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23

 

낯선 손님을 맞이하는지 개가 겁기에 질린 소리로 컹컹 짖어댔다.

《계십니까? 이 집의 귀한 딸이 퇴원했다는 소릴 듣고 왔습니다.》

토방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뜻밖에도 공장초급당비서였다. 몸이 여돌차보이는 젊은 지배인이 뒤따랐다.

한분녀는 당비서에게서 식료구럭지를 미안스레 넘겨받으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우리 집엘 어떻게 다…》

《허, 우리가 오지 말데를 왔소?》

《그게 아니라…》

《내쫓지는 않겠지요?》

당비서는 차선옥이 내미는 방석을 밀어놓으며 방바닥에 그대로 앉았다.

《수술후과가 어떠냐?》

《이젠 다 나았습니다.》

《네가 고민할가봐 걱정했는데 웃는걸 보니 됐다. 처음엔 팔을 잘라야 한다는 소리가 들려서 지배인동지랑 속깨나 태웠다. 그래서 도당책임비서동지에게 이야기했댔지.》

당비서의 말에 선옥은 고개를 수굿했다. 부지불식간에 아픈 심정이 되살아나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고였다. 고개를 틀며 몰래 눈굽을 찍었다. 그러나 이내 자기를 다잡으며 딸자식처럼 정을 기울이는 마음들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하튼 우리 선옥이 덕에 이 지배인의 몸값이 좀 올라갔다. 나두 도당책임비서동지의 말을 듣고서야 선옥이가 구원한 차가 공작기계공장현대화에 동원된 차라는걸 알았다. 책임비서동진 선옥이가 자기 한몸이 아니라 나라의 귀중한 재산부터 생각했다면서 만장앞에서 칭찬했다. 나두 어깨가 으쓱해졌지.》

다혈질의 성미인 지배인은 일밖에 모르는 일군이였다. 그러다나니 말썽거리를 늘 꽁무니에 차고다녔다. 한달전에는 현대적인 후생시설을 지을것을 계획하고 와짝 내밀다가 층막이 무너지는 사고를 내기도 했다. 시공일군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주장만 고집하다가 경난을 쳤던것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그것으로 지배인은 책벌을 받았고 한동안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주저앉은것이 아니라 더 요란하게 일판을 벌려 무너진 층막공사를 이틀사이에 마무리하고 잇달아 건물을 번듯하게 일떠세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젊은 지배인을 존경했다.

《당비서동지, 아까 토론한것처럼 선옥동물 아예 기동예술선동대에 들여보내는게 옳지요?》

지배인의 성급한 소리에 당비서가 차선옥을 피끗 돌아보았다.

선옥이가 없으니 기동예술선동대두 크게 맥을 추지 못하는것 같애.》

일부러 왼심을 쓰는 말들이여서 선옥은 괴롭게 웃었다.

《까짓 아바이, 그렇게 하는것으로 락착지읍시다.》

《아니, 지금은 먼저 안정하는게 기본인것 같습니다. 그 문젠 선옥이가 결심하게 합시다.》

당비서가 누긋한 소리로 말해서야 지배인은 자기는 성미때문에 자꾸 말을 듣는다면서 허허 소리내여 웃었다.

《그럼, 사람과의 사업은 당비서동지가 맡으십시오. 난 차아바이와 의논할 문제가 좀 있습니다.》

지배인은 뒤꽁무니에 차고온 설계도면을 꺼내더니 차기선의 앞에 주르르 펼쳤다. 필기도구를 찾는지 이리저리 눈길을 돌리다가 문득 담배통으로 리용하는 문갑을 띄여보고 팔을 내뻗쳐 끄당겼다.

《이게 아바이가 애용한다는 그 담배통입니까?》

《예, 애가 평양에 출장갔다가 제도기를 사온 뒤에 이렇게 담배통이 되였수다. 담배맛이 별로 구수하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들으니 선옥은 조혁이와 함께 평양제1백화점에 들려 제도기를 사던 때의 일이 기억났다. 그때 조혁은 도면에 밝은 아버지에게는 제도기보다 더 좋은 기념품이 없다면서 무작정 그것을 샀었다. 제도기를 머리우에 쳐들고 싱글벙글하던 모습을 눈앞에 떠올리려니 물리치기 어려운 애바른 정이 가슴을 파고든다.

