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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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등지고 산다는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이쪽에서 아무리 등을 돌려대도 세상이 눈앞으로 돌아서군 한다. 아니, 차라리 등을 돌려댔다는것은 이쪽 생각뿐이요 실상은 돌려대나 바로대나 항상 그 테두리안에서 놀아나는것인지도 모른다.

노루나 토끼 같은 짐승이 사람을 보고도 달아날줄 모르던 이 험한 산골짜기에 이렇게도 많은 인총이 꾀여 총질을 하고 사람을 치고 산을 온통 이잡듯 쑤셔대면서 도륙을 낼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 엄청난 소란이 도시 이 산막에 들어있는 십여명 청년들을 해치기 위한것이라는것까지 알고보니 더구나 세상일에 정이 뚝 떨어졌다. 마령감은 시름없이 부지깽이로 불길을 헤집으며 덧없는 생각을 좇고있었다. 왜놈들 꼴이 보기 싫어 후미진 골짜기로만 돌다나니 겨우 벼랑머리에서 승냥이가 뜯어먹다 남은 토끼 한마리를 떼왔을뿐인데 그 토끼마저 불우에 올려는 놓았으나 돌아볼 경황이 없었다. 토끼다리가 광솔불길에 타느라고 노린내를 풍긴다. 그래도 로인은 어깨까지 솟아오른 두무릎사이에 머리를 묻고 딴생각만 더듬고있었다.

(방안이 저렇게 조용한걸 보니 젊은이들도 일이 틀렸다는것을 알아챈 모양이로군.… 하기는 아무리 슬기가 있고 용맹이 있으면 소용이 있나. 새파랗게 젊은 청년들이 국사를 위해 떨쳐나섰다가 이런 험지에서 속절없이 잘못되게 됐으니…)

사람의 목숨이란 임의로는 어쩔수 없는것이다. 두 자식을 다 앞세우고 안해마저 잃은 이 늙은것이 짐승과 바람소리를 벗삼아 이런 산속에서 아직도 숨을 이어가고있으나 당장 죽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본시 아들 둘이 있었지만 3. 1인민봉기때 맏아들이 왜놈의 작두에 목을 끊기고 그후 석달만에 로친이 심화병으로 죽고 남은 아들은 회령 와서 전염병에 걸려 묻게 되였다. 세상만사가 다 귀찮게 된 그는 속세를 등지려고 산으로 들어선것이 어언 10년이 가까이 된다. 1년에 둬번 소금을 사러 노루가죽을 몇장 지고 한 200리 장에 갔다오는것이 이 세상과 접촉하는 유일한 기회였다. 단 하나 그에게 버릴수 없는 취미는 책을 읽는것인데 소금사러 가는 기회에 이러저러한 책을 구해가지고 와서는 겨우내 산막에 들어박혀 읽었다.

이렇게 인간 아닌 인간생활을 하고있는 늙은것도 죽을 날은 멀었는데 저렇게 끌끌한 청년들이 곤경에 처했으니…

…수만 왜군이 불과 몇명 안되는 젊은이들을 없애려고 산과 골짜기에 덮여있으니 사람으로서 어찌 낯을 붉히지 않을수가 있겠는가. 말세 말세 하기는 하지만 참으로 이런 어지러운 판을 사책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것이다.

문득 부엌지게가 덜컥하고 여닫겼다. 찬바람이 훅 하고 들이치더니 아궁안에서 불길이 구불떡하고 옆으로 눕는다. 그래도 마령감은 두무릎사이에 고개를 묻은채 심란한 생각을 더듬고있다. 탁탁 신바닥을 터는 소리에 이어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오늘 밤은 왜놈들이 기동을 못할터이니 하루밤 조용히 잠자게 해야겠군. 십상 마지막밤이기가 쉬운데 무얼 좀 배불리 먹였으면 좋으련만… 이 골짜기도 사람 살만한데가 못되나보군. 하기는 나라를 잃고보면 고사리를 캐먹는것도 오랑캐의것이라 했으니 원쑤를 보지 않는것으로 락을 삼는다는것을 어찌 떳떳한 일이라 하겠는가. 차라리 내 목숨도 줄이는것이 옳지 내가 이 모양을 하고 굳이 살아가기를 고집할 까닭이 무엇인가. 전도가 구만리같은 저 청년들도 이밤은 저렇듯이 조용히 보내고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났으나 마령감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조용하던 방안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것도 로인은 의식하지 못하였다. 다만 눈앞에는 너울너울 춤을 추는 불길이 보일뿐이였다.

