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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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3일후 차광수는 숙영지를 떠나 돈화로 내려가게 되였다. 사령관동지께서 돈화로 내려갈데 대한 그의 제기에 동의를 주셨던것이다. 그는 떠나기에 앞서 매개 중대를 다 돌아보고 지휘관들의 회의도 소집하였다. 손수 배낭을 뒤져 식량예비도 따져보았고 탄약보유정형도 알아보았다. 전령병들을 앉혀놓고는 장시간에 걸쳐 사령관동지의 신변호위에 대해서 자세한 주의를 주었다. 자신의 말로써는 며칠동안이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한 열흘간 걸릴것이라고 하였지만 그가 주의를 돌려 일을 포치하는것을 보면 적어도 몇달은 걸릴것으로 보이였다. 몸차림도 돌변하였다. 어떤 정황속에서도 몸에서 떼는 일이 없던 근시안경을 벗었고 아래우는 막벌이군토목옷을 입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숲속을 빠져 한 10리까지 그를 바래워주시였다. 어려운 임무를 주어 멀리 적후로 떠나보낸적이 한두번이 아니였기에 장군님께서는 이때도 별로 류다른 감정없이 그를 떠나보내시였다. 한데 지내놓고보니 몇가지 인상적인 세부들이 있었다.

차광수가 떠나기에 앞서 목도리를 바꿔달라고 한것도 그 례의 하나라고 할수 있었다. 언제인가 한번 목도리를 보여달라고 하기에 벗어주었더니 자기것을 벗어놓고 목에 걸쳐보며 대단히 좋다고 하였다. 그이께서 차동무의것은 털실목도리인데 이불솜을 넣고 만든 명주목도리가좋겠느냐고 하자 차광수는 그 목도리에 토기점골 어머님의 체온이 스며있기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정말 뜻밖이였다. 어머님에 대한 절절한 감정을 다시한번 가슴속에 굽이치게 했던 일화였다.

그러나 그때는 그럭저럭 스쳐지날수 있었다. 한데 먼길을 떠나면서 바꿔달라고 하는데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왜 그런지 대수롭지 않은 이 하나의 세부가 오래동안 여운을 남기며 가슴속에 묻어다닌다. 닷새안으로 통신을 보내겠다고 하는데 역시 정확하게 예정했던대로 주영장을 만나게 되였다고 통신을 보내왔다.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그사이 다시 보고가 있어야 할것이였으나 아무 소식도 없는것으로 보면 무슨 까닭이 있는것임에 틀림없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시 궁금한 며칠을 보내게 되시였다. 그이께서는 행군을 중단하시고 며칠 묵으면서 이미 포치한 사업들을 수습할 계획을 세우시였다. 우선 차광수의 활동을 알아보시는것이였고 다음은 국내깊이 들어간 차기용을 비롯한 공작원들 그리고 박흥덕이 나가있는 영평과 그 근방의 반유격구정형을 료해하셔야 하였다. 림시로 정한 밀영, 여기를 거점으로 해서 광대한 지역에 부채살같이 퍼져나간 조직선을 단단히 걷어잡아야 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우선 최칠성을 부르시였다.

발자취소리가 나자 어둠속에서 곧 최칠성이 나타났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최칠성의 절도있고 정확한 동작을 보면서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등을 떠미시였다.

《들어갑시다.》

초막으로 들어가신 그이께서는 요새 부대생활이 어떤가고 물으면서 통나무로 만든 탁자우에서 책을 하나 집어드시였다. 최칠성은 오래간만에 며칠간 휴식을 하고있다는것과 오늘 저녁에는 삐라를 찍었노라고 말씀을 올리였다. 그러면서 그는 대원들속에서 적이 보이지 않는것이 오히려 더 재미없다고 한다는것을 말씀드렸다.

《좋습니다. 그건 차차 토론합시다. 그런데 동무는 요새 무슨 책을 읽었습니까?》

《별로 읽은것이 없습니다.》

그는 며칠동안에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라는 소책자를 읽었지만 그것을 말씀드릴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별로 읽은것이 없다?!》

짬이 있으면 늘 학습을 하고있다는것을 잘 알고계시는 그이께서는 그가 이제는 상당한 정도로 독서력이 자랐으리라고 짐작하시였다.

《얼마동안 짬이 없어서 동무와 만나지 못했는데 오늘은 같이 공부를 해봅시다. 이런 책을 본적이 있습니까?》

그이께서는 탁자우에서 집어드셨던 자그마한 책자를 내주시였다.

그는 책가위를 쭉 내리훑어보았다.

《〈공산당선언〉이군요.》

그 순간 그는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하면서 말소리가 약간 갈리기까지 하였다.

《읽은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최칠성은 박흥덕이를 만나 《공산당선언》이 무엇인지를 몰라 간이 콩알만 해졌던 이야기를 하였다. 그이께서는 손수 고뿌를 들어다가 설설 끓는 주전자의 물을 따라주시며 그런 흥미있는 일이 있었댔느냐고 만면에 웃음을 지으시였다.

박흥덕동무는 그런 수로 동무를 옴짝 못하게 만들었었군. 지금쯤은 또 누구를 그렇게 혼내우고있는지 모르겠소.》

박흥덕의 말이 나오자 그이께서는 그의 그후 소식이 궁금하여 이번에 누구를 파견하여 그의 활동정형을 알아보아야겠다고 하면서 최칠성에게 책을 읽어보라고 하시였다. 책을 두손으로 받쳐든 최칠성은 검실검실한 눈을 몇번 슴뻑이고나서 약간 갈린듯 한 목소리로 《공산당선언》 하고 첫머리를 떼였다.

