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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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마을이 명절처럼 들끓었다.

앞마을에서 골짜기치기까지 들어가자면 15리가 거진 되는 곳을 홍령감은 오늘만 해도 벌써 두축이나 오르내리였다.

나이는 쉰이 넘었는데도 허리가 꿋꿋하고 기운이 펄펄하였으며 옷차림새도 장년들과 다름없었다. 출입이 다사해지면서부터 그의 한발이나 되던 담배대는 한뽐도 되나마나한 고불통으로 변하였고 양산을 접은것처럼 헐렁하던 바지가랭이는 팽팽한 승마바지로 바뀌였다. 머리에 소중히 얹었던 감투는 벗어던지고 허름한 중절모가 약간 삐뚜름하니 올려놓이였다. 홍령감은 집집에 들려 준비가 어떻게 되느냐고 부리나게 독촉을 하였는데 그가 보건대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되는것이 없고 모두 일이 굼뜨고 미미하였다. 그는 방아간집으로 들어가다가 공청책임자 송정걸을 만났다.

《농민협회에서 환영준비가 대단한 모양인데요.》

구당책임자 송정혁의 사촌동생인 송정걸은 이런 투로 슬쩍 중을 떠보았다.

《임자네들 꿍꿍일 내 다 알어. 청년들이 농민협회를 좀 깔볼사 한다는데 그러문 못써.》

원래 승벽이 이만저만 아닌 홍령감이여서 의례히 그러루한 대답이 나올줄 알았다.

《우린 그저 농민협회 모범을 따를뿐입니다. 농민협회서 소를 잡는다는것이 정말입니까?》

《누가 그래?》

눈을 부라리는 시늉을 하였지만 실은 좋아서 한쪽눈이 먼저 내리감기였다.

다들 그럽디다. 농민협회서 이번 공청이요, 반제동맹이요, 부녀회요 하는걸 다 눌러버리구 환영에서 1등을 할 잡도리라고요.》

《꿍꿍이는 너희들이 허지 우린 그런거 모른다, 흐흐흐.》

송정걸이와 헤여진 홍령감은 그길로 직방 방아간집으로 들어갔다. 젊은 아낙네들이 팔을 거두고 분주히 들락날락한다. 마당에다는 쌀함지들을 내다놓고 한쪽에서는 물에 불구고 다른쪽에서는 뒤마당에 잇대인 연자방아간에서 가루를 내고 채로 치고 키로 까부른다. 방안에서는 나이든 축들이 둘러앉아 바느질을 하였는데 솜을 놓는 패, 재봉틀에 거죽을 박아내는 패, 뒤집어서 마무리를 하는 패들이 떠들썩하였다. 그는 들어가는참 부엌문으로 나오는 검정저고리를 입은 아낙네한테 갈린 목소리로 웨쳐대였다.

《아니, 아직두 이래가지구서야 무슨 일을 칠가, 온. 뒤마을에서는 벌써 덧저고리랑 버선이랑 끝낸지가 오래고 지금은 담배쌈지들을 깁고있는데…》

이런 투로 그는 뒤마을에 가서는 앞마을이 앞섰다고 하고 앞마을에 나와서는 뒤마을을 추어올렸다. 뜨물버치를 들고나오던 강계집아주머니가 주춤하니 물러섰다가 홍령감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뜨물을 철써덕 내치고 돌아서서 말을 받았다.

부회장아주바니, 말씀을 좀 똑똑히 하시라요. 우리가 못하는것이 뭐게다 그럽네까?》

나이 삼십인데 벌써 몸이 나서 고름끈이 따져 달아날만큼 가슴이 부풀고 허리가 굵었다. 걷어올린 불깃불깃한 팔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고 맨발에 짚신을 걸치니 발에는 흙물이 한벌 올랐다. 나이차이가 적지 않은데도 둘이 만나기만 하면 늘 어성을 높여 싱갱이질하기가 일쑤이다. 그렇지만 늘 바쁜통에는 홍령감이 부녀회조직책임을 진 이 강계집아주머니를 먼저 찾아가기마련이였다.

홍령감은 유격대가 오늘 저녁이 아니면 래일 일찌기 들어서게 된다는것을 구당책임자한테서 들었던것만큼 시간으로 보아서는 준비가 그닥 늦은것은 아닌데 지레 볶아대였다.

하지만 아낙네들의 그런 정도로 움츠러들 그가 아니다.

