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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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식을 통하여 김일성동지의 말씀을 전해들은 대원들은 벌써 마음들이 풀린데다 종일 눈보라에 얼었던 몸이 녹는 바람에 혼곤히 잠들이 들었다.

자정이 기울어서 마령감이 대원들을 깨웠다. 모두 눈을 비비고 바라보니 방안에 김이 가득 서리고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제부터 먼길을 가야 할터이니 속이 든든해야 한다면서 마령감은 대원들앞에다 무둑하게 만두가 쌓인 버치를 내다놓았다. 방안은 흥성거렸다. 모두 들뜬 분위기속에서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는 전투준비들을 갖추었다.

한편 김일성동지께서는 한흥권을 시켜 한 3km 떨어진 지점에 몰켜있는 구국군부대에 련락을 띄우시였다. 그이께서는 우리가 뚫고나간 뒤를 따라오면 포위된 부대전부를 밤사이에 은밀히 뽑을수 있다는것을 알리라고 하시였다. 한흥권에게 주영장을 만나 일을 본 다음 재빨리 부대의 뒤를 따라오라고 이르시였다.

이윽고 대오는 눈길을 헤치며 산발을 타고내렸다.

광풍이 불었다. 바람은 산을 온통 들었다놓듯이 마구 불어닥쳤다. 눈보라는 숲을 때리고 산마루를 걷어차고 휘휘 말려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다시 내리꼰지군 하였다.

《밤길 걷기엔 아주 안성맞춤이웨다. 발자국을 잠시동안에 다 지워줄것이웨다.》

마령감은 바람을 막기 위해 팔소매로 얼굴을 가리우며 웃었다.

자그마한 령을 넘었을 때 마령감은 걸음을 멈추었다.

《낮에 보니 이 아근에 온통 하얗게 못된 소리를 쓴 종이장이 널려있습데다. 바람에 다 날려가고 지금은 보이지 않는군요.》

그는 길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휘둘러보다가 또 말을 하였다.

《한데 그 김일성장군이란분이 지금 정작 어떻게 됐을것 같습네까? 그 종이에는 하나도 남지 않고 유격대가 다 없어졌다고 했습디다만…》

글쎄요.》

김일성동지께서는 빙그레 웃으셨지만 마령감은 알아볼수 없었다.

《왜놈들은 세상에 없는 악귀들이지요. 그놈들이 하는 소리란 귀담아들을만한것이 하나도 없습네다. 그놈들 수작대로 유격대를 다 잡아없앴다면 무엇때문에 그 숱한 군대를 풀어서 산을 두겹세겹 에워싸고있겠소이까? 내가 지난 초겨울에 소금을 구하러 장에 갔더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김일성장군님께서 군대를 풀어서 왜놈들을 친다고들 하더군요. 그래 멀지 않아 조선이 광복을 할거라구들 합데다. 내 워낙 세상 일에 떳떳하지를 못해서 어디 나설만한 처지는 못되지만 그런분을 한번 만나뵈왔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소이다.》

《할아버지가 왜 떳떳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제 오래오래 사셔서 좋은 세상 보셔야지요.》

《내 일신에 락이 돌아오기를 차마 어찌 바라겠소이까? 다만 그런 위인께서 물론 장생하셔서 불쌍한 겨레를 건져주시기를 바랄뿐이지요. 한데 길이 온통 묻혀버렸군. 이게 어느 모퉁인고…》

로인은 대렬을 세워놓고 잠시 앞길을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절벽이 나졌다. 허공에 세운 기둥같이 아찔하게 깎아질리운 단애였다. 세면은 절벽이고 한쪽귀퉁이만이 산릉선과 잇닿아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친히 100메터폭이나 되는 바위벽을 세밀히 살피시였다.

그동안 대오는 휴식하였다.

이윽고 대렬앞에 돌아오신 그이께서는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 세세한 주의를 주시였다. 명령이 있기전에는 절대로 총을 쏴서는 안된다. 말을 해서는 안되며 돌을 굴리지 말아야 한다.

절벽의 높이는 약 30메터나 되였다.

그중 동작이 민첩하고 나무에 오르는데 재주가 있는 김일룡은 바줄을 허리에 차고 바위벽에 붙었다. 바람은 더욱 사납게 불었다. 사람의 몸뚱이를 허궁 들어내칠것처럼 야단스레 휘몰아쳤다.

숨가쁜 시간이 한초한초 흘렀다.

나무뿌리 부러지는 소리가 우쩍하더니 김일룡이 떨어져내렸다. 가슴을 조이며 바라보던 대원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김일룡은 아무 말도 없이 또 바위에 붙었다. 거듭 다섯번을 실패하였는데도 그는 단념하지 않았다. 손에서 피가 흐르고 무릎이 째졌다. 얼굴에도 상처가 났다. 한 대원이 자기가 올라가보겠다고 하자 김일룡은 그를 밀쳐버리고 또 나섰다.

