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5
온 하루를 전승절공연준비로 바쁘게 보낸 유진수는 자정을 가까이 해서야 퇴근길에 나섰다.
오래간만에 며느리를 만나게 된다는 따뜻한 감정이 속을 덥혔다. 아닌게아니라 보고싶었다. 옛날부터 시아버지의 며느리라는 말도 있지만 무슨 일이 생길가봐 잔걱정이 앞서게 되고 자꾸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런데 혹시 이 시아버지가 며느리의 소환을 반대한것을 두고 다르게 생각하지는 않는지… 그러나 자상히 설명하면 십분 리해할것이라고 진수는 자기를 위안했다.
거리는 어둠에 잠겨있었다. 가로등빛도, 울긋불긋한 장식으로 번쩍이던 봉사망의 불빛도 꺼졌다. 물크러진 감알같은 하현달이 삼복철의 무더위에 지친듯 한 표정을 짓고 중천에 걸려있었다. 우중충한 아빠트건물들에 닿은 희끄무레한 달빛이 차겁게 느껴졌다. 번뇌스런 자기 속 내의 반사처럼 여겨졌다.
집에 들어서니 돋보기를 귀에 걸고 탁상등앞에 바투 앉아 웬 종이장을 들여다보던 안해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선률인 벌써 자오?》
유진수는 웃방에 슬쩍 눈길을 주며 물었다.
《원, 꿈을 꾸셨수?》
《왜, 선률이가 오지 않았소?》
안해가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며 혀를 찼다.
《초저녁에 잠간 들렸다가 갔어요.》
유진수는 다리맥이 풀리며 속이 허전해났다. 가벼이 한숨지었다.
《…또 들리겠다오?》
《래일 내려간다나봐요.》
《그렇구만. 그러니…》
찰나에 정전이 되였다.
전지를 찾아든 안해가 유진수의 군복을 벗겨 옷걸이에 걸었다.
《승철의 편지를 가져왔더군요. 이 에미를 대대참모로 헷갈렸는지 전탕 대대자랑만 늘어놓았군요. 뭐이 좋구, 또 뭐이 좋구… 늙어 죽을 때까지 대대장으로나 복무하겠는지, 원- 헌데 여보…》
안해가 긴장한 시선으로 유진수의 얼굴을 살폈다.
《선률이가 기분이 썩 좋지 못한것 같애요. 인민군예술학원에 들렸다가 온다던데 묻는 말엔 대답하지 않고 한숨만 폭폭 내쉬다가 갔어요. 웬일인지 몰라요?》
유진수는 가슴이 졸아들었다. 안해와 눈길이 부딪칠가봐 얼른 책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은 무슨 일, 힘들어서 그러겠지.》
퉁명스레 뱉긴 했으나 안해의 심정이 리해되였다.
승철은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였다. 그래서 유진수 못지 않게 안해는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있었다. 이제는 아들이 다 커서 제발로 걸어가고있지만 마치 철부지자식을 강변에 세운것처럼 아직도 시종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잔정을 기울이고있는것이다. 그러나 녀석은 언제한번 부모의 욕구를 충족시킨적이 없었다.
부모가 그토록 바라던 음악대학에로가 아니라 군관학교로 가는 길을 선택한것도, 제 어미가 내세운 숱한 평양처녀들을 마다하고 군사복무의 길에서 사귄 녀성군관을 배우자로 받아들인것도 어찌보면 뿔난 송아지의 방자한 행동 같았다.
다행히 처녀가 재간있는 음악전문가라는것이 유진수의 마음에 들었지만 안해는 며느리의 집이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갑산땅이라는것때문에 실뚱머룩했다. 유진수가 며느리감을 두고 분명히 음악가집안에 어울릴 복덩이이며 뛰여난 재간둥이라는것을 열성껏 설명해서야 억지로 마음을 돌려세웠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보다 더 애들의 운명문제에 관심하고있다. 그런 안해가 선률의 소환문제에 빗장을 지른 자기의 처사를 알게 되면 얼마나 상심해하겠는가.…
《여보, 래일 내려간다는데 어떻게 시간을 낼수 없겠어요?》
안해가 간절한 어조로 물었다.
《모르겠소. 시간이 나겠는지…》
그 순간에 유진수는 총정치국에 제기한 조혁의 작품문제에 생각이 미쳤다. 과연 어떤 결론이 떨어지겠는지… 설명순실장이 지나치게 날을 세우다보니 괜히 불집만 커졌다는 불만이 의연 속을 번거롭혔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우격다짐으로 불을 끌수는 없었다.
쏘파에서 일어선 유진수는 오선지들이 차곡차곡 가리여진 책상앞에 다가섰다.
갑자기 전화종이 울렸다.
