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5 회)

12

(4)

 

넋없이 숲속으로 달려나간 영숙이는 축축히 젖은 이깔나무밑둥을 안고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울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이 아픔을 어데다 대고 하소연해야 할지 몰랐다.

《어머니! 어머니가 가셨다는것이 웬말입니까. 어머니! 영숙이를 두고 어데로 혼자 가십니까. 어머니!》

영숙이는 터슬터슬한 이깔나무밑둥에 이마를 비비면서 연방 부르짖었다. 그러나 입을 꽉 다물어버린 숲속의 정적은 그의 가슴을 더 아프게 훑어내릴뿐이였다.

나무가지들에서 이따금씩 굵다란 물방울이 맺혔다 땅우에 무겁게 소리를 내며 떨어지군 하였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서서 울고있던 영숙은 기진맥진해서 기둥을 안은채 주르르 미끄러져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그의 눈앞에는 생시의 어머님이 뚜렷이 나타나보이였는데 그중에서도 지난 설날의 일이 현실처럼 생동하게 살아났다.

…깡똥하게 무릎까지 말려올라간 몽당치마에 짚신을 신은 영숙이가 동이를 끼고 타박타박 샘물터로 걸어나갔다. 려명이 깃들기 시작은 했지만 아직 먼데사람을 가려볼수 없게 어둠이 진하게 깔려있었고 초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아직 멎지 않아 뽀얗게 하늘땅이 흐려있었다. 음산한 설날아침이였다.

추워서 몸을 옹송그린 영숙이는 길이 미끄러워 조심조심 돌등을 옮겨디디면서 샘물터가 있는 웅뎅이로 걸어내려갔다. 동이를 내려놓고 돌을 주어다가 손두께같이 언 얼음을 갔다. 날이 선 얼음덩이를 손으로 건져내친 다음 바가지로 퍼담았다. 손끝이 끊어져나가는것 같아 입김으로 녹이고 또 물을 푸군 하였다. 몇번 거듭하는 동안 고추꼬투리처럼 빨갛게 언 손가락은 바가지를 들어올리기조차 힘들게 되였다. 그러나 입술을 사려물고 동이를 채웠다. 동그랗게 바가지 하나가 들어갈만 한 얼음구멍으로 눈이 연방 떨어져 들어갔다. 신통히도 살구꽃처럼 생긴 눈송이가 뱅글뱅글 돌아 물속에 내려앉아서는 가뭇없이 사라지군 하였다. 두주먹을 입에 대고 그것을 말끄러미 들여다보고있던 영숙이는 갑자기 몸을 소스라쳐 일으키며 파르르 떨리는 입술새로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였다.

샘물구멍으로 떨어지는 그 한송이한송이의 눈꽃은 모두 영숙이의 지난해 하루하루처럼 속절없이 깜박깜박 사라지는것이였다. 그 어느때도 뒤를 돌아다본 일 없이 오직 앞을 향해 허덕이며 살아온 그가 오늘 어떤 령감에 의해 홀연 자기라는 존재를 의식하였던것이다. 또 이해에도 그렇게 하루하루 아무런 보람없이 지내게 되리라는 처량한 생각이 들자 그는 가슴이 텅 빈것 같은 공허를 느끼면서 눈굽이 뜨거워졌던것이다. 두손을 가슴에 얹고 불안하기도 하고 춥기도 해서 오돌오돌 떨고있던 영숙이는 다시 바가지를 집어들고 물을 떠내였다. 그때 등뒤에서 발자취소리가 나다 뚝 멎더니 아늑한 음성이 언덕밑으로 흘러내려왔다.

영숙이 아니냐?》

《네?》

영숙은 급히 무릎을 펴는것과 함께 쌍가풀진 눈을 올롱하니 치켜뜨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때는 벌써 등뒤에서 부드러운 입김이 볼을 스치며 날아넘어왔다.

《벌써 물길러 나왔느냐?》

《어머니.》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며 고개를 숙여보이는데 강반석어머님께서 벌써 다가와 영숙이의 손을 움켜잡으시였다.

《설날아침 이런 신새벽에 물길러 나왔구나.》

《…》

《손이 얼음장같구나.》

어머님께서는 영숙이의 두주먹을 입에다 대고 녹여주시고나서 동이를 받아이고 언덕을 올라가시였다. 이때 영숙이는 사양할 사이도 없이 뒤를 따라가면서 어머님의 어깨우에 눈이 한벌 내려앉은것을 볼수 있었다. 밤을 새워 길을 걸으신것이 분명하였다.

《밥은 안쳤겠지?》

《네!》

《초하루날 묵은 물을 먹으면 병든다면서 남들보다 먼저 길어다 하라는거죠.》

《알만 하다.》

어머님께서는 바가지가 흥덩흥덩 울리면서 물이 넘어나는것을 손으로 훔쳐 뿌려던지며 민지주네 대문밖까지 이르러 동이를 넘겨주고 주인을 좀 내보내라고 영숙에게 일러보내시였다.

얼마뒤에 민가가 공연한 헛기침을 하면서 마당으로 나왔다.

