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서장
1995년 마가을.
전선서부에서 진행된 포병부대들의 사격훈련을 지도하신
비방울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굵어졌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때아닌 소낙비였다. 어둠을 꿰지르는 승용차의 강렬한 불빛에 비풍을 안고 무섭게 태질하는 관목숲과 탕수를 이루는 골개물이 언뜻 드러나군 했다. 번개가 번쩍하며 어둠을 찢어발겼다.
(어둠, 폭우, 돌풍… 우리앞에 닥쳐들고있는 고난과 시련의 전주곡일수도 있다.)
민족이 당한 대국상을 기화로 사회주의보루인 우리 나라를 고립압살하려는 제국주의반동들의 책동이 더욱 로골화되고있는것이 오늘의 정치정세였다. 동유럽나라들에서의 련이은 사회주의좌절도 우리 혁명의 앞길에 엄중한 난관을 조성했다. 례년에 보기 드문 대자연재해까지 겹쳐들며 나라의 생사존망을 위협했다.
세계반동들은 우리에 대한 경제제재와 봉쇄를 강화한다면 다음해 5월에는 기필코 붕괴될것이라고 선전하고있다. 즉 에네르기사정의 악화로 경제전반이 위축된 결과 공장들의 가동률이 저하되였다는것과 자연재해로 인한 농업생산의 저하로 식량사정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것을 거들며 북조선주민들이 더는 사회주의길로 나가지 않을것이라고 떠벌이고있다.
지난 한달간 적들이 매일같이 벌려놓은 조선전쟁을 가상한 콤퓨터모의시험이나 200여차가 넘는 공중정탐행위도 결코 우연치 않다.
《우리의 〈질식〉을 과녁으로 모든 경제제재가 총동원되고있습니다. 미제의 눈총이 무서워 말로나 〈동정〉하는 나라들이 태반입니다. 대부분이 얼마 못 가서 넘어지겠는데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겠다는것입니다. 피난민이 쏟아질 극단한 사태에 대처하여 국경단속을 강화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당중앙위원회 문성태부부장의 목소리였던지… 랭정하리만큼 침착한 일군이였지만 격분을 이기지 못하여 목소리마저 떨렸다.
사태는 그토록 엄중하고 위험하다. 사회주의를 끝까지 지키고 자기의
번쩍! 시창밖이 훤해지더니 뒤이어 지심을 뒤흔드는 우뢰가 울렸다. 방금전에 포병들이 합창으로 부르던
아직도 귀에 쟁쟁한것이 병사들이 불렀던
《적기가》… 만주의 설한풍속에서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전략적이며 일시적인 후퇴를 하게 되자 이에 겁을 먹은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이
그 노래의 생명력이 오늘도 계속되고있다.
바야흐로 정세는 더욱 엄혹해질것이다. 사회주의보루인 이 조선의 전진을 반대하는 적대세력들의 책동은 극도에 이를것이며 하여 인민은 전대미문의 고난을 겪을수도 있다.
이 모진 고난과 시련을 어떻게 헤쳐나갈것인가? 단지 이겨내는것만이 아닌 승리를 이룩하고 영원히 빛내야 할 무겁고도 중대한 과업을 어떻게 수행할것인가?… 며칠을 두고 사색해오시는 문제였다.
비바람이 더욱 세차지며 산자드락의 관목숲을 후려쳤다. 길녘의 키높은 황철나무가 당장 넘어질듯 태질했다. 굵은 가지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꺾이우더니 어둠속의 아득한 미궁으로 날려가는것이 언뜻 보였다. 물씻개가 시창에 끈질기게 달라붙는 비에 젖은 나무잎들을 간신히 밀어냈다.
승용차 록음기에서 흘러나오는 귀에 익은 관현악선률이
1956년 설날
번쩍! 또다시 밤하늘을 짓태우는 섬광이 일었다.
야전승용차가 굽인돌이를 돌아서는데 웬 군인의 모습이 불빛속에 언뜻 비껴들었다. 왜서인지 안타깝게 두손을 마구 엇저었다. 무슨 급한 일이 있는듯했다.
