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9 회)

11

(6)


등잔불밑에 앉아 경과를 다 듣고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밤을 앉아새우시고 이튿날아침 두 동생과 함께 뒤산으로 오르시였다.

김철주동지는 남만원정을 떠나기전에 만났었는데 얼마 헤여져있지 않은 그동안에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키가 쑥 늘어난것처럼 자랐고 몸도 충실해졌다. 민활한 동작이라든가 예리한 눈빛은 전대로였으나 그런중에도 얼마간 은근한 기운이 풍기였다. 그것이 어찌보면 구슬픈 빛을 띤것 같기도 했다. 더욱 그이를 놀라게 한것은 지하공작에 단련되여 몸을 솜씨있게 변장한것이였다. 머리를 길게 길러넘기고 잠바를 입은품이 대단히 성숙해보이면서도 직업이나 지위 같은것을 좀체로 대중할수 없게 하였다. 지난번에 만나시였을 때 그런것을 느끼시지 못한것이 이상스러우시였다.

그러나 오래간만에 만난 동생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실 경황도 없었다. 산을 다 오를 때까지 세형제는 말 한마디 없었다.

서리가 하얗게 내린 금잔디언덕, 외톨로 나서자란 느릅나무 한그루, 그옆에 아직은 풀 한대 살아나지 못한 무덤 하나가 생기였다. 지난봄에 나무짐을 지고 내려오다 잠간 멎어서시였던 바로 그곳이였다. 어린 느릅나무는 벌써 잎을 다 흩어버리고 앙상하게 벌거벗어 바람이 불적마다 가지들이 바르르 떤다. 가지에서 떨어진 은백색서리꽃이 허공에서 한참 맴돌다가 무덤가잔디우에 가볍게 내려앉는다.

그이께서는 조용히 모자를 벗고 잔디우에 무릎을 꿇고앉아 고개를 숙이시였다. 가슴을 찢어발기는것 같고 졸지에 온 육신이 흩어져 허공으로 날리는것 같은 공허감에 휩싸이였다. 무릎우에 놓으셨던 팔이 땅우로 미끄러져내렸다.

어머님께서는 진정 가셨단말인가?

이 한산한 언덕, 들바람이 오가는 여기에 밤이나 낮이나 누워계신단 말인가?

그렇게도 고생을 하시면서 기어이 나라의 독립을 보아야겠다고 하시더니 그날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가셨단말인가?

《어머니.》

그이께서는 한마디 불러보시고는 그만 설음이 북받쳐 깊숙이 고개를 숙이시였다.

왼쪽에 차례로 엎드린 두 동생도 잔디판을 쥐여뜯으며 섧게 울고있다. 희망도 행복도, 지어는 짤막한 한때의 휴식마저도 앞날로 미루고 험난하고 고난에 찬 한생을 걸어온 어머님이시였다. 한 고비를 넘어서면 또 한 고비, 그 고비를 넘어서면 또 다른 고통과 시련의 고비가 기다렸다는듯이 앞을 막아선 일생이였다. 항상 가난의 무거운 짐을 이고지고 억척같이 일어서서 한걸음한걸음 앞을 헤치며 걸어오시였다. 생활은 마치 말이 적고 끝없이 순결하고 인자한 어머님의 강의성을 시험이나 하려는듯이 괴롭히고 시달려놓고 속을 태웠다. 하나 어머님께서는 잠시도 걸음을 멈추지 않으셨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으며 기가 꺾이거나 주저하시는 일이 없었다. 오직 하나 세 아들을 데리고 묵묵히 앞을 내다보시며 한시도 쉬지 않고 가고 또 가며 험준한 산마루를 향해 오르고 또 오르시였다.

고개를 숙인채 끝없는 슬픔에 잠기신 김일성동지의 안광에는 지난날의 가지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지나갔다.

원쑤들앞에서 분노를 터뜨리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그이께서 기억하신 첫번째 인상이였다. 여섯살 나던 해 가을 어느날 한낮이였다. 불시에 달려들어 일제경찰이 아버님을 체포하였을 때 어머님께서는 무섭게 노하여 원쑤들을 향해 호령하시였다. 적개심이 온몸에서 뿜기였으며 언제나 따뜻이 웃던 그 부드러운 눈에는 추상같은 분노가 어려있었다.

