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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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때문인지 눈보라때문인지 지척도 분간할수 없었다. 그래도 전광식의 눈에는 대여섯걸음 앞에서 걷고계시는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조직하기 위해 모여앉았던 화전의 밤이며 북산공원의 약왕묘 앞길, 들꽃 피여난 카륜, 고유수의 오솔길이며 오가자의 벌판에
희생! 진일만이도 또 다른 많은 동무들도 희생을 두고 말했다. 그러나 그 희생이 어떤 희생인가.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해, 우리의
눈보라는 승냥이떼처럼 울부짖는다. 숲은 아우성치며 몸부림친다. 어느 구석에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만한 곳은 없었다.
그래도
전광식은 달도 별도 없는 숨가쁘게 내리덮인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은 이미 깊었다. 정에 끌리여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이밤의 한순간의 주저가 력사우에 백년이 걸려도 메꾸지 못할 손실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전광식은 볼을 후려갈기는 눈보라속에 힘껏 고개를 젓고 우뚝 섰다.
《이제는 돌아가셔야겠습니다. 실은
《내가 다 들었소.》
《그럼…》
전광식은 한순간 당황했으나 이어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였다. 토론내용을 말씀드리지 않을수도 없고 그렇다고 직접
전광식은 벌써부터 눈물이 앞서는것을 가까스로 참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드리였다.
《나는 그 결정에 찬성할수 없소.》
《네?》
《그래 말해봅시다. 동무가 그러한 결론을 짓고 지어 결사대의 명단까지 작성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요? 나는 개별적인 동무들의 의견을 탓할 생각은 없소. 어쨌든 그 동무들은 자기가 처한 립장에서 사태를 심중히 분석하고 거기에 해당한 자기의 결의를 말한것이요. 내 보기에 그 토론들은 대체로 좋고 훌륭하기까지 하오. 그런데 그 훌륭한 토론들을 조직하고 종합한 전광식동무의 결론은 과연 찬성할만 한것인가?》
저쪽비탈에서 우르르 눈사태가 쏟아져 집채같은 눈더미가 허공에 날리더니 휙 하고 눈앞을 덮었다. 전광식은 얼어붙은듯이 눈사태에 말려든채 꼼짝도 않고서서 고개를 숙였다.
《전동무, 이리 오시오.》
《그래도 여기가 좀 잠풍한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사태가 나쁜가? 그렇소. 오늘 밤 이 시각을 두고본다면 나쁘다고 할수 있으며 어찌보면 절망적이라고도 볼수 있소. 하지만 이것은 마치 우리 조국의 형편과도 같소.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지 벌써 20여년이 되였으며 침략군대와 경찰이 그물처럼 전국을 덮고있기때문에 조선사람은 숨도 마음대로 쉬지 못할 형편이요. 게다가 왜놈들은 만주까지 강점해버렸소. 이런 형편에서 조선이 강대한 일본제국주의를 쳐물리치고 독립을 달성한다는것은 매우 힘든 일이요. 우리의 이 사태는 비유해 말한다면 우리 조국이 처한 바로 그러한 정도로 곤난한것이라고 볼수 있소. 그럼 이와 같이 나쁜 사태는 전혀 뜻밖의것이라고 할수 있는가? 내 보기에 이것은 뜻밖의 사태는 아니요. 우리는 1932년의 전략적목표를 세우면서 이와 같은 사태를 주동적으로 조성했다고 말해야 아마 정확할것이요. 전동무, 우리가 량강구에서 세운 행군계획에서 무엇을 고려했으며 무엇을 타산했던가를 생각해봅시다. 그렇다면 이 사태가 나쁜 측면만 있는것이 아니라 매우 좋은 측면도 가지고있다는것을 쉽게 알수 있을것이요. 전동무가 생각하는대로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라자구지구까지 와서는 인차 방향을 돌릴수도 있지 않았는가. 또는 부대를 헤쳐보내지 말고 주력을 계속 유지했어야 옳지 않았는가? 그러나 전동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점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것이요. 만일 우리가 라자구지구에서 동기행군을 끝냈다면 겨우내 우리를 따라다니던 적들도 추위에서 벗어나게 될것이며 뜨뜻한 방에서 충분한 휴식을 하면서 〈토벌〉을 하게 될것이요. 이것은 량강구에서 세운 방침을 포기하는것으로 되며 아직 단련이 어린 지방중대들과 혁명군중을 그놈들앞에 희생으로 내놓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것이요. 또한 주력부대를 지방에 보내지 않고 그냥두었다면 지방을 빨리 일궈세울수 없을것이며 행군은 더 어려웠을것이요. 식량곤난은 몇배로 더하고 적들앞에서 은밀성을 보장해내기가 어려울것이란 말이요.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포위된 구국군들을 도와주기 위해 이곳까지 온것이 얼마나 옳고 또한 떳떳한것인가. 우리를 위해 또한 중국인민을 위해 그것은 필요하였소. 그러나 여태까지 우리가 취한 방침은 정확했으며 그 결과에 빚어진 이 정황은 매우 간고하기는 하나 조선혁명의 발전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사태가 조성되였다고 보아야 할것이요.》
전광식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서있을뿐이였다.