아버지와 무릎을 마주한 지배인은 벌써 목소리를 높이며 열을 올렸다. 듣건대 전력난으로 멎어선 기대들을 어떤 방법으로 돌리겠는가를 토의하는것 같았다. 지배인이 내놓은 안을 아버지가 반대하는가 하면 아버지가 내놓은 안을 지배인이 반대하여 도대체 합의가 이루어질것같지 못했다.

전기사정때문에 절실히 필요한 제품생산이 지체되고 기술자들과 능력있는 기대공들이 계속 쓰러진다는 지배인의 청높은 목소리에 선옥은 가슴이 답답해났다.

당비서는 어머니와 집살림형편이며 선옥의 혼처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결에는 평양에 있다는 친한 총각소리가 나왔는데 선옥은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한시간나마 떠들썩하며 기술토의를 하던 지배인이 드디여 락착을 보았는지 아버지의 솥뚜껑같은 손을 부여잡으며 됐다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당비서에게 빨리 가자고 소리쳤다.

당비서는 계속 충고를 주는데도 성미를 고치지 못하는 지배인을 십분 리해한다는듯 너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선옥이더러 다른 생각말고 안정치료를 잘 받으라고 당부하며 거방진 몸을 일으켰다.

차동문 오늘 밤에 나오지 않아도 되겠소. 지배인동지와 토론이 있었소. 허, 지배인동지가 저렇게 좋아하는걸 보니 우리만 덕을 본것 같구만.》

퇴마루에 걸터앉아 신발을 찾아신던 당비서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참, 좋은 소식이 있소. 인민군대예술선전대가 강계에 왔소. 우리 공장에서두 공연하기루 되여있다누만. 차동무, 선옥이를 데리고 꼭 나와야 하오.》

《그런 공연이야 마다하면 안되지요. 당비서동지두 접때 내가 퉁소 부는걸 보지 않았습니까?》

차아바이, 당비서동지가 지금 차아바이를 빗대고 이 지배인을 답새기는겁니다. 예, 그날에야 일을 전페하고 관람조직을 해야지요.

장군님께서 우리 로동계급을 위해 예술사절을 보내주셨는데 환영사업을 잘합시다.》

먼저 마당에 내려선 지배인이 제잡담 잘못을 인정하는 소리였다.

당비서는 무슨 할말이 있는지 얼른 대문을 열지 못하고 마당에 내려서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당비서의 높지 않은 목소리가 선옥의 귀가에 미쳐왔다.

류동무가 저녁무렵에 다시 공장에 나왔더구만, 집안에 누워있지 못하겠다면서.… 죽기 전까지는 기계소리를 듣겠다는거요. 지금 동력발전기옆에 누워서 로동자들이 일하는걸 봐주는데 나도 어쨌으면 좋을지 모르겠소. 그렇다고 밥술도 뜨지 않지.…》

《그 사람이야 내가 잘 알지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내 오늘 정애 어미를 만났는데 령감이 이젠 눈앞의 일이 뻔한데 먹을걸 구하느라 뛰여다니지 말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라도 더 보탬을 주라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며칠안팎이라는데…》

선옥은 가슴이 쭝해났다. 수더분하고 인정미 넘치던 정애 아버지가 림종을 가까이 했다는 말이 몹시 귀에 설었다. 불가피한 날이 그토록 빨리 닥쳐왔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안해의 부축을 받으며 당위원회에 찾아와서 자기가 잘못한게 있으면 다 말해달라는데… 내 무슨 맡을 하겠소. 이 페장을 떼서라도 살릴수 있다면 정말 좋겠소. 차동무, 딸한테 소식을 전하는게 아니요?》

아버지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환동무가 반대할겁니다. 애들이 당앞에 부끄럼없이 사는게 소원이라면서 죽은 뒤에두 이내 알리지 말라구 당부했다는것 같습니다.》

《너무 모질구만. 어쨌든 좋은 생각이 있으면 알려주오. 자, 가겠소. 선옥이 문제는 후에 다시 토론합시다.》

지배인과 당비서가 떠나자 집안이 불시에 조용해졌다.

차기선은 앉은뱅이책상앞에 마주앉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책꽂이를 뒤적거리더니 낡아빠진 공책을 펼쳐놓고 수판알을 튕기기 시작했다. 선옥은 아버지곁에 다가서며 등불심지를 돋구었다.

공책을 바투 들여다보던 차기선이 돋보기너머로 선옥을 넌지시 넘겨다보았다. 선옥의 동실한 어깨우에 솥뚜껑같은 손을 올려놓았다.

