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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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를 베기 시작하였다. 여러곳에 보초를 세웠다. 밭둔덕에는 가슴까지 가리워질만 한 대피호가 파있었다.
박기남은 세걸이에게 멀찍이서 구경이나 하는것이 어떤가 하였지만 그는 한사코 낫을 들고 조를 베였다. 벌목부였던 세걸은 나무는 잘 찍었지만 낫질은 아주 서툴렀다.
그러나 젊은 혈기에 무엇을 하든지 질 생각이 전혀 없었고 더구나 근거지에서 이런 일을 해본다는것이 보람있는 일일것이였다.
그는 팔을 걷어붙인 다음 낫자루에 침을 발라쥐고 달려들었다.
사실 말이 가을걷이지 몇걸음씩 걸어나가야 몇포기의 조대를 걷어쥘수 있었다. 밭에서는 불에 탄 그을음내가 그냥 풍기였다. 초가을부터 왜놈들은 밭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래도 잘 타지 않는것은 《토벌》하러 드나들면서 말을 들이몰거나 보병들을 산개시켜 밟고 지나가게 하였다. 근거지인민들은 산꼭대기에서 그것을 보고 가슴을 쥐여뜯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어쩌는수 없이 이렇게 자기가 심은 곡식을 밤에 나와 은밀히 거둬들여야 하였다. 세걸은 걸썽걸썽 걸어나가면서 잎이 불에 타서 가드라지고 이삭이 꺼멓게 그슬린것을 닥치는대로 걷어쥐고 낫을 후리였다.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하였다.
여기저기서 돌격대원들의 기운찬 숨소리가 들리였다. 누구나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걸어나가면서 재빨리 손을 놀리였다.
낫질을 하는 뒤에서는 운반조가 뒤따랐다. 베는 족족 단을 묶어 지게에 져서 산으로 져올리였다.
세걸이가 허리를 폈을 때 옆에 따라섰던 박기남이 속삭이였다.
《어떻습니까, 기분이? 준엄한 생활이지요?》
《역시 말그대로 전투군요.》
《아니지요, 전투는 이제 시작되지요. 아마 한 10분 있으면 보게 될것입니다.》
《어쨌든 대단합니다.》
《저기를 좀 보시오. 저기는 제5구의 돌격대가 나와있습니다. 오른쪽 여기는 제7구 돌격대들이지요.》
《기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땅이 생겨서 아니, 그보다 사람이 낟알을 가꾸는 영농법을 생각해내서 수천년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이와 같은 낟알걷이는 아마 처음 있게 되였을것입니다. 나는 밭은 지식으로나마 력사책을 적지 않게 뒤져보았지만 이런 일은 여태 읽지도 듣지도 못했지요. 실로 조선이라는데가 참 유명하지요. 더 정확히 말하면 싸우는 조선인민이란 모든 면에서 이렇듯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거지요. 인류력사가 계급투쟁의 력사라고 한다면 우리 인민은 그의 최첨단을 걷고있는셈입니다.》
《그렇게 말할수 있을겁니다.》
세걸은 땀을 씻고 또 낫질을 하였다.
여기서 번뜩, 저기서 번뜩 낫이 번개처럼 밭이랑을 누벼나갔다.
천평남짓한 두뙈기를 잠간동안에 조기고 세번째 밭으로 건너섰을 때였다. 철알이 날아왔다. 팽팽히 발린 쇠줄을 튕겨놓는것 같은 야무진 총소리가 귀를 울리였다.
숲속과는 달리 총소리는 더 앙칼지고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밭에서는 누구 하나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총소리는 차츰 더 잦아졌다.
그때 녀성들의 노래소리가 울렸다. 부엌녀아주머니도 한몫 끼웠는지 두드러진 녀성저음 하나가 유난하게 울리였다.
…
용감하게 나아가자 무산혁명에
새 사회를 전취할 날 눈앞에 있다
일을 다그치면서 부르는것이여서 두간두간 노래가 끊기였지만 그 음향은 어딘가 모르게 장쾌한데가 있었다.
돌격대원들은 노래를 부르면서도 재빨리 몸을 움직이였다. 이런 생활에 습관된 그들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제 할일들을 서둘러 하였다. 박기남은 두주먹을 쳐들어 총알이 날아오는쪽에 대고 흔들어 보이였다.
《자식들! 두고보자, 네놈들이 그런다고 이 곡식을 그냥 둘줄 아느냐? 쪽발이새끼들.》
세걸은 그냥 낫을 후리며 나갔다.
5구와 7구라는데서도 노래소리가 울렸다.
하늘과 땅을 분간할수 없게 된 진회색공간에 노래소리가 강한 파동을 일으키며 번져나갔다.
총소리는 점점 더 잦아졌다. 점이던것이 선을 이루고 그것이 다시 교차를 이루었다. 공중으로 불줄이 연방 날아왔다.
《피합시다. 동무들, 대피합시다.》
박기남이가 다급히 고함을 질렀지만 누구 하나 밭에서 나서려 하지 않았다. 낫질을 하는 사람들의 눈에서는 불이 뿜겨나오는듯 번뜩이였다.
《빨리!》
적탄이 발부리에 떨어지고 어깨를 스치게 되자 박기남은 권총을 뽑아들고 한방 쐈다. 그것은 결정적인 신호였다.
량쪽 산봉우리에 지켜섰던 적위대원들이 적을 향해 불을 뿜었다. 돌격대원들은 언덕에 내려서거나 대피호에 뛰여들어갔다.
총소리는 골짜기를 흔들었다.
그때 밭가운데서 《아이구.》 하는 신음소리가 울리였다.
《누구요?》
대피호에서 박기남이 뛰여나갔다. 조대를 쥔채 탁재봉이 땅에 딩굴었다. 세걸이가 탁재봉을 업고 대피호로 내리뛰였다.
부상자를 내려놓고 상처를 헤쳐보니 다리에 관통상이 생겨 피가 흘렀다. 대피호바닥에 깔린 눈우에 붉은피가 뚝뚝 떨어졌다. 한편으로는 계속 대응사격을 하였다. 탁재봉을 뒤로 뽑아 마을로 보내고도 돌격대원들은 흩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