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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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린방의 주둔부대에서 현실체험을 마친 설명순은 계획대로 조혁의 애인을 만나보기로 했다. 물론 많은것을 생각했다. 이미 운명의 선택을 했다는 처녀에게 무슨 말을 할것이며 또 어떤 요구를 할지 설명순 자신도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조혁의 심장을 울렸던 처녀가 그토록 경망스러웠다는것이 도대체 미덥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깨여져서는 안될 그들의 사랑을 지켜주고싶었다.

사단정치위원이 다음날 시내로 가는 차가 있으니 그 편을 리용하라고 권유했으나 설명순은 산천의 수려한 정취를 즐기는것도 랑만적인 체험이라고 하며 길을 떠났다.

둔한 가을볕이 드리운 한낮의 산골길에는 오가는 차들이 별로 없었다. 이따금 목탄차들이 매운 연기를 토하며 앙앙 용을 쓰긴 했지만 멀리로는 가지 않고 근방에서 소운반을 하기에 신세를 지지 못했다.

소달구지에 싣고온 석비레를 신작로에 고루 펴던 나이듬직한 도로관리원이 그에게 산골짝사이로 댕기처럼 뻗어간 지름길을 가리켰다.

《보아하니 이 고장에서 복무하는 군관이 아닌것 같은데 지름길을 택하면 한참 시간을 절약할거웨다. 해군에서 부함장을 하는 우리 큰아들 녀석두 결혼식에 왔다가 그 지름길로 갔수다.》

설명순은 마침 정치위원이 준 담배가 있었던지라 아바이에게 고맙다고 인사삼아 쥐여주었다. 등이 약간 굽을사한 도로관리원령감은 엉너리를 떨며 사양했으나 나중엔 감지한 얼굴로 담배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아들자랑을 했다.

도로관리원령감과 헤여진 설명순은 여기저기에 물웅뎅이가 드문하고 사라구나 능쟁이 같은 잡풀들이 무성한 험한 달구지길에 들어섰다.

길녘의 잔디밭을 따라 산골의 정서를 돋구는 벌통들이 띠염띠염 널려있었다. 꿀벌들이 떼지어 붕붕거리는 소리가 향수를 자아냈다.

그는 길을 얼마 축내지 못하고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열흘남짓이 군인들과 어울려 근무를 수행한데다 로독을 풀새없이 련속 길을 다그어대다나니 아닌게아니라 힘에 부쳤다.

과연 자기가 필요한 길을 걷고있는지 또다시 의혹이 앞섰다. 조혁을 위한 걸음이라고 하지만 도리여 그에게 부담이 될가봐 겁이 났다. 아니, 결코 헛된 걸음이 아닐것이다. 처녀를 만나는 순간에 시대의 찬가로 불리울 노래의 악상을 찾게 될것이며 때늦게 찾아온것을 후회하게 될것이라고 자기를 위안했다.

그러나 이미 쉰내가 풍기는 육체는 피로감에 못이겨 자꾸 눈길을 풀숲으로 이끌었다. 잠간이라도 다리쉼을 하고싶었다. 끝내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잔디밭에 들어서며 맥없이 물앉았다.

뻣뻣해진 다리를 주물럭거리는데 그가 오던 길쪽에서 웬 달구지 하나가 불편스레 굴러왔다.

멍에를 진 암소가 자꾸 목을 비틀며 목갈린 소리로 음메음메 울었다. 달구지뒤를 총총히 따라서는 송아지를 보고서야 설명순은 암소가 새끼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해한다는것을 알았다.

아니나다를가 송아지가 어미소의 배밑에서 흔들거리는 희멀쑥한 젖통을 견주며 가까이에 다가서자 암소는 불시에 얌전해지며 좀전과는 다른 기꺼운 울음소리를 냈다.

쟈크를 채우지 않은 허름한 잠바를 걸친 로인이 손을 뻗치면 금시 파랗게 물들것 같은 가을날의 하늘에 명상적인 눈길을 주며 달구지앞채에 걸터앉아 회초리를 젓고있었다.

총 센 흰머리칼이 닭의 볏처럼 쭈뼛이 일어선 로인이 자기를 견주는 군관의 눈길을 감촉했던지 헤식은 웃음을 지으며 어디로 가는가고 물었다.

