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4 회)

10

(4)


량세봉의 침상머리에 두사람이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최참모와 엄치환이였다.

량세봉은 왼쪽팔굽으로부터 목있는데까지 온통 붕대로 감고있어 고개도 돌리기 힘들어하였다. 하여 천정을 줄곧 바라보면서 나직이 말을 하고있었다·

최참모, 당장 참모회의를 열고 모두 자중시키게. 이번 일이 불똥이 되여 사방으로 번지지 않게 해야겠네. 이것은 사령의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니 모두 무겁게 받아들이게 하라구.》

여느때없이 허물없는 어조에 최참모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황참모가 분별을 잃고 날뛰지 못하게 해야겠네. 장가와 가까웠다고 하여 이번 사건의 주모자가 황참모라는 식으로 절대로 여론을 몰아가면 안되오. 가뜩이나 공산당찬양사건과 나에 대한 테로사건으로 뒤숭숭한 통화의 군심과 민심인데 이때에 누구를 누구를 하면서 헤집어 놓으면 수습하기가 어렵네. 내가 죽고살고 하는 문제는 나에 한한 일이지만 부대가 사분오렬되는 문제는 독립군의 문제이니 절대로 사가 공을 해치지 않게 하라구.》

《알았습니다.》

최참모는 공손히 머리를 숙이였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 황참모의 행태가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그자는 여기저기 싸다니며 내놓고 공산당을 찬양하고 백주에 사령을 암살하려고 한 엄치환무리를 뻔뻔스레 싸고도는 그런자들과 더는 함께 독립성전을 할수 없다고 떠들어댔다. 한편으로는 자기에게 붙어사는 기생충같은자들과 밀담을 벌리고 사병들을 한사람이라도 자기 주위에 더 끌어당기려고 획책을 꾸미고있었다.

이런 때 총구를 꼬나들고 맞섰다가는 부대가 넝마찢어지듯이 될수 있다는것은 불보듯 뻔했다. 하여 지금 사령으로서 자기 부대의 사병에게서 탄환을 맞은 육체적아픔보다도 정신적아픔에 더 시달리는 량세봉이 이토록 자중자숙하는것이였다.

말을 마친 량세봉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총상보다 가슴이 더욱 아팠다. 처절한 전투에서 왜놈의 총탄에 맞았다면 이다지 가슴이 쓰리지 않을것이였다.

오히려 왜놈과 목숨을 내대고 싸웠다는 긍지라도 있었을텐데…

이 순간 량세봉은 기울어져가는 독립군의 군세를 추측이 아니라 현실로 감지하고있기에 더더욱 가슴이 미여졌다. 동족상잔으로 드디여 꺼져내리는 산사태와 같이 되여버린 민족주의운동이였다.

바로 자신도 그 하나의 희생물이 될번하지 않았던가.

올해 장마때 비가 새여 누렇게 뜬 천반의 한부분을 이윽토록 바라보는 량세봉에게는 바로 저렇게 어지러워진 민족주의의 두루마기를 이제는 벗어던질 때가 되였다는 생각이 빛발쳤다.

허나 이제와서 한생을 따라다닌 민족주의운동을 훌 집어버리자니 지나온 자기의 인생의 굽이굽이가 너무도 허망해져 선뜻 포기할수도 없었다.

량세봉은 독립군 천마산부대를 찾아간 그때로부터 이날까지 한생을 조국을 독립하기 위한 길에 바쳤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 곡절많은 한생이 생애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공허한것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승대를 안고 돌틈에서 밤을 새거나 끝없는 숲속 밤길을 걷거나 지사들을 만나 낯을 붉히며 언쟁을 하고 간데마다 애국선전을 하여 자금을 모으고 한 그 모든것들이 끝없이 비껴간 푸른 하늘에 점점이 널린 구름덩이처럼 자취없이 생겨나고 또 자취없이 사라지는 그런것 같았다.

량세봉은 괴로왔다.

어제만 해도 그는 자기가 독립운동의 여러 지사들만큼 뚜렷한 몫은 하지 못하였어도 그래도 한생을 민족주의의 거창한 탑을 쌓는데 이바지하였다고 떳떳하게 생각하고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쌓아놓은 탑이 졸지에 와르르 무너져내리는것이였다.

탑이 무너지면 페허가 쓸쓸해지는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탑을 공들여 쌓았던 사람들의 인생도 허무해지고마는것이였다.

문제는 무엇인가.

바로 그 탑의 기초에 문제가 있는것이였다.

돌이켜보면 조선의 민족주의는 첫날부터 인민이라는 거창한 대지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몇몇 지사들의 사상으로써만 생겨났었다. 저 멀리 실학자들의 사상에 리론적기초를 두어 력사는 유구하여도 그 사상이 뿌리를 내릴 근본인 인민들에게 발을 붙이지 못한 관계로 물우에 뜬 거품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기만하다가 급기야는 팡 소리를 내며 터지여 가뭇없이 사라져버리고야말 운명에 처한 민족주의운동이였다. 말로는 민족을 계몽시키고 나라를 근대화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 직접적당사자인 인민을 차요시하고 때로는 무시까지 한데 인민이 그들이 세운 탑의 튼튼한 지반이 되여주지 못한 근본리유가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하여 웃어도 몇명의 지사들만이 웃고 다투어도 저희들끼리 티각태각하였으며 울어도 그들만이 곡성을 터뜨리였고 이제 그것이 망하게 되였어도 결국 그들만이 망하게 될것이였다.

