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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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강구를 떠난지 사흘만에 최칠성은 쏙새골 뒤산마루에 올라섰다. 천여리행군을 하는 동안 군복은 물색이 다 날았고 얼굴은 거멓게 타고 찌들었으며 어깨에는 그와 잘 어울리게 화승대가 메여있다. 그는 이마에 손을 얹고 바야흐로 산그늘이 밀려들기 시작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속새가 무성해서 쏙새골이라고 불리우게 되였다는 이 골짜기는 손가락짬같이 치기가 깊었는데 강기슭을 따라 백여호 남짓한 농가가 촘촘히 들어앉았다. 마을복판으로는 동북과 서남지방을 련결하는 큰 도로가 뻗어있고 한쪽으로 강물이 감돌아나갔다.

저녁해가 산마루에 걸리고 길바닥의 돌멩이마저 기다란 그림자를 던질무렵에 자기 집앞에 당도하였다.

집은 간데온데 없었다. 기둥이 불타 넘어지고 구들장이 들춰진데서는 바람이 불 때마다 재가루가 날리였다.

가슴이 철렁해진 그는 넋없이 주위를 살피였다.

일제의 만행에 대한 말은 많이 들었지만 바로 그것이 이토록 자기자신의 일로 육박해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머리가 아찔하고 가슴에 연기가 꽉 들어차는것 같았다.

그는 배낭을 벗어 돌등에 놓고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뛰여올라갔다. 쏙새골중에서도 유독 이 샘골이라는 마을이 몽땅 재더미가 되고말았다. 가슴이 들먹이고 목안에서는 겨불내가 올라왔다. 그는 허둥지둥 자리를 옮겨가며 이미 아무것도 없다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마을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얼굴에 절망의 그늘이 비껴간 그는 가슴을 움켜쥐고 언덕에서 내려서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다가 이미 잘 알고있는 샘물터에 이르렀다. 그는 돌우에 넙적 엎드려 가슴속에서 활활 타번지는 불길을 끄기라도 하려는것처럼 입을 들이대고 샘물을 마시였다.

그때 마침 동이를 끼고 물길러 나왔던 작은녀 어머니가 흠칫 놀라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허리를 굽히고 엎드린 사나이의 거치른 얼굴이 물우에 비쳤는데 그의 등에는 보기에도 엄엄한 총이 메여져있었다.

아유, 이런 별일이 있소. 세상에…》

약간 다사할사한 작은녀 어머니는 물동이를 땅에 내려놓고 최칠성이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들었다놓으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난 누군가 했지요. 참, 군대에 갔다기에 무슨 소린가 했더니만…》

비를 맞아 약간 주름이 간 군모며 쑥 내밀린 가슴과 혁띠로 졸라맨 허리 그리고 가뜬하게 차린 신발 등을 쭉 내리훑어보더니 아주 딴 사람이 되였다고 또 한번 감탄을 하였다. 정신없이 물을 퍼담아인 녀인은 꽛꽛한 베치마가 풀숲에 스쳐 와싹와싹 소리가 날만치 재빨리 언덕으로 내려가더니 우둥퉁한 몸집에 비해서는 매우 아름답고 쟁쟁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새애기, 군대가 옵매, 군대가 온당이.》

몇번 거듭해서야 거적문이 들리더니 얼굴이 가밋가밋한 최칠성의 안해 쌍가마가 신도 미처 신지 못하고 비칠거리며 달려나왔다.

작은녀 어머니는 마치 자기가 잃어졌던 사람을 찾아다주기라도 하는것처럼 물동이를 인채로 한바탕 떠들어대더니 초막들이 다문다문 들어앉은 골짜기로 사라졌다.

최칠성이도, 그 안해도 서로 마주볼뿐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다가 드디여 정신을 차려 쌍가마가 가슴에 손을 올려댄채 앞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오셨군요.》

그리웠던 안해의 목소리를 듣게 된 최칠성은 우둥퉁한 얼굴에 금시 웃음을 지으면서 벌써 습관되여버린 군대식걸음걸이로 발을 구르며 앞으로 나가더니 안해의 손을 움켜쥐였다.

