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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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철은 밤이 퍽 깊어서야 퇴근길에 올랐다. 신대원모집을 위해 평양에 갔던 안해가 오늘에야 돌아왔던것이다. 열흘나마의 독신생활이 비로소 끝나는 날이였다. 총각때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안해가 없는 생활에 대한 고독을 새삼스레 체험한 뒤여서 집으로 향한 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예술선전대의 사택마을에 들어서니 그를 발견한 개들이 열성껏 짖어댔다. 삼라만상도 굳잠에 곯아떨어진 깊은 밤이였지만 그의 집 창가에서는 여전히 불빛이 흘렀다. 승철은 대문소리를 내며 헛기침을 깇었다.
부엌문이 활짝 열리며 승철을 반기는 안해의 목소리가 울렸다. 총알처럼 달려나오며 그의 목에 매달렸다. 승철은 따뜻한 정을 느끼는 동시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얼른 주위를 살피게 되였다.
아래목에 저녁상을 차린 안해는 승철이가 밥을 먹는 모습을 재미나게 지켜보며 평양에 갔다온 소식을 들려주었다. 한창 이야기보따리를 펼치던 선률은 시집소리가 나오자 그저 잘있더라는 말로 얼버무리며 긴 설명을 피했다. 얼굴색이 편안치 않았다.
《왜, 무슨 일이 있었소?》
선률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별로… 헌데 승철동지, 어쩜 난 그리도 행운이 없을가요? 글쎄 선전대에 들리니 모두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혼자서 울었군요.》
안해의 심정이 리해되였다.
《너무 속쓰지 마오. 누구인가는 당신에게 복이 따라다닌다고 하더군. 난 선률에게 꼭 분에 넘친 영광이 차례지리라 보오.》
승철은 다른 사람의 말을 빌어 자기의 속마음을 내비치며 안해를 위로했다.
《정말 그럴가요?》
선률은 가늘게 한숨 지으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승철은 안해에게서 집소식을 자상히 듣고싶었지만 그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아 그만두고말았다.
식사를 마치고나서 안해가 평양에서 가져온 부업과 관련한 잡지를 뒤적이던 승철은 곧 잠에 곯아떨어졌다.
어뜩새벽에 깨여났다.
처음에는 대대지휘부에서 밤새는줄 알고 우쩍 몸을 일으키려다가 팔뚝에 휘감긴 선률의 부드러운 머리칼이며 그윽한 향기를 느끼면서 보금자리를 찾았다는, 바로 곁에 사랑하는 안해가 누워있다는 생각에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소쩍새우는 소리가 밤의 정서를 더해주었다. 부엌에서 귀뚜라미가 솔갑게 울어댔다. 선률을 처음 알게 되고 사랑을 속삭이던 때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즐거워졌다.
유승철과 한선률의 결합은 려단관내를 벗어나 군단지휘부에까지 잔파를 일으킨 화제거리였다. 매력적인 성악지도원의 주위를 빙빙 에돌며 그를 만날 어떤 구실을 찾지 못해 안달아하던 총각군관들은 용감하지 못했던 자기들을 탓하며 아쉬움속에 새 군인가정의 탄생을 축복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사랑에 다 그럴듯한 리유가 있고 곡절이 있는것처럼 그들의 사랑 역시 순탄치 않은 아리랑고개를 넘었다. 다름아닌 승철의 어머니가 그들의 관계를 썩 달가와하지 않았던것이다.
구태여 리유를 따진다면 처녀쪽이 남자측보다 좀 기울며 더우기는 처가신세를 지기 어렵다는 안주인다운 타산때문이였다. 다행히 승철의 아버지가 그들의 진실한 사랑을 리해했고 어머니몰래 지지해주어 종당에는 가정을 이루게 되였다. 이를테면 사심이 없고 순결하며 열정적인 사랑이 마침내 열매를 맺은것이다.
안해의 고르로운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승철은 그만하면 자기는 행복자라고 생각했다. 선률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과연 이런 아름다운 상념이며 행복에 대해 알수 있었을가 하는 의혹이 불현듯 속에 갈마들었다.
책상우에 놓인 자명종에서 볏을 꼭뒤에 인 눈이 부리부리한 수닭이 대가리를 까딱거리며 꼬끼요 울자 몽롱한 꿈세계를 헤매던 선률이 오동통한 팔을 힘껏 뻗치며 눈을 떴다. 승철은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손질한 선률이 고르로운 숨소리를 내는 승철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웃음을 머금는 소리가 들리는듯했다. 승철의 몸을 한절반 덮은 담요를 꼭꼭 여미여준 선률은 살그머니 일어나 부엌으로 내려갔다. 동자질하는 소리가 가벼운 률조로 들려왔다.
선률을 처음 만나던 때가 생각난다.
