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회 )
서 장
1
그날 중부산악지방에서는 사나운 눈보라가 산과 골짜기들을 휩쓸고있었다. 희뿌연
그 시각 천리전선길을 헤쳐오시는
지금은 1997년 12월,
하여
그리고
한순간 모자도 쓰지 않고 맨머리바람으로 쇠질통을 지고 달리던 한 전사가 돌부리에 걸채여 모재비로 나딩굴번 하였다. 다부진 몸에 허연 입김을 내불며 걸싸게 일을 제끼던 그 전사는 몇발자욱 비틀거리며 나가더니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잡았다. 그러는 그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소리없는 웃음속에 바라보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그 전사가 돌연 《이놈의 돌부리가?》하더니 얼어붙은 땅우에 비쭉이 내밀린 돌부리를 주먹으로 힘껏 쳐갈긴것이였다. 얼마나 드세게 쳤던지 돌부리가 깨여져나가며 그 파편이 제일 가까운 수행원들의 차에까지 날아왔다.
깜짝 놀란것은 그 전사뿐만이 아니였다. 김하천대장을 비롯한 수행원들의 얼굴이 해쓱하니 질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서있던 그 전사의 지휘관이 《뭐야, 수일이?!》하고 금시 목구멍이 꽉 메여버린듯 거쉰소리를 지르며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들의 시점에서는 비상사고가 아닐수 없었다. 다름아닌
그때
《아주 대단해. 저런 병사앞에서는 어떤 원쑤도 감히 접어들지 못할거요. 그렇지 않소?》
대답이 없었다. 그 누구도 《그렇습니다,
《대위동무.》 이번에는
그제서야 지휘관은 허리를 꼿꼿이 펴며 목갈린 소리로 힘차게 대답올렸다.
《알았습니다,
《음-》
《동무 이름이 뭐라구?》
《옛, 림수일입니다!》
엄청나게 높은 목소리였다.
《고향은 어데구?》
《함경북도 길주군입니다.》
병사는 노상 웨치듯 했다.
《힘들지 않습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우린 발전소를 일떠세우고
《그래서 천막에서 산다?》
《그렇습니다,
《안돼. 이 추운 때 천막에서 살다니…》
어느덧 병사는 어려움도 다 잊은듯 했다. 쇠질통을 바싹 당기며 그는 또 청높이 말씀드렸다.
《일없습니다,
《그래서 모자도 없이 맨머리바람으로 뛰여다니오?》
《아닙니다,
《그러다 감기에 걸리면 어쩔려구 그래, 응? 동무들이 건강해야
《알았습니다. 이제 당장 모자를 쓰겠습니다!》
《그래야지. 음-》
《알았습니다,
크나큰 흥분을 이길수 없어 목청껏 웨치는 눈물의 대답… 보라. 우리 인민군전사들은 언제 어느때나 《알았습니다!》라는 이 한마디 대답밖에 모른다. 평범한 대답, 례사로운 대답이다. 하지만 그 대답을 지키기는 결코 헐치 않다. 노래에도 있듯이 우리 인민군전사들은 때로 이 한마디 대답을 지켜 청춘도 생명도 서슴없이 바치는것이다.
승용차들은 골짜기를 얼마간 내리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작은 나무다리를 건넜다. 이제부터는 고속도로와 이어진 경사길을 치달아올라야 한다. 얼음강판에 눈까지 덮여있어 앞서가던 차가 앙-앙- 용을 쓰는것이 내다보인다.
《속도를 더 높이시오. 아무래도 우리가 앞서가면서 길을 열어야 할것 같소.》
경적소리가 길게 울렸다.
얼마후였다. 고속도로에 올라서는 구배길옆의 눈무지속에 승용차 한대가 구겨박혀있는것이 보였다. 아직 차바퀴가 빙그르 돌고있는것으로 미루어 금시 굴러내린것 같았다.
《차를 세우오!》
때마침 한쪽바퀴가 들려 기우뚱해있는 차에서 운전사가 기여내리더니 차에 타고있는 사람을 도와 차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쭈그러든 차안에서 한사람이 겨우 비집고 내리는데 한손으로는 이마를 세게 문지르고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키가 늘씬한 사람, 낯익은 모습이였다.
《이게 누구요. 강창길부총리동무가 아닙니까.》
《?!…》
강창길은 너무도 뜻밖의 일이여서 입을 벌리고 찬바람을 헉- 삼키고있었다.
《어디 다치지 않았습니까?》
《음, 다행입니다. 하마트면 큰일날번 했구만.》
강창길은 전후 외국류학을 하고 온 오랜 지식인출신의 부총리이다. 조용하고 침착하면서도 늘
《덕천이라… 아직 공장이 멎어있단말이지.》
《그렇습니다,
《제일 걸린것이 뭐요?》
《예. 강재가 없고 전기가 딸려서…》
《부총리동무,》하고
《예, 용기를 내겠습니다.
이윽고 눈더미속에서 강창길의 차를 끌어내였다. 세찬 눈보라가 사람들의 솜옷깃을 마구 헤집어놓았다. 맵짠 강추위여서 눈가루가 얼굴을 후려칠 때마다 무수한 바늘끝으로 침을 놓는듯 때끔거렸다. 어떤 사람은 하얀 모래알같은 눈가루를 막으려고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있었다.
《뭘 그렇게 추워서 그러오. 아무리 혹독한 강추위라도 정을 붙이기탓이요. 이런 날씨에도 제멋은 있거던. 정신이 번쩍 드는게 얼마나 좋소. 응?…》
《예, 좋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대답올렸지만 어쩐지 맥빠진 소리처럼 들렸다. 하여
《동무들, 우린 사실 력사상 그 류례를 찾아볼길 없는 어려운 행군에 나섰기때문에 신들메를 단단히 조이지 않으면 끝까지 가대지 못할수도 있소. 이처럼 어려운 때 끝까지 나를 따르자면 모든것을 다 각오해야 한단말이요. 그것도 비상한 각오를!…》
그러자 세찬 눈보라에 어깨를 웅크리고있던 여러 일군들이 죄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들더니 허연 입김을 내불며 무엇이든 다 각오하고있다고 말씀드렸다.
《좋소. 우린 최후승리의 그날까지 한길을 가야 하오. 중도에서 멎어설 사람은 애당초 따라서지 않는게 좋소. 그러나 일단 같이 떠났으면 떨어질 권리가 없소. 끝장을 볼 때까지 나와 같이 가야 해.》
《알았습니다,
승용차들이 또 부르릉거리며 길을 떠났다. 드디여 고속도로에 올랐다. 눈보라가 휩쓰는 길,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다.
사실 엄혹한 시련이 겹치기 시작할 때부터 의기를 잃고 패배주의의 오소리굴에 들어박힌 사람들, 우국지사처럼 우그러든 가슴이나 허비고 한숨만 내뿜고있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저 강창길부총리는 어떻게 하나 숨죽인 공장을 돌려보려고 용기를 내여 눈길을 헤쳐갔었다. 그러나 준엄한 현실에 부닥치자 그만 의기가 꺾인듯 하다. 그래서 자꾸만 걸음이 떠지고있는것은 아닐가?… 아니, 그래선 안된다. 길을 떠났으면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끝까지 가대야 한다. 도중에 주저하거나 멎어서면 다시는 용기를 되찾지 못한다. 우리는 사생결단의 의지로 이 난국을 맞받아 뚫고나가야 한다. 끝장을 볼 때까지 밀고나가야 한다!…
《차를 세우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