《시내에 들어갑니다.》

주름살이 얼기설기한 로인의 고동색얼굴에 반가움이 어렸다.

《허, 마침이군. 이런 산길에서야 달구지가 제격이지요. 마다하지 않는다면 올라타시우.》

귀가 번쩍 트이는 권고가 반갑기 이를데 없었다. 닁큼 일어선 설명순은 서둘러 달구지에 오르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소시적 동네애들과 함께 가을걷이하는 어느 작업반의 달구지에 올라 쿵덕쿵덕 뛰며 환성을 지르던 일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흥그러워졌다.

《강계에 출장왔는가요?》

로인이 갈퀴같은 손바닥에 침을 퉤 뱉으며 강냉이송치가 삐죽삐죽한 마대짝을 고루 펴주었다. 삶아 터진 강냉이알처럼 마디가 울툭불툭 삐여진 넙적한 손을 보니 한뉘 피아노건반만 두드린 자기의 손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예, 출장길에 우리 조카애가 친했다는 강계처녀를 좀 만날가 해서 이렇게 걸음하지요.》

설명순은 주름살이 이랑처럼 깊이 패인 로인의 뒤덜미를 여겨보며 흥심없이 대꾸했다.

《이랴, 눈치만 보지 말고 씨엉씨엉 걷거라.》

로인이 설명순이 앉은쪽을 돌아보며 흐뭇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꾀쟁이지요. 짐이 많을사하면 떡 버티고 서서 냅다 울기만 하지요. 하지만 오늘은 제 물을 빼먹은 송아지가 따라오니 좀 성수가 난것 같수다. 난 저-기 산골마을에 사는 사람인데 이를테면 부업지를 관리하지요. 사람들은 날 보고 흔히 〈나가자〉령감이라고 한답네다. 전수백이라는 좋은 이름이 있는데도 그러지요. 하긴 싫진 않습니다만…》

로인은 맡동무가 생긴것이 다행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공장정양소에 가을한 강냉이서껀 고구마서껀 주자고 떠난 길이웨다. 허, 모두들 올해를 정말 용케 견디여냈지요. 통강냉이 몇알 있는 집이래야 살림이 괜찮은 집이였수다. 허지만 누구 하나 기계곁을 떠나지 않았지요. 그래서 나두 기를 쓰고 농사를 지었는데 로동자들이 좋아들 할거요. 헌데 조카가 뭘하는 사람이길래 강계처녀를 다 얻었수? 강계태생인가요?》

나이에 비해 호기심이 꽤 많았다.

《예, 말하자면 좀 깁니다. 나처럼 군관이지요. 가다오다 만났다는데 련애를 한답시구 몇년 끌더니 처녀가 마음이 돌아섰다는지… 부모들이 좋은 혼처가 나섰다고 강박한것 같습니다.》

《저런, 그러니 체네편에서 차버렸다는 소리가 아니요? 허파에 바람이 잔뜩 찼구만. 하긴 내용이 있겠지요. 부모들이 뭐이 모질어서 애들을 그렇게 갈라놓갔시요? 그렇다구 이제와서 그 녀자를 만나선 뭘하시려우? 총각이 군관이라니 숱한 처녀들이 따르겠는데… 하다못해 내라두 좋은 처녀를 소개할수 있수다. 괜찮은 처녀이지요.》

전수백이 숭게숭게한 이발을 드러내며 입을 다셨다.

덜렁거리는 암소의 젖통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던 송아지가 애달프게 울었다.