잘있었나?》

그 순간 쌍가마는 겁에 질린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잠시 마주보다가 갑자기 울먹울먹해지면서 고개를 돌려버리였다. 그렇게 되자 최칠성은 불안한 기색이 얼굴에 어리더니 고운 새를 놓칠가봐 움켜쥐는 어린애들 모양으로 안해의 어깨를 사정없이 그러쥐는것이였다.

《사람두… 울긴 왜 우나.》

거칠게 행동은 하면서도 제딴엔 안해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 그는 반가운 때에는 응당 반가운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투로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고는 이것저것 몇가지 안부를 묻고나서 안해의 손목을 끌고 거적문이 나있는 초막으로 걸어갔다.

가리마가 곱게 드러난 머리를 들면서 빛나는 눈으로 남편을 바라본 쌍가마는 어깨에서 배낭을 내리려고 손을 들어올리였다. 그 순간 그는 손을 움츠러뜨리여 빨갛게 물이 오른 입술로 가져갔다.

《총이 있네요.》

하하하, 군대가 총이 있잖구…》

최칠성은 받아주려는 배낭보다도 먼저 총을 훌쩍 벗어서 앞으로 돌려잡았다.

이때 쌍가마가 또 한번 놀라 눈이 동그래진것은 전혀 몰라보게 달라진 남편의 말씨며 행동이였다. 목안으로 기여드는것 같던 목소리는 우렁우렁해졌고 구부정하던 허리는 쭉 펴졌으며 몸가짐은 활달하고 기운이 있었다. 긴 살눈섭을 치켜올리며 방긋 웃음을 지어보인 쌍가마는 남편이 등을 떠밀어서야 거적문을 들고 같이 들어갔다.

허리를 펼수 없게 천장이 낮은 초막안은 밤처럼 캄캄한데다가 풀로 웃설미를 덮어서 쑥내가 확 풍기였다. 엉거주춤하니 허리를 굽힌채 총을 방구석에 세우고 배낭을 벗어 훌쩍 방바닥에 집어뜨리고 부뚜막에 걸터앉았다.

그는 안해를 만나기만 하면 며칠밤을 새워가면서도 이야기를 하리라던 그 많고많은 사연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덮어놓고 벙글벙글 웃기만 하였다.

이윽해서 그는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들이 의례히 주고받을만 한 그런 몇가지 이야기를 나누고나서 신을 신은채로 삿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버지는 해소가 심해서 넘은켠 마을 친척집에 침 맞으러 가서 오시지 않았고 그외는 별일이 없었다는것이 그간 집소식의 전부였다. 한짐으로 질만 한 오막살이가 흥부네 집같은 이런 꼴로 된 까닭은 물으나마나한것이다.

《어떻게 오셨나요? 난 아주 가신줄 알았는데…》

《누가 아주 간다구 했나? 나라를 찾구 온다구 했지.》

《떠날 땐 언제 올지 모른다구 하구선…》

《하긴 이번에 못 왔더면 언제 올지 정말 모를번 했어.》

《그런데 어떻게 오셨어요?》

공연히 이때 최칠성은 얼굴이 화끈 달아났다.

부대가 량강구에 와서 묵고있을 때 최칠성은 갑자기 집생각이 났었다. 앓고계신 아버지와 안해 소식이 그리웠다. 그렇지만 집에 갔다오겠다고 할수도 없어 그저 혼자 속을 태우고있었다. 그러다가 박흥덕의 흥클한 속뽑이에 걸려 약간 그런 기미를 비친적이 있었는데 며칠후에 그가 꾸레미를 하나 들고 나타나더니 집에 얼핏 갔다오라고 하였다. 처음에 그는 딱 잘랐다. 유격대원이 사사로운 일때문에 집에 갔다왔다 할수도 없거니와 배낭에 호미를 넣어 지고다니던 때의 최칠성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박흥덕은 참모장동지의 지시라고 하면서 강요하다싶이 하였다.

이런 사정을 다 말할수 없게 된 그는 시꺼먼 눈섭을 몇번 슴뻑이다 《아버님 병이 어떤지 걱정이 되여 왔어.》하고 대답하고나서 그뒤끝에 《당신도 보고싶구…》하는 말이 목구멍으로 올리미는것을 얼른 눌러버리고말았다.

해가 떨어지자 마을은 우중충한 산그림자에 덮이였다. 최칠성은 웃동을 벗어팽개치고 초막들로 이루어진 마을에 나가 인사를 하고 방안에 들어와 다시 드러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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