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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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때가 되였다. 석양이 추녀밑 높은데까지 쨋쨋한 빛을 던지였다. 마당 한편에 가로맨 빨래줄그림자가 강낭밭 둔덕에까지 길게 뻗어나갔다.

봉애아주머니는 사과를 채쳐서 물을 내 대접하려고 하였다.

《사과가 아주 향기롭군요. 물을 짰어요.》

문턱을 넘서는데 어머님께서 고개를 돌리시였다.

《고마와요. 여기 놔두구 나가보시우. 나 좀 혼자 누워야겠어요.》

봉애아주머니는 그릇을 놓고 얼른 돌아나왔다.

강반석어머님께서는 천장을 응시하신채 회상에 잠겨계시였다.

생애에서 보람있고 의의있던 가지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눈보라치는 령길이 아득히 바라보이였다. 누구도 가지 않은 숫눈길이였다.

여러해전 그날… 어머님께서는 목도리를 다시 감아주면서 말씀하시였었다.

《천리가 넘는다는데 꽤 혼자서 가낼만하냐? 하긴 네가 갈만하다기에 떠나는것이지만 혹시 길을 헛갈리지 않겠는지?》

벌써 름름한 소년으로 자라신 아드님께서는 볼우물을 지으면서 웃으시였다.

《걱정마세요, 어머니! 자꾸 가면 끝이 나겠지요.》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아버님께 절을 하신다.

절을 받고 대견하게 어깨를 짚어주시는 아버님도 웃고계시였다.

《가면 전보를 꼭 쳐라.》

잠시동안에 눈보라가 자국을 메워버린다. 눈보라가 얼른얼른하는데 이제는 다 자란 아들의 모습이 또 나타났다.

아마 여태 보던중 제일 기뻐서 어쩔줄 모르던 그 모습이다.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조직했습니다. 어머니, 기뻐해주십시오. 아버지의 뜻을 이룩하자면 이런 조직이 있어야 합니다. 조국을 광복하고 장차 조선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이룩하자면 우선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하거던요. 이건 우리의 선언입니다.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우겠다는 다짐입니다.》

온 세상을 안아볼듯이 팔을 벌리고 빙그르르 돌면서 하늘을 쳐다보며 웃던 그 모습이 시야에 꽉 들어찼다.

송강회의가 있은뒤 얼마 안있어 로동복차림을 하고 찾아왔던 그때의 아드님의 모습도 떠오르시였다.

밤길을 걸어서 옷이 후줄근히 젖었다.

토방에 올라서서 옷을 벗어 쥐여짜는데 봉당우에 물이 주르르 떨어졌다. 가끔 이렇게 나타나 옷을 말려입고는 또 밤에 길을 떠나군 하였다.

어느땐가 동구밖까지 바래주신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궂은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이였다.

《어머니! 이제 멀지 않아 우리는 총을 들겠습니다. 그만치 준비했으면 싸워볼 때가 됐습니다.》

아드님의 우렁우렁한 음성이였다.

어머님께서는 차차 멀어져가는 아드님의 뒤모습을 익혀보면서 손을 저어 바래주시였다. …

홀연 명상에서 깨여나신 어머님께서는 아쉬운듯이 방안을 둘러보시였다. 그러다가 근심에 잠겨 머리맡에 앉아있는 막내를 보시자 어머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아당겨 가슴에 올려놓으며 나직이 말씀하시였다.

《너 이제 커서 무엇을 하지?》

어머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수 없었던 어린 아들은 이마에 내리덮인 어머님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고나서 대답하였다.

《난 커서 형과 함께 유격대 하다가 고향 가 농사짓겠어요.》

《유격대를 하고 농사를 짓겠단말이지?》

《형이 그러는데 만경대엔 좋은 땅이 많다구 했어요. 왜놈들만 없으면 그 땅이 다 조선사람들이 맘대로 농사지어 잘살게 된다는데요. 그런데 난 만경대를 한번도 못가봤어요. 형이 말하는데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샘물도 거기 있다는거야요.》

《그래, 만경대는 살기 좋은곳이란다. 너는 꼭 가보게 될거다.》

《내가 이제 어머님을 모시고 꼭 같이 가겠어요.》

《나를 데리구?…》

가슴에서 뜨거운것이 울컥 올리밀어 더 말씀을 잇지 못하신다.

눈물이 글썽해진 어머님을 본 어린 아들도 길다란 살눈섭을 내리깔면서 코밑을 손등으로 문지른다.

《그래, 네 말대루 우리모두 같이 가자!》

림종에 이르렀다는것을 이미 알고계신 어머님께서는 어린 아들의 기대를 조금이라도 흐려놓을가 념려되여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애를 쓰시였다. 하지만 그 음성에서는 벌써 이전에 느낄수 없었던 어머님의 강한 소망과 또 일시에 뿜기는 절절한 사랑이 깃들어있었다.

《그래, 같이 가자. 그러자면 너는 꼭 맏형의 뒤를 따라야 한다. 알겠느냐?》

《네!》

잠간 숨을 돌리시고나서 어머님께서는 다시 뒤말을 이어대시였다.

