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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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길을 걸으시면서
실로 거창한 전선이 앞에 펼쳐져있었다. 훌 지나가는 말씀으로 세개의 전선이 펼쳐졌다고 한 대원에게 말씀하셨지만 총과 정치, 짚오리와 경제, 공책과 문화에 잇닿은 그것이 방금
빼앗긴 생존조건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인 투쟁을 벌려야 하며 강요당한 락후와 비문명을 털어버리기 위해 피어린 투쟁을 해야 한다. 이 모든것은 오직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끊임없는 투쟁으로써만 가능할것이였다.
마을에 이르러 전령병이 들어가 알리자 은테안경을 낀 백광명이 흰홑섶양복을 입고 달려나왔다.
앞이 벌어진 홑섶양복을 두손으로 여미고 한걸음 떨어져 걸어가는 백광명은 벌써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뵈옵고싶던
그 결과는 오열에 뜬 어지러운 밤과 식은땀에 젖어 일어나는 아침과 번민에 사로잡힌 나날을 가져왔을뿐이다.
혹시 내가 걸음을 잘못 내디딘것이나 아닌가? 마땅히 내가 갈길을 가고있는것인가? 자아에 대한 주제넘은 평가와 당돌한 행동이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다 머리를 들고 일어났었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희망만이 그를 부축해 일으켰으니 그것은
강기슭에 이르렀다. 달빛에 푸르게 물든 짙은 안개가 물길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리고 돌등을 굴러내리는 물소리와 함께 향긋한 물내가 풍기였다. 주단을 편것 같은 잔디우에 몇대 일어선 쑥을 휘여눕히시더니
《여기 좀 앉아 바람이나 쏘입시다.》
백광명은 안경을 붙잡고 허리를 굽힌채 앉지 못하고 주밋거리고있었다.
얼마간 침착해진 백광명은 소사하의 그날부터 이때까지의 경로를 죽 설명하였다. 그중에는 정옥이와의 관계가 큰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그를 잘 도와주지 못하고있다는 말이 태반을 차지하였다.
백광명이 말을 끝내기를 기다리셨던
《영평으로 들어가십시오. 정옥동무와 함께 가십시오. 백선생이 지금까지 그렇게 고생한것은 왜놈들의 〈토벌〉 이 심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떠돌아다녀서 하지 않을 고생을 더 했습니다. 리광동무가 얼마나 찾고있는지 압니까? 오늘쯤은 여기로 사람이 올지도 모릅니다.》
《네? 저같은 사람을 찾아서 뭘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백선생은 혼자가 아닙니다. 백선생은 우리의 후대들을 맡고있습니다. 그와 함께 백선생이 나아가는 그 서렬에는 이 나라의 수많은 인테리들이 같이 서있습니다. 그런데 왜 혼자겠습니까. 소심하지 마십시오. 그때도 말했지만 백선생은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무자비하고 용감해야 하지만 주위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서도 용감해야 합니다. 리광동무는 편지에서 백선생이 왜 자기를 만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리광동지가 어떤분인지 모릅니다.》
《리광동무는 왕청지구 파견원입니다. 경험으로 삼아야 할것은 조직을 찾지 않고 뜨내기식으로 돌아다녀서는 아무것도 해낼수 없다는것입니다. 짐작컨데 백선생이 이름을 광명으로 지어부르는것도 그 의도를 알만합니다. 선생이 바라는 그 광명도 혁명조직에 의거할 때만 찾을수 있을것입니다.》
한참동안 호탕하게 웃고나신뒤에
《우리는 어린것들을 글뒤주로 만들것이 아니라 일제와 싸워이기는 불굴의 혁명투사로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원쑤는 조선민족을 깡그리 전멸시킬 목적을 내세우고있는 일본제국주의입니다. 력사는 침략자에 의하여 하나의 종족이나 또는 몇개의 원주민이 종말을 고했다는 실례를 한두번만 알고있는것이 아닙니다. 가령 아메리카의 인디안이라든지 아프리가대륙의 모모한 곳을 들어 그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을 담보와 우월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우월성은 침락자에 대한 참을수 없는 반항입니다. 무장을 든 원쑤를 무장으로 소멸해버려야 한다는 우리의 각오입니다. 그런것만큼 우리에게는 무장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원쑤들이 던지고 달아난 총창을 제것으로 만들기 위해 〈위험한 곳〉 에 뛰여든 첫째의 행동을 금지해서야 되겠습니까? 물론 백선생이 아이들을 귀중히 여기고 보호하는것은 응당하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몸, 그 사랑은 적을 치고 원쑤를 갚고 혁명을 하는데 돌려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부르죠아인도주의적인 〈자비〉 와 〈선량〉 은 필요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금물입니다.
부모를 원쑤에게 빼앗기고
잠시 말씀을 중단하시였다.
백광명은 땀에 미끄러져내린 안경을 인지끝으로 밀어올리였다.
《나는 첫째의 이야기를 백선생님이 감동을 받은 그대로 교양자료로 쓸수 있다고 봅니다. 일제경찰을 속여 련락쪽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랑하는 동무의 코등을 호되게 후려갈겨야 했던 그 심정 그대로 좋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인의례지나 권선징악을 풀고 진선미를 례찬하는것보다 못하다고 보아지는가요? 전우의 시체를 넘어 적진에 돌진하는 이야기, 교수대에서 떳떳이 〈조선혁명 만세!〉 를 부르며 이슬로 사라지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하지 않을가요. 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기 칼로
백광명은 수건을 꺼내서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씻었다.
백광명은 은테안경을 벗어서 수건으로 닦았다. 가슴이 뻐개지는듯 한 가책을 느끼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그에게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