그런가 하면 무기운반을 위하여 위험한 길을 가셨다가 돌아오시였을적에 만탄창을 한 총을 들고 놀라와하시는 그이께 소고기가 든 함지를 내려놓고 태연히 웃으며 하시던 어머님의 음성도 들려왔다.

《피값이라도 해야지. 기껏해야 두놈이나 세놈이 접어들겠는데 제끼자고 그렇게 했다.…》

숨이 차서 들먹이고계시는 그이께서는 생생한 현실로 육박해오는 어머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시는듯하였다. 맑은 음성도 생시 그대로였다.

너무나 가슴이 미여져 눈을 감으니 눈보라치는 령길로 치마폭을 날리며 걸어가는 어머님의 모습이 눈앞을 막아섰다. 어머님께서는 《새날》신문을 가슴에 품고 숲속으로, 산간마을로, 들길로 걸어가신다. 부녀회조직들을 지도하기 위해 밤길을 걸으신다.

조용조용히 그러나 그칠줄 모르고 걸어가시는 어머님의 발길은 끝없이 뻗어있었다. 동지 한사람을 만나기 위해 수백리길을 걷기를 서슴지 않으셨고 아버님의 통신을 가지고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걸은 길은 또 얼마인가? 강직하고 맑고 깨끗한 어머님의 그 량심과 심장이 원쑤들에 의해 받은 타격은 또 몇번이였던가. 상처투성이가 되여 석방된 아버님의 몸을 씻어줄 때 손이 떨리더라는 말씀을 여러번 하시였다.

아버님앞에 앉아 간곡하고 처절한 유언을 들으실 때 그 가슴은 얼마나 쓰리고 아팠으며 굳어지는듯 하시였겠는가. 그러면서도 한번도 눈물을 보이시거나 약한 말씀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였다.

한 어머님의 가슴이 그토록 많은 고통과 생활의 시달림과 힘에 넘치는 부담을 이겨낼수 있다는것은 참으로 기적이 아닐수 없다.

생활은 바위벽을 때리는 파도마냥 거듭거듭 고난과 역경과 헤여날수 없는 심연과 미궁을 몰아왔으나 어머님께서는 그것을 한번도 회피하거나 물러섬이 없이 꿋꿋이 그대로 맞받아 이겨나가시였던것이다.

실로 어머님의 한생은 험난한 가시덤불길이였지만 언제나 웃으시며 조용조용히 그리고 확신에 찬 모습그대로 온 우주의 불행과 광란을 안아내치시였다. 어머님의 한생은 한집안을 먹여살리고 한세대를 길러내는 부뚜막과 반짇고리로부터 조국을 광복하고 착취없고 압박없는 사회주의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투쟁과 리상에 가닿아있었으며 전세계 녀성의 해방과 인류의 찬란한 미래와 행복을 위한 숭고한 투쟁에 온 생애가 잇닿아있었던것이다.

어머님께서는 아직도 더 많은 일을 하실수 있는 젊은 나이에 모든것을 고스란히 앞날에 남겨두고 가시였다. 그이께서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채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하시였다.

과거와 미래의 그 모든것들이 파도처럼 한데 뒤엉켜 밀려오고있었다.

문득 어머님의 모습이 크게 확대되여보이시였다.

지난봄 잔디언덕에 서서 우리 유격대를 보시며 그토록 기뻐하던 어머님, 한평생에 겪은 쓰리고 아픈 그 많은 고통을 단 한번의 기쁨의 눈물과 웃음으로 다 날려보내려는것처럼 그렇게 만족하게 웃고우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고개를 드시였다. 어머님의 모습은 간데없고 아늑하게 비껴간 언덕만 내다보이시였다.

풀잎에 한벌 내돋았던 서리꽃이 진주알같은 물방울로 변하였다. 그것들은 해빛을 받아 령롱한 무지개방울을 이루었다.

느릅나무우듬지에 목이 알룩알룩한 이름모를 새 한마리가 아래를 내려다보고있다.

