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서 장
잠들수 없는 령혼들
(1)
독립군대원인 안덕삼은 심한 갈증과 함께 누구인가 자기 얼굴을 자꾸 간지럽히는듯한 느낌을 받으며 잠에서 깨여났다.
몽롱하던 의식이 자욱한 안개속을 헤치고 나오는것처럼 점차 맑아지기는 하였지만 왜서인지 눈을 뜨기는 힘이 들었다.
(목은 왜 이렇게 마를가? 얼굴은 누가 자꾸 간지럽히고… 혹시 우리 초산이가?…)
문득 언제인가 젖먹이아들애가 발랑발랑 머리맡으로 기여와 야들야들한 손을 얼굴에 올려놓고 오무작오무작 간지럽히며 열심히 장난을 하는 바람에 굳잠에서 깨여났던 일이 얼핏 떠올라 안덕삼은 눈도 뜨지 못한채 속으로 비주름히 웃었다.
지금도 그애가 이 아버지의 밤송이처럼 꺼칠한 수염을 가지고 장난질을 하는 모양이다. 얼굴이 동글납작한 예쁜 안해는 부엌에서 찬물을 한사발 떠들고 문턱을 넘어서다가 귀여운 아들애의 장난을 보고 새물새물 웃고있을것이다.
안덕삼은 이 애를 어쨌으면 좋을가, 그때처럼 버쩍 쳐들고 둥게둥게 해줄가 아니면 담쏙 그러안고 그 말랑말랑한 볼에 이 꺼칠한 턱을 슬쩍 대주어 바스라지게 소리치며 캐득거리게 해줄가 생각하며 애써 왼눈을 뻐글서 떠보다가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웬일인지 아들애는 간곳없고 대신 천정을 통채로 휘감은채 무섭게 활활 타번지는 시뻘건 불길을 보았던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 불이다. 집에 불이 났다.)
너무도 당황하여 숨을 훅 들이그은채 흡뜬 눈으로 천정의 여기저기를 황황히 둘러보던 그는 한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엄청난 착각을 하였다는것을 깨닫고 맥을 놓으며 허- 하고 김빠진 소리를 냈다.
불타는것은 천정이 아니라 하늘이였다. 노을이 그렇게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장엄하게 타번지고있었다.
그 노을을 배경으로 누렇게 마른 풀대 서너대가 눈앞 얼굴우에서 흐느적거리였다.
(여긴 어딜가? 내가 왜 여기에 누워있을가?)
풀메뚜기 한마리가 툭-하고
그걸 야들야들한 아들애의 손으로 착각한것이 어이 없었다. 허구프게 웃으며 그 새초줄기를 밀어제낀 안덕삼은 빨리 일어나 물부터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끙 힘을 썼다. 하지만 그는 웃몸을 일으켜 앉기도 전에 갑자기 누가 날창으로 옆머리를 콱 찔러대는것만같아 《앗!》하고 소리치며 그 자리에 나동그라지고말았다.
머리며 어깨며 허리며가 금시 으깨여져나가는듯 아니, 온몸이 그대로 산산이 부서져나가는듯한 아픔에 전률을 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왜 이렇게…)
그 자리에 퍼더누운채 헐떡거리며 피빛하늘을 올려다보던 안덕삼은 갑자기 그 하늘을 꽉 메우며 날아드는 환영에 《아-》하고 진저리를 쳤다.
나지막한 언덕우에 엎드린 누런 군복을 입은 왜군병사들… 따따따따 무섭게 불을 토하던 왜놈기관총.
《쪽발이놈들을 몽땅 때려죽이라!》
말을 타고 장검을 휘두르며 앞장서 돌진하던 독립군부대장.
《때려죽이라.》하고 맞받아웨치며 화승대며 날창이며를 비껴들고 왜놈들을 향해 달려나가던 독립군대원들, 언덕우 새초밭에 엎드린 왜군 두놈이 징그럽게 웃으며 기관총을 휘둘러댄다. 성난 사자마냥 무섭게 돌진하는 독립군대원들을 삼대베듯 모조리 쓸어눕힌다.
(저 기관총을 무조건 빼앗아내야 한다. 저 기관총을…)
기관총을 갈겨대는 왜놈들을 향해 화승대를 꼬나들고 맹렬히 달려나가던 안덕삼은 갑자기 눈앞이 번쩍하면서 몸이 허궁 들리는것을 느꼈다.
그다음엔… 아무것도 생각나는것이 없었다. 정신을 잃었던것이다.
그러니 덕삼은 방금전 잠에서 깨여난것이 아니라 그때 정신을 잃었다가 이제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것이다. 정신을 잃고 얼마나 누워있었는지 알수가 없다. 생각나는것은 그저 왜놈들과 맞다들린것이 아침밥을 먹고 한숨을 돌리던 때였는데 지금은 저녁노을이 저렇게 불타고있다는것뿐이였다.
안덕삼은 또다시 오른쪽옆머리가 칼로 우벼내는듯 쑤셔와 슬그머니 손을 가져다대보았다. 껍진껍진한것이 손끝에 닿았다. 전률을 하며 손을 떼보니 아닌게아니라 피였다. 오른쪽목부위도 뻣뻣해서 어루쓸어보니 거기도 온통 피범벅이 되였다. 기관총탄에 상한 모양이다.
안덕삼은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목에서 쇠비린내가 났다. 누가 속에서 겨불이라도 때는듯 해서 그대로 누워있을수가 없었다.
어쨌든 일어나야 했다. 일어나야 물을 마시러 갈수도 있고 또 전투가 어떻게 되였는지 알아볼수도 있는것이다.
