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제 1 편
전쟁은 어느때 일어나는가
제 3 장
2
(2)
불시에 깔깔깔 호들갑스럽게 웃는 서용숙의 어릴 때 모습이 떠오른다.
《오빠, 나 저 진달래꽃 안 꺾어줄래요. 이 용숙이가 중학교에 가는데 축하해주지 않을래요?》
용숙이 가리키는 벼랑중턱엔 진달래가 소담히 피여있었다. 다른곳의 진달래들은 이제 겨우 꽃망울을 부풀리고있었지만 류달리 해바른 양지인 그 벼랑중턱에는 해마다 제일먼저 진달래가 피여나군 했었다.
《좋아. 용숙이가 바란다면야 하늘엔들 못 올라갔다올가. 내 제꺽 올라가 한아름 꺾어다줄테니 기다려.》
그날 기련은 용숙이를 데리고 단너삼을 캐러 산에 갔다가오는 길이였었다. 서용숙은 함흥에 있는 중학교로 떠나면서 지금껏 자기가 길러온 토끼로 할아버지에게 곰을 해주고싶어했다. 자기를 그리도 사랑해주는 할아버지가 금방 앓고난 뒤여서 몸이 퍼그나 쇠약해졌기때문이였다. 함흥에 사는 이모네집에 가서 중학교에 다녀야 하는 용숙의 그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기련은 자기가 토끼도 잡아주고 단너삼도 같이 캐러 다니자고 약속했었다.
그들은 소학교동창이였는데 늘 웃자리를 다투는 경쟁자이면서도 앞뒤집에 사는 제일 가까운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헤여져야 했다. 용숙은 래일 함흥의 중학교로 가지만 기련은 철공소로동자로 가야 한다. 기련이네는 너무 가난하여 중학교에 갈 엄두도 낼수 없다.
소학교도 어머니가 짚신장사로 한푼두푼 벌어 학비를 대여 그럭저럭 다닐수 있었다. 아버지는 북청에서 늙은 조모를 모시고 소작살이를 하고있었고 어머니는 어떻게 하나 빈곤한 살림을 추세우기 위해 외가인 함흥의 치마리에 와서 짚신장사를 하고있었다. 아무리 밤을 패우며 짚신을 삼아 팔아도 학비를 제대로 댈수 없었다. 어머니와 함께 치마리에 온 기련은 집에 오면 어머니를 도와 짚도 추고 새끼도 꼬고 밭김도 매였다. 짬이 생기면 철길에 나가 석탄부스레기를 주어팔아서 학비를 보태였다. 그렇게 하여 그럭저럭 소학교는 마칠수 있었으나 너무도 고된 일에 시달리는 어머니와 하루세끼 풀죽으로 살아가는 빈궁한 가정형편을 보고서는 중학교를 단념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기련은 철공소에 들어가 일하면서 돈을 모아 꼭 상급학교에 가려고 결심했다. 래일부터는 철공소에 나가 억척스럽게 일할것이다. 어른들 못지 않게…
용숙이는 귀한 외동딸인데다 아버지가 소학교 교원을 하기때문에 학비때문에 그렇게 된고생은 하지 않는다. 이모부가 함흥의 이름난 치과의원이여서 용숙은 중학교에 다니면서도 큰 걱정이 없을것이다.
용숙이는 령리한 애였다. 가난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기련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전혀 불쌍하다거나 측은해하는 내색이 없이 웃고 떠들군하는것이였다.
기련이도 그것이 고마왔다. 철공소로 나가는것이 그처럼 바라던 소원을 이루기나 한듯이, 마치 중학교보다 더 좋은곳이기나 한듯이, 이제는 어른이 다된듯이 우쭐렁거려보기도 했다. 속으로는 피눈물이 흘렀지만 지금도 중학교에 가는 용숙이를 진심으로 축하해주려고 이처럼 벼랑을 톺으려는것이다. 벼랑턱에 가붙으니 별로 해볕이 따스했다. 기련은 씨엉씨엉 잡관목줄기들을 휘여잡으며 사선으로 벼랑을 기여오르기 시작했다.