《그래, 늑장을 부리다가 당장이라도 유격대가 들어서면 어쩔셈인고?》

《농민협회에서 감당을 못하겠으면 내놓으라요. 우리 부녀회서처리할테니끼니.》

녀인은 부쩍 부아통을 건드리면서 옆에 아이를 업고 선 자기또래 부녀회원을 보며 눈을 끔뻑해보인다.

잘헌다. 청년들은 청년이래서 농민협회를 밀어놓지. 이제는 부녀회서까지 이 모양으로 우릴 박대할셈인가? 대관절 부녀회는 농민이 아닌가? 엉?》

홍령감은 고불통으로 삿대질을 한다.

《농민은 농민이지만 부녀야 부녀지요.》

녀인도 틀어올린 큼직한 낭자를 바로잡으며 한걸음 다가선다.

《어허 참, 그러게다 누구 덕에 부녀회가 있는지 아느냐 말이야?》

《부녀가 없으면 농민도 없다는걸 모릅네까?》

강계집아주머니는 또 한번 뒤에 대고 눈을 끔뻑해보인다.

잘헌다.》

그때 아이들이 달려들어오며 장보러 갔던 사람들이 온다고 알리였다. 홍령감은 대통을 든채로 한길쪽으로 어기적어기적 오리걸음을 해서 달려나갔다. 아닌게아니라 두채의 발구가 재등을 넘어 쏜살같이 마을로 들어오고있다.

《일이 잘된가보군.》

싱갱이에 붉어졌던 홍령감의 얼굴에 주름이 한벌 덮이고 팔자수염끝이 건덩건덩 흔들렸다.

잠시동안에 발구가 마당에 들어섰다. 두 청년은 머리수건을 벗어들고 둘러선 군중에게 인사를 하는데 허리가 늘씬한 황소는 배를 풀턱거리며 방치같은 뿔을 내젓는다.

《수고했네! 별일 없었겠지?》

《그곳 조직에서 도와주어서 직방 가서 구해싣고 왔습니다.》

땀을 훔치며 키가 큰 청년이 대답하였다.

《난 장밤 걱정을 했네. 비밀리에 허는노릇이 어느때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겠나.》

《유격대를 돕는 일은 하늘도 아는 모양입니다.》

《우리 마을에 대통운이 텄지. 그러게다 옛말에도 있지 않나, 일이 잘될 땐 넘어져도 떡함지에 엎어진다고.》

《이만하면 될것 같습니까?》

다른 한 청년이 가마니아구리를 벌려 매캐한 고무내가 풍기는 새 로동화 한걸레를 내들었다.

《대짜들로 골랐겠지. 두툼하게 감발을 하고 신어야 발이 시리지 않지.》

신을 받아든 홍령감은 해에 비쳐보며 머리를 뒤로 제끼였다.

《전부 큰 문수들입니다.》

《잘했네, 잘했어.》

홍령감은 뿌리가 내놓인 누런 이를 드러내놓고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그때 누군가가 또 고함을 질렀다.

《망원초에서 신호가 왔어요. 유격대가 오는것 같아요.》

《뭐?》

《저 숲속에서 총멘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어디?》

《저기요, 저기! 아차 지금은 뵈지 않는군요. 저기 또 나타났습니다.》

눈섭이 절반이나 흰 홍령감의 자그마한 눈이 쭝깃쭝깃 움직이더니 드디여 저녁해살에 황금빛으로 물들여진 등성이를 배경으로 대여섯명 총을 멘 사람들을 포착하였다.

《옳다, 유격대가 옳다.》

뒤미처 망원초에서 또 기발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왔다.

《야, 구당책임자 송정혁을 불러라, 우리 농민회장두 부르구. 저 배나무집에 있다. 어서 부녀회장도 오라구 하구.》

한마당 모여섰던 사람들이 마을로 쫙 퍼져나갔다. 집집에서 문을 밀어제끼고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바느질감을 든 젊은 녀인들, 손에 떡가루를 묻힌 아주먼네들, 바지괴춤을 붙잡고 달려나온 아이들, 팔을 부리나케 휘젓지만 발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 늙은이들, 팔팔한 젊은이들이 마을앞길로 밀려나갔다. 유격대를 마중하러 갔다가 먼저 돌아온 송정혁이 뒤마을과 넘은켠 마을들에 련락을 보내고 군중들을 지휘해서 환영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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