《혹시 애가 아닐가요?…》
안해가 얼른 탁자우에 손을 뻗쳐 송수화기를 들었다. 무춤 놀란 표정을 짓더니 진수를 향해 단장이 찾는다고 입모양을 그려보였다.
유진수는 송수화기를 넘겨받았다.
《미안하오. 혹시 쉬는게 아니요?》
《아직은…》
《부대에 빨리 나와야겠소? 한 5분이면 차가 도착할거요.》
《무슨 일입니까?》
그러나 수화기에서는 긴 통화음만 흘러나왔다.
유진수는 속이 불안해졌다. 안해의 굳어진 눈길을 피하며 성급히 군복을 찾아입었다.
《기다리지 마오.》
문밖에 나서면서 던진 그 한마디가 인사말을 대신했다.
×
뜻밖에도 전상근의 사무실에는 심진성부국장이 틀진 자세로 앉아있었다. 얼굴색이 무거웠다. 단장과 정치부장이 사무탁우에 사업수첩을 펼쳐놓은채 고개를 짓숙이고있었다.
유진수가 도착보고를 하자 심진성은 늦은 밤에 다시 나오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하며 자리를 권했다.
《동무들이 올려보낸 합창조곡을 들어보았소. 허, 요란하더구만. 우리끼리 하는 소리이지만 합창조곡이라는 형식이 있다는걸 나도 처음 알았소. 그게 어떤건지 설명해줄수 있겠소?》
심진성의 눈길을 받은 유진수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진성이 앉아서 이야기하라고 권유했으나 그냥 버티고섰다.
《조곡이란 원래 서로 다른 여러개의 악곡들을 묶어서 만든 기악곡 종류인데 합창들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합창조곡이라고 합니다. 총체적인 표제와 함께 매개 부분들이 자기의 뚜렷한 표제를 가지는데 한마디로 대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제목이?…》
《〈우리는 승리하리라〉입니다. 제 생각엔 작품이 다소 완성되지 못한 결함은 있지만 작곡가에게 대담하고 진취적인 면이 있다고 봅니다.》
심진성은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꼼꼼히 닦았다. 무엇인가 의혹이 실린 눈으로 유진수를 피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작품이 총정치국에 반영될 때에야 부단장도 신심을 못가졌다는 소리가 아니요?》
유진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부국장의 말에는 부인할수 없는 진실이 담겨져있었다. 바로 그것때문에 고민을 했고 자기에 대한 환멸을 느꼈던것이다. 설명순에 대한 고까운 심정이 속에서 회오리쳤다. 유진수는 부국장의 물음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채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솔직히 말하면 창작가의 의도와 창작적개성을 지지하는 부단장동무의 의견에도 동감이지만 어딘가 형식주의 일반에 치중했다는 설명순동무의 견해에도 일리가 있다고 보오. 그런데 문제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다르다보니 우리도 함부로 단정하기 어렵다는거요. 부단장동무는 어떻게 생각하오?》
유진수는 자기의 견해를 당당히 주장해야 한다는것을 느끼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그 작품을 예술지상주의작품이라고 단정한데 대해 의견이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대하면 창작가들이 마음놓고 창작할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노래의 전반양상이 어두운건 사실이요. 난 이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 창작가들이 현실을 도피한 책상주의자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했소. 예술지상주의라…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소. 조혁이라면 시대의 명곡을 창작하여 온 나라를 기쁘게 했던 젊은 작곡가동무가 아니요?》
유진수는 바로 이 사무실에서 조혁이가
그때 입술이며 움푹 패인 두볼이 새파랗게 얼어든 조혁을 와락 껴안으며 수고많았다고 인사한 일군이 심진성부국장이였다.
새벽에 심진성부국장을 집무실로 부르신
《…며칠전에도
심진성은 안경다리를 다시 귀에 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숨을 죽인 창작지도일군들을 한명한명 여겨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제기된 문제를 당에 보고드리기로 했소. 이 문제는
유진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엉거주춤 일어서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일이 그렇게까지 엄청나게 번져질줄을 몰랐다. 컴컴한 낯색으로 부국장을 바라보았다.
《우리
고음에 가까운 심진성의 어조는 준절했다.
유진수는 부국장의 말마따나 자기가 예술실무에 너무 치중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결국은 조혁은 물론이고 창작지도일군인 자기부터가 예술지상주의적인 상아탑속에 갇혀있은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분명 실책이였다.
전상근단장이 컴컴하게 질린 얼굴로 일어섰다.
《부국장동지, 차마
《이 기회에
부국장은 제기된 현안문제들을 더 토론하다가 새벽녘에야 돌아갔다.
사무실에 돌아온 유진수는 예술위원회 기록부를 뒤적이며 심진성부국장이 남긴 말을 곰곰히 되새겼다. 당에 보고드린 작품문제로 하여 마음은 도시 밝아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