《이거 마당이 왜 이 꼴이냐. 눈치가 없구 게을러빠지구. 온, 계집애두. 눈이 오면 마당을 쓸어야 한다는것쯤이야 몰라, 쯧쯧.》

강반석어머님께서는 민가가 대문밖까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영숙이를 오늘은 하루 쉬게 하고 집에 좀 보내달라고 하였다.

집이란요. 여기가 있는 집이지요.》

《우리 집에 좀 보내달라는겁니다.》

《심부름이라도 시킬것이 있습니까?》

《어데 좀 같이 갔다 올데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여 영숙이는 이날 어머님을 찾아가 세면을 하고 머리를 땋고 명절을 쇠게 되였다. 빗으로 머리를 빗어주신 어머님께서는 농짝에서 천을 꺼내 치렁치렁한 머리태끝에 빨간댕기를 달아주시였다. 영숙이는 철이 들어 이날 처음으로 제또래 처녀들과 함께 널뛰기를 하며 즐겁게 놀았다.

다음날이였다.

《그럼 오늘은 나와 같이 실컷 길이나 걸어보자.》

어머님께서는 영숙이를 데리고 길을 떠나시였다. 눈이 펑펑 쏟아져 무릎까지 올라오고 하늘땅에는 뽀얗게 눈가루가 날리였다.

《그래 마음이 어떠냐?》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난 기뻐요.》

기쁘다구? 그래, 기쁠테지. 고생스럽지만 제가 갈길을 가면 그런 법이란다. 이제부터는 나와 함께 이렇게 자꾸 길을 걷자.》

《어머니, 추우시겠어요.》

볼이 빨갛게 된 영숙은 목도리를 얹으신 어머님의 어깨우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주며 걱정을 하였다.

《아니다. 나도 이렇게 길을 걸으면 춥지도 않고 다리도 아프지 않단다.》

갸름한 영숙이의 얼굴은 발깃발깃하게 상기되였고 앵두알같은 입술에는 알릴듯말듯 한 웃음이 노상 사라지지 않았다. 굵다란 짚오리로 대강 틀어만든 짚신은 터벅터벅 숫눈길을 밟으며 앞을 정복해나갔다. 해가 거의 질무렵까지 70리를 걷는 동안에 영숙은 어머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날 이때까지 알지 못했던 하나의 세계를 가슴에 간직하게 되였다. 처음에는 철옹성같이 꽉 막히였던것이 자그마한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불안스럽게나마 갸웃이 밖을 내다볼수 있었다. 어머님의 한마디한마디의 말씀은 피멍이 들고 꽛꽛하게 얼었던 그의 가슴을 녹여주었고 드디여 준엄한 계급투쟁에 대한 자그마한 뙤창문 하나를 열어주었다. 아직은 온 세상이 다 내다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통해서도 날씨를 가릴수 있었고 맑은 바깥공기를 마실수 있었으며 강하게 흘러드는 한가닥 빛을 통해 어둡고 그늘진 자기 생활을 비쳐볼수 있었다.

이날 밤이 깊도록 어머님께서는 부녀회원들을 모아놓고 말씀을 하시였다. 아궁앞에 쪼크리고앉은 영숙이는 부지깽이로 나무가지를 밀어넣고 부엌바닥에 던져진 얼룩진 그림자를 내려다보면서 방안에서 두런두런 울리는 어머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었다.

《총칼을 휘둘러 우리 나라를 빼앗은 왜놈들을 우리 강토에서 내몰지 않고서는 우리는 하루도 발편잠을 잘수 없고 마음대로 숨을 쉴수도 없습니다. 우리 조선인민은 총을 들고 왜놈들과 싸움을 벌릴 결심을 했습니다. 지난 초겨울 명월구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회의를 열고 반일인민유격대를 내올것을 결정지었습니다. 압박과 착취에 시달린 우리 녀성들도 남자들과 같이 총을 들고 싸울 때가 왔습니다. …》

영숙이는 입술을 사려물면서 봇나무장작가치를 아궁에 밀어넣었다. 진이 끓고 불찌가 탁탁 튕기면서 커다란 솥에서 김이 피여올랐다. 부엌바닥에는 붉고 누런 빛이 얼른얼른 엇바뀌는데 영숙이는 볼을 싸쥐고앉아 먼 과거로 거슬러올라가기도 하고 또 자기 처지를 놓고 이모저모로 뜯어보기도 하였다. 생각할수록 가슴을 긁어내리는 어지러운 추억들이 구름처럼 피여올랐다. 왜놈한테 매를 맞고 돌아가셨다는 아버지, 뒤따라 유복자를 낳고 차디찬 방에서 굶어죽었다는 어머니, 여덟살때부터 아이보개로 이날까지…

《아!》

그것이 운명이 아니라 어떤 공정치 못한 인간들의 처사에 의해 빚어진것이라고 할 때 그는 너무나 놀라 몸서리를 치게 되였다. 이에 대해서 어머님께서는 야학방에서, 우물길에서 한두번만 말씀하시지 않았다. 급격히 차오르는 물이 뚝을 터뜨리듯이 이날 영숙이는 아궁앞에서 불을 뒤지며 가슴속에서 무엇이 쏟아져나가는것을 분명히 의식하였다.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