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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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거 누가 알수 있을가? 오, 저기 영숙동무, 영숙동무! 여기로 좀 오우!》

지나가던 영숙이를 손짓해부르며 진봉남은 꼭 사연을 밝히려들었다.

《가만 좀 있소. 진동무!》

뒤에 앉았던 용택이가 진봉남을 제지시켜 송정혁에게 뒤를 이을것을 재촉하였다.

《나때문에 동무들의 숙영시간에 방해가 되는것은 아닙니까?》

요긴한 대목에서 효과를 노릴줄 알았던 송정혁이 약간 시간을 끌면서 다시 좌중의 관심을 한데로 집중시켰다. 그는 붕어가 물을 삼키듯이 입을 내밀고 담배를 뻐금뻐금 빨면서 침착하게 말을 계속하였다.

《지난 일이니 내가 이렇게 앉아서 말을 하고있지 그 당시에는 넋이 빠진 놈처럼 정말 얼떨떨해졌댔습니다. 아래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앞이 컴컴해졌는데 오직 최후의 경우만을 생각했을뿐입니다. 바지괴춤에 찌른 권총으로 결사전을 벌릴 각오였지요. 〈야! 여기 안도쪽에서 온 사람 있지?〉 눈을 까뒤집고 칼을 돌려잡으면서 다그치는 놈이 그중 상관인듯 합디다. 보위단장 안윤재는 그놈을 〈과장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장군님께서 도끼를 내리치는 소리가 텅 하고 울리였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대담하라〉 하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안도서 사람이 오다니요? 온…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보십시오. 우리 집 식구들뿐입니다.〉 하고 제가 수색을 해볼테면 해보라는 뻐젓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누군가?〉 아까 그놈이 노닥노닥 해진 덧저고리어깨우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습니다. 〈예, 저… 우리 집 머슴입니다.〉 나는 서슴없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놈들은 집을 샅샅이 수색했습니다. 지끈지끈 문을 여닫으면서 부엌, 골방, 허청간 지어는 물독과 굴뚝, 함실아궁을 발칵 뒤졌습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세집을 더 수색하고 그놈들은 허탕을 치고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되여 홀연 하루사이에 장군님께서는 우리 집 〈머슴〉으로 되시였던것입니다. 그날 밤 장군님과 저는 방안에 불을 켜고 앉아 얼마나 통쾌하게 웃었는지 모릅니다. 웃고 또 웃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이전에 교하에 가셨을 때도 정황이 급하게 되여 어떤 집에 피신하여 아이를 업고 부엌에서 불을 때주어 위급한 대목을 면할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보다 처지가 훨씬 나빠져 〈머슴〉이 되였다고 하시였습니다. 〈동무는 날 순식간에 머슴으로 슬쩍 고용해버렸소.〉 하고 또 웃으시였습니다. 〈할빈에 갔을 땐 신사차림을 하고 고급려관에 들어 잠만 자고 몰래 나가서 눅거리지짐을 사먹고 지냈더니만 점점 내리먹는 판이군, 하하하.〉 이렇게 밤이 깊도록 웃고 또 웃었습니다. 실로 눈물이 나게 웃었지요.》

숨을 죽이고 아슬아슬한 대목을 넘기다가 사태가 돌변하여 왜놈들의 몰골이 한심하게 되자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진봉남은 입을 싸쥐고 끙끙 갑자르면서 웃었고 최칠성은 입을 벌리고 몸을 뒤로 제끼며 웃었다.

《에그마나…》

중간에 끼여들었던 영숙이도 왜놈들이 보기 좋게 속아넘어가는 바람에 두주먹을 가슴에 모아대고 흰 이를 드러내놓으며 웃었다.

송정혁동무도 어지간하군요.》

좀체로 웃지 않던 전광식이도 고개를 굽석거리며 입을 싸쥐였다.