아홉번만에 바줄이 내려왔다.

김일룡은 머리가 터져 검은 피가 얼굴로 흘렀지만 그것을 훔칠 생각도 못하고 바위에 바줄을 매고 끌어당기였다.

대원들이 다 올라서고 나중에 마령감까지 언덕우에 올라섰다.

《아! 산양도 발을 붙이지 못할 곳인데 사람들이 올라왔군.》

진일만이 《리론가》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또 한마디 하였다.

송덕형이 받았다.

《산양이 갈수 있으면 사람이 갈수 있고 사람이 갈수 있으면 부대가 갈수 있다는 그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오? 그러나 그건 벌써 낡은지 오랬소. 우리들에겐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풀이 돋는 곳이면 어데나 갈수 있고 또 살아갈수 있으며 싸울수 있단 말이요.》

《할아버지, 마침내 뚫고나왔군요. 고맙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도 감개가 새로와 마령감의 손을 잡으며 말씀하시였다.

딴말씀이올시다. 산중에 숨어사는 내가 우리 군사에게 무엇인가 보탤길이 있을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소이까? 참으로 내 한생에 이밤은 가장 보람있는 밤이올시다.》

마령감은 눈굽에 이슬을 번쩍거리며 그이의 손을 마주잡았다.

날이 밝을 때까지 대오는 포위망을 벗어나 60리밖으로 행군해나갔다. 아닌게아니라 소나무숲속에 초막 한채가 조용히 들어앉아있었다.

뒤따라 한흥권이 와서 보고한데 의하면 구국군부대들은 얼마간 희생이 있기는 했지만 포위망을 간신히 빠져 동녕방면으로 넘어갔다고 하였다. 부대장이 김일성장군께 감사를 전하더라는 소식까지 가지고왔다.

마령감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전광식에게 집살림을 세세히 알으켜주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방안은 비좁은대로 모두 들어갈수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아궁이 바람을 가리는데 그땐 부엌문을 열고 불을 때면 된다는것과 움안의 감자는 보름이상 먹을수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솔밭에 들어가면 노루나 돼지를 얼마든지 잡을수 있는데 옹노로 쓸 쇠줄은 부엌에 걸린 퉁구리를 풀어쓰라고 하였다.

나중에 마령감은 뒤울안에 가서 노루 얼군것을 들고 들어왔다.

이거면 한끼 반찬은 자랄것이웨다. 걱정은 소금이 한되를 넘지 못하는것이올시다. 워낙 궁벽한 산속이다보니 넉넉한것이 없습넨다.》

그러면서 오래 있을 작정이면 후날 라자구쪽에 가서 소금을 한 둬말 져올수도 있다고 하였다.

잠시후 로인은 유격대원들과 감격적인 작별을 하였다. 대원들 전원이 먼데까지 따라나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마령감의 손을 잡고 5리이상이나 걸어나가시였다.

눈물이 글썽해진 마령감은 허리를 굽히며 말하였다.

《찌그러진 집 한채를 바로세우는데도 힘이 드는데 기울어진 나라를 건지는 일에 어찌 고생인들 없겠소이까.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그리고 후날이라도 혹시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옵게 되거든 나라를 잃고 산중에 들어와 여명을 부지하고있는 이 주책없는 늙은것의 축원도 전해주십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로인의 손을 오래오래 잡고 놓지 않으시였다.

그이의 손등에 로인의 눈물이 떨어졌다. 그이께서는 머지않은 앞날에 반드시 조국이 광복될터이니 그때까지 기어이 사셔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시며 그때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전광식을 따로 불러 험한 길을 벗어날 때까지 로인을 배웅해드리라고 이르시였다.

마령감은 도중 내내 전광식이더러 들어가라고 등을 떠밀다가 듣지 않으니 한 10리쯤 가서는 떡 뻗치고 서버렸다.

《여기는 내가 아침저녁 다니던 길이라 내 집 뒤뜰안이나 같소이다. 젊은이는 어서 가서 대장이나 잘 모시도록 하시오.》

전광식은 하는수없이 작별인사를 하였다.

《우리 사정이 딱하지 않으면 할아버지를 집까지 모셔다드려야겠는데 참 안됐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몇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씀을 전하도록 저에게 일렀습니다.》

뭣이라구요? 김일성장군님께서 말씀하셨다구요?》

《그렇습니다.》

《아니, 그럼 그분이 김일성장군님이시란 말씀이웨까? 어- 하늘이 무심하군.》

마령감은 눈우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생에 귀인을 사모하다가 정작 귀인을 만나서는 모르고 지나쳤으니 한심하다, 내 일이여-》

로인은 가슴을 치며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내 기어이 장군님을 다시 뵈오리다. 가거든 꼭 장군님께 내 이 뜻을 전해주시오. 내 기어이 장군님을 다시 찾아가뵈오리다.》

로인은 속으로 무엇인가 단단히 다지면서 숫눈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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