《후유, 요새 애들은 잘 모르겠시다. 우리 조카딸두 웬 녀석과 친한지 몇해 잘되는데 그 집처럼 갈라진것 같수다. 리상이요 뭐요 하는데 다 구실이지요. 조카딸이 팔을 다쳐서 불구가 되니 녀석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외면한거지요. 주위에서 맴도는 평양처녀들에 비하면사 우리 조카년이 짝이 기울지요. 그녀석이 바루 평양에 있다우. 쯔쯧, 애가 마음쓰는게 고달파뵈서 인차 다른 혼처를 찾아 상을 차릴가 하웨다.》

설명순은 어느 집에나 또 누구에게나 하나의 공식으로는 풀기 힘든 인간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괜히 만나는것 같수다. 제 좋아서 한 일을 나무람하겠수? 강계에 가면 우리 동생네 집에 들려 한잠 푹 자구 렬차를 타시우. 목이 마르겠는데 막걸리나 듭세.》

령감은 막걸리가 들어있는 병을 앞에 내밀었다. 그가 사양을 하자 령감은 저리 병아구리를 입에 대고 꿀꺽꿀꺽 소리나게 들이키고는수염그루터기가 볼썽사납게 삐쭉삐쭉한 입언저리를 뻑 씻었다.

《허지만 둘러보면 다 좋은 사람들이웨다. 우리 공장사람들만 봐두 그렇지요. 시련을 겪어봐야 사람의 진가를 안다구 고난속에서 서로를 위해주는 마음들이 얼마나 자심하다구요. 나라를 생각하는 품두 넓어졌수다.

이번에 우리 공장의 직장장 한사람이 사망했는데… 아니, 희생이지요. 자기가 난치의 병에 걸린걸 안 다음엔 아예 밥술을 들지 않았수다. 염라대왕앞에 당장 갈 사람이 식량을 축내는게 아니라면서 집에 있는 쌀을 전부 직장에 내보냈지요. 그리구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기대곁을 떠나지 않았수다. 이게 바루 우리 사람들이우다. 자, 군관어른두 한모금만 드시우. 로친이 담근건데 맛이 괜찮수다.》

《난 할줄 모릅니다. 어서 드십시오.》

배속을 뜨끈하게 적시는 막걸리가 어떤 감동적인 상념을 떠올렸는지 로인의 눈에 광채가 돌았다. 입을 맛스레 다시며 몸을 흔들거렸다.

설명순은 자기가 만나러가는 처녀도 그런 녀자라고 믿고싶었다.

길녘에서 풀을 베여 묶던 린근마을 농장원들이 달구지에 탄 길손들을 향해 반가이 손을 흔들었다. 면식이 있는지 로인이 답례삼아 막걸리 한병을 던져주자 런닝바람의 한 중로배가 초물모자를 벗어 인사를 보냈다.

소잔등에 회초리를 철썩 안긴 령감은 흥얼흥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전시가요인 《조국보위의 노래》였다.

암소도 노래소리에 성수가 났는지 꼬리를 추썩이며 음메 소리를 질렀다. 앞뒤를 오가며 달랑달랑 따라서는 귀염스런 송아지가 어미소의 흉내를 내며 목청을 놓았다.

《로병입니까?》

설명순이 로인의 얼금얼금한 뒤덜미에 눈길을 주며 물었다.

《군관이니 제꺽 알아보시는구만. 옳수다.》

설명순은 회한에 젖은 전수백의 어조에 관심하며 말이 계속되기를 기다렸다.

《내 전쟁때 락동강까지 나갔던 사람이우다. 락동강에서 돌아설 때의 그 아픈 마음을 지금사람들은 다는 모를거요. 책이나 영화에서 보고 그저 그런가부다 하겠지요.

그때의 통분하던 감정을 어디다 비기겠소. 내뻗치면 손끝에 닿을 땅을 남겨두고 돌아서자니 심장이 다 갈기갈기 찢겨졌수다. 후에 들으니 무기가 없어서 돌아섰다고 합디다.

그때 우리 소대는 후위경계임무를 받고 련대철수를 보장하다가 거의 모두 희생되였소. 살아남은 사람이 손가락에 꼽을 지경이였소.

후퇴하던중에 숙천어방에선가 놈들의 항공륙전대와 맞다들렸수다. 모두 기차게 싸웠지요. 희생된 전우들이나 살아있는 사람들이나 정말 량심적으로 자기를 총화받을수 있지요.

그 전투에서 난 넙적다리에 총알을 받구 쓰러졌다우. 정신을 차리고보니 놈들의 시체더미속에 혼자 있는게 아니겠소? 화농된 상처에서는 썩은 냄새가 풍기고 고열에 정신이 점점 흐리마리해지는데… 살았다는 희망을 가지는 동시에 맥없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원통하기 그지없었지요, 군관어른도 전쟁에 참가했는가요?》

설명순은 전쟁이 끝나는 해에 군대에 입대했다고 대답했다.

