없이 바라보던 푸른 저 하늘이 내 조국의 자랑인줄을 비로소 깨달은듯 군인들은 감동에 젖은 절절한 목소리로 합창을 했다.

선률의 눈길이 승철이쪽으로 날아왔다. 왜서인지 승철은 그 눈길을 마주대하기 부끄러워 슬그머니 고개를 떨구었다. 곁에서 몸을 흔들며 노래부르던 공병중대장이 격한 심정을 이기지 못한듯 그의 팔을 꼈다.

전시가요가 련이어 잇달렸다. 군인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합창으로 화답했다.

《동지들!》

방송선전차의 확성기를 통해 올린 안해의 목소리였다.

《오늘 고난의 행군의 앞장에는 우리 장군님께서 서계십니다. 노래에도 있듯이 우리의 하늘이 저토록 푸를수 있는것은 바로 위대한 태양을 모시였기때문입니다.

저는 하루빨리 발전소를 완공하여 최고사령관동지께 승리의 보고를 올리자는것을 동지들에게 호소하고싶습니다. 그 길에서 저는 동지들의 힘이 되고 용기가 되는 노래를 힘껏 불러드리겠습니다. 저의 노래가 완공의 날을 앞당기는데 도움이 된다면 힘이 진토록 불러드리겠습니다.》

요란한 박수갈채가 터졌다.

함뿍 웃음을 머금는 선률의 모습은 황홀했다. 승철의 눈에는 평양의 화려한 무대에서 만장의 절찬을 받는 녀가수의 형상으로 안겨왔다.

꽃보라인양 하늘에서 또다시 눈꽃이 날리기 시작했다. 노래소리 울려퍼지는 공사장을 하얗게 덮으며 장식했다.


×


김호삼은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공사장을 떠났다. 푸지게 내리던 눈이 멎고 심신을 거뜬하게 하는 신선한 냄새가 강산에 차넘쳤다. 눈에는 냄새가 없다지만 햇솜마냥 대지를 덮은 밤의 눈세계에서는 이름못할 향취가 풍기는듯했다.

뜻하지 않은 심야의 공연에서 받은 흥분으로 호삼은 마냥 기분이 들떴다. 선률이 부르던 노래소리가 그리고 자기도 함께 목소리를 합쳐 부르던 노래소리가 귀전에 메아리쳤다.

려단지휘부와 잇닿은 집뜨락에 들어선 호삼은 눈가래를 찾아들고 발목이 푹푹 잠기는 눈을 쳐냈다. 인기척에 놀라 문을 열던 안해가 실성한 사람을 대하듯 벙벙한 눈길로 지켜보다가 비자루를 잡았다. 뜨락의 눈을 다 쳐내고서야 그들은 집안에 들어섰다.

안해는 아래목에 네활개를 뻗친채 굳잠에 든 잔뼈가 굵기 시작한 아들을 옆으로 끄당기고 밥상을 차렸다. 호삼은 물길굴공사장에서 띄여보았던 안해를 생각하며 피씩 웃었다.

《식사했소?》

안해가 의아스레 그를 마주보았다.

오늘따라 별스레 관심하시는군요. 음식냄새를 맡았더니 먹지 않아도 배불러요. 공사장군인들을 지원하려고 찰떡을 치댔어요.》

《그런가?…》

안해는 남편의 지꿎은 눈길을 피하며 얼른 부엌에 내려갔다. 쿵쿵 절구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호삼은 아무래도 혼자 먹고싶은 생각이 나지 않아 안해를 따라 부엌에 내려섰다.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절구공을 뺏아들었다.

《남들이 보면 뭐라겠어요?》

《당신 노래를 귀동냥해서 들었는데 이렇게라도 보답해야지.》

《어마나, 봤어요? 엉큼한 2대대장이 너무 잡아끌기에 따라갔지요 뭐. 내가 노래를 해야 당신을 감동시킬수 있다나요?》

《그 사람이?…》

《아닌게아니라 노래랑 부르고 춤이랑 추니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군관들이 당신을 두고 의견이 좀 있어하는것 같애요. 너무 뚝박새라던지…》

《듣기 좋구만.》

안해는 곱게 눈을 흘기였다.

호삼은 버룩 웃으며 힘있게 절구공을 찧었다.

중대장시절, 개천에 산다는 어느 군인의 집에 들렸다가 맞다들린 처녀가 지금의 안해였다. 가리마를 타고 량쪽으로 단정히 빗어넘긴 윤기나는 새까만 머리카락, 사려깊으면서도 처녀다운 소심성과 수집음을 감추지 못하던 올롱한 눈, 좀처럼 열릴줄 모르던 앵두입술…

절색이라고는 할수 없어도 륙군상위 김호삼의 눈에는 개천백화점 출납원으로 일한다는 처녀가 기막힌 고전형의 미인으로 비껴들었다. 동생의 소식을 안고온 지휘관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할지 몰라 당황해하는 숫저운 처녀의 모습은 총각군관의 가슴속에 세찬 불길을 지폈다.

김호삼은 아래방에서 흘러오는 처녀의 고르로운 숨소리를 들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군대성격으로 정식 청혼하면 처녀가 어떻게 나올것인가를 상상해보았다. 화들짝 놀란 새처럼 가슴을 할딱거리다가 훌쩍 날아나버릴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마지막까지 따라가서 손목을 붙잡을 용기는 얼마든지 있었다. 처녀가 싫다고 하면… 문제가 다르긴 해도 강다짐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옷매무시를 바로한 총각군관은 처녀의 부모에게 자기의 진정을 터놓았다. 일생 행복만을 안겨주고 복덩이처럼 고이 떠받들겠다고 사나이의 자존심을 걸고 맹세했다. 다행히 처녀는 싫다좋다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만나 시작된 군관살림이였으나 이날이때껏 복은 고사하고 고생만 더미채로 안겨주고있다.

《떡이 잘되였구만. 떡이 질기면 집안이 화목하다는데…》

《어마나, 당신도 그런 말을 다 할줄 아시나요? 하긴 찰떡처럼 묻어돌아가는게 정이겠지요 뭐.》

안해가 큼직하게 잘라낸 찰떡에 콩가루를 묻히여 호삼의 입에 물려주었다.

《거 맛 좋구만.》

호삼은 입안에서 우물거리는척 하다가 급한 성미 그대로 목이 메게 꿀꺽 삼켜버리고말았다. 안해가 받쳐주는 물 한사발까지 말끔히 동을 냈다. 안해는 너무 좋아 입을 다물줄 몰랐다.

2대대장네 말예요, 성악지도원이 인차 평양에 간다는 소리가 있어요.》

《글쎄… 갈 사람이면 가겠지. 승철이도 이 산골에 오래 배겨있을 사람은 아니야.》

호삼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이 대꾸했다.

《이번에 대대군인가족들의 예술소조를 지도하는걸 보니 정말 재간이 좋더군요. 그가 가면…》

《됐소. 반살미를 준비할 생각이나 하오.》

떡을 다 치고 때늦게 밥상을 마주하는데 갑자기 전화종이 울렸다. 여느때없이 어뜩새벽에 울린 전화종소리에 호삼은 바싹 긴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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