바람이 산기슭을 스치고 지나가자 나무잎이 소리없이 떨어져 잔디우에 내려앉는다. 이윽해서 그이께서는 천천히 일어나시였다.

《철주야, 일어들 나거라.》

그이께서는 차례로 두 동생을 들어일구시였다.

《그만둘 울어라, 이렇게 울고만 있으면 어머님께서 노하실수 있다. 기운을 내자, 그래서 어머님께서 그렇게도 바라시던 독립을 찾자.》

김철주동지께서는 고개를 들고일어나 눈물을 닦는데 막내는 땅에 엎드려 일어나지 않는다. 김철주동지께서 동생을 들어일구려 하자 그는 몸부림을 치며 《어머니!》하고 목메이게 고함을 질렀다. 그 고함소리가 어떻게나 가슴을 치는지 그이께서는 고개를 돌리며 가슴을 움켜잡으시였다. 잠시후에 그이께서는 다시 동생의 손을 잡으시였다.

《그러지 말고 일어나거라. 네가 울면 어머님께서도 우신다. 자, 어서.》

이윽해서 동생은 팔소매로 눈을 닦으며 일어섰다.

《자! 이쪽으로 바로들 서거라. 그래서 어머님께 말씀을 드리자.》

세형제가 나란히 서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고개를 약간 숙이신채 나직이 말씀하시였다.

《어머님! 저는 다시 길을 떠나겠습니다. 나라를 찾고서야 어머님을 다시 뵙겠습니다. 그렇게도 바라시던 조국을 찾고 만경대로 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가겠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우리들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기다리시는 할아버님, 할머님께서 계시는 그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어머님! 안녕히 계십시오.》

말씀을 끝내시고도 한참동안이나 자리를 뜨지 못하시다가 끝내 그이께서 먼저 걸음을 떼시였다.

《철주야, 가자.》

김철주동지께서는 손으로 무덤앞 땅을 파고있었다.

《무얼 그러고있느냐?》

《좀 기다려요.》

《그게 뭐냐?》

《형이 가져온 약이예요.》

아닌게아니라 차광수가 주던 그 약꾸레미가 무릎앞에 놓여있었다. 흙을 다 파고난 동생은 약봉지를 정성스레 들여놓고 흙을 덮었다. 흙을 움킨 동생의 손등에 눈물방울이 또 떨어졌다.

그것을 보신 김일성동지께서도 눈물이 콱 쏟아지고 앞이 캄캄해지시였다.

그이께서는 얼른 외면하신채 동생의 손을 더듬어잡으시였다.

산을 내릴 때도 세형제는 한마디 말도 없는데 산소옆에 선 어린 느릅나무우듬지만이 가을바람에 설레이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하루밤을 더 지내시고 다시 길떠날 준비를 하시였다. 막내는 잠시도 형곁을 떠나지 않는다.

《난 어찌나, 형?》

이러한 물음을 담은 깜박이는 어린 눈동자가 쉼없이 그이의 뒤를 따르고있었다.

하는수 없었다. 어린것을 두고라도 그냥 떠나셔야 하였다. 떠나는 그이의 마음도 아프셨지만 어린것의 마음을 생각하니 더 견딜수 없이 가슴이 저리였다.

그이께서는 김정룡이네 집에 다시한번 들리시였다. 김정룡은 경찰의 눈을 피해 은신한지 오래고 그 가족들만이 있었다. 동생들을 좀 돌봐달라고 부탁을 하자 어지고 선량한 그 집 아주머니는 걱정말고 어서 가셔서 혁명을 하라고, 그래서 빨리 나라를 독립시켜놓고 옛말하며 살자고 하였다.

그이께서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여 량강구쪽으로 뻗은 길가에 나서시였다.

동리사람들과 봉애아주머니가 길가에서 배웅하였다.

두 동생이 멀리까지 따라나왔다.

이전같으면 그 한가운데 흰옷을 입으신 어머님께서 서계실것이였지만 지금은 그때 그 모습을 전혀 볼길이 없게 되였다.

이때 그이께서는 지난봄에 문밖에 나서서 손을 들어보이시던 어머님의 모습을 언뜻 보실수 있었다.

그 순간 그이께서는 느릅나무 한그루 서있는 언덕을 향해 발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보이시였다.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