몇년전, 중대장으로 복무하던 유승철은 군단예술선전대 소편대를 책임지고 대대에 공연하러온 한 처녀군관을 보고 자기 눈을 의심했다. 백랍같이 하얀 얼굴에 오목하게 들어앉은 고혹적인 눈매, 혁띠를 꽉 졸라맨 싱싱하고 탄력있는 자태, 범접하기 어려운 심령의 세계를 고이 지키려는듯 선뜻 들리지 않는 촘촘한 속눈섭…·아무리 뜯어보아야 처녀는 분명 유승철이 평양학생소년궁전시절에 사귀였던 한 소녀의 모습이였다.
설맞이무대에서 관중들의 절찬을 받던 소녀, 유승철의 손풍금반주에 불만을 터뜨리며 자기의 노래속도에 맞출것을 요구하던 지나칠 정도로 자존심이 높던 녀학생, 유승철을 곧잘 궁지에 몰아넣고는 그게 우스워서 깔깔대고 얼굴이 시뻘개진 그를 위로하다가 제편에서 먼저 성을 내던 사내번지개…
다툼질과 승벽싸움이 있긴 했어도 그들은 누구보다 가까와졌다.
소녀의 고향은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량강도의 갑산땅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그곳 주둔부대의 군관이였는데 그래서 소녀는 할아버지의 집에서 다니고있었다.
어느날엔가 승철은 소녀를 따라 그가 생활하고있는 할아버지의 집에 가게 되였다. 집에 들어선 뒤에야 소녀의 생일인줄 알았고 빈손으로 따라선것을 후회하였다.
《오, 네가 승철이냐? 우리 선률이 자꾸 네 소릴 하길래 데려오라고 했다. 아버지가 유진수선생이란 말이지.》
소녀의 할아버지는 승철이를 유심히 살피며 마치 시험관처럼 노래를 시켜보았고 손풍금도 연주하게 했다.
비지땀을 흘리며 시험을 마쳤을 때 그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은 신중했다. 음악에 정말 취미가 있는가고 엄격한 어조로 물었다.
승철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가 음악공부를 시작한것은 그자신의 취미보다 아버지의 요구였다. 그래서 어지간히 마음을 붙이긴 했지만 정말로 좋다고 대답하기에는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저녁 승철은 아버지에게 선률의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을 내비쳤다.
《음, 그러니 오늘 한규일선생을 만났댔구나. 대학시절 아버지의 스승이였다.… 하지만 승철아, 문제는 열정이다. 들인 품이 헛되지 않게 직심스레 배우거라.》
했으나 승철은 선률의 할아버지가 던진 말을 기억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하다보니 음악공부가 점점 실뚱해졌고 보다는 수학이라든가 물리와 같은 자연과목들에 더 흥미가 당겼다.
궁전소조에 나가지 않는 날이 드문해졌다. 날이 감에 따라 승철에게는 그토록 현란해보이던 음악세계와 멀어지는것이 다행한 일로 여겨졌다. 단지 아버지에게만은 사실을 숨겼다.
그런데 졸업을 한해 앞둔 어느날 승철은 자기의 짝패였던 선률이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그 애는 꼭 성공할것이라고 믿었는데 무작정 고향으로 내려갔다니 리해되지 않았다.
알고보니 아버지가 군사임무수행중에 동지를 구원하고 희생되였다고 했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위해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평양을 떠났다는것이였다.
승철은 불행을 당한 녀동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한것이 서운했다. 편지라도 쓰고싶었으나 주소를 알길이 없었다.
그렇게 헤여진 소꿉시절의 녀동무를 다시 만난것이 유승철에게는 마치 운명적인 인연처럼 생각되였다. 원예사의 섬세하고 살뜰한 손길이 닿는 온실이 아니라 폭풍이 내닫는 대자연의 들가에 만첩의 꽃으로 싱싱한 자태를 드러낸 처녀의 모습은 유승철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다.
《놀랍군요. 난 승철동지가 지금쯤이면 음악무용대학(당시)을 졸업하고 어느 중앙예술단체에서 일할줄 알았는데…》
《스스로 선택한 길이요. 동무의 할아버지가 일찍 나를 깨우쳐주었소.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을 신고서야 먼길을 갈수 없지. 없는 재간을 멋부리는것보다 더 싱거운 일은 없을거요.》
《할아버지의 한마디 말때문에 포부를 꺾다니… 그러니 저의 할아버진 중대장동지에게 나쁜 인상만 남겼겠군요.》
선률은 짐짓 애모쁜 인상을 지었다.
《아니, 할아버지의 말이 옳았소. 음악은 교육 하나만으로 성공할수 있는게 아니요. 난 결코 내가 걷는 길을 후회하지 않소. 터놓고 말해서 다행으로 여기고있소. 헌데 더 놀라운건 선률동무요. 이렇게 군복입은 동무를 보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못했거던.》
《실은 인민군협주단에 가고싶었더랬는데 이곳 부대에 배치 받았어요.》
선률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때문인지 나직이 한숨을 지었다.
《아니, 난 동무가 화선무대를 지켜선것이 더 돋보이오.》
《고마워요. 그렇게 위안해주시니… 앞으로 많이 도와주세요.》
그들은 전화나 인편으로 자주 소식을 주고받군 했다. 흔히 나눌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도 그들에겐 비상한 화제거리가 되였고 기쁨과 환희의 매개물이 되였다.