《하나의 유… 령이 유… 럽을 어슬렁거린다. 공산주의라는 유… 령이…》

한자한자 떼읽어 의미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서툴렀다. 사령관동지앞에서 글을 읽는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자기로서도 놀랄만치 입이 굳어진것이다.

《천천히 뜻을 새가며 읽으시오.》

흥분을 눌러가며 최칠성은 다음줄로 시선을 옮기였다.

《낡은 유럽의 모든 세력들 즉 법왕과 짜리, 메테르니히와 기조, 블란서의 급진파와 도이췰란드의 경찰이 이 유령의 성스러운 토벌에 련합하였다.…》

고뿌를 들어올리다가 그만두시고 그이께서는 눈을 한 반쯤 감고 귀를 기울이시였다. 처음에는 궤도를 잃은 차바퀴처럼 종잡을수 없이 비틀비틀하던것이 차차 침착해지면서 정확하게 한줄한줄 읽어내려갔다. 두툼한 입술에서 새여나오는 약간 거쉰듯 한 그의 목소리는 정적이 깃든 초막안 공기를 가볍게 흔들면서 구석구석까지 은근하게 울려갔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내리듯이 잔잔히 소리없이 시작한것이 차차 여울을 치고 거센 흐름을 이루어 격조를 띠고 번져나갔다.

눈을 가볍게 내리감으신 그이께서는 자연스럽게 내리드리운 손으로 무릎을 가락맞게 두드리면서 조용히 귀를 강구고계시였다.

최칠성은 두간두간 막히는데가 있기는 하였지만 글을 방금 깨친 사람치고는 매우 훌륭하다 할 정도로 거침없이 읽어내려갔다.

시간은 흘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뻘겋게 숯이 진 우등불에 시선을 던지신채 입가에 알릴듯말듯 한 미소를 지으시였다. 호탕하고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환희와 격동도 좋아하셨지만 이렇게 아늑하게 깊은 사색에 잠기는데서도 그만 못지 않은 정취를 느끼시는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자기에게 고된 로동과 학대와 주림을 강요하며 뺨을 후려치고 발길질을 하던 지주가 못 견디게 미워서 배낭을 지고 집을 떠났던 글장님이 이제는 인류의 가장 크고 위대한 리념이 담긴 하나의 책자를 무릎우에 놓고 마음대로 뒤져보게쯤 되였다. 불무지에 시선을 던진채 기운차게 울리는 최칠성의 음성을 듣고계시던 그이께서는 자그마한 소책자에 담긴 그 위대한 사상이 이 시각에 한 유격대원의 입을 통해서 온 조국강토에 울려가고있다는 장쾌한 장면을 상상하게 되시였다.

조국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푸른 언덕이 아득히 바라보이였다. 그 해방의 언덕을 지나야 장엄하게 일떠선 사회주의봉우리를 내다볼수 있다. 최칠성이가 읽어내려가는 한마디한마디 말속에 포함된 그 위대한 력사적로정들이 하나의 화폭으로 펼쳐졌다.

지금은 불바다를 뚫고 제국주의에 의해 강점된 조국을 되찾아야 하지만 그다음에는 사회주의제도를 수립하고 그것을 건설하는 력사적대업이 또 기다리고있을것이다.

언젠가 차기용이도 말했지만 지난날 락후했고 빼앗겼던 그 모든것을 봉창해야 하며 우리를 업신여긴자들에 대한 응당한 타격으로서 우리 인민의 창조적열정과 재능을 남김없이 보여주어야 할것이다.

우리 인민은 우리 식대로, 우리 본때대로 일하고 생활할것이다.

지금은 이 땅에 겨레의 피가 쉴새없이 젖어들고있지만 그때에 가서는 그보다 더 많은 땀으로써 침략자들에 의해 멍이 든 이 땅을 가셔내게 될것이다.

창조, 여기에서도 우리는 남에게 뒤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이께서는 꼬리를 저으며 솟아오르는 우등불의 불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갑자기 몸을 일켜세우며 《좋소!》 하고 최칠성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으시였다. 최칠성은 책에서 눈을 들어 그이에게로 시선을 돌리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이께서는 다시 웃으시는데 최칠성은 고개를 숙이며 낯을 붉히였다.

《잘 읽었소!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이께서는 거듭 치하해주시고나서 담화를 계속하시였다.

그 책을 다 읽고 다시 토론하자는것이 약속되였다.

그다음 그이께서는 며칠째 우리가 초막을 치고 편안히 있는데 기분이 어떤가고 물으시였다. 최칠성은 편안히 있는것이 마음이 더 괴롭다고 하였다. 어째 쉬고있는데 괴로운가고 물으시자 그는 개구리가 주저앉는것은 높이 뛰자는 심보가 뻔하다고 하면서 왜놈들이 지금 잠잠한것은 한바탕 되게 해보자는 수작이라고 하였다.

그이께서는 통쾌하게 웃으시였다.

《옳소, 바로 그렇소.》

그이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여 초막안을 천천히 걸으면서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놈들의 잔꾀에 넘어갈것이 아니라 더 긴장해서 단단히 잡도리를 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피해다니지만 말고 주동적으로 적을 쳐야 합니다. 그래서 적들이 갈팡질팡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동무가 말한 식대로 하면 주저앉지도 못하고 뛰지도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최칠성은 마냥 가슴이 뛰였다.

계속하여 김일성동지께서는 지금 진행되고있는 동기원정에 대한 의의를 다시금 자세히 설명해주시였다.

최칠성은 두어시쯤 해서 초막으로 돌아와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아 밤을 새웠다. 아침을 먹고나서 농민옷차림을 하고 삐라뭉테기를 가득 밀어넣은 망태기를 메고 그는 돈화를 향해 길을 떠났다. 영숙이가 그와 함께 가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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