《차를 세우오.》
승용차가 멎기 바쁘게 부관이 내렸다. 뒤따라 멎어서는 승용차들에서도 지휘성원들이 달려왔다. 군인이 차의 불빛이 뻗어간 앞쪽을 가리키며 무엇이라 열성껏 설명했다.
《무슨 일이요?》
《앞쪽 도로가 물에 잠겼다고 합니다.》
부관이
이쪽을 바라보던 군인의 몸가짐이 굳어졌다. 환희에 휩싸이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차례진 영광이 뜻밖이여서 군인은 어쩔줄을 모르고 허둥거렸다. 곧 자기를 수습하며 등에 지고있던 짐때문에 약간 숙일사했던 상반신을 쭈욱 폈다.
특이한 음색의 목소리였다.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손풍금씌우개에서 비방울들이 튕겨나며 부서졌다.
《손풍금강습?… 좋은데 참가했구만. 헌데 왜 혼자서 다니오?》
대대까지는 대렬을 짓고왔는데 중대동무들을 한시바삐 만나고싶기에 인솔군관을 기다리다못해 먼저 길을 떠났다고 보고드렸다.
《중대예술소조핵심인게로구만.》
《그렇습니다,
군인은
《우리 중대는 예술소조활동도 잘하지만 전투정치훈련이나 군사과업수행에서도 언제나 대대의 앞장에 서고있습니다.》
《옥철동무가 자랑하는 중대예술소조공연을 한번 보았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없구만. 후날 꼭 시간을 내서 봐주지.》
김옥철이 환성을 올렸다. 눈가에서 눈물이 번쩍거렸다.
《입술까지 새파랗게 얼었군. 손풍금을 타려면 손건사를 잘해야 돼. 헌데 도로가 물에 잠겼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물이 막 허리를 칩니다.》
《허리를 친다?… 그렇다고 물이 찌기를 기다릴수야 없지.》
김옥철이 애원했다.
《고맙소. 하지만 가야 할 길이요.》
《옥철동무를 중대까지 태워다주는게 좋겠소. 사관장에게 감기에 들지 않게 옷을 인차 갈아입히라고 하오.》
김옥철의 쌍겹진 눈에서 눈물이 그냥 샘솟았다.
《그래, 다시 만나야지. 만나구말구.》
손풍금수를 떠나보내신
군인이 알려주던 경사길이 나타났다. 사방에서 몰려든 물이 부그그 끓어오르며 거품을 일으키고있었다.
뒤좌석에 앉았던 조명록이 성급히 말씀드렸다.
가속답판을 지그시 밟으시였다. 승용차가 아츠러운 발동음을 울리며 속도를 냈다. 위험한 물목을 벗어나 경사급한 대안에 붙은 승용차는 이번엔 진창과 맞다들렸는지 헛바퀴를 돌렸다.
조명록이 주먹으로 이마전의 땀을 훔치는것이 실내경에 얼핏 비꼈다.
《총정치국장동무, 포병들이 부르던 노래소리가 귀전을 떠나지 않는구만.》
조명록이 앞으로 몸을 기웃했다.
《공연을 통해서 느꼈겠지만 우리 군대와 인민은 아직도
《…》
《대국상의 아픔이 채 가셔지지 않았는데 우리앞에는 난관이 첩첩으로 막아서고있소. 미증유의 난관이라고 할지… 이제 헤쳐가야 할 길을 생각하면 잠이 다 오질 않소.…》
조명록의 길쑴한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무릎우에 놓인 두주먹을 꽈악 틀어쥐였다.
《많은것을 각오해야 하오. 많은것을… 그런데 무엇으로 군대와 인민을 불러일으키겠는가 하는거요. 난 오늘 군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 혁명의 길에 울려퍼진 혁명군가에 대해 생각해보았소. 노래는 언제나 우리의 길동무였고 힘이였지.》
후사경을 통해 뒤따르는 차들을 확인하신
《총정치국장동무, 요즘 인민군협주단의 일부 예술인들이 무대를 떠나겠다고 한다는데 원인이 어디에 있는것 같소?》
조명록이 가늘게 한숨 지었다.