《웃지 마십시오. 웃을 일이 아닙니다. 내가 그때 얼마나 땀을 뺐던지 아십니까. 경찰대들이 돌아간 다음에 물에 잠그었다낸것 같은 속옷을 벗어 말렸다는것만 말해둡니다. 그 이튿날 나는 장군님께정적으로 요청했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일을 더 잘할터이니돌아가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주인님이 저를 하루동안 장작을 패우고 내쫓는 법이 어데 있습니까? 한달쯤 일을 시켜봐야 일솜씨도 알것이고 일에 자리를 낼것이 아닙니까? 어서 나무밭이나 알려주시오. 오늘은 나무를 한발구 해와야겠습니다.〉 이러시지 않겠습니까. 하는수없이 저는 나무하러 떠났습니다. 산에 가서 본격적으로 청을 드려보자는것이였지요. 장군님께서는 여전히 전날 그 헌 덧저고리를 걸치신채 마을 한복판으로 발구를 끌고 산으로 오르시였습니다. 이렇게 되여 나는 린색한 〈주인〉이 되고 장군님께서는 부지런하고 착실한 〈머슴〉으로 전적인 인정을 받고야말았습니다. 그런데 그후 저는 〈주인〉노릇을 하면서 정말 더 딱하고 송구한 나날을 보내였습니다.》

수첩에 글을 쓰며 짬짬이 듣고있던 전광식이 수첩을 집어넣고 송정혁이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러자 송정혁은 한숨을 후후 쉬여가며 그 당시의 고통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인차 격해지기 잘하는 성미여서 조리있게 형상을 못하고 걸썽걸썽 뛰여가며 숱한 마을사람들을 이리저리 끌어들여 욕질을 하였다.