《주위엔 놈들이 쭉 깔렸습데다. 그러나 살아서 전우들의 원쑤를 갚아야 한다고 윽벼르면서 한치한치 기여갔수다. 그때 내게 힘을 준게 뭔고 하니… 바로 노래였수다.

입속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무슨 생각인들 안했겠소. 해방후에 땅을 분여받고 김장군만세를 부르던 일이며 〈밭갈이노래〉 부르며 아버지와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던거며… 리승만이 못되게 놀기에 내 땅을 지키려면 군대에 나가야 한다고 우기던 일서꺼랑…

전쟁때 제일 많이 부른 노래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였소. 전투를 앞두고 맹세문에 이름자를 남기면서도 불렀고 고지를 지키면서도 그 노래를 불렀지요. 그 노래의 구절구절이 생명을 연장시켰다고 할지…

청천강어방에선가 의식을 잃었는데 후퇴길을 걷던 한 처녀에 의해 구원되였수다. 좌우간 어찌어찌해서 우리 사람들을 만나게 되였고 군의소에도 입원했수다. 군의소에서 나에게 더 싸울수 없다는 딱지를 붙여놓은줄을 후에야 알게 되였지요. 통분해서 막 울었수다.

나를 구원한 청천강처녀가 자주 면회옵데다. 그게 또 힘이 되였지요. 어지간히 통성했을 때 처녀가 이야기하더구만. 총을 들고 싸우는것만 나라를 지키는건가, 전우들이 싸울수 있게 총탄을 만들어주구 무기두 만들어주면 그게 다 원쑤를 치는게 아닌가고 안타깝게 말하는데 난 그말이 옳다고 생각했지요.

처년 우리 수령님께서 자강도의 무기공장을 찾아주신 소식을 귀띔해주면서 거기를 찾아가라고 권고합데다. 얼마나 고맙던지… 그래서 달려갔지요.

거기에 가니 그 처녀가 또 보입네다. 목청도 곱지 못한 소리로 노래부르는데 그 노래가 수령님의 은덕으로 사람답게 살던 옛일이며 락동강에서 돌아선 병사의 가슴아픈 어제일을 상기시켜주었수다.

꽃다발이 있소? 탄약상자를 쌓아만든 무대에 뛰여올라 들꽃을 기념으로 주고 그 처녀와 제창 혼성2중창을 불렀수다. 그 체네가 후날 이 막걸리를 만들어주는 로친이 되였지요.

지금도 내 종종 그때의 노래를 부르군 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나보구 〈나가자〉령감이라 하는거웨다. 허허…》

설명순은 가슴속에 그들먹이 차오르는 감동의 파도에 휘감기며 존경어린 시선으로 로인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이제껏 창작해오던 음악작품들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게 되였다. 과연 그 노래들에 인민이 안고있는 그처럼 뜨거운 감정이 고패쳤던지 되새겨졌다.

이들의 정신세계에 비하면 창작가로서의 자기의 사색과 탐구는 너무도 가벼웠고 얕았다. 음악가로서 감수해야 할 인민의 목소리를 비로소 들은것처럼 가슴이 뻐근해졌다.

설명순은 별스레 로인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정수리에 내려쪼이는 뜨끈한 해빛, 들쑹날쑹한 산말랭이들과 우수수 설레이는 누렇게 뜨기 시작한 강냉이밭, 풀밭을 찾아 네굽을 놓는 송아지, 애국에 대한 로인의 진실한 토로… 노래처럼 생활이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상념이 뒤따라 뇌리에 갈마들었다.

로인과 말동무를 하다나니 시내까지 힘들지 않게 당도했다. 교외와 접한 입구에서 설명순은 령감과 헤여졌다.

강계는 설명순에게 영 생소한 산골도시가 아니였다. 후비장악을 위해서도 둬번 다녀온 일이 있었고 인민군협주단 소편대를 이끌고 공연하러 온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안내자가 있었고 공적인 업무여서 환대도 받았다. 지금은 혼자였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으며 강계승리기계공장을 찾아갔다.