《아무래도 내 현장에 나가봐야겠다.》

《아니 여보, 애가 왔는데 부득부득…》

앞치마에 손을 문대며 방안에 들어서던 한분녀가 불만조로 핀잔했다.

선옥이도 리해할게다. 너도 들었겠지만 지금 공장에선 장군님께서 주신 과업을 제기일에 수행하자고 불이 붙었다. 전기가 없다고 주저앉겠니? 어떻게든 기대를 돌려야지. 그리구 정애 아버지두 다시 공장에 나왔다질 않더냐.》

《운신하기 힘들겠는데…》

한분녀가 의심쩍은 소리로 되받았다.

《마음을 모질게 먹은것 같소. 여보, 집에 강냉이든 콩이든 남은게 있으면 좀 꾸려주오.》

《나도 함께 가겠어요.》

《안된다.》

한분녀가 부르짖었다. 그러나 딸의 동그스럼한 얼굴에 비낀 간절한 소망을 읽고는 말없이 승낙하였다. 부엌에 내려가더니 크지 않은 오지단지를 안고 방안에 들어섰다. 넓게 펼쳐진 보자기에 강냉이알이 쏟아지는 소리가 호젓한 방안공기를 흔들었다.

《여보, 내 당신마음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어쩌겠소.》

《됐어요. 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치겠나요? 공장이 돌아가는 소릴 들으면 먹지 않구두 배가 불러요. 선옥아, 힘들어두 좀 참자꾸나.》

《어머니, 다 알아요.》

선옥은 한분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조용히 뇌이였다.

차기선은 딸과 함께 집을 나섰다. 모래에 씻기운듯 반짝거리는 별들이 밤하늘이 좁다하게 널려있었다. 자리다툼에서 밀려났는지 이따금 별찌들이 긴 꼬리를 끌며 살같이 내리꼰지군 했다. 거리는 조용했다. 가로수들이 잎새를 살랑살랑 저으며 밤의 자장가를 부르는듯했다.

《아까 당비서동지랑 기동선동대소릴 꺼내던데 어떠냐?》

《아직은… 호-》

《사실 모두가 지치고 힘들어할 때에 노래를 불러주면 힘이 되지. 그래서 아버지두 조혁이를 좋아하는게다. 그래 그 사람과는 련계가 있냐?》

《아니요, 잊어버렸어요.》

차기선이 걸음을 멈칫했다. 선옥은 눈을 꼭 감았다.

《어서 말해라, 무슨 소리인지?…》

선옥은 밤하늘을 장식한 잘디잔 아기별들을 쳐다보며 차겁게 웃었다.

《아버지, 암만 생각해야 우린 서로 어울리기 힘들것 같애요. 그인 리상이 하늘에 닿았는데 난 기계동음이 울리는 생산현장에 있어요. 이젠 한팔까지 못쓰게 되였으니… 절 리해하고 또 부모님도 편안히 모실 그런 사람을 택하는게 옳다고 봐요. 저에게 종종 면회오던 공무직장의 한 선반공이 어떨가 해요. 이야기를 나눠보니 어질고 순박한것 같애요.》

아니, 거짓말이였다. 물론 면회는 왔지만 숫제 그 나이의 총각처녀들 사이에 있게 되는 그러루한 이야기를 여담삼아 나누었을뿐이다.

《처신이 바른것 같질 않구나.》

《장차 괴로움을 겪기보담 차라리 지금 단념하는게 나아요.》

아버지는 응대없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이따금 장거리운행을 하는 화물자동차들이 요란한 발동음을 울리며 곁을 지나쳤다. 아빠트너머로 보이는 희읍스름한 공장구내에서 방송소리가 울려왔다.

선옥아, 몸이 불편해도 음악만은 버리지 말거라. 우리 자강도사람들은 노래를 사랑한다. 네가 그 사람과 헤여지겠다니 다른 말은 못하겠다만 꼭 좋은 노래를 지어달라고 부탁해라.》

《…》

선옥은 자기가 울고있다는것을 느꼈다. 더운 눈물이 두볼을 타고 흘러내리며 입언저리를 적셨다.

《이제 정애 아버지를 만나면 힘이 되는 소릴 하거라. 평양총각에 대해 묻거든 다른 소린 말구. 앞일을 짐작했는지 네 서방될 사람을 꼭 만나고싶다고 외우더라.》

선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느낌이 새여나가지 않게 입술을 옥물며 멀리 불빛이 어룽진 공장정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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