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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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걸이는 그 이튿날 몇개 지구로 떠나는 공작원들과 함께 최칠성이와 반대쪽으로 떠났다.

세걸은 왕청과 라흥에 들려 통신을 전해야 하였고 룡정거리까지 나갔다와야 하였다. 왕청에는 아는 사람이 없지만 라흥에 가서 박흥덕을 만나게 된다는것은 매우 흥미있을것이고 룡정거리에 나가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출판물을 구하는것도 그만 못지 않을것이다. 아래우 로동복을 입고 모자를 삐딱하게 올려놓은 그는 거침없이 영평을 향해 하루에 한 100리씩 걸어나갔다.

벌써 서너차례 적들의 몸수색에 걸리기는 하였지만 그런 정도로 가슴이 떨릴 그가 아니였다. 원체 모험을 즐기는 그는 이런 일을 위해 태여난것처럼 위험이 닥칠 때면 비상한 기지가 생겨나서 슬쩍슬쩍 고비를 넘기군 하였다. 영평어구에서 보초에 걸려 암호를 대니 곧 박기남에게 데려다주었다.

《아! 산에서 온 동무요? 이거 수고했소!》

가슴이 좀 나오고 목이 앙바틈한 박기남이 팔을 벌려 세걸을 포옹하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무고하시지요?》

《네, 건강하십니다.》

사령관동지의 안부를 자세히 알게 된 박기남은 감동되여 눈물이 글썽해지더니 얼마후에 담배쌈지를 내놓으며 다시 그전 기분으로 돌아갔다.

《우리 생활은 그저 그렇습니다. 어서 피우십시오. 이래두 산보다야 낫겠지요?》

그는 잎담배를 와삭와삭 부스러뜨려 신문지를 뜯어 담배를 말았다.

세걸이도 한동안 담배강목을 치르던차라 입술이 벌어질 정도로 굵직하게 말아물었다. 담배연기를 마주 내불며 부대이야기와 근거지이야기가 교환되였다.

바깥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뙤창으로 내다보이는 저녁하늘은 진회색장막을 내려드린듯 한데 함박눈이 푸뜩푸뜩 내렸다.

《날씨는 좋군.》

턱이 검실검실한 박기남은 유쾌하게 한마디 해놓고 밖을 내다보고있는 세걸에게 설명하였다.

《지금 추수전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심각한 생활이지요. 조밭 한뙈기를 가을하자면 서너번의 전투를 해야 합니다. 적들은 우리가 지어놓은 곡식을 거둬들이지 못하도록 밭을 지킵니다. 산에 눈이 덮였는데 아직 가을걷이는 절반밖에 못했습니다. 우리가 식량을 가지지 못하면 끝장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맑스가 말한것처럼 인간은 제도와 리념을 가지기 전에 먼저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희생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식량이 없다는것은 혁명 그자체도 없는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여보! 돌격대장, 떠나겠소?》

박기남은 싸리창문을 해단 뙤창으로 머리를 쑥 내밀고 어느 소대에서 몇명 왔고 누가 나오지 않았는가 물었다.

《나 좀 손님이 와 그러는데 이따가 곧 가겠소. 눈이 더 오기전에 제3지구는 끝내야겠소! 마침 날이 흐려서 좋기는 한데 캄캄하면 뭐가 뭔지 가려낼수 있을가? 여하튼 떠나시오.》

박기남은 꽁무니에서 털썩거리는 권총을 앞으로 훌쩍 당겨놓고 량귀퉁이가 벗어져올라간 이마를 수건으로 문대였다.

눈이 오는 날씨인데도 그는 땀을 흘렸다.

《〈토벌〉이 심합니까?》

예상한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것을 느끼면서 세걸이 물었다.

《요새는 그래도 좀 뜸한 편이지요. 쏙새골에서 된방을 맞고는 한결 도수가 떠졌습니다. 그러나 알수 없지요. 무슨 꿍꿍이를 하느라고 놈들이 그 모양인지. 이제라도 자동차소리가 부르릉 하고 나면 그때부터 기관총란사가 시작됩니다.》