그는 누운채로 좌우옆을 돌아보았다. 오른쪽으로 반발정도 되는 곳에 화승대부혁이 보였다. 안덕삼은 손을 뻗쳐 가까스로 총끈을 잡아당겼다. 화승대가목을 땅에 박고 그에 의지해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가쁜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그만 너무도 놀라운 정경에 소스라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마른 새초가 나붓기는 들판에 독립군들의 시체가 하얗게 깔려있었다. 온 들판이 그대로 피이고 시체였다.
안덕삼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눈앞이 아뜩했다.
(이게 웬일인가. 그럼 우리가 또 패했단말인가. 그 몇놈 되지도 않는 쪽발이들한테… 300명도 넘는 우리 부대가…)
억이 막혔다. 믿어지지 않았다. 사실은 왜놈이 불과 몇놈 안되기에 신심을 가지고 덮쳐들었댔었다. 놈들이 가지고있는 그 기관총이 몹시도 눈을 끌었었다. 그런데 그 기관총 한정한테 이 숱한 사람이 이렇게 맥없이 쓰러지다니… 그 한정때문에…
마가을바람이 우수수 불어오고 새초들이 몸부림치듯 설레였다. 안덕삼은 총탄에 넝마처럼 찢겨진 옷자락을 기폭처럼 날리며 화승총을 지팽이삼아 짚고 절뚝절뚝 정신없이 걸었다.
어딜가나 피, 피였다. 그래서 하늘도 저렇게 온통 피빛인가싶다.
문득 날창을 땅에 박고 쓰러진 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람이 보였다. 머리에 질끈 동인 무명수건도 피에 젖었고 잔등에도 피가 질벅했다. 3. 1만세 (인민봉기)때 일가친척을 모두 왜놈에게 잃었다는 평북 선천사람이였다.
며칠전 날창을 숫돌에 썩썩 갈며 터치던 울분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글쎄 우리가 왜 졌가시요, 예? 늙은이구 젊은이구 다 떨쳐나서 독립만세를 부르구 북을 치구 홰불을 올리구… 누군들 안 나왔가시요. 차돌이네 꼬부랑할머니랑… 더기 랭증골집 오마닌 세살짜리 손주까지 업구 나왔디요. 우리 마을뿐인줄 알아요. 건넨말, 홍촌말, 밤골… 아니, 온 나라가 다 떨쳐나섰댔다구 합디다레… 긴데 왜 젰시요, 예?》
누구도 그에는 대답을 못했다. 모두가 고개를 돌리고 거친 숨을 내뿜으며 그때를 회상했다.
《일본군대와 일본인은 물러가라!》, 《조선독립만세!》를 목청껏 웨치며 성난 파도와 같이 거리를 밀고나가던 군중들, 북을 치고 징을 울리고 나팔을 불고…
저녁이면 야산들에 올라 홰불을 올리고 양푼을 두드리면서 《조선독립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일제놈들은 물러간것이 아니라 야수적인 탄압으로 그에 대답했다. 두주먹밖에 없는 적수공권의 시위군중을 향해 일제놈들은 총탄을 퍼부었고 기발을 들고나가는 처녀애의 두팔을 잘랐으며 독립만세를 부르는 늙은이의 목을 베였다.
그래도 시위자들은 굴하지 않았다. 왜놈들의 총칼에 앞대렬이 쓰러지면 그 뒤대렬이, 뒤대렬이 쓰러지면 또 그 다음대렬이 앞장서 나아가며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조선독립만세!》를 목청껏 웨쳤다.
정말 그때는 일제가 아무리 악착해도 조선사람들의 그 억척같은 독립의지를 알면 더는 어쩔수가 없어 물러가고야말리라고 믿었었다.
《난 그때 일가친척 서른여덟명을 잃었수다. 왜놈들이 다 죽엤시요. 아, 우리가 망상을 했지. 안돼요, 만세나 불러가지구는… 우리도 그놈들을 죽여야 해요. 내 어떻게든 원쑤를 갚고야말게시요.》
눈에 피발이 서서 부르짖던 그 목소리…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사람은 이렇게 날창을 땅에 박고 쓰러지고만것이다. 눈도 감지 못했다.
안덕삼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푸들푸들 떨리는 손으로 뚝 부릅뜬채 굳어진 그의 두눈을 감겨주자니 분통이 터져와 견딜수가 없었다. 속에서 매운 연기가 자꾸 솟구쳐올라와 안덕삼은 쓰린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고개를 돌렸다.
저옆에 또 눈을 감지 못하고 누워있는 사람이 보였다. 털조끼를 입은 강계포수령감이였다. 국채보상운동때 그처럼 즐기던 담배까지 끊었다는 령감이였다. 총만은 놓을수가 없는듯 가슴에 꼭 안고죽었다.
《령감님, 이제라도 다시 담배를 피우시라요. 령감님이 담배를 끊구 호피를 석장이나 바치구… 곰열까지 내놓았지만… 뭐 국채때문에 우리 나라가 먹히운줄 아시우?》 하면서 누구인가 이죽거리던 소리가 가슴을 허빈다. 마음무던한 이 강계포수령감에게 늘 말을 걸지 못해 안달아하던 개성사람의 목소리이다. 늘 함께 붙어다니더니… 옛 조선봉건왕조군대가 입던 까만 군복을 그대로 입고있어서 어디서나 눈에 띄우던 사람… 그는 한때 왕궁시위대에 있었다고 했다. 그 군대가 일제놈에 의해 강제해산되자 그 길로 의병대에 들어갔다가 여기까지 흘러온 사람이였다.
안덕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닌게아니라 그 사람은 강계포수에게서 몇발자국 안되는 저 옆 자그마한 웅뎅이에 쓰러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