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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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진 그림자를 던지고있는 아궁앞에 앉으신채 그이께서는 여전히 험난하고 아득한 지나온 로정들을 더듬고계시였다.
그이께서도 지금 당장 무슨 방책이 있는것은 아니시였다. 몇겹으로 포위되였다는것과 그것을 조련히 뚫어낼수 없으리라는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이였다.
봇나무장작은 아궁안에서 벌겋게 숯을 이루며 타번지고있다. 너울거리는 불그림자가 부엌바닥과 벽에 커다랗게 내비치여 춤을 추고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김이 문문 피여오르는 모자와 웃옷을 번져놓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을 지켜보시였다.
방안에서는 절박한 목소리들이 계속 울려나온다.
《이번에는 진일만동무 차례로군.》
그이께서는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다시 생각에 잠기시였다.
아닌게아니라 진일만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리였다.
《군사학에 밝았던탓으로 〈장군〉이라고까지 애칭되였던 엥겔스도 포위를 뚫는 방법에 대해서는 별로 쓴것을 아직 읽지 못했소.》
그는 이런 경우에도 자기의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혁명이 희생이 없이 이루어질수 있는가? 아니요. 희생의 대가에 의해서만 승리는 우리에게 차례질것이요. 우리는 모두 스무살안팎의 청년들이요. 한생을 거의다 산 늙은이들이 아니고 청춘이요. 그렇기때문에 우리의 생은 무엇보다 귀중한것이요. 그러나 혁명앞에 바칠바에야 청춘을 바쳐야 할게 아니요. 사랑은 희생을 요구하오. 조국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의 청춘을 기꺼이 희생합시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방금 진일만이 말한 청춘의 희생에 대해 생각해보시였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그리고 얼마나 절통한 말인가? 아무리 아름다와도 이 세상 수십억사람가운데서 오직 혁명을 위해 청춘을 바친 그들 당자만이 할 권리가 있는 그 말을 우리 동무들은 지금 서슴없이 하고있다. 불현듯 그이의 안광에는 차광수며 최창걸이며 리동천의 얼굴이 떠올랐다. 광막한 우주공간에 높이 솟아올라 조선혁명의 앞길을 지켜보고있는듯 한 그 얼굴들은 어쩐지 벙글벙글 웃고있는것 같이만 생각되시였다.
신바닥에서 고무타는 냄새가 연하게 풍기였다. 그이께서는 불그림자를 하염없이 지켜보시며 신바닥안을 더듬어보시였다. 아직 속은 축축하였다. 그런데 깔개밑에서 무엇인가 푹신한것이 느껴지셨다. 이상한 생각이 드신 그이께서는 얼른 깔개를 뽑아내시였다.
깔개밑에는 어머님의 머리태가 들어있었다.
철주가 주고 간 이 신을 갈아신은 다음부터는 발시린줄을 전혀 모르고 지내시였다. 지난번 남만에 갈 때도 그렇게 해주신적이 있었다. 머리태를 집어드신 그이의 손은 떨리였다.
(어머님!)
꽉 잠겨든 목소리로 한마디 부르짖으신 그이께서는 신깔개를 움켜쥐고 눈을 내리감으시였다.
지난봄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올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시던 어머님의 얼굴이 삼삼히 보이시였다.
방문을 채 닫지도 못하고 총총히 걸음을 옮기여 멀리 동구밖에 이르러 뒤를 돌아다보셨을 때 흰옷 입으신 어머님께서는 손을 들어 어서 가라고 그리고 어서 이기고 돌아오라고 바래주시였다.
림종을 앞둔 어머님께서 물려주신 신 한컬레- 그것이 지금 젖은채로 아궁앞에 놓여있다. 재산으로 물려주실 헌 보따리 하나 없고 유언으로 글쪽지 한장 남기지 않으신 어머님께서 마지막순간에 가위로 머리태를 자르며 무엇을 생각하시였을가?
나라를 빼앗겼고 왜놈들에게 식구들을 다 잃고 그리고 아들마저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수 없는 길을 떠나보내고 이국땅에서 홀로 눈을 감으실 때 어머님께서는 무엇을 생각하시였을가?
(어머님!)
그이께서는 목메이게 또 한번 불러보시였다. 그럴수록 어머님의 마지막숨결이 후덥게 손을 거쳐서 가슴으로 미쳐왔다. 백마디, 천마디말씀보다 더 강하고 더 무겁고 더 뜨거운 아들에 대한 사랑과 조국광복의 위업이 성취되기를 그렇게도 바라시던 어머님의 절절한 호소가 온몸으로 맥맥히 흘러들었다.