《뒤마을에 좀 가보지, 철주형이 왔을는지도 모를터인데.…》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막내는 어머님의 손목을 한번 쥐여보고나서 가슴에 그 통통한 볼을 갖다대였다.

눈을 내리감으신 어머님께서는 이때 가슴우에 흘러떨어지는 막내의 뜨거운것을 감각하면서 젖먹이때처럼 팔을 드시여 포근히 안아주시였다.

《엄마!》

막내는 가슴에다 볼을 비비면서 어머님의 목을 그러안고 우들우들 몸을 떨었다.

《엄마!》

《얘야!》

서로 한껏 웨치건만 목이 꽉 잠겨들어 말이 나가지 않는다.

떨어졌다가는 또 안기고 놓쳐버렸다가는 다시 부둥켜안으시는 어머님과 아들, 부르면 부를수록 더욱더 그리운 정이 솟아오르는 그 이름.

막내는 어머님의 품에 안겨 잠든듯이 눈을 감고 빨간 입술을 비죽거리고있다. 금시 울음을 터뜨릴것 같은데 용케 참고 견딘다. 어머님께서는 가슴에 대인 볼과 가쁘게 들먹이는 숨결을 거쳐 막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있는지 아실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몰라야 한다.

서로 말이 없었다. 침묵속에서 더 많은 말씀을 하고계신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것을 아신 어머님께서는 그저 조용히 이렇게 누우셔서 어린 아들의 가슴을 놀래우지 않고 몇분이라도 더 지내고싶으시였다.

이윽해서 방안에서 나온 막내는 뒤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마당에서 노는척 하면서 방안동정을 살피고있었다.

봉애아주머니는 다시 부엌에 나가 약사발을 들고 들어와 약 잡수실 때가 되였다고 하였다. 어머님께서는 물끄러미 올려다보시다가 봉애아주머니의 팔을 잡으시였다.

사람의 마지막순간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알지 못했던 순진한 녀인은 귀하신 한몸이 바야흐로 림종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고있다는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어머님께서 잡으시는대로 손을 내맡기고있었다.

어머님께서는 평온한 기분으로 나직이 말씀하시였다.

《내 말을 좀 들으시우. 아무래도 나는 더 견디여낼것 같지 못해요. 어떻게 하나 일을 더 해서 우리 나라가 독립되는것을 보려구 했지만 그럴것 같지 못해요. 내가 죽은 후에 우리 아들이 오거든 내가 대하듯 해주시우. 일제가 조선땅에 남아있고 조선이 독립 못된채 오거든 내 무덤을 파가지도 못하게 해주시우. 그렇지만… 내 아들은 싸우다 도중에서 돌아서지는 않을거요.… 조선이 독립되는 그날에… 우리 평양 만경대에가보시우, 참 좋은곳이라우.…》

어머님께서는 잠간 말씀을 중단하고 숨을 돌리시였다.

이때 김철주동지께서 사색이 된 모습으로 방안에 들어서시였다.

《어머니.》

《오, 인제야 왔느냐?》

어머님께서는 침상곁에 꿇어앉아 울먹이는 김철주동지를 자애에 넘치신 시선으로 한동안 바라보시였다.

《철주야, 네 형을 잘 돕거라. 그리고 너희들도 꼭 형님같은 혁명가가 되여야 한다. 이것은 떠나가신 아버님의 뜻이기도 하지만 이 어머니의 소원이기도 하다. 조선이 독립되면 너희들을 앞세우고 만경대로 가자고 하였는데 난 안될것 같구나.》

어머님께서는 무슨 말씀인지 더 하시려다가 철주동지의 손을 꼭 잡으시고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시였다. 그러시고는 스르르 눈을 내리감으시였다.

어느덧 해가 졌다.

1932년 7월 31일.

달도 없는 여름날 캄캄한 밤은 깊어갔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은 삽시간에 온 두만강지구에 퍼져나갔다. 부녀회 구조직들에서 마을로 옮겨지고 반제동맹과 공청들, 아동단조직들에 전해내려갔다.

세상의 모든것을 하나도 보여주지 않으려는듯이 하늘과 땅, 그 공간을 채운 칠흑같은 어둠은 사람들의 감각을 죄다 뺏어버린것 같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못했다.

길가던 사람은 선채로,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앉은채로 고개를 숙이고 흐느껴 울기만 하였다. 너무나 아프고 너무나 슬픈 이 사실을 어찌 말로 표현할수 있을것인가.

모두 울기만 하였다.

부녀회사업때문에 련락을 떠났던 보금이도 되돌아와 토방에 앉아 울었고 야학방에 모였던 청년들도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동생과 같은 또래 아동단원들도 마당에 찾아와 울고 젊은이들, 늙은이들이 소리없이 걸음을 옮겨 소사하의 귀틀집으로 모여왔다.

사흘째되는 날 석양녘, 어머님을 모신 길다란 장의행렬이 마을 뒤산까지 잇닿아섰다.

조선의 어머니.

40평생을 하루같이 험난한 가시덤불길을 헤쳐오면서 온갖 풍랑고초를 겪으신 혁명의 어머님께서는 그렇게도 바라시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신채 가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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