얼굴이 기름한 산뜻한 느낌을 주는 접수원처녀가 설명순을 유심히 살펴보며 차선옥이 이제는 제관반에서 일하지 않는다고 알려주었다.

《기동예술선동대에 있어요. 문화회관에 가면 만날수 있을거예요.》

설명순이 알건대 차선옥은 분명 고급선반공이였다. 그래서 조혁이도 이를 무척 자랑하며 선반이 돌아가는 소리가 곧 경음악적인 리듬이라고 억지스레 설명했다. 그런 처녀가 기동예술선동대원이 되였다고 한다. 물론 그럴수도 있겠지만 설명순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아니아니하며 온 걸음이 랑패일수 있다는 생각에 설명순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렇다고 아름답지도 못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내놓고 물어볼수도 없었다.

문화회관은 정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한창 노래련습을 하던 예술소조원들이 선옥을 찾아왔다는 설명순의 말을 듣더니 귀속말로 무엇이라 속삭였다. 썩 반기는 기색들이 아니였다. 처녀들은 선옥이가 방금전에 집으로 갔다면서 언덕받이의 주택마을을 가리켰다. 주소도 알려주었다.

힘들게 인민반을 찾은 설명순은 곧바로 처녀의 집뜨락에 들어설수 있었다. 나직한 어조로 집주인을 찾았다. 토방밑에 누워 낮잠을 청하던 허리가 늘씬한 개가 이발을 드러내고 으르릉거렸다.

분홍빛머리수건을 쓴 이목구비가 단정한 처녀가 토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제서야 개가 온순해지며 주인의 곁에서 꼬리를 저었다.

군복차림의 설명순을 대하는 순간 처녀는 몹시 당황해하였다. 눈매가 그윽하고 얼굴이 동그스름한것이 어딘가 진중한 성격미를 느끼게 했다.

차선옥동무가 맞지요?》

설명순은 려행용가방을 다른 어깨에로 옮겨메며 될수록이면 어조를 부드럽게 하려고 애썼다.

《네, 제 이름이 선옥이랍니다. 어디서 오셨는지?…》

처녀가 서둘러 편리화를 찾아신으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머리에 쓰고있던 분홍빛수건을 벗어들며 조심스레 왼팔을 감싸쥐였다.

면바루 찾아왔구만.》

설명순은 목덜미의 땀을 훔치며 가방을 퇴마루에 놓았다. 의심쩍은 눈길을 던지는 처녀에게 한걸음 다가서며 조혁이와 함께 일하는 음악창작실장이라고 소개했다.

처녀의 동그란 어깨가 흠칠했다. 눈동자에 어린 이름못할 불안이 설명순의 마음까지 어수선하게 휘저었다.

《이거 안됐습니다만 시원하게 물 한사발 청합시다.》

하지만 처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듯 멍한 자세로 서있기만 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보니 랭수를 떠줄 생각도 없는것이라고 생각되였다. 더이상 청하지 않았다.

《에돌지 맙시다. 조혁동무에게 편지를 보냈지요?》

랭수를 떠주지 않는데 대한 반발은 아니였겠으나 어조가 생각지 않게 퉁명스러워졌다.

《이쪽에 출장왔다가 겸사해서 들린 길입니다. 약혼했다는게 사실인가요?》

그 순간에 설명순은 처녀의 길고 구붓한 속눈섭이 파르르 떨리는것을 띠여보았다. 처녀는 어떤 공포에 질린 눈길로 그를 일별하며 고개를 수굿했다.

진득진득한 침묵이 뒤따랐다.

《호- 달포전에… 그래요, 부모님들의 의향을 쫓아서 다른 사람을 만났답니다.… 정말 안됐습니다.》

온몸의 기운이 삽시에 땅으로 잦아들었다. 허거픈 웃음이 입밖으로 새여나갔다.

《그렇구만. 난 믿고싶지 않았댔는데… 혹시 일부러 꾸며낸 소리는 아니겠지요?》

《뭣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군관동지, 정말 미안합니다.》

자꾸 반복되는 말에 설명순은 화가 동했다. 이런 소리를 듣자고 달구지까지 얻어타며 온 걸음이 아님을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었다. 어떤 선의에 기대를 걸며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을 안고 달려온 길이였다고 강조할 필요도 없었다. 자기에 대한 환멸이 커졌다.

