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 회)

29

 

피아노와 금관악기소리가 혼탁되여 온 하루 법석 끓어번지던 예술선전대청사는 저녁무렵이 되여서야 조용해졌다. 했으나 아직도 어느 구석에선가는 기량련습을 하는 녀성고음 노래소리가 간간이 흘렀다.

하루사업총화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선 한선률은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즈음에 와서 무슨 일을 하든지 짜증이 앞서는가 하면 입맛마저 떨어지는것이 이상했다. 이제껏 없던 현상이여서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번에도 한선률은 자강도순회공연을 보장하면서 능력있는 성악지도원으로, 또는 성악가로서의 재간을 유감없이 시위하였다. 군단정치부에서도 그를 높이 평가했다. 했으나 별로 기쁘지 않았다.

선률은 책상서랍에서 손거울을 꺼내들었다. 타원형의 맑은 거울속에 좀 수척해진, 어딘가 매력잃은 떼꾼해진 눈매의 녀자가 비껴있었다. 입술도 윤택을 잃은듯했다. 연지로 슬쩍 문댔으나 파릿한 인상만 더해주는것 같아 다시 손수건으로 씻어냈다.

(왜서일가? 도대체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는것이 무엇때문일가?…)

누구인가를 원망하게 되고 설음을 안게 되는것이 못마땅하여 다른 일에 집념하고싶지만 바로 그 일로 하여 마음을 다잡을수 없었다. 이번 자강도공연에서 예술선전대가 거둔 성과는 컸지만 그의 울적한 심기는 가셔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불안을 더욱 부채질하는듯했다. 공연때의 감동이 어떤 다른 사람이 겪은것처럼 상기되였다.

문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얼굴이 가을철 무우처럼 길쑥하게 생긴 예술선전대장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왜 퇴근하지 않소?》

《일이 좀 있어서…》

《아하, 대대장동무가 늦게 들어오는게구만. 알겠소.》

선률은 응대하지 않았다. 닫겨진 문을 지꿎게 응시하며 알릴듯말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이는 오늘 밤 들어오지 않을것이다. 발전소건설장에 나가겠으니 기다리지 말라고 전화를 걸어왔던것이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오래간만에 만나 긴히 이야기할 짬도 내지 못할가? 자기의 심란한 마음을 터놓을데란 남편밖엔 없는데 남의 속은 아랑곳없이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는것이 야속했다.

사실 선률은 평양에 가기 전에 군단정치부장으로부터 인민군예술학원 원장을 만나라는 지시를 받고 어정쩡했었다. 좋은 일이 있을것이라고 덧붙이는 말에 그만 심장이 흉곽밖으로 튀여나올것처럼 높뛰였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잊지 않았다는 생각에 눈물마저 솟구쳤다.

그러나 대좌령장을 단 년로한 원장을 만나고는 실망하지 않을수 없었다. 꼭 그렇다고 찍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원장은 실력이나 경력으로 보아 전과교원으로 소환했으면 좋겠는데 인민군협주단 부단장이 바라지 않아서 그만두어야 할것 같다고 암시했던것이다.

믿어지지 않았다. 시집에서 며느리가 곁에 오는것을 썩 달가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났다. 아니라고 부인해보았으나 다르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부대에 도착하니 예술선전대가 최고사령관동지를 모시고 공연을 진행한 놀라운 사실과 다름아닌 한선률성악지도원이 인차 평양으로 소환될것 같다는 소문이 동시에 그를 맞이했다. 그 행복한 순간에 부대를 떠나있은것이 한스러워 선률은 눈물로 하루해를 보냈다.

한편으로는 평양으로 소환되는줄 알고 부러움을 금치 못해하는 선전대동무들에게 사실을 말해줄수 없어 더 속을 앓게 되였다. 선률은 화선초소도 중요하지만 자기에게는 평양의 무대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반대하고있다. 무엇때문에?… 리해되지 않았다.

자강도에 다녀오면서 선률은 자기의 희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였다. 노래에 열광적으로 화답하며 생산전투의 불길을 지피겠다고 맹세다지던 로동자들과 뜻하지 않은 사고로 한팔을 못쓰게 되였지만 일터를 뜨지 않고 일감을 찾아쥔다는 눈매고운 선반공처녀, 공무직장장의 희생, 다름아닌 그가 대대정치지도원 아주머니의 아버지였다는 사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를 놀라게 했다. 왜서인지 선률은 화려한 무대를 꿈꾸던 일이 죄스럽게 여겨졌다.

그래, 더이상 미련을 가지지 말자. 이 화선초소에도 내가 할일은 얼마든지 있어. …

한선률은 방안에 어둠이 자리편것도 의식 못했다. 불을 켜려다말고 말코지에서 모자를 벗겼다. 대충 머리칼을 다듬고 모자를 눌러썼다.

