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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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강구마을은 흥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수천리 원정을 끝내고 안도로 돌아온 부대는 량강구로 돌어와 집집에 숙소를 정하고 학습을 하면서 사령부의 명령을 대기하고있었다.

부대는 봄보다 대렬도 몇배로 늘어났고 온갖 곤난을 뚫고나온 믿음직한 대오로 장성되였다. 누구를 보나 군복차림들이 모두 격에 맞았고 몸동작들이 부대생활에 푹 배였다.

총이며 배낭이며 그들이 일상 주고받는 대화들이 모두 유격대생활이라는 하나의 진한 색채에 물들어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사령부가 자리잡고있는 집의 앞마당을 천천히 거닐며 혁명의 내외정세를 종합분석하시는 한편 그동안 수개월에 걸쳐 진행된 남만지구진출을 총화하고 그에 토대하여 앞으로의 방침을 세우시는것이였다.

그동안 부대는 류하에서 떠나 몽강에서 두달동안이나 묵으면서 신입대원들에게 정치군사교양을 주는 한편 반일구국군들과의 사업을 진행하였다. 부대가 확장되는데 따라서 날을 따라 신입대원의 비중이 커진 실정은 부대의 정치군사적교양을 한층 더 강화할것을 절실히 요구하였다. 이것은 주력부대뿐만아니라 각 지구에 일제히 나오게 된 전반적 부대사정이 모두 그러하였다.

몽강에 계시면서 그이께서는 각 지구에 공작원들을 파견하여 군정학습을 위한 단기강습을 조직하도록 구체적인 지시를 주시였고 학습자료들을 직접 집필하거나 요강을 작성하여 띄워보내기도 하시였다. 또한 몽강에서 펼치신 사업가운데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것은 구국군들과의 관계문제였다.

반제통일전선을 형성할데 대한 그이의 방침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가 하는것은 지난봄 우사령부대와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보여주었지만 몽강에서의 2개월간 그리고 이곳 량강구에서 각 지구형편을 료해한데 의하여 남김없이 확증되였다. 그이께서는 이 문제를 옳게 풀지 않는다면 혁명에 커다란 손실을 주리라는것을 간파하고 앞으로 본격적인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내리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 끊임없이 주의를 집중하고계신것은 역시 적들의 반혁명적공세와 관련한 내외정세였다. 그이께서는 각종 출판물과 통신원들 그리고 인민들과의 담화에서 얻은 자료들을 종합분석하고 그에 대처할 방침을 세우시였다.

어차피 하반년로정도 이미 봄에 예정했던대로 될수밖에 없을것이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의 우여곡절은 정세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해야 할것이였다.

이날도 김일성동지께서는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천천히 마당을 거닐면서 깊은 사색에 잠겨계시였다.

《대일본제국》 대륙행진은 급정거를 하였다. 일제통치자들은 이 한마디로 요약되는 사변을 극력 감추고싶었지만 이미 내외에 퍼진 커다란 파문으로 하여 다소나마 꼬리를 드러내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그런데도 일제의 신문과 방송들은 딴전을 펴서 사람들의 이목을 딴데로 돌려보려고 시도하고있다.

일제침략군이 최근 중국 열하에 침입했다는 보도를 정도이상 과장하고있다는것도 그렇고 일본이 괴뢰만주국을 국가로 승인했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놀음도 다 그런 잔꾀의 하나라고 볼수 있다. 결국 놈들이 골을 싸매고 분주히 돌아치는 문제의 초점은 제놈들이 20여년전에 이미 락착지어버렸다고 믿었던 조선문제가 다시 대두된 거기에 있는것이다.

《바로 네놈들이 만들어놓은 페허에 네놈들이 정갱이까지 빠진셈이지. 앞으로 허리와 머리까지 푹 빠지고말걸.…》

그이께서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뇌이며 뒤짐을 지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으시였다. 하기는 리성을 가진 사람들은 벌써 일제의 하는짓을 보고 오늘을 내다본지가 오래다.

사무라이상투에 하까마에다 게다짝을 신고 자전거를 탄것이 명치유신을 거쳐나온 일본제국주의몰골이라고 볼수 있을것이다.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는 말과 같이 처음부터 기형아로 력사에 등장한 일제는 그날부터 칼부림을 시작하였다.

