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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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길을 걸으시면서 그이께서는 허리를 구부정하고 앉아 새끼를 꼬고있을 최칠성을 눈앞에 그려보시였다.

실로 거창한 전선이 앞에 펼쳐져있었다. 훌 지나가는 말씀으로 세개의 전선이 펼쳐졌다고 한 대원에게 말씀하셨지만 총과 정치, 짚오리와 경제, 공책과 문화에 잇닿은 그것이 방금 그이자신앞에 펼쳐져서 해결을 바라는 력사적인 위업들이였다.

빼앗긴 생존조건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인 투쟁을 벌려야 하며 강요당한 락후와 비문명을 털어버리기 위해 피어린 투쟁을 해야 한다. 이 모든것은 오직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끊임없는 투쟁으로써만 가능할것이였다.

그이께서는 마치 아득히 펼쳐진 불모의 땅 한켠에 서시여 이제 그것을 기름진 옥토로 갈아번질 첫 괭이를 박을 때의 그런 심정에 잠기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명상에 잠긴채 걸음을 다그치시였다.

마을에 이르러 전령병이 들어가 알리자 은테안경을 낀 백광명이 흰홑섶양복을 입고 달려나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숙소에 들리여 아동단원들을 일일이 만나주시고나서 강변으로 나오시였다. 그이께서는 백광명이와 나란히 걸으면서 그간 학교운영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시였다. 첫째와 상훈이에 대해서도 물으시였다.

앞이 벌어진 홑섶양복을 두손으로 여미고 한걸음 떨어져 걸어가는 백광명은 벌써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뵈옵고싶던 그이이신가. 그는 항상 장군님을 잊은적이 없었다. 특히 소사하의 그날밤부터는 그의 심중에 자리잡은 장군님의 모습, 그날밤 그렇게도 진지하게 들려주시던 그 말씀, 그 모든것이 그의 생활의 전부를 지배하고있었던것이다. 그가운데서도 강한 충격을 일으킨것은 정옥이와 함께 영평의 박기남을 만났던 사건이였다. 정옥이의 정성이 너무 극진하고 기특해서 작정없이 그는 붉은기가 내리드린 박기남의 방으로 대담하게 들어갔었다.

그 결과는 오열에 뜬 어지러운 밤과 식은땀에 젖어 일어나는 아침과 번민에 사로잡힌 나날을 가져왔을뿐이다.

혹시 내가 걸음을 잘못 내디딘것이나 아닌가? 마땅히 내가 갈길을 가고있는것인가? 자아에 대한 주제넘은 평가와 당돌한 행동이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다 머리를 들고 일어났었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희망만이 그를 부축해 일으켰으니 그것은 장군님을 만나 다시 말씀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그것이였다.

장군님께서 여기 쏙새골에 오셨다는것을 그는 어제 벌써 알았지만 선뜻 찾아가 뵈올념을 못내였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무슨 면목으로 찾아뵈옵겠는가. 바쁘신 그이께 공연히 걱정을 끼치고 번거롭힐 필요가 있겠는가. 이렇게 욕망과 제지가 매 시각 다투고있는 가운데 그이께서 몸소 찾아주시니 그 기쁨과 죄송한 마음을 어떻게 나타내야 할지 몰랐다.

강기슭에 이르렀다. 달빛에 푸르게 물든 짙은 안개가 물길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리고 돌등을 굴러내리는 물소리와 함께 향긋한 물내가 풍기였다. 주단을 편것 같은 잔디우에 몇대 일어선 쑥을 휘여눕히시더니 장군님께서 백광명에게 자리를 권하시였다.

《여기 좀 앉아 바람이나 쏘입시다.》

백광명은 안경을 붙잡고 허리를 굽힌채 앉지 못하고 주밋거리고있었다.

그이께서 먼저 앉으며 백광명의 손을 잡아 옆에 앉혀주시였다.

얼마간 침착해진 백광명은 소사하의 그날부터 이때까지의 경로를 죽 설명하였다. 그중에는 정옥이와의 관계가 큰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그를 잘 도와주지 못하고있다는 말이 태반을 차지하였다.

백광명이 말을 끝내기를 기다리셨던 장군님께서는 아이들이 몇인가, 부상당한 아이들은 없는가,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이였는가? 무슨 공부를 시키고있는가? 아동단생활은 어떤가? 등을 자세히 묻고나서 비록 고생은 하고있지만 전란속에서 그만하면 괜찮게 되여간다고 분에 넘치는 치하를 해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이미 영평소식을 자세히 알고계시였다.

