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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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드니
아버지, 어머니와 덕걸이는 이미 방안으로 들어가고 마당은 괴괴하였다. 문득 그 녀자의 눈에는 벽에 걸려있는
녀인은 옷을 벗기여 정히 들고 조용히 문을 나섰다.
남편이 목숨바쳐 지켜야 할분이라고 늘 말하던 생각이 났다.
짓밟힌 조선을 위해, 망국노가 된 인민을 구원하기 위해 반드시 건강하셔야 할분이라고 얼마나 많이 말했던가. 하여 수집음도 잊고 따라나선 녀인이였다.
어둠속이였지만 앞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고 우물가곁에서 말씀을 나누신다는것을 알았다. 옷을 받쳐들고 그쪽으로 발볌발볌 다가가던 녀인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래일 여기를 떠나자니 창걸동무의 부모님들과 처자들때문에 발길이 무겁습니다. 안해와 젖먹이아이는 물론 늙으신 부모님들께도 창걸동무는 집안의 대들보였겠는데…》
《그래서 오늘 아침 창걸동무의 동생이 찾아와 유격대에 입대하겠다는것을 떼말렸습니다.》
차광수는 어떻게 하나
《잘했습니다.》
《태여난지 아직 한살도 못된 아들을 두고 그렇게 가다니. 참 무정도 한 사람이요.》
무거운 침묵이 깃들었다. 하늘을 덮은 비구름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였다. 그 침묵에 숨이 막힐것 같아 차광수가 입을 열었다.
《창걸동무의 부인이 참 강한 녀인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허나 속으로는 피를 흘릴겁니다. 우리가 너무 슬퍼하니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려고 마음속으로는 피를 흘릴겁니다. 우리 조선녀인들은 참으로 외유내강한 훌륭한 녀성들입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강하니 비록 아버지를 잃은 어린애지만 마음이 조금은 놓입니다.》
차광수의 말에
어둠속에서 녀인은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어쩌면 저리도 인정이 깊으실가. 부모님들과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슬픔을 안겨주고싶지 않으시여 이 쌀쌀한 깊은 밤 멀리 이곳까지 와서 옛 동지의 이야기를 나누시는
《지금도 눈앞에 환합니다. 오가자회의때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부르던 모습이…》
차광수의 말을 들으신
…
오가자회의 마감날 밤 차광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의를 환기시키고나서 이제부터 우리의 한별동지를 새 존함으로 부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불쑥 꺼낸 말이 아니였다. 이미
하지만
차광수가 흰 광목천에 큼직하게 쓴 《
허나 장내는 정숙하지 못했다. 달아오를대로 달아올랐던 흠모의 마음들이 드디여 폭발하여 불길이 솟구치고 불꽃이 작열하는 도가니속같았으니
한동안이 지난 뒤
《나를 별에다 비기는것도 몹시 무안스럽고 송구스러웠는데
그때 불쑥 최창걸이 나서면서 소리쳤다.
《그만두오, 성주동무. 소사하의 어머님께는 우리가 달려가서 승낙을 받으면 되오. 그리고 또 바로 혁명의 견지에서 보아도 우리의
《그렇지 않소, 동무들. 오늘 이 최창걸이 말 좀 합시다. 지금 우리 나라를 보오. 우리 겨레를 보오. 어둠에 싸여 하늘도 땅도 보이지 않는 암흑천지에서 죽기보다도 더 고달픈 인생살이를 정말이지 죽지 못해 해나가는 우리 2천만 동포요. 그래서 백의민족은 누구나 자기들에게 빛을 안겨줄, 새날을 안겨줄
우스개소리외에는 언제한번 긴말을 해본적이 없는 최창걸의 일장연설은 차광수와 같은 열변가들도 무색할 정도여서 모두 열광적인 박수로써 호응하였다. 녀성들은 말할것도 없고 계영춘이같은 사내들의 눈에서도 뜨거운것이 넘쳐흐르고있었다.
최창걸은 가슴속에 닫겨있던 동이라도 터졌는지 다시
《성주동무, 불속을 걸어가라 명해도 이 창걸은 노래를 부르면서 가겠소. 물속에 뛰여들라 명해도 이 창걸이는 웃으면서 뛰여들겠소. 동무를 위해 최창걸이 어찌 목숨인들 아끼겠소. 성주동무를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차광수가 두손을 높이 쳐들며 웨쳤다.
《우리의
모두 소리높이 만세를 불렀다.
…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최창걸이
《일부 동무들이 창걸의 복수를 하자고 하는데 난 동족을 살해하는짓은 절대로 용허할수가 없어 그 제의를 부결했던겁니다. 우리에게 아물수 없는 상처를 주었어도 동족이야 동족이 아니겠소. 우리가 복수를 한답시고 제 민족의 가슴에 총탄을 쏘아박으면 그놈에 그놈이라는 식으로밖에 될수 없습니다. 국민부의 테로행위에 분노하는 우리가 꼭같은 짓거리를 한다면 어찌 그들을 단죄할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기뻐할것은 일본놈들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한가지 해도 오직 민족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까지 동족의 가슴에 칼부림을 한다면 망국의 한을 하늘이 미여지게 안고있는 우리 겨레가 얼마나 가슴아파하고 그들이 누구를 바라보며 살겠습니까. 창걸동무도 그것은 바라지 않았을겁니다. 비록 그자들의 손에 쓰러지면서도… 말이요.》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가녁에서 창걸의 안해는 어둠속에 무릎을 구부리고앉아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있었다.