사택마을까지는 멀지 않았다. 예술선전대울타리를 따라 미나리밭을 지나면 인차 맞다들게 되는 집들이 예술선전대사택마을이였다. 별빛없는 밤의 공간에 밥짓는 구수한 냄새가 짙게 떠돌고있었다. 썰렁한 집에 혼자 들어설 생각을 하니 별스레 쓸쓸해났다.

예술선전대 경리과장네가 살고있는 옆집에서는 무슨 좋은 일이 생겼는지 청높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여나왔다. 개들마저 덩달아 컹컹 짖어대는것이 마치 외로운 자기를 조롱하는듯했다.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선 선률은 한동안 미닫이문에 기댄채 오도카니 서있었다. 마음을 다소 진정하고서야 전등을 켰다.

앉은뱅이책상우에 오선지들이 무질서하게 쌓인것이 눈에 띄였다. 남편이 부탁한 중대예술소조공연에 내놓을 노래곡목들이였다.

유승철에게서 사랑의 첫 고백을 듣던 때가 생각났다. 물론 옛 시절로 되돌아갈수는 없겠지만 그때처럼 아무 걱정없이 그와 속삭이고싶었다.

《선률이, 우리 부모님들께 편지를 쓰기요. 우리의 사랑이 합쳐지는 곳에 우리의 미래가 꽃펴난다고 말이요.》

《거짓말! 난 몰라요.》

지난해 겨울날이였던지… 대대사격장에서였다. 그와 함께 걷던 눈덮인 소로길, 페장깊이 흘러들던 매운 화약내, 꽃보라처럼 날리던 눈가루, 웃음소리, 웃음소리…

(정애동진 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분명 들었겠는데… 울고있겠지? 그래, 이렇게 앉아있을수 없어. 정애언니를 만나서 슬픔을 함께 나누어야 해.)

때늦은 생각을 하며 선률은 책상을 두손으로 짚고 일어섰다.

갑자기 문밖에서 조심스런 인기척소리가 났다.

퇴마루의 문이 빠금히 열리더니 몸집이 작은 녀인이 고개를 기웃했다.

《있었구나. 나야, 정치지도원네 집.…》

《어마나, 정애동지!》

한선률은 정애가 나타난 사실에 닁큼 놀라며 어서 들어오라고 부산을 피웠다. 먼저 찾아가지 못하고 집에서 맞이하는것이 미안했다.

《빨리 온다는게 그만 늦었어. 갈밭에서 오다나니 옷이 말이 아니야.》

《일없어요, 막 보고싶었어요.》

선률은 퇴마루에서 작업복을 터는 정애의 손을 잡아끌었다. 갈밭의 감탕내가 물씬 풍겼다. 순회공연을 떠날 때보다 얼굴이 더 수척해보였다. 눈가장자리에 남아있는 눈물흔적이 선률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정치지도원동지네 집소식이 강계까지 날아왔더군요. 모두가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몰라요. 하지만…》

선률은 뒤말을 끊으며 입술을 여물질했다. 물론 알고는 있겠지만 자기 입으로 그의 집소식을 전하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 걸음에 선옥동무를 만났어요. 정애동질 무척 따르더군요.》

정애의 얼굴이 한순간 밝아졌다. 이야기에 구미가 동한듯 눈을 치뜨며 선옥이가 어떻게 지내던가고 물었다.

《지난 겨울에 차사고로 한팔을 못쓰게 되였더군요.》

《어마나, 그건 또 무슨…》

《굴러내리는 차를 막다가 팔을 다쳤다나봐요. 곱게 생기구 성격두 차분한 동무인데 얼마나 아깝던지…》

《어쩜 그런 일이 다 생기다니.》

정애의 눈이 흐릿해졌다. 선률은 친자매간처럼 정을 나누는 그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도리여 정애동지를 생각했어요. 장군님께 기쁨드린 정애동지가 마음속의 거울이라면서 좋은 소식만 전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정애동지의 아버지도…》

정애는 반응이 없이 구석진 곳의 어느 한점을 지그시 응시했다. 눈가에서 눈물이 바그그 끓어올랐다.

며칠전에 남편으로부터 아버지의 희생소식을 전해들은 정애였다. 처음엔 믿고싶지 않아 완강히 도리질했다. 그러나 남편의 침통한 낯색을 보고서야 사실이라는것을 깨달았고 뒤따라 흐느낌을 터쳤다.

아버지가 불치의 병을 앓고있다는것은 이미전부터 알고있었으나 그렇게 빨리 갈줄은 몰랐었다. 딸자식으로서 제대로 구실 못한것이 속을 허볐다.

올여름엔가 강계로 가는 차편이 생겼길래 터밭에서 캔 올감자 한마대를 보내주었으나 오히려 아버지는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군관인 남편과 병사들을 위해 진정을 바쳐야 할 딸이 잔일에 신경을 너무 쓴다는것이였다.

