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4 회)

11

(1)


김일성동지께서는 토기점골로 향해 길을 떠나시였다.

지난봄과 같이 차광수가 멀리까지 따라나갔다.

고개마루에 이르러 그이께서따라오지 말고 돌아가달라고 하시여서야 차광수는 들고나갔던 약꾸레미를 내드리였다. 대원들에게 주어보낼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또 심히 꾸지람을 하실것 같아 우정 그렇게 한것이다.

그이께서는 차광수를 돌려보내시고나서 들길을 혼자 걸으시였다. 볕에 타서 얼굴은 구리빛으로 되였고 정열과 예지에 빛나는 눈은 그전보다 더 광채를 뿜는듯 하였다.

후리후리한 키와 균형이 잡힌 체구는 얼마간 색이 날은 풀색군복과 잘 어울렸다. 걸음을 옮겨놓으실적마다 무겁게 드리운 목갑총이 슬쩍슬쩍 다리를 스치였다. 고개 하나를 부지런히 넘자 이마에 땀발이 내솟아 군모채양을 손으로 밀어올리시였다. 보기 좋게 주름이 잡혀돌아간 군모테가 약간 올리솟으면서 윤기나는 몇오리 머리카락이 이마우에 내리드리웠다.

그이께서는 자못 상쾌한 기분에 잠기여 들판으로, 혹은 단풍이 들기 시작한 푸른 하늘로 시선을 옮기며 기운차게 걸어가시였다.

한창 무르익는 가을은 봄에 비해 참으로 많이 달라졌다. 통털어 온 산과 들이 풍만해졌고 가을향취가 진하게 풍기였다. 건들바람이 불 때마다 산에서인지 들에서인지 무르익은 과실내같은 향긋한 냄새를 날라왔다.

사람도 짐승도 지어는 꿀벌마저도 들향기에 취해버릴 계절이다.

하지만 귀를 강구면 어데선가는 아직도 《토벌대》 총소리가 울리고있으며 산과 집과 세간살이 또는 다 익은 곡식밭이 불에 타는 소리를 들을것만 같다.

골짜기에는 희멀건것이 떠돌고있었다. 때아닌 안개인것 같기도 하고 혹시 어느 마을의 불탄 연기가 흘러온것 같기도 하였다.

그이께서는 그닥 빠르지도 않고 그리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들길을 질러가고계시였다.

하루를 1년맞잡이로 시간을 쪼개고 그 전부를 혁명사업으로 채워넣으시는 그이께서 단 며칠이라도 이렇게 시간을 내신다는것은 여간한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며칠동안에 여태 시간이 없어 익히지 못하였던 많은 문제들을 푸시기에 여념이 없었다. 혁명앞에는 실로 많은 문제들이 당장 해결을 기다리고있었다. 근거지창설과 그의 발전전망에 대한 문제, 당창건의 조직사상적준비를 갖추기 위해 무엇부터 착수할것인가 하는 문제, 일제의 초토화전술을 어떻게 전면적으로 분쇄할것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반간첩투쟁을 어떻게 진행할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번갈아 떠오르시였다. 그이께 있어서 가장 즐거운 휴식은 숲속이나 마당을 천천히 거닐거나 이렇게 길을 걸으시는 때였다. 다른 때 같으면 오랜 시일을 두고 모대겨야 하는 문제들도 이런 때는 쉽사리 풀리는 수가 많았다.

처음에는 문득 전번에 들리였을 때 카륜회의에서 제시한 로선을 해설한 소책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던 어머님의 말씀이 떠오르시였다. 유격대에 출판부서를 두기는 하였지만 그런것을 다량적으로 찍어낼수 있게 아직 준비되지 못하였다. 그이께서는 짬짬이 수첩에다 어머님께 드릴 내용을 적어두시기는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어머님을 만족시킬수 없을것이였다.

어떤 곤난이 있다 하더라도 시급히 출판사업을 확대해야 하였다. 당조직이 직접 관할하는 출판부서를 두고 선동문도 찍고 교양자료도 찍어야 할것이며 혁명학교들에서 쓸 교과서도 출판하여야 하며 적군와해공작을 위한 삐라도 더 많이 찍어야 하였다. 물론 기계적으로 단일화할것이 아니라 지방실정에 따라 출판물의 종류와 규모를 정해야 할것이다.

우선 출판물의 선전선동자이며 조직자적역할을 원만히 수행하는데서 가장 선도적역할을 수행하는 대내기관지 《투쟁》 질을 결정적으로 높여야겠다는데 생각이 미치시였다. 당원들을 맑스-레닌주의사상으로 교양하며 대렬을 조직사상적으로 확대공고화하는데 있어서 《투쟁》은 모든 출판물의 선봉에 서야 한다. 각 외각단체기관지들인청년투쟁》, 《농민투쟁》, 《소년선봉》, 《반제전사》 등과 기타 출판물들은 앞서나가는 《투쟁》 따라서도록 해야 할것이다.