처녀는 숨없는 사람처럼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일을 다 저지르다니…》

차선옥이 고개를 외로 틀며 트레트레한 구름이 엉킨 먼 하늘가에 서글픈 눈길을 던졌다.

《절 욕하셔도 더 할소리가 없습니다.》

처녀의 목소리는 금선처럼 떨렸다. 자기의 실책에 대한 반성의 무게가 실려서인지 설명순은 무심중 처녀에 대한 련민의 정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사랑에 대한 처녀의 배반과 잇달렸다는 생각에 서둘러 부인했다.

《군관동지, 사실 그이와 전 갈 길이 달랐어요. 처음 만나서는 서로 의지가 될것 같았지만 지금에 와서보니… 아니였어요. 그이가 바라는것을 전 충족시킬수 없답니다. 그렇다고 큰일을 해야 할 그이한테 기계기름을 맡으라고 강요할순 없잖습니까. 그이한테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설명순은 속이 울컥했다. 처녀를 쏘아보았다.

《너무 리기적이구만. 조혁인… 동무와는 다른 사람이요.》

《우리 부모님도 더이상 가까이 지내는걸 바라지 않아요.》

처녀가 고집스레 외웠다. 해빛이 처녀의 눈가에 닿아 번쩍거렸다.

《전 외딸이랍니다. 부모님들도 년세가 계셔서 제가 모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기의 들뜬 기분에 부모님들을 고생시킬순 없어요.》

《그래서 신의를 버렸소? 조혁동무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무작정… 조혁동문 늘 말했소. 자기는 한 처녀의 진실하고 깨끗한 마음에 반했다고, 음악처럼 생활을 아름답게 대하는 순결한 마음에 반했다고 말이요.… 허, 그러니 다 지나간 일이겠구만.》

《…》

처녀는 눈을 꼭 감았다.

《아니, 아니예요. 그이는 너무 멀리에 있어요. 아득한 높이에 올라선 희망일뿐이예요.》

처녀의 어조가 별안간 금속성처럼 하고 울렸다. 눈을 뜨며 인차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이가 꼭 좋은 반려를 만나 행복하길 바랄뿐이예요. 이번에 저와… 약속한 동무는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기능공이랍니다. 평범한 청년이지만 마음에 들어요. 이젠 저도 마음이 평온해졌으니 더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한마디만 합시다. 정을 뗀 사람에게 이런 말이 바로 들릴지 모르겠소만 가능한껏 새겨주오. 정은 리기심이 아니요. 음악을 사랑하는 동무라니 알겠지만 음악과 생활을 별개로 대한다면 그것은 벌써 위선이고 허영이나 다름없소. 웃사람으로서 하는 소리요.》

처녀가 설명순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오연한 빛이 동그스름한 얼굴에 비꼈다. 무엇인가를 강렬히 부언하려는 내심이 그의 눈에 어렸다. 무슨 말인가를 할듯 입을 오무작이던 처녀는 살레살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 더 설명한댔자 구실이나 변명으로밖엔 안될것이다. 나름대로의 견해로 첫 정을 배반한 그의 생활이 얼마나 아름답겠냐마는 더이상 그를 꾸짖고싶지 않았다. 고난을 겪는다는 가정사정, 애인에게 도움이 안된다는 리유… 그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는데서 오는 혹은 리기심을 가리우기 위한 허울에 불과했다.

《이젠 가봐야겠소. 행복하기 바라오.》

설명순은 가방을 들고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조각처럼 서있는 처녀의 곁을 지나쳐 대문에 다가서다가 다시 돌아섰다.

조혁동무의 악보수첩이 있겠는데… 돌려주오. 물론 그가 요구한건 아니요. 하지만 그의 상관으로서 난 수첩을 돌려받는게 옳다고 보오.》

《그건… 그건…》

처녀가 사뭇 당황해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명순은 기다렸다.

《아니, 없어요. 이미 버렸어요. 정말이예요. 무슨 필요가 있겠나요. 군관동지, 이젠 다 지나간 일이 아니나요.》

왜서인지 처녀의 어조는 애원에 가까왔다.