주책없는 녀편네들이란 얼마나 한심한가 보시오. 매일 아침마다 나무하러 가는 우리들을 불러세우고 우물길의 얼음을 까내라는겁니다. 나는 이때도 〈주인〉노릇을 해야겠기에 소고삐를 잡고 멀찍이 서있었지만 장군님께서는 낯색을 달리하지 않으면서 수걱수걱 도끼를 들고 얼음을 까시였습니다. 그 아낙네들은 재미를 보고 매일 그 야단입니다. 마치 인심좋은 동리집〈머슴〉으로 아는 모양입니다. 기가 막혀서 죽을 지경이였습니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녀편네들이 둘러서서 깔깔대며 〈요기 좀〉, 〈저기 좀〉 해가며 지시하는대로 묵묵히 도끼로 얼음을 까시였습니다. 얼음을 다 까고 돌아서시는것을 보면 흙탕물에 옷이 홈빡 젖습니다. 손은 더 말이 아니지요. 그런 날이면 저는 그날 종일 〈몹쓸 녀편네〉들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저주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장군님께서는 모닥불곁에 앉아 글을 쓰시다가 나무를 찍고있는 저에게 넌지시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송동무! 얼음을 까라고 하는것은 아낙네들의 요구인것이 아니라 곧 혁명의 요구입니다. 혁명의 요구가 어찌 그런 정도뿐이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혁명은 우리에게 더 무자비하고 준엄한 요구를 제기할 때도 있는것입니다. 가령 혁명이 우리에게 한목숨을 바칠것을 요구할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얼음을 까듯이 서슴없이 그 자리에 나서야 하는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다시 울화를 가라앉히고 나무를 찍으면서 글도 쓰고 통신원들도 만나고 혹은 머슴사는 마을청년들과 저물도록 담화하시는 장군님의 신변을 지키군 하였습니다. 〈머슴살이〉는 그런 정도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눈이 오다 멎은 정월중순 어느날 보위단장 안윤재놈네가 며느리를 맞는 잔치를 하게 되였습니다. 동리아낙네들이 떨쳐나서 방아를 찧는다, 떡을 친다, 지짐을 부친다 야단인데 마을녀편네들이 아이들을 내보내 이 집 아무개를 좀 들여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니까 떡칠 손이 모자라 그러는데 급히 보내란다는것입니다. 때마침 거기에는 마을에서 영향력이 큰 령감 홍씨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지목하고 전취하려던중이여서 거절할수도 없었습니다. 그 사연을 장군님께 말씀드리니 곧 가보자고 하시였습니다. 지금은 홍령감이 농민협회 부회장으로 아주 열성입니다만 그때는 큰 말썽거리인물이였고 위험한 존재였습니다. 그 령감의 주장은 푸르허에는 절대로 공산주의자를 들여놓아서는 안된다는것입니다. 그런 주의자가 있으면 영낙없이 왜놈들이 〈토벌〉 해서 숱한 사람이 죽게 된다는것입니다. 주의자 몇이 잡혀가는것이 낫지 온 마을에 무리죽음을 낼 필요가 뭐냐는거지요. 그런데다 밀정들은 그 령감의 꽁무니에 딱 붙어 낯선 사람이 나타나는것을 탐지하군 하였습니다. 너무 한심해서 한번은 내가 맞대놓고 〈령감은 반동이요.〉 하고 욕을 했더니만 땅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도 조선민족을 위해서 그러는데 자네까지 날 그렇게 보면 새끼로 목을 매 죽고말겠다고 하는걸 겨우 말린적이 있습니다. 잔치집 널다란 마당 한켠에 떡판을 내다놓았는데 그우에 김이 무엿무엿 나는 조찰밥을 쏟아놓고 처음에는 슬쩍슬쩍 이기다가 두셋이 둘러서서 철썩철썩 메로 때립니다. 술이 거나해진 홍령감이 긴 대통을 물고 마루에 걸터앉아 아무개는 얼마짜리다, 누구는 몇냥짜리다 금새를 쳐가며 싱갱이를 붙입니다. 눈이 온 뒤끝에 바람까지 불어서 떡밥은 내다놓기만 하면 인차 식어 아무리 두드렸대야 또글또글한 밥알은 그대로 밀려다닙니다. 그러니 힘은 갑절이나 들게 되였는데 떡이 잘 안되는걸 보니 날을 잘못 받았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아낙네들이 공연한 가슴앓이부터 하고 돌아갔습니다. 〈송별장네 사람한테 좀 치워보지.〉 송별장은 저의 아버지입니다. 홍령감이 지시를 하자 한 청년이 떡메를 장군님께 넘겨주고 땀을 씻으며 물러났습니다. 〈떡치는걸 보면 어느마한 일군인지 알수 있느니라.〉 홍령감의 눈길은 좋지 못했습니다. 그런수로 중을 떠보자는 수작같았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농사일은 막히는것이 없었지만 떡치는 일은 생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사람은 어제 나무하러 갔다가 팔을 삐였다고 하면서 장군님대신 내가 제꺽 나서서 쳤습니다. 나도 역시 떡은 칠줄 몰랐지만 그건 시비거리로 될수 없었고 그저 〈골서방〉이니 그럴거라고 모두 입을 이죽거렸을뿐입니다. 그대신 장군님께서는 아궁이에 불도 때고 마당도 거두고 분주히 돌아가시였습니다. 손님대접이 시작되였습니다. 모두 방안에 들어가 상을 받았습니다. 물론 나도 탁배기사발까지 놓인 륙모소반을 마주하고 웃목에 앉았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구팡돌에 걸터앉아 해진 짚신을 손질하고계셨는데 누구 하나 불러들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윽해서 갱충머리 없는것으로 소문난 강계집아주머니가 밥바리에 떡을 무드기 담아들고 나오더니 아무데서나 많이 자시면 된다고 하면서 맨손에 넘겨주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때 장군님께서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셨는데 저는 그때 인간이하의 차별, 굴욕, 여하튼 제가 그때까지 계급적차별이라는것을 알고있는 그 모든것이 하나로 뭉쳐져서 정수리를 내리치는것 같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분노했었는지 짐작이 가시겠지요? 전광식동지, 어떻습니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두팔이 걷잡을수 없이 떨리고 온몸이 확 달아났습니다. 〈에익, 사람을 천대해도 분수가 있지!〉 하고 주먹을 부르쥐긴 했으나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하하하하, 하하하.》

《으흐흐, 으흐흐.》

좌중에서 또 폭소가 터졌다.