구호는 백성을 위하고 민족을 위한다 크게 달아놓았지만 실은 선각자 몇명과 리론가 몇명에게 의지하여 살아온 거창한 허수아비같은것이였다. 바로 그렇기에 그 시원을 실학자들의 《실용지학》이나 《실사구시》 소박하면서도 현명한 사상에 두어 유구하다 자랑은 많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나라를 개화시키고 인민을 계몽시키지는 못하였으며 날강도에게 나라가 통채로 먹히울 때도 별로 맥을 추지 못한것이다.

이 세상에 계급과 계층은 많아도 민족밖에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있을수가 없으니 민족주의사상도 만인이 공감하고 따르어야 하겠는데 그렇지가 않으니 결국 민족주의 그자체가 잘못된것이 아니라 우리가 든 민족주의기치가 잘못된것이 아니겠는가.

문득 김일성장군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바로 이 방에서 그이께서는 조국을 광복하기 위해서는 전체 조선인민이 하나같이 일어나서 철천지원쑤 일제를 반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일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려는 애국심들이 하나의 숨결, 하나의 힘으로 이루어진다면 기필코 우리 조국은 독립의 새아침을 맞이할것이라고 하시였다.

얼마나 훌륭한 말씀인가. 허나 더 훌륭한것은 그 말씀보다 그 말씀을 반드시 실행시켜나가실없는 의지를 뚜렷이 보여준 그이의 눈빛이였다. 계급과 계층에 관계없이, 사상과 신앙에 관계없이 조선민족이라면 누구나 일제를 반대하는 싸움에 나서야 할것이며 반드시 나서게 할것이라는 그이의 사상은 그이의 눈빛에서 먼저 확연히 뿜어져나오고있었다. 하여 그 눈빛을 바라보며 량세봉은 한편으로는 주눅이 들면서도 다른편으로는 어딘가 의지할데가 생긴것같은 느낌도 들어 마음이 편한 감이 들었었다.

지금 이 시각도 량세봉은 그때와 비슷한 심경이였다.

한쪽으로는 한생을 고스란히 바쳐온 민족주의라는 공든탑이 무너져내려 허무감이 가슴을 식히는가 하면 다른쪽으로는 비록 자신의 인생은 허무하게 스러진대도 민족의 앞날은 밝을것이라는 확신이 샘솟아 심장의 어느 한 부위로부터 따뜻함이 온몸으로 퍼져가는 느낌도 드는것이였다.

량세봉은 고개를 돌려 엄치환을 바라보았다.

허우대가 크고 듬직한 사내였다. 이런 끌끌한 젊은이들이 나처럼 허무한 인생탑을 쌓는데 자기의 삶을 소비하게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불쑥 든 량세봉은 자식을 둔 아버지로서의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엄치환이, 오늘중으로 유격대를 찾아 떠나라구.》

최참모는 물론이고 엄치환이도 눈이 둥그래졌으나 사실 더욱 놀란것은 말한 당자인 량세봉이였다.

독립군사령의 입에서 이런 말이 그토록 자연스레 흘러나왔다는것이 얼마나 놀랄 일인가. 한생을 반일과 함께 반공도 해온 독립군의 사령의 입에서 말이다.

그러나 인츰 량세봉의 입가에는 웃음이 비끼였다.

자기는 금방 진리를 말한것이며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부자연스러울수가 없는것이였다. 그러기에 스스로도 놀랄만큼 그렇게 자연스럽게 말한것이였다.

김일성장군께서 오시였던 며칠간에 통화의 민심은 물론 군심까지도 그이께로 전부 쏠리였던 사실을 량세봉은 잊지 않고있었다.

내물이 바다로 흐르듯이 사람들의 마음이 김일성장군께로 쏠리는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인것이다.

량세봉은 오른손으로 엄치환의 투박한 손을 꽉 잡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장군을 찾아가라구. 혼자서만이 아니라 이번에 유격대찬양사건으로 위험에 처한 소대원들과 함께 가라구. 그들에게 내가 갈것을 당부했다고 아니, 명령했다고 해도 무방하이.》

엄치환의 손이 떨리고있었다. 최참모의 어깨도 솟구쳤다가라앉았다 하고있었다.

량세봉은 심신의 힘을 다 모아 터뜨리듯이 당부했다.

《길이 험해도 꼭 찾아가게. 반드시 찾아가라구.》

다음날 통화거리에는 엄치환이라는 독립군병사가 황참모를 쏴눕히고 자기네 소대인원을 데리고 어데론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소식이 쫙 퍼지였다.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