《저도 같이 가볼수 있을가요?》

《그만두시오, 그만둬요. 부대생활을 하다 그걸 보면 눈이 딱 감길겁니다. 추수전투란 그저 강다짐이고 억지를 쓰는거지요. 고작해야 화승대 몇자루에 사냥총, 소리폭탄 그런걸루 기관총과 맞서지요. 엎친데덮치기로 저 산너머에 있는 구국군친구들이 말썽이여서 우리의 두개 중대는 노상 그 친구들을 지킵니다. 리광이라구 동무가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파견원동지인데 줄창 거기에 붙어있지요. 그들만 말썽이 아니더라도 이렇게까지 목에 방울을 달 지경은 아닐터인데 그러지 않습니까. 난 성미가 급해서 그런지 그것들을 한번 혼내우자고 여러번 제기했지만 리광동지는 끝까지 설복해서 손을 잡아야 한다구 그러고있지요. 제꺽하면 놈들은 우리 마을에 달려들어 식량을 걷어갑니다. 그것들은 순 악당들이지요. 그건 그렇구 통신원동무는 숙소에 가서 오늘은 푹 쉬십시오. 그러고나서 이곳 실정에 대해 설명도 듣고 또 직접 보기도 하시오.》

박기남은 벽에 걸렸던 수건을 벗겨서 목에 걸치며 무엇을 잊은게 없는가 두리번거렸다.

《저도 구경을 가겠습니다. 여기 오면야 여기 풍습대로 살아야지요. 오늘은 한 50리밖에 걷지 않아 그닥 피곤하지도 않습니다.》

《아무렇게나 좋도록 합시다. 내가 동무의 열의를 꺾을순 없으니까. 오늘 밤이나 래일 아침에 리광동지가 오면 오신 용무를 토론하시지요. 나는 어디까지나 리광동지의 방조자니까요.》

그들은 들길을 걸었다.

《이번에 가시면 장군님께 여기 실정을 본 그대로 좀 말씀드려주시오. 이자도 딱한 사정을 말했지만 구국군들 문제는 순전히 반영이 잘못돼서 이렇게 애먹지 않습니까. 사실대로 그들이 악당이라는것을 보고했다면 장군님께서 그런것들과 통일전선을 하라고 지시하실리가 있습니까. 골치거리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슬슬 얼려먹지요. 이따금씩 협박장까지 보내옵니다. 무식한 벗은 원쑤만 못지 않게 무섭다는 말도 있지만 그런 격이지요. 허허 참, 이젠 다 왔습니다. 이 등성이를 넘으면 이른바 중간지대입니다. 적들도 견디여배기지 못하고 우리도 또한 들락날락하는 지대지요.》

박기남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하였다.

정열이 있고 또한 아는것도 많았다. 생각나는대로 슬슬 내뱉는것 같은데 사개가 딱딱 물리고 곁가지로 멀리 뻗어나가다가도 원줄기로 되돌려 아퀴를 맞추군하는데 그 재주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하지만 세걸은 차차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어쩐지 그에게서 속이 궁근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등성이를 넘어서자 민틋이 휘여넘어간 밭이 나졌다. 한쪽은 콩밭이고 다른쪽은 조밭, 그다음에는 수수밭이였다.

가을걷이돌격대원은 한 50명 되였는데 절반가량은 녀성이였다.

《아주머니, 좀 떠들지 마우. 적들이 들으면 또 총질을 하겠소.》

박기남은 밭머리에서 이야기를 하고있는 녀성들에게 큰소리로 우선 주의부터 주었다.

《아니, 박선생은보기만하면 저런당이요. 적들이 총질을 하는거사 놈들 심보가 그거니까 그러는거지 내가 말한다고 그러겠소? 그래 근거지에 살면서 말도 크게 못하며 살아야겠소? 그러챙이요?》

녀인은 자기네 패들을 둘러보며 웃었다.

하하하.》

박기남이도 어처구니없다는듯이 수염이 한벌 내돋은 턱을 문대며 따라웃었다.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소!》

키가 크고 얼굴이 기름한 30대의 아낙네가 치마우에 허리띠를 동이며 눈을 흘겼다.

돌재에서 살던 아주머니인데 남편을 먼저달 《토벌》에 잃고 아이 셋을 데리고 근거지로 찾아왔다. 그전에는 얌전했다는 자기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이곳에 나타난 그는 여간만 괄괄하지 않았다. 그옆에 탁재봉이라는 몸이 통퉁한 반제동맹 맹원이 있었지만 그는 번번이 부녀회원인 이 부엌녀아주머니한테 퉁을 맞군하였다.

아주바이, 좀 비키오, 남녀평등권인줄 모르고 쩍하면 녀자들앞에 나서서 오새없이 그런당이.》

다섯가마니를 한짐에 져서 《곰》이라는 별명이 붙은 탁재봉은 덧이를 드러내놓으며 씩 웃었다. 끝내 그는 뒤줄에 가 서게 되였다. 그렇게 몰아주고난 부엌녀아주머니는 앞에 선 처녀 금실이의 어깨를 치며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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