눈물이 찔끔나게 한바탕 웃고난 진봉남이 가슴을 두드려 숨을 돌리고나서 그 강계집아주머니가 지금 있는가 물었다. 송정혁은 웃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중해져서 담배꽁초를 발로 뭉개버리더니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한 달무리진 하늘을 쳐다보았다. 밤이 깊었고 눈이 오게 되자 그는 서둘러서 몇마디 더 보태였다.

《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첫날과 마찬가지로 나무도 해오셨고 우물길의 얼음도 깠으며 마을에 생기는 궂은일, 마른일을 손수 다 치우면서 사업을 하시였습니다. 우리 마을에 상범이 어머니라고 한 십년이상 속탈을 앓아 꼬챙이처럼 마른 녀인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조직원이 됐지만 그때만 해도 상범이는 보위단에 들어 갈길을 모르고 헤매던 동무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상범이 어머니병을 고쳐주겠다고 매일 나무짐을 지고 내려오다가는 눈덮인 밭에서 수수뿌리를 캐오군 하시였습니다. 온 동네사람들이 감동되고 앓는 환자는 탕약을 받아들고 눈물을 흘리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농민협회 부회장 홍령감이 열병을 앓을 때도 장군님께서는 일신을 돌보실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매일 찾아다니며 약을 권하고 간호를 하시였습니다. 이제 그 령감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재미있을겁니다. 우리 푸르허가 오늘처럼 혁명화된것은 사실상 장군님의 남다른 공작방법이라기보다 그분께서 끊임없이 기울여주시는 사람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지요. 그이의 덕성에 모두 감화된것입니다. 이렇게 되여 전체 혁명조직이 이 이름없던 푸르허를 향해 집중되였었습니다. 돌파구는 열리였고 드디여 진격은 시작되였습니다. 장군님께서 떠나실 때에는 대낮에 마을에서 혁명가요가 울렸습니다. 그후 이곳의 모범이 온 두만강지구에 퍼져 드디여 4월 25일을 가져왔던것입니다. 이제 가보면 알겠지만 동무들이 가서 며칠 묵게 될 우리 마을은 이런데올시다.》

송정혁은 이야기를 끝내고 흰 무명덧저고리를 벗었는데 그속에 또 덧저고리를 입었다.

《바로 이것입니다. 장군님께서 이렇게 볼꼴없이 해진 옷을 입고 일을 하셨습니다.》

대원들이 모두 일어나 날이 바오래기같은 토스레덧저고리를 만져보았다. 그들은 그 어떤 신기한 물건이라도 보는것처럼 등이며 앞섶이며 소매를 일일이 살펴보는것이였다.

전광식은 깊은 감회에 잠겨 송정혁이 왜 그것을 그냥 입고 다니는지 알수 있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눈이 내렸다. 송이가 큰 함박눈이 진회색빛하늘에서 가볍게 내려와서는 아무데나 내려앉았다. 나무가지에도 내리고 전광식이와 나란히 숲속을 걷고있는 송정혁의 어깨우에도 내리고 최칠성이가 금방 《머슴! 머슴!》 하고 긍지높이 입속으로 외우며 잠자리를 찾아들어간 초막우에도 내리고 그렇게 장밤 웃었는데도 전에 받은 그 슬픔때문에 기분이 채 개이지 않아 그런지 우등불곁에서 아직 무엇을 하고있는 영숙이의 팔소매우에도 눈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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