《성악과의 일부 성원들이 노래를 부르는것보다 흙 한삽 떠서 나라에 보탬을 주는게 낫다고 생각하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합창대에 서있는것이 불만스러워 다른 예술단체에 가겠다는 동무들도 더러 있습니다. 저희들이 예술인집단의 성격에 맞게 사상교양사업을 바로 하지 못했습니다.》
《고난이 겹쳐드니 주접이 들었는가?…》
동안을 두며 말씀을 이으시였다.
《지금 일부 동무들이 합창에 대해 편견적으로 생각하는것 같은데 인민군협주단의 남성합창은 언제나 힘과 단결을 상징해왔소.
합창을 전면에 내세울 때가 된것 같소. 인민군협주단에서 남성합창만으로 공연을 준비하도록 방안을 연구하고 종목편성을 해야겠소.》
《알았습니다.》
조명록이 심중한 기색으로 대답올렸다. 하지만 길쑴한 얼굴에는
×
당중앙위원회청사 집무실이다.
창작지도일군들이 곡목편성에 품을 많이 들인것이 알렸다. 그러나 합창과 합창사이에 독창이나 4중창 같은 종목을 넣은것을 보니 당에서 의도하는 합창음악회의 목적이나 의의보다 공연의 흐름새에 더 관심한것 같았다.
전화로 총정치국의 심진성부국장을 찾으시였다. 인사를 받으시고는 인민군협주단에서 준비한 공연종목을 보았는데 당에서 의도하는대로 되지 못한것 같다고 말씀하시였다.
《…부국장동무, 전에 포병부대군인들의 예술소조공연을 보고나서도 말했지만 오늘의 정세는 단결과 힘을 시위하는 합창소리가 높이 울려퍼질것을 요구하고있소. 그래서 당에서는 합창만을 묶은 합창음악회를 해보자는거요. 아마 그런 방식의 음악회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일게요.》
심진성이 긴장한 어조로 말씀올렸다.
《부국장동무, 합창음악회라는것을 잊지 마오.》
《…합창종목은 한시간정도 출연할수 있게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품이 좀 걸릴게요. 총정치국에서 잘 도와주어야 하겠소.》
《…인민군협주단 공연을 극장이나 회관이 아닌 곳에서 보려고 하는 리유가 남성합창을 그대로 들어보자는데 있소.
인민군대는 대부분이 남자들로 구성되여있고 생활자체가 남성적이기때문에 그들의 투쟁과 생활을 반영하는 예술도 응당 남성적인것으로 일관되여야 하오.
한마디로 남성합창은 남자들의 성격과 정서에 맞는 전형적인 예술형식이요. 남성적인 울림으로 사람들에게 강렬한 정서와 락천적이며 전투적인 열정을 안겨주고 그들을 투쟁과 위훈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는 여기에 남성합창의 특성이 있고 생활력이 있소.
나는 인민군협주단 남성합창을 들어보고 괜찮으면 그들을 자주 불러 군인들과 인민들앞에서 공연을 하게 하려고 하오. 웅장하고 힘있는 합창소리로 군대와 인민의 심장에 불을 답시다.》
《12월 24일이야 어머님의 탄생일이지. 벌써 78돐이 되던가? 세월이 빨라.… 그렇다면 12월 24일에 합창음악회를 보는것으로 락착짓기요. 모든 력량을 집중하여 남성합창을 최상의 수준에서 준비하도록 해야겠소.》
《…합창음악회에 참가한 성원들을 표창하는 문제도 생각해봐야겠소. 모두가 공로가 있는 동무들이요. 시간이 허락되면 식사도 함께 하자고 하오.》
《당에서 왜 오늘같이 어렵고 힘든 때에 인민군대의 남성합창을 내세우는가를 명심하고 이 사업에 관심해주오.》
《알았습니다.》
《그만합시다.》
통화를 마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