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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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벌써 중낮이나 되였다.

세걸은 오래간만에 세상 모르고 늦잠을 잤다. 동무들이 알뜰하게 손질해두었던 군복으로 산뜻하게 몸차림을 한 그는 초막에서 나오자 보초를 서고있는 진봉남에게 시비부터 걸었다.

《왜 진작 깨워주지 않았나. 점심때가 오래지 않았지?》

《중대장동무가 저절루 깨날 때까지 푹 재우라고 했다네.》

에익, 창피해 죽겠다.》

사령부쪽으로 올라가다가 걸음을 돌려 전광식이 있는 초막으로 내려갔다. 사령관동지께 공작정형에 대한 보고를 올리기 위해서는 출판물이 들어있는 배낭이 있어야 하였다.

초막앞에 이른 그는 오래간만에 발뒤축을 딱 붙이면서 거수경례를 하였다. 전광식은 인사를 받고 출판물은 이미 사령부에 올라가있으니 거저 가도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빨찌산전투경험집〉은 어디서 났소? 그런걸 책방에서 팔지는 않았겠는데…》

《그저 그럭저럭 구할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수고했소. 어서 가보시오.》

세길은 산중턱에 자리잡은 사령부로 올라오면서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공작임무를 무사히 수행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전광식이 웃는 낯으로 보아 박기남이가 이미 예언한것처럼 그 책이 대단한 물의를 일으킬것만은 틀림없는것 같았다.

따뜻한 날씨였다. 한겨울답지 않게 양지쪽에는 눈이 녹고 나무가지에 매달렸던 고드름끝에서 진주알같은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머리우로 비쳐드는 해빛은 숲속을 그 어떤 수정궁처럼 현란하게 만들어놓았다. 푸른 안개가 무릎을 스치며 서서히 흘러가고 검푸른 분비나무가지사이로 유리처럼 투명한 하늘이 올려다보이였다.

키가 크고 목이 기름한 세걸은 보초를 서는 변인철에게 고개를 끄떡해보이고 사령부천막으로 들어섰다.

통나무탁자에서 글을 쓰고계시던 사령관동지께서 세걸의 손을 잡아 불무지곁에 앉혀주시였다. 천장에 줄을 달아 내리드린 양철주전자에서는 물이 설설 끓고 빠금히 열린 뙤창으로는 나무가지에 앉은 배때기가 알록알록한 새 한마리가 내다보이였다.

《잠을 좀 잤습니까?》

《여태 잤습니다.》

《아직 얼굴에 피곤이 다 가시지 않은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번듯한 이마로 손을 가져가며 세걸은 약간 모로 돌아앉는다. 그는 이마를 보이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신경을 썼다.

글을 쓰던 종이를 한옆으로 밀어놓으시고 그이께서는 탁자우에 무드기 쌓인 이미 낯이 익은 그 출판물들을 두손으로 옮겨내놓으시였다.

세걸이가 숙영지를 떠나서부터 영평을 거쳐 룡정까지, 거기서 다시 영평으로 돌아와 라흥으로 갔다온 로정을 상세히 보고하기 위해서 서두를 떼였을 때 그이께서는 근간신문들을 펼쳐놓고 고개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놀라기도 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세걸의 말에 주의를 집중하시는것이였다.

원래 말재주가 없는데다가 약간 덤비기까지 하는 세걸은 첫마디를 떼자 곧 줄거리를 잊어버리고 두서없이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보고들은 감격적인것이 너무나 많았던탓으로 손짓, 몸짓을 해가며 펼쳐놓았는데 그 형상이 아주 생동하였다. 신문의 제목만을 읽기도 하고 때로는 중요기사들을 세밀히 읽기도 하시던 그이께서 다시 손을 뻗치셔서 책자들을 집어들세걸은 문득 말을 멈추었다.

《어서 계속하시오. 아주 흥미있습니다. 마치 내가 그곳에 직접 가보는것 같습니다.》

영평소식을 끝낸 그는 룡정거리장면으로 옮겨갔다. 거리풍경과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난 정서들, 더욱더 야박해지는 거리의 인심, 붐비는 렬차칸, 철갑모를 뒤집어쓴 왜놈군대들이 유개차에 들어앉아 북으로 끝없이 실려가던 광경, 광란적인 색채를 저마다 내든 광고판거리, 높이 올리솟은 일장기게양대, 간데마다 나타나는 게다짝패들. 세걸은 더욱더 신이 났다.