출판물에 대해서 늘 생각하실 때마다 그이께서는 《새날》과 《볼쉐비크》시절을 회상하군 하시였다. 《볼쉐비크》 내올 때만 해도 등잔불을 켜놓고 밤을 새워 강판글을 쓰셨고 손수 등사를 밀어야 하시였다. 한호분을 다 찍고 등사기밀대를 놓고 밖으로 나오면 해돋이가 시작되군 하였다. 지금도 그 붉은 일색으로 누리를 채우며 아득히 펼쳐진 버들밭우로 떠오르군 하던 카륜의 장엄한 해돋이가 눈에 선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렇게 출판물과 관련한 가지가지의 즐거운 추억들과 또 앞날에 있을 희망찬 랑만에 사로잡혀 들을 지나고 산기슭을 걸어나가시였다.

매사가 다 그러하지만 출판물을 놓고도 어머님에 대하여 끝없이 생각할수 있었다. 무송에서 《새날》 발간하던 때 어머님께서는 종이를 구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시였다. 신문이 나오면 누구보다도 어머님께서 제일 기뻐하시였다. 그리고는 밤이건 낮이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가리지 않고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신문을 꾸려 들고 길을 떠나시는것이였다.

《어머니! 우리들이 어련히 할터인데 왜 수고스럽게 그러십니까?》

하시면 어머님께서는 《나도 혁명조직의 한 성원이 아니냐. 나도 내 할일을 해야 면목이 있지. 난 〈새날〉 받아들고 기뻐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잠시도 지체할수 없어 그런다.》 하며 또 신문을 꾸리시는것이였다. 사방에 널린 그 수많은 반일청년들, 부녀회원들은 모두 《새날》은 곧 어머님과 함께 오는것으로 알게 되였다.

그렇지만 쉬지 않고 길을 걸으시던 어머님께서 지금은 방안에 들어앉아계셔야 하니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닐것이라는것이 리해되시였다.

출판물에 대한 생각이 일단 뒤로 물러가자 이번에는 《민생단》 문제가 대신 떠오르시였다.

지난 2월달에 룡정거리에 《민생단》 간판이 나붙었다는것은 그후 곧 통보를 받았다. 박아무개를 비롯한 민족반역자 몇놈이 일제의 부추김에 의해 과자방을 하던 길다란 방안에 두세개의 책상을 들여놓고 소나무널쪽에 백묵가루를 칠하고 먹으로 쓴 그런 간판을 내붙였다. 그의 정치적활동보다 일제어용출판물에 지나친 찬양과 보도에 의해 그것의 반동성이 첫끝을 내밀었었다.

그러던것이 지난 7월에 홀연 없어졌다.

어느 때 무엇때문에 누구에 의해 없어졌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수상쩍은것은 그것이 없어진 한달후에 와서 《민생단》 이야기가 더 많이 떠돌게 되였다는 사실이다. 《민족자치》 운운하면서 개량적인것을 주장하던 그것이 필경 밀정들의 소굴로 굴러들어갔다는 추측이 십분 타당할것이다.

룡정거리한켠의 널다랗게 구획을 지어 담을 쌓고 그안에 들여앉힌 2층벽돌집의 이마때기에 국화문장을 붙여놓은 그 현관으로 《민생단》 모모한 자들이 뻔질나게 드나든다는것을 보아 그렇게 말할수 있었다.

이것은 일제의 경찰통치방법에서 특이한 수법이라고 할수 있는데 밀정을 조직화하고 그것을 혁명대중속에 깊이 침투하려는것이다. 그것으로 하여 《민생단》이 자취를 감추었다는것이 더 위험한것으로 된다. 하지만 그런것때문에 정도이상 떠들어대는것은 오히려 적들의 롱락에 빠지는 결과를 가져올것이다.

다음에는 근거지내부생활에서 어떤 문제가 앞으로 제기될것인가 더듬어보시였다.

일제는 유격구창설이 가지는 저들의 위험성을 다 리해하지는 못하고있다. 하지만 늦어도 래년봄에 가서는 놈들의 식민지통치에 커다란 파렬구가 생겼다는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것이며 그렇게만 되면 몇배나 더 치렬하고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지게 될것이다.

그때까지 유인기만전술로 나갈수는 없을것이다. 공격과 방어가 끝없이 다투게 될것이며 정세는 더욱더 간고성을 띠게 될것이다.

그렇게 되면 근거지의 방위는 유격대원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할것이며 오직 근거지내 전체 인민이 동원될 때만 혁명의 터전을 보위해낼수 있을것이다.

그러자면 전체 인민을 무장시켜야 한다. 방아쇠를 걸어당길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방위에 나서야 한다. 여기서는 그 능력보다도 그런 사상이 기적을 낳게 될것이다.

근거지는 바다에 뜬 섬처럼 적의 포위속에 장기간 있게 될것은 명백하다. 이런 형편에서 식량, 피복, 그밖의 모든 필수품들을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안전한 보급로를 개척하거나 물자를 은닉저장하는것으로는 해결되지 못할것이다. 오직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에 의해서만 난관을 극복할수 있을것이며 자력갱생의 혁명정신, 그것만이 살아갈수도 있게 하고 싸울수도 있게 할것이다. 자기 힘을 믿고 가능한한 모든 크고 작은 공장들을 다 운영하여 농기구도 생산하고 무기도 생산하거나 수리해야 할것이다. 비록 칼과 창과 같은 원시적인것이라 할지라도 매 사람에게 다 차례지게 해야 한다.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