《오빠, 덤비지 말구 주의하라요.》 용숙의 걱정스런 목소리…
기련은 그 소리가 듣기 좋아 히뭇이 웃었다.
《걱정말어-》
기련은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멀리서 달려오던 화물자동차 한대가 용숙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함흥쪽으로 가는 차같았다. 기련은 곧 돌아서서 엇비스듬히 뻗은 굵기가 팔목만한 소나무뿌리를 잡고 몸을 솟구었다. 조금만 더 가면 중턱에 이른다. 벌써 저기 진달래가 보인다. 이제 저 진달래꽃을 꺾어다주면 너무 좋아 머리우로 흔들며 랄랄라 춤추듯 콩당콩당 뛰여갈 용숙의 모습이 눈앞에 얼른거린다. 기련은 빙긋 웃었다. 또 한걸음… 이젠 됐다. 진달래꽃향기가 취할듯 물씬 안겨든다. 기련은 꽃을 꺾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순간 《오빠!》 하는 다급한 웨침소리가 났다. 《오빠- 아-》
기련은 진달래꽃가지에 손을 뻗친채 고개를 획 돌렸다. 눈을 흡떴다. 용숙이가 보이지 않았다. 풍을 친 화물자동차가 용숙이 서있던 곳을 지나 꽁무니에 먼지를 뽀얗게 말아올리며 달려가고있었다. 이게 웬일인가. 놀라서 눈을 껌벅껌벅거리는데 화물자동차쪽에서 용숙의 목소리같은것이 들려왔다.
《오- 빠-》
기련은 벼랑에서 굴며 미끄러지며 정신없이 길바닥에 내려섰다. 멀리 사라져가는 자동차를 따라 허둥지둥 달려갔다. 목터져라 불러댔다.
《용숙이! 용숙이!》
안타까왔다. 아무리 빨리 뛴다 해도 자동차를 따라잡을수는 없었다.
목안에서 쇠비린내가 나고 숨이 꺽꺽 막혔다. 그래도 달렸다. 헐떡거리며 함흥장안에까지 들어갔다.
장안의 여기저기를 허겁지겁 헤덤비며 찾아다녔다. 자동차만 보면 혹시 그 차가 아닌가 해서 뻥해 쳐다보았다. 풍을 친 자동차면 한사코 따라가보았다. 서용숙이를 싣고오지 않았는가 따지다가 정신나간 놈이라고 따귀를 맞기도 했다. 밤 늦어서야 후줄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가 눈이 까매 기다리고있었다. 서용숙이네 집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고 했다. 앞집 기련이가 용숙이를 데리고나갔는데 밤늦도록 오지 않으니 야단을 한다는것이였다.
기련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터벅터벅 용숙이네 집에 찾아들어갔다. 사실대로 말하니 모두들 펄펄 뛰였다. 그길로 서용숙이네 온 집안이 떨쳐나섰다. 함흥으로 나가 그 일판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을길이 없었다.
그때부터 기련은 용숙이와 그 일가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용숙이와 비슷한 녀자만 보면 만사를 제치고 따라가보군 했다. 그렇게 벌써 5년세월이 흘렀다.
전기련이 터벌터벌 걷는데 후방참모가 뒤따라왔다.
《여, 동무 왜 그래, 동무 정말 이상한 사람이구만.》
전기련은 후방참모를 돌아보았다.
《참모동지, 됐습니다. 갑시다.》
아무때건 시간을 내여 려단지휘부식당에 들려보리라 결심했다. 후방참모는 왼손장지손가락으로 안경허리를 밀어올리며 전기련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허허허- 하고 웃었다.
《저 동무가 뭔가 잘못됐군. 리금실일 보구 뭐 서용숙이? 허허허… 가만, 이거 날씨가 별로 추워진다.》
후방참모는 으시시 몸을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돌개바람이 휘몰아치며 황이 든 락엽들을 뜯어 공중으로 말아올리고있었다.
《어- 이거 무우 실어다놓은거 얼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