그후 유승철은 인차 대대장으로 임명되였다. 옛 중대정치지도원인 예술선전대장을 만나야 한다는 그럴듯한 구실을 궁리해낸 그는 대대에서 그닥 멀지 않은 군단예술선전대에로 달려갔다.
《엉큼한 속심을 모를줄 아오?》
선전대장은 유쾌한 웃음을 지으며 직일병에게 빨리 성악지도원을 데려오라고 일렀다.
《내가 왜 그를 만나야 합니까?》
《됐소. 딴전부리지 말라구. 벌써 동무네 려단장동지가 나에게 귀띔한 소리가 있단 말이요.》
선전대장은 그만두겠으면 취소하자고 손을 홱 내그었다.
《하긴 려단장동지가 뭘 부탁한것이 있긴 있습니다.》
능청스러운 거짓말에 그자신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여 승철은 사람들의 시선이 덜 미치는 예술선전대청사 후원에서 선률을 만나게 되였다.
꽃향기가 진동하는 봄날이였다. 청춘남녀의 가슴에도 진한 봄물이 흘러넘쳤다.
선뜻 넘어서기 어려운 경계선에서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즐거이 웃었다. 그들사이로 흐르는 작은 시내… 속깊이에 묻어둔 서로의 마음이 그 내물에 비껴있었다. 두 기슭을 이어줄 돌다리는 어디쯤에나 있을지? 아니, 발목을 적시며 내물에 풍덩 뛰여들면 그만이였다.
그러나 유승철은 주저하게 되였다. 그때에야 승철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자기가 미처 의식할새없이 조용히 가슴속에 깃들었음을 느꼈다.…
사이문턱에 앉아 안해의 동자질솜씨를 지켜보던 승철은 선률이가 샐쭉한 웃음을 지으며 그러다간 늦겠다고 핀잔해서야 정신을 차렸다.
제꺽 세면을 하고는 밥상을 마주했다. 그사이에 선률은 승철이가 부탁했던 중북이며 저대 같은 대중악기들을 어깨짐으로 질수 있게 꽁꽁 묶었다. 안해에게 지나가는 소리로 부탁했더랬는데 이번 기회에 잊지 않고 가져온것이다.
짐을 한가득 지고 나섰지만 기분이 좋았다. 산뜻한 군복차림을 한 선률이 그를 따라섰다.
《갈림길어구에까지 함께 가요.》
《늦지 않겠소?》
《어제 저녁 선전대장동지한테 이야기했어요. 승철동지가 들어오지 못하면 아무래도 제가 대대에 갔다와야 할것 같다구요.》
승철은 선률이와 짐을 맞들고 아직은 인적이 없는 강냉이밭사이로 난 넓지 않은 토사길에 나섰다. 동켠의 산말랭이우에서 따스한 아침해가 벙글거리며 그들을 반기였다. 개꼬리가 활짝 핀 강냉이밭사이로 눈부신 해빛이 가닥가닥 닿으며 이삭들에 맺힌 이슬방울을 어루쓸었다.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그들은 얼른잠간 갈림길에 당도했다.
《정치지도원동지가 자꾸 나더러 중대예술소조공연활동을 봐달라는데 안된다고 피할수도 없고… 당신이 있으니 부탁하는거겠지.》
《도와드려야지요.》
선률이 혼자소리처럼 조용히 응대했다. 문득 고개를 들고 승철을 쳐다보았다. 무엇인가 간절한 빛이 맑은 눈동자에 비껴있었다.
《저- 승철동지, 내 하나 물을가요?》
《? …》
《승철동진 이 선률이 어떻게 발전하기를 바라요?》
《글쎄, 선률이 하던 말이 생각나는구만. 이 승철이가 운명적인 길을 선택한것처럼 선률인 꼭 성공한 음악가가 되겠다고 했댔지.》
한선률은 그 말에 애틋한 웃음을 지으며 누리를 적동색으로 물들이는 아침해를 향해 명상적인 시선을 던졌다.
《호, 하필이면 왜 그날에 선전대를 떠났을가요?》
《또 그 생각이요? 선률인 이제 만사람의 축복을 받는 그런 군인예술가가 꼭 된다니깐. 헌데 집에 들렸던 일은 어떻게 됐소?》
선률의 갸름한 얼굴에 애매한 웃음이 비꼈다.
《아버님이랑 어머님이랑 여전하셔요. 그저 지나가는 길에 잠간 들렸댔어요. 호-》
《왜 무슨 일이 있었소?》
선률은 웃음을 거두며 승철의 어깨에 중북묶음을 메워주었다.
승철은 안해가 무엇인가를 숨기고있다는것을 직감했다. 안해의 해맑은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일은 무슨… 됐어요.》
선률은 망두석처럼 서있는 승철에게 손을 흔들어보이며 제먼저 강냉이밭너머로 멀리 보이는 파아란 지붕을 인 예술선전대청사를 향해 걸음을 뗐다.
승철은 마음이 무거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