《할아버지, 무엇이 다 타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김일성동지의 음성에 마령감은 비로소 부지깽이 든 손을 뻗쳐 한쪽이 새까맣게 그슬린 토끼다리를 뒤적거렸다.

토끼다리 하나를 묻었습네다. 잘 구워서 소금에 찍어먹으면 맛이 하 고이찮지요. 하지만 워낙 패린 놈이 돼서 여러 사람 입에 붙일나위가 없을것 같소이다.》

《여러 사람은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어서 그 부지깽이를 이리 좀 주십시오. 불을 좀 끌어내다 아궁앞에서 구워야 골고루 구워질것 같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마령감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익숙한 솜씨로 숯불을 끌어내시였다. 마령감은 순순히 부지깽이를 넘겨드리고 뼈마디투성인 앙상한 손바닥을 불길앞에 내댔다. 새빨간 불빛을 받고도 고목등걸처럼 거멓게 색이 죽어있는 그 여윈 손이 어쩐지 마령감의 그늘진 마음속을 그대로 드러내고있는것만 같다.

《눈이 깊어서 짐승이 더러 잡힐것 같은데 이런것밖에 걸리지 않았습니까?》

그이께서는 벌건 숯불우에 토끼다리를 올려놓고 부지깽이를 천천히 만지면서 말씀하시였다. 맞춤하게 익어가는 고기냄새가 연하게 풍겨온다.

《걸리기야 몇놈 걸렸겠지요. 하지만 어디가나 왜놈들이 득실거리는 판에 남아있기는 할라구요. 내 행여나 트인 길이 없을가 해서 옹노를 놓은 외진 곳은 다 다녀봤소이다마는 아무데고 그놈들이 꽉 덮였습데다. 이 토끼 한놈도 워낙 험한 벼랑턱에 놓아서 남아났지 그렇지 않구야 어림이 없지요.》

《우리때문에 할아버지 사냥까지 화를 입는군요. 하기는 저놈들이 여기서 수태 죽어넘어질것입니다. 그런 구경은 흔히는 못하는 구경이 아니겠습니까?》

마령감은 고개를 들고 물끄러미 서글서글 웃고계시는 김일성동지의 존안을 바라보았다. 옛날책에 나오는 얼굴이 관옥같고 새별눈에 붉은 입술을 가진 영웅호걸이란 이런분을 두고 하는 말이였던가? 설혹 그렇기로서니 수만 적군의 포위속에 든 외로운 장수가 어찌 이리도 눈섭 하나 까딱않고 태연자약해있을수가 있는가?

《여보시오, 대장어른.》

마령감은 한쪽무릎을 가드라뜨리고 바싹 그이곁으로 몸을 끌며 간절한 목소리로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그이께서는 토끼다리를 천천히 번져놓으며 애원이 어린 마령감의 눈길을 고요히 맞이하시였다.

《대장께 무슨 방략이 없겠소이까? 내 오늘 해종일 산을 샅샅이 뒤졌소이다마는 형세가 매우 어렵게 되였소이다. 나라가 망하는것을 보고도 할일없이 산속에 묻혀 하늘을 등지고 사는 이 늙은것이 감히 국사에 관계되는 일을 가지고 간참할 계제가 못되는줄 백번도 더 잘 알고있소이다마는 대장들이 총을 들고 국난을 타개하러 나섰다가 이 곡경을 당하게 되니 비록 짐승이나 다름없는 목숨이지만 어찌 한가닥 충의지심이 없겠소이까. 이 늙은것의 마음을 헤아려 부디 이 밤중으로 몸을 피할 길을 도모해주었으면 좋겠소이다. 왜놈들은 필시 래일이면 이 골짜기로 몰려올것이웨다. 그러면 대장들의 장한 뜻을 어디다 펴보겠소이까?》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토끼가 잘 익었습니다. 오늘은 시장하셨겠는데 어서 요기나 하시지요. 우리도 지금 그 공론들을 하고있습니다.》