가슴이 뻐근해지신 그이께서는 고개를 들어 불그림자가 널름거리는 맞은편 벽을 쳐다보시였다. 그때 어머님의 얼굴과 엇바뀌여 감자알을 내들며 머루알같은 눈을 반짝이던 동생의 얼굴이 피뜩 지나갔다. 그 순간 그이께서는 눈굽이 뜨거워짐을 느끼시면서 다시한번 벽을 쳐다보았지만 그때는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시였다. 갑자기 허전한 감정에 사로잡히신 그이께서는 눈을 몇번 슴벅이시면서 애써 흥분을 누르고 정신을 가다듬으시였다.
(어머님의 소원대로 꼭 나라를 찾겠습니다. 그래서 고향 만경대로 돌아가 할아버님, 할머님을 뵙겠습니다.)
그이의 존안에는 결연한 빛이 어리였다.
잠시후에 그이께서는 채 마르지 않은 신을 집어들어 깔개를 밀어넣고 신끈을 조이시였다.
그때도 방안에서는 그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떤 동무는 혁명이 마지막이라는듯 한 서글픈 소리를 하는가 하면 또 어떤 동무는 최후의 경우에만 말할수 있는 비장하고 처절한 감정을 서슴없이 쏟아놓고있다.
그런데 이 모든 사태를 수습해야 하며 어머님께서 남기신 뜻에 대답해야 할 자신은 아궁앞에 시름없이 앉아만 있다.
이런 때 어머님께서 이 광경을 보셨다면 과연 어떻게 말씀하시였을가?
한생을 기울여 가꾼 나무가 한줄기 바람에 쓰러지는것을 보신다면 어머님께서는 슬픔에 잠겨 아마 고개를 돌리실는지도 모른다.
《동무들의 말이 다 옳소.》
문득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며 울려온 전광식의 약간 떨리는듯한 목소리에 그이께서는 번쩍 고개를 드시였다.
왜 전광식의 목소리마저 떨리는가? 적어도 그는 이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것인지 리해해야 될 사람이 아닌가?
하기는 전광식이 혼자서 이런 토론을 벌려놓은 심정이 충분히 리해되기도 하시였다. 심중한 토론이 필요한것도 사실이였다. 그러나 전광식이만은 저렇게 창황한 어조로 말하지 말아야 할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천천히 웃옷을 집어 팔을 꿰고 단추를 채우시였다.
《희생도 좋고 청춘도 좋고 다 좋소. 동무들이 각오한것처럼 우리는 일치한 의견에 도달했소. 우리는 여태 무엇을 배웠는가?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과학적진로를 인식하였고 또 그것을 자기 리념으로 했소. 프로레타리아독재가 어떻게 되여야 하며 무엇을 할것인가에 대해서도 알았소. 그리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적용한 우리 혁명에 대한 로선도 알았소. 무장투쟁에 대해서도 우리는 시작을 하였고 보다싶이 이런 정도로 우리는 전진해왔소. 뿐만아니라 우리는 그 모든 사실과 리론과 리념과 방법들을 하나의 초점으로 집결시킨 김일성동지께서 계심으로 해서 우리 혁명이 있고 우리의 승리가 있고 우리의 미래가 약속되여있다는 진리를 체득하게 되였소. 조선혁명을 위해 나선 공산주의자 그 누구에게 나를 물론하고 그에게 최대의 영광은 우리 혁명의 사령관이신 그이를 모시고있다는것과 그이를 보위하기 위해 기꺼이 한목숨을 바칠수 있다는 그 점이요.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이 어려운 형편에서 우리가 목숨으로 그이를 보위하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소. 자! 여기에 차광수동무의 체온이 아직 식지 않은 편지가 있소.》
왈각왈각 종이장 번지는 소리가 나더니 뒤이어 나지막하면서도 엄숙한 전광식의 음성이 들리였다.
《…자, 보시오. 그는 최후순간에 이렇게 썼소. 동무들, 우리의 사령관, 우리의 령도자 김일성동지를 잘 모셔주오. 이것은 마지막부탁이면서 또 영원한 부탁이기도 하오. 그이를 모셔야 조국이 있고 우리민족의 미래가 있고 번영이 있소… 내 평소에 마음속깊이 간직한대로 숨지는 마지막순간에 그 장소가 흙구뎅이건 교수대이건 불붙는 장작더미우이건 관계없이 나는 주저없이 명확하게 김일성동지 만세를 소리높이 웨칠것이요… 동무들! 차광수동무의 부탁을 명심합시다. 이것은 곧 우리의 의무이기 전에 영광이요! 나는 이런것을 제기하오. 우리들가운데 한두명, 기껏해서 서너명이 사령관동지를 모시고 빠지도록 하고 그외 동무들은 나와 함께 적을 맞받아나갑시다.》
《좋소.》
《누가 남겠소?》
그때 밖에서 인적기가 나더니 뒤이어 탁탁 발을 굴러 눈 터는 소리가 났다. 송덕형이네 조와 그들을 마중나갔던 김일룡이가 돌아온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일어서서 부엌문을 열고 얼어서 돌아온 대원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 불앞으로 이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