조혁동무의 사진도 없겠구만?》

《네, 것도 다…》

《알겠소.》

설명순은 맥없이 손을 내저었다.

처녀는 대문밖에 나서는 설명순을 망연히 지켜보았다. 대문에 매단 방울이 귀솔갑게 울렸다.

골목길에서 피끗 돌아보니 처녀는 대문짝을 부여잡고 흐느껴 울고있었다. 다시 돌아갈수 없는 과거에 대한 애달픈 추억때문일수 있었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설음때문일수도 있었다. 후회하는 눈물은 아닐것이다. 조혁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할지 난감했다.

언덕받이를 내려 유보도에 나서는데 앞에서 오던 사람이 그를 유심히 살피다가 환성을 질렀다. 뜻밖에도 시내입구에서 헤여졌던 《나가자》령감이였다.

로인은 마치 몇년만에 다시 만나는 지기처럼 법석 떠들며 설명순의 손을 부여잡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의아한 눈길로 그들을 여겨보았다.

《원, 확실히 우린 연분이 있는것 같수다. 점심식사두 못하셨겠는데 우리 동생네 집에 갑시다.》

령감은 다짜고짜로 설명순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냥 물리치자니 성의를 무시하는것 같아 별수없이 따라섰다.

공장에 들렸던 일을 이것저것 외우던 령감이 설명순에게 조카를 배반한 녀자를 만났는가고 물었다. 설명순은 쓰거운 웃음으로 대답했다.

《헌데 군관어른, 그 녀자두근방서 사는가요?》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로인이 지팽이에 몸을 실으며 톺는 언덕길이 바로 설명순이 내려왔던 그 길이다.

설마하며 고개를 가로젓던 설명순은 걸음을 멈칫했다. 령감이 차선옥의 집대문을 열고 들어서며 바로 그 처녀의 이름을 불렀던것이다.

《…이 집이 우리 동생네 집이우다. 마침 조카딸이 집에 들어왔시다레. 선옥아, 내다. 〈나가자〉령감이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가? 령감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조카딸이 선옥이라고 한다. 조혁의 옛 애인이였다. 설명순은 꿈을 꾸는듯했다.

토방에 앉아 먼 산구릉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겨있던 처녀가 언뜻 놀라는가싶더니 령감을 반가이 맞았다. 《나가자》령감이 설명순이 서있는쪽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무엇이라 설명했는데 무심결에 눈길을 보내던 처녀가 소스라치듯놀란다.

설명순은 그럴수 없다고, 무엇인가 잘못되였다고 생각했다. 황황히 걸음을 돌리려는데 《나가자》령감이 얼른 그의 손목을 잡았다.

군관어른, 바루집이우다. 애가 우리 조카딸이지요. 어떻수?》

설명순은 두려운 눈길로 처녀를 일별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녀의 동실한 얼굴도 해쓱하게 질렸다. 으깨문 입술에서 당장 피방울이 내배일듯했다.

《우리 공장이 자랑하는 보배처녀이지요. 이런 애에겐 꼭 복이 차례질거우다. 글쎄…》

《큰아버지, 아니예요. 큰아버진 다 몰라요.》

별안간 높아진 새된 목소리에 령감이 흠칫 놀랐다.

나에겐 이미 있어요. 큰아버지, 그만하세요. 이제 죄다 말씀드려요.》

설명순은 서글프게 웃었다.

《됐습니다, 아바이. 우린 방금전에 만났댔습니다. 세상에 별의별 일이 다 있지요. 그럼 전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설명순은 어리뻥뻥한 낯색으로 번갈아보는 로인에게 인사하며 돌아섰다. 《나가자》령감이 그를 소리쳐불렀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때마침 정류소에 뻐스가 닿고있었다.

령감이 절룩거리며 잰걸음으로 따라왔다. 설명순은마주서야 마음만 상할것 같아 손님들의 뒤를 따라 그냥 뻐스에 올랐다. 유보도에 내려선 령감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고있었다.

(미안합니다, 아바이…)

뻐스의 맨뒤가름대를 잡고 선 설명순은 아픈 눈길로 그를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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