1871년 섣달그믐께 요꼬하마항을 떠나는 구미전권공사 이와구라를 보내면서 19발의 축포를 올린것은 실상 그들이 이미 머리속에 점찍어 둔 대외침략의 모모한 대상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은것이였다. 그런지 몇달후에 류구를 삼키고 오끼나와를 병합하고 다음은 중국과의 불평등조약을 체결한데 이어 곧 대만을 떼내더니 인차 생억지를 써서 천도렬도를 강탈했고 계속하여 남화태를 끊어냈다. 그런 다음 《큼직하게 먹었다.》고 본 조선의 강점에 뒤이어 얼마간 새김질을 한 후에 만주와 중국내륙을 또 물고늘어졌다.

제놈들도 이 지나친 탐욕과 만용이 무슨 일을 저지르게 될지 미심쩍게 생각되였던지 요새는 정계가 매우 분분해졌다.

다나까가 물러난 후 한 5년어간에 무려 7차에 걸치는 총리교체가 있었고 불한당놀음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작년 《만주사변》과 때를 같이하여 대두한 륙군청년장교회는 제놈들도 걷잡을수 없을만큼 과격하게 나가고 몇달전에는 군벌들의 5. 15쿠데타가 일어나서 총리라는것을 강아지처럼 쏘아죽여버렸다.

이런 란장판에 반일인민유격대의 이번 남만진출이 단행된것이다. 하기는 제놈들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미리 손을 쓰느라고 갖은 모략을 다 꾸민것이 사실이다. 작년 이맘때 있은 《륙군3장관회의》이래 군대와 경찰의 중대책을 더 강하게 내밀어 조선북부지방을 말그대로 총칼로 숲을 이루어놓았다. 만주에서 《9. 18사변》 도발함과 함께 조선에서도 올가미를 조일대로 조이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마지막 《소탕전》 한셈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무려 여덟차례에 걸치는 전국적인 대검거를 일으켜 공산주의자를 비로 샅샅이 쓸어내다싶이 하였다. 특히 간도지방에 힘을 집중하여 작금간에 30여차의 검거선풍을 일으켜놓았다.

그런데 어째서 사태가 이 모양인가? 대체 유격대는 어데서 나서 저렇게 광활한 벌판을 종횡으로 누벼다니며 대륙으로 나가는 《황군》 뒤통수를 후려갈기고있는가? 도대체 이것이 사실이기는 한가? 이와 같은것이 이른바 대일본제국 통치자들의 커다란 의문이며 분격이라고 한다.

병력의 대이동이 시작되였다.

네개의 보병사단이 부산항을 거쳐서 북상하였고 두개의 기병사단과 여섯개의 수비대주둔군이 청진항에 올랐다.

그길로 관동군과 조선군에 대《토벌》명령이 하달되여 문화통치를 한답시고 《남면북양》이요, 《자작농창정》이요, 《중농정책》이요, 《일시동인》이요, 《내지연장주의》요 하던 허울좋은 껍데기를 다 벗어던지였다.

닥치는대로 죽이고 불지르라. 반일인민유격대를 싹에서부터 무찔러버리라! 이것이 오늘 일제가 내놓은 새 구호이다.

이 구호는 조선군사령부와 관동군의 대륙행진을 정거시키고 급기야 딴 방향으로 머리를 돌리게 만들었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중심으로 한 두만강지구의 혁명력량을 압살하기 위해 특수하게 편성된 이른바 간도림시파견대의 작전적이동이 시작되였다. 관동군 일부 부대는 길림과 돈화를 거쳐 동남으로 내려오고 또 다른 한 부대는 심양을 거쳐 천상데기쪽에서 동북간을 지향한 대각선을 그으면서 유격대의 주력을 추격하거나 혹은 앞질러나갈것을 시도하고있다. 그 량익의 방조를 받으면서 간도림시파견대는 이 여름에 일제히 펼쳐진 두만강지구 유격근거지를 전면적으로 무찔러버릴 작전을 준비하고있다. 그중에서도 종성과 회령대안을 따라 올라오면서 왕청지구로 지향한 한개의 련대가 중심이 되여 근거지에 대한 첫 돌파를 시도하고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주먹을 들어올리셨다가 휙 엇가로 내려그으며 결연하게 속으로 되뇌이시였다.

《그렇다! 근거지〈토벌〉에 대한 놈들의 총계획을 첫걸음에서 파탄시켜야 한다.》

얼마후 김일성동지께서는 전령병을 불러 차광수와 전광식을 불러오라고 이르고 방안으로 들어가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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