영평으로 들어가십시오. 정옥동무와 함께 가십시오. 백선생이 지금까지 그렇게 고생한것은 왜놈들의 〈토벌〉 이 심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떠돌아다녀서 하지 않을 고생을 더 했습니다. 리광동무가 얼마나 찾고있는지 압니까? 오늘쯤은 여기로 사람이 올지도 모릅니다.》

《네? 저같은 사람을 찾아서 뭘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고개를 돌려 안경을 벗어들고있는 백광명을 잠간 바라보다가 다시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백선생은 혼자가 아닙니다. 백선생은 우리의 후대들을 맡고있습니다. 그와 함께 백선생이 나아가는 그 서렬에는 이 나라의 수많은 인테리들이 같이 서있습니다. 그런데 왜 혼자겠습니까. 소심하지 마십시오. 그때도 말했지만 백선생은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무자비하고 용감해야 하지만 주위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서도 용감해야 합니다. 리광동무는 편지에서 백선생이 왜 자기를 만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리광동지가 어떤분인지 모릅니다.》

리광동무는 왕청지구 파견원입니다. 경험으로 삼아야 할것은 조직을 찾지 않고 뜨내기식으로 돌아다녀서는 아무것도 해낼수 없다는것입니다. 짐작컨데 백선생이 이름을 광명으로 지어부르는것도 그 의도를 알만합니다. 선생이 바라는 그 광명도 혁명조직에 의거할 때만 찾을수 있을것입니다.》

한참동안 호탕하게 웃고나신뒤에 그이께서는 학교운영에 대하여 구제적으로 알아보시였다.

《우리는 어린것들을 글뒤주로 만들것이 아니라 일제와 싸워이기는 불굴의 혁명투사로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원쑤는 조선민족을 깡그리 전멸시킬 목적을 내세우고있는 일본제국주의입니다. 력사는 침략자에 의하여 하나의 종족이나 또는 몇개의 원주민이 종말을 고했다는 실례를 한두번만 알고있는것이 아닙니다. 가령 아메리카의 인디안이라든지 아프리가대륙의 모모한 곳을 들어 그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을 담보와 우월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우월성은 침락자에 대한 참을수 없는 반항입니다. 무장을 든 원쑤를 무장으로 소멸해버려야 한다는 우리의 각오입니다. 그런것만큼 우리에게는 무장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원쑤들이 던지고 달아난 총창을 제것으로 만들기 위해 〈위험한 곳〉 에 뛰여든 첫째의 행동을 금지해서야 되겠습니까? 물론 백선생이 아이들을 귀중히 여기고 보호하는것은 응당하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몸, 그 사랑은 적을 치고 원쑤를 갚고 혁명을 하는데 돌려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부르죠아인도주의적인 〈자비〉 와 〈선량〉 은 필요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금물입니다.

부모를 원쑤에게 빼앗기고 자신도 불더미에서 요행 살아남은 첫째에게 복수할 날창이나 총이 필요없을것 같습니까? 나이가 너무 어린가요? 원쑤들은 우리의 어린것들을 자기들의 적으로 인정하고있는데 왜 우리는 그들을 싸움에 내세우지 못하겠습니까? 이것은 계급투쟁에서 하나의 상식이라고 생각되는데 백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시 말씀을 중단하시였다.

백광명은 땀에 미끄러져내린 안경을 인지끝으로 밀어올리였다.

《나는 첫째의 이야기를 백선생님이 감동을 받은 그대로 교양자료로 쓸수 있다고 봅니다. 일제경찰을 속여 련락쪽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랑하는 동무의 코등을 호되게 후려갈겨야 했던 그 심정 그대로 좋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인의례지나 권선징악을 풀고 진선미를 례찬하는것보다 못하다고 보아지는가요? 전우의 시체를 넘어 적진에 돌진하는 이야기, 교수대에서 떳떳이 〈조선혁명 만세!〉 부르며 이슬로 사라지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하지 않을가요. 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기 칼로 자신의 인후를 끊는 김문동무의 이야기며 젖가슴을 도려내도 그대로 입을 다문채 서있는 홍양순동무의 이야기를 그대로 말입니다.》

백광명은 수건을 꺼내서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씻었다.

김일성동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데는 백광명자신을 위해서도 그것이 필요하였다. 백광명에게 잘한다고 칭찬을 얼마든지 할수 있었지만 한 인간을 강철로 달구기 위해서는 열풍이 필요한것이였다.

백광명은 은테안경을 벗어서 수건으로 닦았다. 가슴이 뻐개지는듯 한 가책을 느끼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그에게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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