전광식은 입을 다문채 말이 없다.
《그래 지금 우리 동무들은 산막에 앉아 결사전에 나갈 준비들을 하고있겠군… 전동무도 이제 나하고 작별인사를 하고는 그들과 함께 떠나자는것이겠지?》
전광식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왈칵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뽀얗게 흐린 망막앞에
《전동무, 이러지 마오. 얼마전에는 김혁이와 최창걸이 가고 어제는 차광수가 가더니 오늘은 전동무마저 가겠다는거요? 동무는 엊그제 혁명을 시작한 사람도 아니지 않소? 그래 내가 동무들을 이 골짜기에 다 묻고 누구와 혁명을 하란 말이요. 동무들이 다 결사대로 나서서 죽어버린다면 조선혁명은 결국 누구와 하라는것이요?》
이때
전광식은 와락
《전동무, 우리는 혁명의 길에서 쓰러진 동무들을 잊지 맙시다. 원한을 품고 피를 흘리며 죽어간 무수한 전우들과 겨레들이 모두 우리를 지켜보고있을것이요. 사람이 죽는다는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마는 만난을 뚫고 기어코 혁명에서 승리하는것보다 어려운것은 아니요. 우리가 이만한 난관앞에서 뚫고나가기보다 죽기를 먼저 생각한다면 전우들의 원한은 누가 풀어주며 민족의 숙원은 누가 해결하겠소? 착취와 폭압속에서 신음하는 세계 수십억 무산대중은 누가 구원하겠소? 나는 아까 동무들의 토론을 들으며 차광수동무와 최창걸, 리동천동무들을 생각했소. 창걸동무의 안해의 심정이 돼보시오. 동천동무의 어머니의 심정이 되여보시오. 우리는 차광수와 영결하면서 그에게 무어라고 맹세했소. 해방된 조국을 통채로 그의 령전에 내놓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우리가 모두 없어진다면 낯설은 이국땅에 홀로 묻힌 그의 무덤을 찾아줄 사람은 누구이며 그앞에 맹세를 지키지 못한 사연을 알려줄 사람은 또 누구이겠는가.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리다가 소식이 없으면 차광수는 기다리다 지쳐서 울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그것이 무슨 동지애이고 무슨 동지적의리가 있는것인가. 우리는 참으로 아무것도 없는데서 맨주먹으로 오직 동지를 믿고 사랑하는것 그 하나를 밑천으로 혁명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이것마저 버린다면
전광식은
《참으로 좋은 눈보라요. 이것이 우리들에게 귀중한 시간을 마련해주고 잘하면 이 사태를 타개할 가능성까지도 만들어줄수 있소. 아마 적들은 이런 눈보라가 한 사흘만 불면 모두 얼어죽어버릴지도 모를거요. 하하하…》
《전동무, 이제는 돌아가야 하지 않겠소? 동무들이 기다리겠는데… 이젠 그만하고 돌아갑시다. 가서 그 동무들의 마음도 풀어주고 좀 생각도 해봅시다. 따뜻한 구들목에 앉으면 얼어붙었던 생각이 풀릴지 알겠소.》
전광식은 고개를 쳐들었다.
《죄송합니다.》
전광식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낮게 한마디 하고는 주먹으로 눈물을 뻑 훔치였다. 얼어붙은 눈귀가 알알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념에 차서 힘차게 돌아서 걸었다.
어느덧 산막의 불빛이 나무사이로 간간이 바라보이는 등성이에 내려섰을 때
《그래, 하기는 이게 보통문제는 아니야. 여기서 빠진다는것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란 말이거던. 하는수없지. 정 안되면 최후의 수단이라도 써야지. 전동무생각엔 어떻소? 이놈들이 아무리 포위를 했대도 철조망을 친 감옥담벽같이 둘러싸지야 못했겠지?》
《글쎄올시다.…》
전광식은 말씀하시는 의도를 선뜻 알아챌수가 없어 어정쩡하게 말끝을 흐리였다.
《그렇다면 뚫고나갈수도 있을거요. 우리가 감옥살이를 해봤지만 그런 속에서도 탈옥을 하는데 정 방법이 없을 때 매 사람이 각개 포위를 빠져나가는것쯤은 능히 할수 있을거요.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런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소. 문제는 어떻게 대오를 유지하면서 이 난국을 타개하는가 하는데 있소.》
전광식은 갑자기 자기 몸에서 긴장이 풀리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