《그래 무슨 방도가 나졌소이까?》

《뭐 특별한 방도라는것이 있겠습니까? 적의 수효가 많고 이쪽에 방비할만 한 군사가 부족하니 일단 대결을 피하고 다음 기회를 보아야지요.》

《과시 밝은 말씀이웨다. 옛 병법에도 나가고 물러서는것이 다만 순리를 따르고 억지를 피한다 하였으니 지금은 형세를 보아 피해야 마땅할 땐가보웨다. 여기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군사가 의거해서 힘을 길러 다시 떨쳐일어날만 한 으슥한곳이 있소이다. 여기서 60리 송림속을 뚫고가면 사람발자취가 전혀 미칠수 없는 외진 골짜기가 있는데 내가 홀로 이름짓기를 화개동이라 하였지요. 그속에 들기만 하면 비록 10만대병이 와도 두려울것이 없습넨다. 내 또 대장의 군사들을 보아하니 일일이 산을 뽑을 용맹과 세상을 덮을 기개를 가졌으나 몹시 지친것 같이 생각되는데 화개동골짜기에 가면 몸도 추세울수 있을것이웨다.》

《화개동이라…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그렇게 외진 곳에 있다면 저희들이 찾아가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어딘가 같은 느낌을 주는 로인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의논조로 물으시였다.

《길은 응당 내가 대여드려야 할 일이지요. 하지만 당장 적이 담장을 쌓다싶이 둘러섰는데 그속을 빠져나갈 일이 어렵소이다.》

《그래도 어디 빠질 길이야 있지 않겠습니까? 이 큰 산을 그놈들이 다 둘러싸기야 했을라구요.》

《대장은 나가보지 못했소이까?》

로인은 기가 차다는듯이 그이의 동하지 않는 안색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섞어가며 말을 이었다.

《이 라자구일대의 등성이와 골짜기가운데 내가 다녀보지 못한데가 어디 있겠소이까? 내 그러지 않아도 이런 일이 있을것 같아서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빠져나갈만한 길목에는 모조리 저놈들이 파수를 보고있소이다.》

《그야 사람이 다닐만한 곳은 지키고있을테지요. 그렇기때문에 이런 때는 보통 생각이 미치지 못한 곳으로 빠져야 하지요.》

《하기는 예로부터 군사에 능한 사람들은 뜻하지 않는 곳으로 나가는것을 중히 여겼지요. 하지만 워낙 저놈들은 수효가 많다보니 총총히 늘어서있는 형편이웨다.》

허허허, 할아버지께서도 길을 못 찾으신다면 우리 일이 정말 어렵게 됐군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 큰 산을 병모가지막듯이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좋은 수가 있겠지요.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선 내가 보건대 적이 없는 곳이 적어도 한군데는 있습니다.》

《그곳은 어데 있소이까?》

마령감은 번쩍 고개를 들고 순시도 웃음이 사라질줄 모르는 그이의 존안을 우러러보았다.

《방금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토끼를 떼온 곳 말입니다. 거기는 적들이 없었다고 하셨지요?》

《에-》

마령감은 홀린듯이 말끝을 길게 뽑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 길이 없다면 그런데로라도 빠져나갈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마령감은 그이의 존안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연신 턱을 끄덕거리며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불시에 푸른 눈에 정기를 띠우며 숨가쁘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요? 그곳에 적병이 없더라고… 나는 그놈들이 있는 곳에는 가까이 가지 못했다고 말했을뿐이였지요. 아- 참으로 밝으십니다. 내 눈으로 보고도 찾지 못하는 길을 10리밖 집안에 앉아 찾아내시니 내 이제사 세상에 천리안이 있다는것을 믿겠소이다. 과연 그렇소이다. 그 벼랑턱에는 적이 없었소이다. 워낙 깎아지른듯 급한데다 높이가 스무길이나 되여서 짐승도 오르내리지 못하는 곳이지요. 하지만 대장의 말씀을 듣고보니 비록 벼랑이 아무리 험한들 사람이 마음먹어서 오르지 못할 산악이 어데 있겠소이까? 내 길잡이로 앞에 설터이니 이밤으로 떠나는것이 좋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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