박흥덕동무가 잘있습니까?》

그이께서 책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주전자를 들어 물을 따르시였다. 박흥덕의 말이 나오자 세걸은 난처한 빛을 띠며 한숨을 내쉬였다.

《사령관동지! 박동문 참 말이 아닙니다.》

《말이 아니라? 그럼 사업이 순조롭지 못한것이 아닙니까?》

그이께서는 물을 따르다말고 세걸이쪽으로 돌아서시였다.

《사업은 잘되고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글쎄 리발쟁이가 됐습니다. 그것도 왜놈들 대가리를 매일 만지는 그런 세상에 못해먹을노릇을 하고있었습니다. 나 그거 참.》

《리발을 하고있다?! 하긴 그 동무가 그런 재주가 있었지.》

《그뿐인줄 아십니까? 내가 처음 그 동물 만난것은 룡정거리 한복판입니다. 난 너무 놀라서 뒤로 자빠질번 하였습니다.》

《자빠질번 했다?》

세걸은 쓴입을 한번 다시고나서 계속하였다.

《가다오다 거리복판에서마주쳤는데 왜놈의 녀편네를 태운 말을 끌고 허리를 이렇게 구부리고 오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설마 박동무가 저런 꼴로야 다니지 않겠지 하고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쳐다보니 박동무가 틀림없었습니다.》

《그래? 하하하.》

그이께서는 들어올리였던 물잔을 다시 놓고 웃음을 터치시였다.

《그래 내가 〈여보 박동무! 공작을 못하면 못했지 유격대원이 그거 뭐요. 위신없게.〉 하니까 박동무는 〈그것이 어떻다고 그래, 문제는 거기에 있는게 아니야.〉 하고 웃지 않겠습니까, 기가 막혀서.》

세걸은 정이 뚝 떨어진다는 투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박흥덕이 찜쪄먹을 정도인 세걸이가 흉을 보고있는데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한참 웃고나신 그이께서는 다시 걸상에 앉아 수건으로 눈굽을 훔치며 말씀하시였다.

《그건 박동무 말이 옳습니다. 이번 최칠성동무는 영숙동무와 함께 부부로 가장하고 돈화거리에 들어가 많은 일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부부로 가장했습니까?》

세걸은 금시 얼굴이 밝아지며 벙글벙글 웃었다.

《그렇소. 닭알바구니를 이고 경비초소를 보기좋게 뚫고들어갔습니다. 동문 아직 칠성동무를 만나지 못한 모양이구만.》

최칠성동무를 어제밤에 만났는데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무의 이마에 그것이 뭡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돈잎만하게 생긴 꺼먼 상처자국을 가리키시였다.

끝내 발각되였다고 생각한 세걸은 모로 돌아앉으며 이마를 슬슬 쓸면서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데 다친거나 아닙니까?》

체포되였더랬습니다.》

《체포?》

그이께서는 흠칫 놀라 세걸이앞으로 다가오시였다.

개놈들이 어떻게나 격검채로 호되게 내리갈기는지 정신을 잃을번 했습니다. 별놈들입니다. 공연한 사람들을 휘딱 잡아가군 하면서도 진작 들어가야겠다고 하니 어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래 하는수없이 죄를 짓기로 하였습니다.》

세걸은 술냄새를 피우며 최경부네 집에 찾아갔던 전말을 말씀드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우습강스러운 연극인데도 그는 한번 웃지도 않았다.

《그래 그렇게 해서 얻어낸 책이 이것입니까. 허, 그럼 대단한 값을 치른셈이군.》

높이 쌓아놓은 책무지곁에 외톨로 놓였던 그 책으로 그이의 손이 미쳐가자 세걸은 이마를 다시한번 쓸면서 빛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책을 집어드신 그이께서는 퍼런 가위를 잠시 보고나서 목차가 붙은 다음장과 몇군데를 띠염띠염 번져나가며 유심히 들여다보시였다. 전광식으로부터 그런 책을 구해왔다는 보고는 들으셨지만 그런 사연이 깃들어있다는것까지는 미처 알지 못하셨던 그이께서는 한번 읽은 그 책을 다시 번지시였다. 이때 그이의 존안에는 미소가 어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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