《…산사람의 입에 거미줄이 쓰는 법이란 없다. 우리 자강도사람들은 꿋꿋이 이겨내고있으니 집걱정은 말거라. 난 네가 장군님께서 기억하시는 그런 군인가족이 되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

그 편지를 쓸 때에 아버진 분명 앞일을 내다보았을것이다.

정애는 당장 집에 가고싶었다. 늦게나마 자식된 도리를 다하고싶었다.

(아니야, 아버진 분명 이 딸이 장군님을 뵈온 사실을 알았을텐데 모든걸 줴버리고 온걸 알면 노염을 터뜨릴거야. 그래서 어머니도 오지 말라고 한거야. 아버지, 좀만 기다려요. 이 갈밭을 다 개간하고 우리 군인가족들이 예술소조공연을 준비한 소식을 장군님께 아뢰인 다음에 아버질 뵈러 가겠어요. 아버지도 그걸 바라지요?)

그날부터 정애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돼지우리와 갈밭에서 살다싶이했다. 기진하여 밭두렁에 쓰러진적도 있었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류정애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선률의 손을 잡았다.

《사실 래일쯤 오려댔는데 마침 대대장동지가 오늘 밤에 공사장에 나가겠다고 하잖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선률동무의 도움을 좀 받을가 해요.》

도움?… 선률은 의미를 알수 없어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 군인가족들은 아버지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예술공연준비를 하고있어요. 하지만 그저 뚱땅거릴줄이나 알았지 곡목편성이랑은아나요? 대화시도 있구 노래이야기도 있어야겠는데 아무래두 선률동무의 신세를 져야 할것 같애서…》

선률은 혹시 잘못 듣지 않았나 하여 귀를 의심했다.

《인차 본가집에 가야잖나요.…》

《됐어요. 그 이야긴 그만두자요. 좀전에두 우린 갈밭을 개간하다가 밭두렁에서 오락회를 펼쳤댔어요. 독창도 하고 북제창도 했는데 모두가 좋아해요. 난 단소를 불었는데 지나가던 군인들이 단소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더군요.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이였어요. 우린 모두 장군님이 그리워서 울었어요.…

그렇다고 늘 오락회식으로나 해선 안될것 같애요. 대대장동지도 선률동무를 한번 만나보라고 등을 떠밀더군요.》

《네-》

선률은 고개를 까딱하며 정애의 손을 잡았다. 그의 까밋한 얼굴이며 아직 슬픔을 가시지 못한 눈동자를 살폈다.

정애동지, 힘들지요?》

《글쎄, 솔직히 말하면 힘들어요. 하지만 보람이 있어요. 우리 장군님께서 군인가족들의 수고를 알아주시지 않았나요. 그리고 또 우리에게 영예로운 과업도 주셨구.》

《나도 그렇게 될수 있을가요?》

《어마나,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선률동문 노래로 우리들에게 힘을 주지 않나요. 선률동문 꼭 온 나라가 다 아는 훌륭한 예술가가 될거예요. 그땐 우리더러 촌로친들이라고 욕하지나 마세요.》

선률은 정애가 마치 자기의 속을 들여다본것 같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도 대대의 한 군인가족이나 다름없는데 과업을 주세요. 있는 힘껏 돕겠어요.》하며 선률은 책상우에 가려놓은 오선지에 얼핏 눈길을 주다가 전투가방에서 노래수첩을 꺼냈다.

《원, 성미두… 오늘은 동의나 얻자고 걸음한걸요 뭐.》

정애가 무릎걸음으로 선률의 앞에 바싹 다가앉았다. 눈을 삼박이며 선률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요새 몸이 좀 이상하잖아요?》

선률이 알릴듯말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거짓말 말아요. 얼굴색이 전같질 않아요. 눈밑에 검버섯이랑 돋은걸 보니… 몸조릴 잘해야 할것 같애요. 남자들은 다 몰라요. 은근히 그걸 바라면서도 관심을 돌려줘야 말이지요? 래일 리진료소에 가봐야겠어요.》

선률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짜릿한 흥분이 피줄을 타고 온몸을 누볐다.

《무슨 일이 있나요?…》

《글쎄… 그저 짐작일따름이예요. 몸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것 같애요.》

선률의 입술이 방싯 틔여졌다. 뒤이어 해살같은 웃음이 비꼈다.

《어쩜 좋을가? 난 것도 모르고 겁만 앞섰군요. 그래서…》

선률은 행복이 기척없이 다가왔다는 감당하기 어려운 느낌에 머리가 핑 돌았다.

선률동무, 앉아있어요. 오늘은 내가 밥을 짓겠으니 래일부턴 대대장동지한테 막 투정질을 해요. 그런 때나 앉아서 호령하지 지나면 손에 자개바람이 일도록 뛰여다녀야 해요. 호호…》

정애는 자리에서 움쭉 일어서더니 벽에 걸려있는 앞치마를 벗겼다.

선률이 제발 그만두라고 간청했으나 정애의 고집을 당해낼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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